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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8] 양진남북조 시대의 민란 ①


▲  삼국 이후 중국은 남과 북으로 통치기반이 분리됐으며 중원 북부에는 선비족의 나라 북위가 오랫동안 장악했다. 불교를 숭상한 북위의 초기 수도 대동 운강석굴. ⓒ 최종명



도교의 이상이 접목된 태평도 농민 민란의 여파로 지방 호족은 삼국시대의 영웅담을 만들었고 최후의 승자 조조의 위나라는 권신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습 작위인 진왕(晉王)에 안주하지 않고 265년 양위를 통해 진나라를 건국하자 역사는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여전히 강남지방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오나라를 평정해 통일제국을 형성했지만 지방 호족을 견제할 목적으로 친족 왕을 내세워 분봉한 정책이 오히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8왕의 난'을 촉발했다.


16년 동안 친족 정권의 암투가 한창이던 때 8왕 중 성도왕(成都王)의 용병부대이던 흉노족 지도자 유연(劉淵)은 독자적인 나라를 건국했다. 중원으로 진출,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켜 수도 낙양을 함락하고 황제를 처형했다. 이로써 건국한 지 불과 50년 만인 316년 진나라(서진)는 멸망했다. 선비족과 함께 저(氐)족, 갈(羯)족, 강(羌)족도 기다렸다는 듯 중원으로 진출해 연쇄적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민족에 의한 최초의 중국지배, 즉 오호가 135년 동안 16개 나라를 세우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선비족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위나라(북위)에 의해 중원이 통일될 때까지 약육강식의 혼란이 지속됐다.


중원을 내준 한족 사마씨 왕족은 장강 이남으로 도피해 오나라 호족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건업(建業, 남경南京)에 도읍을 세우고 진나라(동진)를 복원했다. 사마씨의 강남 정권 진나라는 100여 년 동안 통치하며 중국 영토의 남방 확장을 이뤘으며 유유(刘裕)의 송나라(조광윤의 송나라와 구분해 유송刘宋이라 함)에게 멸망하고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시대를 맞았다. 장강 이북의 위, 제, 주로 이어지는 북조 시대와 묶어 남북조 시대가 지속됐는데 수나라에 의해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의 320여 년의 혼란을 양진오호남북조라 부른다.


혼란의 와중이라고 농민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서진과 동진, 남조 시대에 일어난 민란이 역사의 비중이 비록 약할지 모르나 시대의 아픔을 내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농토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유민으로, 비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농민들은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반국가 투쟁의 일선에서 피와 땀을 흘렸다.


동진이 부견(苻堅)의 전진(前秦)과의 역사적인 전투인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승리해 강남 지역을 방어하고 송, 제, 량,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시대를 열어가고 있을 때 오호십육국의 5개 민족은 중원과 북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흉노에 이어 몽골 지역을 평정한 유목민족 선비족의 탁발규(拓跋珪)였다. 그는 386년 16세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위魏(북위)라 하고 지속적으로 중원 땅을 공략해 398년 평성(平城, 산서 대동大同)으로 천도 후 황제를 칭했으니 북조 시대의 토대를 쌓았다.


북위는 오호십육국 말기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중원으로 전파된 불교를 적극 수용했으며 선비족 문화를 한족과 융화하면서 균전법과 봉록제를 실시하고 <주례>에 근거한 호적제도인 삼장제(三長制)를 실시했다. 북위는 국력이 안정되면서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한족과의 융합을 더욱 가속화하자 오히려 지역 차별과 계급 분화가 급속히 진행돼 변경의 육진 반란과 함께 국론 분열에 휩싸이게 됐다. 권력 투쟁의 결과 권신 고환(高欢)은 업성(邺城, 안양安阳)에 동위로 독립했으며 우문태(宇文泰)도 서쪽 장안에 서위를 세웠다. 갈라선 두 나라는 각각 북제와 북주로 발전했으나 채 30년을 넘지 못했으며 북주의 승상이던 양견(楊堅)은 통일국가 수나라를 건국했다.


