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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6] 도교와 황건적의 민란 ①


▲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종교화했으며 백성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도교사원의 최고 신앙인 삼청전에는 옥청, 상청, 태청이 봉공돼 있다. 이중 태청인 도덕천존은 노자를 우상화하고 있다. 사진은 산서 면산 도교사원 대라궁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지점에 있는 태청 도덕천존의 조각상. ⓒ 최종명


장강은 동쪽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풍랑에 휩쓸려 영웅은 간 곳 없네.

성공과 실패를 허공에 묻겠는가? 

청산은 의구하고 석양은 언제나 붉네.

백발의 어부와 나무꾼은 은거하며 추월과 춘풍에 젖어가니

탁주 한 사발에 주거니 받거니 

고금의 온갖 풍상을 웃음 담아 이야기하네.


나관중(羅貫中)은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낭만적인 송나라 곡조인 <임강선(臨江仙)>을 앞세워 영웅의 서사를 암시하고 있다. 120회 마지막 편도 장편의 서사시로 끝맺는 장편소설로 정사보다 몇 백배는 더 유명한 소설 삼국지는 천하의 대세는 분(分)하면 합(合)하고, 합하면 반드시 분한다는 역사관을 언급하고 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주나라 말년 전국시대와 초한의 쟁투, 광무제의 부흥을 거쳐 십상시의 횡포에 이르는 역사를 개괄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하는 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번지게 됐으며 황건적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으며 이윽고 위, 촉, 오 삼국의 영웅들이 등장하는 서사가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한날 한시에 함께 죽자는 결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또 다른 삼형제를 등장시키고 있다. 50만 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노란 수건을 둘러쓰고 전국을 휩쓴 민란을 소설 삼국지의 배경 설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최초의 종교집단에 의한 기층 민란부대 황건군(黃巾軍)은 '황건적(黄巾賊)'으로 불리며 도적이나 내란음모 집단으로 추화(丑化)돼 왔다. 정사가 그랬으니 소설은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러 대중소설이나 만화조차 당연히 무지막지한 '반군' 또는 '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기 184년, 광무제가 한나라를 부활한지 150여 년이 흘러, 거록(巨鹿)의 장각(張角) 삼형제가 일으킨 황건 민란을 도술과 주술이 난무하는 무협만화로 보지 않으려면 도교라는 신앙이 생긴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교는 중국 전통종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종교로서의 도교는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 비해 창시한 사람, 즉 구세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道)'는 도교의 최고 가치를 상징하지만 춘추전국시대 도가(노자와 장자) 사상과는 엄연히 다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신화의 인물 황제(黄帝)를 숭상하는 황학이 성행했는데 노자(老子)의 학설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황로학(黄老学)이 이미 한나라 초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었다. 황로학이 번성한 이유는 <사기> '한비자열전(韓非子列傳)'에 한비자의 법가(法家) 사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로 한나라 브레인 소하(蕭何) 등이 법가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것과 무관하지 않다.


왕망과 광무제를 거치며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자 황로학은 점차 위축됐다. 그러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천하의 안정을 추구하는 노자의 청정무위(淸淨無爲) 사상은 '시절이 하 수상하다'면 언제라도 구세주가 될 준비가 돼 있었다. 도교를 황제와 노자를 숭배하는 황로(黄老)라고도 하며 유가나 법가처럼 도가(道家)라 붙이고 <도덕경(道德經)> 속 내용인 하늘의 심오한 이치인 현묘(玄妙)에 이르는 문이라는 현문(玄門)도 도교의 별칭이다. 심지어 노자의 성씨를 따라 노씨(老氏)라고도 부른다.


서기 2세기에 이르러 노자는 도교의 신선사상에 따라 '도교의 창시자'라며 추앙된다. 도교사원에 가면 가장 지위가 높은 신선 3명이 봉공된 전각인 삼청전에는 '도'의 화신인 옥청(玉清)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上清)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청(太清) 도덕천존(道德天尊)이 자리잡고 있다. 노자는 도덕천존으로 추상화, 우상화를 통해 '도'의 화신으로 부활했다.


고대에 사람들은 '도'가 우주만물의 근본이라는 신념이 있어 유가에서도 초기에는 자신의 학문을 '도교'라 부르기도 했으며 공자의 이론을 '도교'라고 쓰기도 했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도 근본이념인 '보리(菩提)'를 '도'라 번역하기도 했다.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신념화했지만 종교적 논리체계가 미흡해 민중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유가와 불교의 교리를 차용하거나 덧붙이는 등 다양한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유, 불, 선이 대체적으로 융합돼 있는 문화유산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도교가 종교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불교의 경전이 널리 보급된 5세기경 남북조 시대였다.


