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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2] 진승과 오광의 대규모 기층 민란 ①


하염없이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기원전 209년 7월, 대규모 범람으로 회수(淮水)는 온통 습지로 변했다. 900여 명의 농민들은 폭우 속에서 계속 더 진군하는 것은 무리였다. 안휘 성 북부 태택향(大澤鄉)에 이르러 푹푹 빠지는 속도로는 북경 밀운(密雲) 근처 어양(漁陽)까지 명령대로 도착하긴 불가능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고 호송 무관들의 호령은 이미 저승사자 고함조차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다. 더 이상 걸음조차 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겨우 몸 하나 가눌 움막 찾아 쉬어가기로 했다. 농민들의 대장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머슴이자 소작농으로 겨우 풀칠이나 하며 연명해 왔지만 현실을 보는 눈만큼은 냉정했다.


진승: 도망가도 죽고 당도해도 죽게 생겼네.

오광: 헛되이 목숨을 버릴 수야 없지.

진승: 영정(嬴政)이 죽자 호해(胡亥)가 황위를 찬탈하더니만 세상이 이 꼴이야. 사람들이 부소(扶蘇)를 어질다고 기억하고 초나라 영웅 항연(項燕)조차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 우리 둘이 의기투합하면 사람들도 모두 따를 것이야.

오광: 좋소. 사람들은 점복(占卜)을 믿으니 꾸며 보리다.


강력한 통치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 영정이 사망하자 환관 조고(趙高)는 승상 이사(李斯)를 압박해 공모하더니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막내아들 호해를 권좌에 올렸다. 진나라 2대 황제가 된 호해는 부소는 물론 서른 명이 넘는 공자와 공주를 갖가지 핑계로 도륙하고 조고의 전횡을 눈감고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북방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제하느라 빈농까지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가난에 이력이 난 삶을 살았지만 진승과 오광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무지렁이는 아니었다.


▲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전국을 주유하며 통치하다가 객사했다.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의 공모가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며 진승과 오광 민란의 원인이 됐다. 사진은 진시황의 순행지 동쪽 끝 산동 위해 성산두. ⓒ 최종명


정비(鄭妃)가 낳은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는 성품이 인자하지만 심약했던지 분서갱유와 가혹한 징벌체제에 반발하다가 변방으로 쫓겨나 있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도무지 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진시황이 객사하자 조고와 이사는 황제 조서를 위조해 '효성스럽지 못한 아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부소를 자결하도록 했다. 충과 효를 다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만 허위 조서로 죽을 정도로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중국인들은 '영원한 황제의 아들 공자公子'로 대우하고 있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열전에 기재된 덕분이다. 부소의 자살을 진지하게 만류했던 변경 총사령관 몽염(蒙恬)도 압송된 후 스스로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2005년 성룡과 김희선 주연의 영화 <신화(神話)>는 바로 대장군 몽염을 역사로부터 캐스팅한 명작이었다. 몽염과 이사를 각각 한 편의 열전으로 엮은 덕분에 부소 역시 오늘날 멋지게 부활했다. 더불어 사마천은 <사기>에 '진섭세가(陳涉世家)' 편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섭은 진승의 자(字)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데 의기투합했다. 무릎 꿇고 죽느니 일어나 싸우다 보면 살아갈 길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지혜도 빌리고 명분도 살려야 하며 희망도 엿보여야만 농민들이 모두 따르고 그것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직감했다. 중국 역사 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의 두 주역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2천년 역사상 가장 분연한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농민들을 불러일으키는데 믿을 구석이 필요했으니 반란의 깃발을 들며 부소와 항연을 대역했다. 그들의 캐스팅은 적절했으니 혁명이나 반란 사상이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 구세주의 등장을 통해 스스로 믿을 구석을 찾는 것도 당연했다.


항연은 누구인가? 부소 옆을 지키던 장군 몽염 대신에 항연을 무대에 올린 이유는 진승이나 오광이 주도한 농민반란군은 대부분 진(秦)에게 멸망한 초(楚)나라 국적(?)이었던 것이다. 제(齊)나라 땅 임기(臨沂)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성공한 몽염 대신에 초나라 대장군 항연을 부추긴 것은 당연했다. 항연은 진나라에 맞서 싸운 영웅이자 초나라 부흥운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항연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기 바라는 초나라 사람들의 염원을 이용했던 것이다. <사기>의 '초세가(楚世家)'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각각 등장하는 항연은 죽음의 과정이 서로 다르게 기록될 정도로 애매했다. 그만큼 역사에서 흔적이 모호하니 진승과 오광이 캐스팅하기에 아주 좋은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봉기 이후 초나라를 재건한 항량(項梁)은 그의 아들이며 진나라를 멸망시킨 초패왕 항우(項羽)는 그의 손자였다.