북조 시대는 사실상 선비족 북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융합을 도모한 시대였다. 이를 통해 중원의 문화는 다양해지고 발달했지만 농민이 합세한 민족 갈등과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은 계급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결국 북위 말기에 육진 지역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자 나라가 동강 나고 호한 결합에 의한 선진문화를 잉태했던 북위가 멸망하자 오랫동안 분열됐던 중국은 통일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유민들의 사정을 아파하다


▲  호남 최초의 유민 폭동을 거쳐 촉발된 두도 민란의 거점인 상주(湘州)는 지금의 장사. 장사에 위치한 성곽 모습을 한 대규모 음식점 서호루(西湖樓). ⓒ 최종명



서진 정권이 영가의 난 이후 몰락의 길로 접어들자 남방 지역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됐으며 삼국시대 파촉(巴蜀) 지역에 거주하던 농민들은 유랑하고 있었다. 마침 청해와 감숙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이 광범위하게 촉나라 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저족 지도자 이특(李特)은 10만 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301년에 면죽(绵竹, 사천 서북부)에서 민란을 일으켜 광한(广汉)을 점령했다. 진나라 군대의 기습으로 이특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아들 이웅(李雄)은 다시 성도를 점령한 후 익주 전체를 장악하고 성(成)나라를 건국했다.


<진서(晋书)>에는 기아와 재해는 물론 정권의 가혹한 박해를 피해 남방으로 이주하는 농민의 수가 백만이 넘는다고 기록될 정도로 심각했다. 살 곳을 잃고 사방으로 유랑하던 농민들이 303년 안륙(安陆, 호북 효감孝感) 지방의 장창(张昌)이나 관중(关中) 지방의 유민 왕여(王如) 폭동에 가세하는 등 혼란의 조짐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호남의 장사(長沙)에서 이전과는 훨씬 강력한 유민 폭동이 발발했으니 호남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유명한 두도(杜弢)의 민란이다.


사천 성도 출신 두도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으며 수재로 천거되기도 했지만 이특 봉기가 발발하자 동쪽으로 이주해 호남의 상주(湘州)에서 살았다. 두도는 능력을 인정 받아 장사 군의 현령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익주 출신 여반(汝班)과 양주(梁州) 출신 찰무(察抚)가 이끄는 10만 여명의 유민이 형주와 상주 지역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의지할 곳도 없고 지방 호족들의 텃세와 횡포로 인해 참혹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상주 참군(参军, 참모)은 여반과 불화가 생기자 유민을 무고하게 반란죄로 밀고하니 자사(刺史, 군현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관)가 이를 그대로 믿고 주살하려고 하자 강력히 반항했다. 311년 여반과 찰무의 유민 4~5만 가구가 일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평소에 유민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두도는 공개적으로 민란의 기치를 천명하고 수령으로 추천, 옹립됐다.


두도가 이끄는 유민 민란군은 즉시 군현을 공격하고 상주로 진격해 도주하는 자사를 체포했다. 소식을 듣고 토벌군을 이끌고 온 안성(安成, 강서 안복安福) 태수 곽찰(郭察)도 참살하고 일거에 상주를 점령했다. 진나라 정권이 각 지방 태수를 동원해 토벌하려 했지만 두도가 이끄는 민란군은 호남 대부분을 장악해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듬해 진나라 조정은 도독(都督) 왕돈(王敦)을 사령관으로 장군 도간(陶侃), 주방(周访), 감탁(甘卓) 등이 참여한 수군 및 육군 10만 명을 동원했으나 민란군은 두려워하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며 수십 차례나 공방을 벌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과부족으로 민란군이 점점 전사하자 두도는 어렵게 투항을 선택했다. 일찍이 투항을 권고했던 태수 왕운(王运)과 협상해 민란에 참가한 유민의 죄를 사면 받았으며 두도 역시 감군(监军)의 벼슬을 받아냈다.


사태가 일단락 되자 민란군은 대부분 원래 거주지 상주로 돌아갔는데 논공행상에 눈이 먼 토벌군 장령들이 여전히 유민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배반감과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두도는 315년 3월 왕운을 살해하고 다시 봉기했다. 두도는 두홍(杜弘)와 장언(张彦)을 파견해 예장(豫章, 강서 남창南昌)을 공략했으며 왕진(王真)에게는 무창(武昌, 호북 무한) 방향으로 진격했으나 모두 진나라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8월에 도간과 주방이 이끄는 토벌군 주력이 장사를 공격해오자 사서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지니 항복하려는 생각이 많아졌다'고 기록될 정도로 민란군은 기강이 해이해졌다. 토벌군 도간이 항복을 권유하며 유혹하자 민란군 왕진은 출전하자마자 부대를 이끌고 투항했다. 두도는 포위망을 뚫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투신 자살했다.