▲  징키스칸은 서역 정벌 도중에 도교의 도사 구처기를 초청하는데 산동에서 멀리 찾아와 배알하고 통치의 도리를 설명하는 장면을 벽에 그려놓았다. 중국 통치권자에게 매우 중요한 통치사상으로 도교가 받아들여졌다. 사진은 북경 전진도 도교사원 백운관. ⓒ 최종명


2세기에 시작된 <도덕경> 경전의 종교화는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해 각 시대마다 각종 종파가 생겨나고 생멸하는 과정을 거쳤다. 동한 말기를 기원으로 당송을 거치며 흥성했고 원명시기까지 유행했으나 청나라에 이르러 탄압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국문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역대 황제들도 도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징키스칸은 서역 정벌을 하면서도 멀리 산동에 있는 당대 최고의 도사 구처기(丘處機)를 초청한 후 전진도(全真道)를 적극 지원했으며 명나라 영락제는 도교의 진무(真武) 사상을 창안해 자신의 얼굴 모습으로 도교의 명산 무당산에 진무대제를 세우기도 했다.


중국문화를 이해하는데 명산과 도시에 산재한 도교사원과 그 속에 모셔진 신선과 역사인물의 신격화를 따라가보는 것은 필수에 가깝다. 중국 사람의 마음 속 종교적 신앙은 곧 '도'라는 코드가 잠재의식 한가운데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도교는 20세기 문학가이자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의 <중국사고(中國史稿)>에 의하면 동한시대에 생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의 종파로 등장한 것은 동한 156년의 정일도(正一道, 정일맹위도正一盟威道를 줄인 말)로 천사도(天 師道)라고도 한다. '하늘의 권위'를 물려받은 최초의 도사 조천사(祖天師)는 장릉(張陵)이다.


광무제가 정권을 잡은 지 10년 후인 서기 34년 정월 15일에 한고조 유방의 고향 부근 풍현(豐縣. 서주徐州 부근) 서남쪽의 농촌마을 반경촌(盘庚村, 비루촌費楼村)에서 출생했으며 황로학을 신봉한 모성(謀聖) 장량(張良)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도덕경>에 정통했으며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에서 배웠다. 천거를 받아 파군(巴郡) 강주(江州, 중경重庆)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후 낙양에 있는 북망산(北邙山, 망산邙山)에 은거했다. 옛날부터 민간에서는 '살아서는 소항(소주와 항주)에 살고, 죽어서는 북망에 묻힌다.'는 말이 있는데 황제를 비롯 '왕후장상'의 묘가 한곳에 모인 곳으로 유명한 북망산에서 장생(長生)의 도를 공부했다.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한 조정은 도서와 문건을 관장하고 역사 고증을 책임지는 관직인 박사(博士)로 임명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으며 한화제(漢和帝)가 최고벼슬인 삼공(三公)의 한 축인 태부(太傅) 벼슬을 3번이나 하사했는데도 응하지 않고 북망산을 떠나 전국을 주유했다. 환관 정치로 인해 벼슬에 환멸을 느낀 태학 출신의 지식인, 사인士人 장릉은 개혁을 추구하기보다는 주유천하와 장생의 도를 깨닫는 야인의 길을 선택했다.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三国志> '장로전(張鲁傳)'과 범엽(范曄)의 <후한서> '유언전(劉焉傳)'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릉은 한순제(漢顺帝) 때에 이르러 사천 성도(成都) 서쪽 60km 떨어진 대읍(大邑) 현 학명산(鶴鳴山)을 근거지로 도를 깨우치고 전파했다. 도교의 등장은 동한 시대 날로 피폐해 가는 농민에게는 예수나 부처, 마호멧처럼 구세주 출현에 버금갈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서울대학교와 같은 최고의 국립대학을 졸업하고도 야인으로 살면서 세상 사는 지혜를 제시하며 고통 받는 인민에게 제대로 살아나갈 방도를 깨우쳐 주었다면 당시나 지금이나 구원의 빛이 아니겠는가? 후대의 도교 천사의 민란 또는 '반란', '대역죄'과 같은 반역의 종교 지도자로 역사서 마다 등장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도교 최초의 천사 정일교조(正一教祖) 장릉에 대한 평가는 후손들 때문에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는 도교 도사들이 종교의 신비화를 위해 교조를 미화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종교 창시자에 비해 훨씬 신비롭게 등장하는 것은 후대의 역사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전국을 주유하던 장릉은 심산유곡이 많은 촉(蜀)의 영토에 들어선 후 학명산에 은거하며 왕장(王長)과 조승(趙升)을 데리고 오랫동안 신의 명약인 신단(神丹)을 수련하고 부주(符咒)를 연마했다. 황로학을 학습하며 용호단(龙虎丹)을 조련해 완성 후 그 약을 복용하니 노인에서 아이로 회춘하게 되자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람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오악의 하나인 숭산(嵩山)에서 비단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수의사자(繡衣使者)를 만나는데, 그가 말하길 '산 위 동굴에 <삼황비전(三皇秘典)>과 <황제구정단서(黄帝九鼎丹書)>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 수련하면 승천할 지다.'고 했다. 비전과 단서를 얻고 즉시 운금산(雲錦山), 즉 지금의 용호산(龍虎山, 강서 응담鷹潭 시)으로 가서 수련을 했더니 형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도술을 익히게 됐다.