부소와 항연을 자처한 진승과 오광의 농민군은 어양에 도착하더라도 진나라 군법에 의해 참수될 운명에 이를 것이라 판단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의해 사라지는 한 떨기 민초로 남기보다는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맞춤 구호가 필요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명분을 얻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오광은 몰래 생선 속에 "진승왕(陳勝王)" 글자가 새겨진 비단을 넣어두었고 배를 가른 취사병이 호들갑을 떨며 '하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왕이라는 글자보다 진승이라는 인물에 더욱 낯설고 놀라지 않았을까? 고대에는 맹수나 뱀, 조류나 물고기까지 신통한 토템이 정신 세계를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은나라 시대에는 거북이 등껍질 귀갑(龜甲)이나 신비스런 풀인 시초(蓍草)로 점을 치기도 했다. 물고기 배에서 놀랍게도 천자의 메아리가 들릴 줄 상상조차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절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기>에 고스란히 기록될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진승과 오광은 한발 더 나아가 사당 부근에 숨어서 대나무로 불을 피우고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 '대초흥, 진승왕(大楚興, 陳勝王)'이라고 교묘한 음운으로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초나라가 크게 부흥할 것이니, 진승이 출현해 왕이 되리라'는 리드미컬한 여섯 글자는 마치 전략적 구호마냥 각인됐다. 귀신까지 동원한 이들의 계책은 사마천도 신기했던지 대나무 불과 여우소리라는 뜻의  '구화호명篝火狐鳴'이라 언급했으며 바로 '거사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대명사로 회자됐다.


▲  진승과 오광 민란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안휘 성 중심에 위치한 천주산. 천주산은 고대에 환산(山)이라 불렸으며 안휘 성 별칭을 '환'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 최종명


구(篝)는 허신(許慎)의 <설문(說文)>에 따르면 곧 대나무 죽(竹)이다. 화약이 없던 시절의 폭죽(爆竹)은 바로 대나무를 태우며 귀신을 쫓던 행사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춘절(春節)뿐 아니라 혼례를 치르거나, 진학이나 승진, 건물 낙성식, 가게 개장에도 폭죽을 터트린다. 서기 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편찬된 책으로 초나라 지방의 명절 풍습을 담은 종름(宗懔)의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부터 정월 초 하루, 첫닭이 울 때 모든 가족이 문 밖에 나와 폭죽을 터트렸다고 전한다.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질 박烞(pò), 불 활활 탈 필熚(bì) 자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새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귀신을 쫓는 의식이었는데 화약과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대나무를 불에 태우면 꽤 커다란 소리가 났던 것에 착안했다. 중국사람들의 민간풍속인 '개문폭죽開門爆竹'은 복이나 재물을 바라는 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단순한 폭죽놀이가 아니라 민간 풍속이며 기복이자 귀신을 쫓는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승과 오광의 민란 전술은 대중적인 관점을 지닌 멋진 아이디어였다.


지금의 소림사 부근 하남 양성(陽城) 사람으로 소작농이던 진승은 평소에 포부가 남다르고 의리도 많아 훗날 크게 부유해진다면 가난했던 시절의 형제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늘 호기를 부렸다. 봉건제 신분사회에서 허풍치고는 꽤 인간적인 면모였다.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비웃었을 것인데 그때마다 "어찌 제비나 참새 따위가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까?"라고 했다. 


기러기와 고니처럼 고귀하고 원대한 포부인 '홍곡지지鴻鵠之志'를 진승의 캐릭터로 둔갑했던 것도 당시 농민반란이 가져다 준 사회적 영향이 폭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대형사고를 친 인물은 늘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어울릴 터이니 후대에 이르러 진승의 반란으로 인해 큰 혜택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영웅스토리로 담았을 것이 분명하다.


물고기를 영물로 둔갑시키고 대나무로 도깨비 불을 피우며 '왕'의 도래를 알린 후 진승과 오광은 보다 명확하게 목표와 전략을 드러냈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후 영토를 군과 현으로 나누어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내려 보내 통치를 펼치게 된다. 춘추전국 시대 이래 왕과 제후, 지방 대부 등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권력이자 세습이라 생각했던 사람들 앞에 생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관리가 파견 와서 농민들을 수탈했던 것이다. 