두도 민란은 호남 최초의 대규모 '반봉건투쟁'으로 5년에 걸쳐 유민과 농민이 일치단결한 투쟁이었으며 호남, 호북, 강서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악한 지주계급의 만행을 폭로했으며 진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민란이 끝난 후 불과 1년 만에 진나라는 운명을 다 했으며 전국은 다시 분열과 혼전에 빠지게 됐다.


최초의 해적, 원하던 바 아니야


▲  남조 시대 강남 일대를 도모했던 손은과 노순 민란. '중원'과 '해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바다와 내륙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항쟁을 지속했다. 강남의 전형적인 마을인 소흥 일대. ⓒ 최종명



손은(孙恩)과 노순(卢循)이 주도한 민란은 반진 농민투쟁으로 당시 최대규모로 12년 동안 장강 이남을 휘몰아쳤다. 치열했던 민란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문벌귀족에게 강력한 타격을 날렸으며 '최초의 중원 해적'이라는 명예까지 덤으로 얻었다.


서진 시대는 도교 오두미도가 백성뿐 아니라 귀족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조카손자 손수(孙秀)는 서진 '8왕의 난' 당시 조왕(赵王) 사마륜(司马伦)의 책사였는데 오두미도 신봉자인 그는 조왕의 즉위를 위해 신도들의 힘을 활용하기도 했다. 오두미도를 신봉한 손씨 가문은 결국 손태(孙泰)에 이르러 '반역'이라는 대역죄를 저지르게 된다.


서예가 왕휘지(王羲之)를 치료했다고 전해지는 도사 두경(杜炅)의 수제자인 교주 손태를 따르던 신도가 남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신도들은 부패 정권의 억압에 시달리던 농민이 대부분이었으며 명문세가 출신 교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손태는 398년 동진의 대신 왕공(王恭)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이용해 신도 수천 명을 규합해 봉기를 도모했지만 사전에 누설돼 권신 회계왕(会稽王, 절강 소흥绍兴의 통치자) 사마도자(司马道子)에 의해 온 가족이 멸족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조카 손은(孙恩)은 손태를 따르던 신도 백여 명의 지지에 힘 입어 주산군도(舟山群岛)로 도피해 숙부의 복수를 도모한다. 풍랑이 세찬 바다에서의 생활은 고난이기도 했지만 손은에게는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이듬해 399년 사마도자의 장남 사마원현(司马元显)이 정권을 이어받고 노비들을 면천하지 않으면 군대 병력을 충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손은은 육지로 상륙했다. 상우(上虞, 소흥 동부)를 공격해 현령을 살해했으며 회계(会稽, 소흥)를 공격해 행정장관인 왕휘지의 아들 왕응지(王凝之)도 살해해 분연히 일어나자 손은을 따르는 자가 수만 명으로 늘었다. 오군(吴郡), 오흥군(吴兴郡), 회계군(会稽郡)의 삼오(三吴) 지역 8개 군 농민들이 일시에 손은이 주도하는 항거에 참여하자 수십 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관원은 모두 피살되거나 도주했으니 손은은 회계에 본거지를 두고 정동장군(征东将军)을 칭한 후 본격적인 민란군 조직으로 편재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은을 '장생인(长生人)'이라 추앙했다.


손은은 부대를 이끌고 수도 건강(建康, 남경南京)을 향해 진격하자 계엄을 선포한 동진 정권은 비수지전(淝水之战)의 영웅 사안(谢安)의 아들 사염(谢琰)과 유뢰지(刘牢之) 장군을 출전시켰다. 손은은 전당강(钱塘江, 항주杭州를 흐르는 강)전선에서 대치하며 장기전 태세를 갖췄으나 유뢰지 부대가 강을 건너오자 근거지인 섬으로 철군했다. 다급하게 도피하는 과정에서 손은은 노획한 금은보화를 고의적으로 길거리에 뿌리니 추격하는 토벌군이 서로 쟁탈하는 사이 철수 시간을 벌기도 했다.