어느 날 밤 장릉의 꿈에 나타난 태상노군 노자가 말하길 '요즘 촉 땅에 6대 마왕이 있어 백성이 수탈에 고통 받고 있으니 바로 달려가 한 없이 어진 은덕으로 그들을 다스리라.'고 하며 힘을 발휘하는 부적인 '정일맹위부록(正一盟威符箓)'과 함께 악귀를 물리치는 자웅검(雌雄劍), 새로운 자치의 나라의 공신력을 지킬 치도공인(治都功印), 위엄을 드높일 의관인 평정관(平頂冠)과 팔괘의(八封衣), 폭이 넓은 치마인 방군(方裙)、붉은 신발 주리(朱履)를 하사했다. 천일이 지난 후 신선이 사는 궁전 랑원(閬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꿈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장릉에 대한 삶은 무협소설이나 신마소설(神魔小說)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로 전개된다. 꿈 속의 계시처럼 장릉은 24곳의 자치 고을을 두고 자신의 학식과 종교 교리를 설파하며 정교합일의 정치를 했으며 폭정대신에 은덕을 베풀며 죄의 대가를 체형이 아닌 가급적 곡식 납부로 대신한 기록도 보인다.


도교의 창시자 장릉은 장도릉(張道陵)이라 불린다. <도덕경>의 최고 권위자라는 뛰어난 학식과 통치사상으로서의 황로학을 기반으로 당대 민중들의 현실을 담아낸 통찰력과 직관을 가지고 도교의 방향을 제시한 지도자. 수도 없이 각색됐고 권력자들의 이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3억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만큼 예수, 부처, 마호메트만큼은 아니어도 역사인물이건 종교인물이건 제대로 평가돼야 하지 않을까?


도교 명산이자 세계문화유산 청성산(青城山, 사천 도강언都江堰)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23세까지 살았는데, 기록을 믿거나 말거나 노자와 꿈에서 약속한 궁전으로 떠난 장릉은 동한시대를 철폐하고 혼란의 삼국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중국 최대의 종교 기반의 농민봉기로 확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조천사니까 예언했을 지도 모르지만 장릉의 사상과 실천은 아들 장형, 손자 장로로 이어져 인민의 지지를 받고 그 세력이 점점 커지자 본격적인 정교합일 정권의 선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쌀 닷 말'을 받은 도사는? 


▲  동한 시기 처음 도교가 종교로서 자리를 잡을 때 오두미교 신도가 되면 천,지,수에 맹세를 바치는 '삼관수서'를 치른다. 도교사원에는 삼관을 봉공하는 전각이 많아 중국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하북 창암산 옥황정의 천관,지관,수관. ⓒ 최종명


장릉은 '귀도사설(鬼道邪說)'의 교주로 다소 악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수 많은 민중들의 구세주가 아니었을까? 신도가 되려면 쌀 닷 말을 내야 했기에 오두미교(五斗米教)라 치부됐으며 미적(米賊)이라 홀대 받았던 것도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장릉은 민란의 수괴도 아니었고 역적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니 미적도 아니고 더구나 면죄부로 구원을 판 적도 없다. 그럼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도교라는 종교에 진입장벽을 세웠던 것인가? <후한서> '유언전'에 '한순제 때 오두미도의 창시인 장릉'이라고 기록했거나 <삼국지> '장로전'에 장릉을 미적이라 칭한 것은 아마도 '천사 세습' 정책으로 인한 오해이자 허물이다. 손자 장로(張鲁)에 이르면 정일 사상은 보다 세련된 종교이자 통치수단으로 등장한다.