신권이건 왕권이건 하늘에서 오는 줄 알았던 허위를 일깨운 건, 어쩌면 진나라의 군현제이기도 했다. 진승이 외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는 메시지치고는 원자폭탄이었다. 모두 떨쳐 일어나서 누구든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폭약만큼 폭발적이었으며 농민반란군에게는 군현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회심의 한 수였다. 이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국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거사, 인간해방을 선언하다


디데이는 정해졌다. 평소에 대인관계가 좋은 오광은 진 나라 호위 무관들을 자극한 후 다툼을 벌여 일부러 채찍질을 당했다. 안 그래도 서럽고 억울했던 농민들은 흥분했으며 분위기가 고조되자 오광은 검을 높이 들어 무관들을 찔러 죽였으며 동시에 진승도 합세해 진나라 관리 및 무관들을 모두 제압했다. 농민들이 함성으로 호응하자 진승은 큰 목소리로 "죽어도 명성을 남기고 죽자!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를 하늘이 내려주기라도 하는가?"라고 외쳤다. 


부소와 항연을 잇는다고 설파하고 가독(苛毒)한 요역(徭役)을 거부하고 떨쳐 일어서자고 설득했다. 농민들의 동조를 얻자 바로 연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를 세울 것을 선포했다. 굴욕의 허울을 벗어 제키듯 한쪽 웃통을 벗고 나섰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리 빛 몸통은 순백의 양심으로 절규하는 몸짓처럼 멋지게 보였다. 나라의 독립과 재건을 꿈 꾼 진승과 오광은 드디어 민란의 주동자로 화려하게 탄생했다.


용농(傭農) 진승은 장군(將軍)으로, 빈농(貧農) 오광은 군대를 지휘하는 도위(都尉)가 돼 군대 조직을 갖추고 반진(反秦)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국 최초의 농민주도의 혁명군이 탄생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왕과 제후의 전쟁 놀이의 소모품이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만 겨우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농민은 스스로 주인을 자처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인간해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승이 제단을 쌓고 '인간해방'을 동맹했던 제대(祭台)는 지금도 안휘 성 숙주(宿州) 기현(蘄县)에 남아있는데 진승의 자인 섭을 따서 섭고대(涉故台)라 부른다. 사마천의 <사기> "진섭세가" 편에 진승의 자가 기재돼 있는데 언뜻 보면 진승에게도 자가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


고대 사람들은 이름 '명名'과 '자字'를 함께 썼으며 현대 중국인들은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밍쯔(名字)?'라 한다. 태어나자 마자 이름을 얻는 것을 취명(取名)이라 하고 남자가 20세 성인이 되는 관례를 올릴 때 이름을 얻는 것은 표자(表字)라 했다. 또한, 남송 역사학자인 정초(鄭樵)가 편찬한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따르면 씨족이 후손을 잇는 개념으로 모계사회의 영향은 성(姓), 이후 부계사회는 씨(氏)로부터 나왔다 하고 성씨를 설명하면서 귀한 이는 씨가 있고 천한 이는 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고 했다. 하층민이던 진승과 오광에게도 성과 이름뿐 아니라 자도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부여한 것인지는 아마 사마천에게 물어봐야 할 듯싶다.


▲  예로부터 용은 황제를 상징하며 중국인은 용의 후손이라는 토템적 사고를 믿고 싶어한다. 진승과 오광이 민란을 일으킨 후 '장초'를 건국했는데, 지금도 민란 발생지 대택향에는 '용' 이름이 들어간 유적지가 많다. 사진은 북경 고궁(자금성)의 전각 대문에 조각된 용의 모습으로 관광객의 손때가 반질하다. ⓒ 최종명


현을 점령한 후 기거했던 기현고성이 여전히 유적지로 보존돼 있으며 최근에 만든 민란 기념관은 진승의 포부를 상징하듯 홍곡원(鴻鵠苑)이라 하고 옛 우물은 용안정(龍眼井), 커다란 나무는 자용수(柘龍樹)라 부른다. 용이 등장하는 이름을 쓴 이유는 진승이 곧 초나라의 왕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진승은 '민란' 이상의 역사를 꿈 꾸며 진나라의 황제가 있는 황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제 "무도한 황실과 재상을 벌(伐)하고 폭력적인 진 나라를 주(誅)하려는" 거사가 시작됐다.


진승의 '인간해방' 선언은 전국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으며 진나라의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제2의 춘추전국' 시대를 열었다. 비록 6개월 만에 진승과 오광은 세력을 잃었지만 작은 현의 정장에 불과하던 풍운아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으니 <초한지>의 멋진 서사를 우리에게 남겨준 일등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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