장로는 정일파의 3대 천사이자 동한 말기 군벌(軍閥)이었다. 익주목 유언(劉焉)의 신임을 얻어 부대를 감독하는 독의사마(督义司马)에 임명된 후 병사를 동원해 장수(張修)와 공동으로 한중(汉中)을 공략했다. 장수가 이끄는 부대는 한중으로 들어가 태수 소고(苏固)를 죽였으며 얼마 후 장로는 장수를 죽였다. 문제의 인물 장수는 촉나라 땅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민족으로 한족과 다른 고대사를 겪은 파인(巴人) 출신이며 오두미도의 '진정한' 창시자이다.


<후한서> '령제기(灵帝纪)'에 따르면 '무인(巫人) 장수는 병을 치료할 때 환자로부터 쌀 닷 말을 비용으로 받았기에 별호를 오두미사(五斗米师)'라 불렸다. 오두미도 신도가 되면 고요한 방에서 반성을 시작해 부적과 주문으로 회개 및 수도를 거쳐 최고의 가치인 정일(正一)에 이르는 진인(真人)이 되겠다는 맹세를 한다. 진인은 <황제내경(黄帝内经)>이 그 출처인데 도교에서 득도해 신선에 이르면 우주와 인생의 원리를 통찰하게 돼 완벽한 깨달음을 얻게 된 사람을 말한다.


만사를 이해하고 세상사를 극복하게 되면 얼마나 행복하고 참된 삶을 살게 되겠는가? 그런 맹세를 담은 3편의 글을 써 천지수를 관장하는 신선에게 바치게 된다. 천신을 위해 산꼭대기에 놓아두고, 지신을 위해 땅에 묻고, 수신을 위해 강물에 빠뜨린다. 진수 <삼국지(三国志)>에 대한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은 이를 삼관수서(三官手书)라 기록하고 있는데 기도를 통해 아픈 상처를 다스리고 죄를 용서하려는 뜻이 담겼다. 지금도 도교사원의 삼관묘는 현실의 고통을 풀고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공간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군벌 전쟁에서 참패한 장수의 병사와 신도는 모두 승리자 장로의 수하가 됐다. 장로는 한중에서 익주목을 배반하고 스스로 오두미사의 교권을 이어받고 보완해 사군(师君, 천사로서의 통치자)이라 자칭하며 군벌로 성장했다. 유언 사후 유장이 익주에 남아있던 장로의 모친과 가족을 처형하고 토벌군을 보냈으나 장로는 굳건하게 한중을 지켰다.


장로는 한중을 통치하며 범법자를 3번까지 사면해 주는 등 온건한 정치를 폈다. 본격적으로 장릉의 사상과 장수의 오두미도의 정신을 통합하고 민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교합일의 통치를 통해 더욱 강성해졌다. 정일파가 도교의 주요 정파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장로의 30년 통치가 큰 역할을 했다. 장로는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투항했는데 정권은 사라졌지만 오두미도는 소멸되지 않았고 장로를 따라 북방으로 전파돼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역사서에서는 장로가 장수를 살해했다고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교권에 욕심이 났거나 명령 불복종이거나 하는 이유조차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시기도 명확하지 않고 그저 서기 200년 겨울이라고만 기재돼 있는데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장수라는 인물의 서글픈 사연이다. 그러나, 장수에 대한 기록은 또 있다.


<삼국지> '장로전'의 주석본을 쓴 사학자 어환(鱼豢)의 <전략(典略)>에 따르면 '요적(妖贼)들이 크게 민란을 일으켜 광화(光和, 서기 178~183) 연간에 동방(당시 산동, 하북 일대를 지칭)의 장각(張角)과 한중의 장수가 있었으며 장각은 태평도, 장수는 오두미도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결코 장수의 민란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장수는 장로에게 오두미도의 '명성'을 물려주고 말았다.


소설 삼국지의 서두를 피비린내로 시작하며 강렬하게 등장하는 황건 민란의 주인공은 바로 장각이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형제보다 먼저 소설은 거록의 삼형제를 거론할 수 밖에 없었다. 장각, 장보(張宝), 장량(張梁)으로 삼국지는 시작하고 있다.


▲  소설 <삼국지> 초반에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그런데 탁주의 삼형제보다 앞서 거론되는 거록의 삼형제는 도교의 도사인 장각, 장보, 장량 삼형제이다. 사진은 탁주의 장비고향.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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