1년 후 400년 5월 손은은 협구(浃口, 영파宁波 해안)를 따라 상륙해 여요(余姚)를 거쳐 상우를 돌파한 후 공방전을 이어갔다. 이때 사염이 전사했는데 조정은 크게 놀라 다시 토벌군을 보냈는데 치열한 공방 끝에 유뢰지 부대에게 패하자 다시 근거지로 들어가 버렸다.


3번째로 육지에 상륙한 402년 2월에는 곧 되돌아 갔으며 3월에 4번째로 육지에 올라와 해염(海盐, 가흥嘉兴 남쪽 해안)으로 진격했다. 남조의 송나라 개국황제가 되는 유유(刘裕)와 전투를 벌인 후 호독(沪渎, 상해 황포강 하류)을 공략해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수도를 향해 북상했다. 단주(丹徒, 진강镇江)에 이르러 유유가 급히 추격해 오자 곧바로 배를 타고 도주했다. 전열을 정비한 손은이 다시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사마원현이 토벌군을 이끌고 왔으며 예주자사 사마상지(司马尚之)까지 수도방어를 위해 집결하는 등 응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손은은 어쩔 수 없어 신주(新洲, 무한)를 거쳐 해안가 욱주(郁州, 연운항连云港)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유유의 부대가 진격해오자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고 계속 추격해오자 근거지 섬까지 철수했다.


402년 3월에는 장강 중류의 실력자이자 권신 환현(桓玄)이 사마도자와 사마원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조정을 장악하는 정변이 일어났을 때 손은은 수차례의 상륙작전과 수도 공략으로 힘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다. 유유와의 공방전에서 받은 타격이 컸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항전하려는 의지가 컸던 손은의 민란군은 다시 바다를 건너 절강 남부 해안도시 임해(临海)를 공략해 군량을 비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손은은 대세를 절감하고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당하기보다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어 자진하는 길을 택했다. 거사를 함께 도모하던 수백 명의 민란군과 신도들도 함께 따라 죽었고 이에 사람들은 손은을 '수선(水仙)'이라 불렀다.


손은이 장렬히 전사하자 매부 노순(卢循)이 민란을 계승했다. 노순은 범양(范阳) 노씨 가문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서예와 바둑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동진의 고승 혜원(慧远)은 노순을 보고 '비록 재능이 있으나 법도를 지키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손은이 민란을 도모하자 즉시 동참했으며 성품이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는 손은에게 자주 충고를 하자 노순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403년 1월 노순은 동양(东阳, 금화金华)으로 침입해 절강 일대에서 유유가 이끄는 정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하해 복건을 거쳐 광동 번우(番禺, 광주)을 점령해 평남장군(平南将军)을 자청하고 실질적인 지배력을 확보했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광주자사로 봉하고 타협했으며 매형 서도부(徐道覆)를 파견해 함께 광동 지역을 다스리도록 했다. 노순과 서도부는 비록 관직을 받고 사신도 보내 조공했지만 강서와 광동 경계에 있는 대유령(大庾岭) 산맥 일대를 벌목해 비밀리에 북벌을 위한 선박을 건조했다.


410년 2월 노순과 서도부는 동진의 유유가 남연(南燕) 공략을 위해 장강 이북으로 움직이자 곧바로 북벌을 시작했다. 노순은 호남 장사를 거쳐 호북 강릉(江陵, 형주荆州)에 이르렀으며 서도부는 강서 예장(豫章, 남창南昌)을 돌파해 5월에 이르러 두 부대가 합류한 후 진나라 대장 유의(刘毅)가 이끄는 군대를 대패시킨 후 수도로 돌진했다.


이 무렵 노순이 이끄는 부대는 10만 명에 이르렀고 천 척이 넘는 함선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유가 급히 돌아와 응전을 했는데 서도부는 즉각 결전을 치르자 했으나 의심이 들었던 노순은 결정을 미루게 돼 전투의 유리한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 유유는 병력을 집중해 주도 면밀한 준비를 마치고 진격해오자 노순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가 시작되자 다시 쫓기게 된 노순은 곳곳에서 결전을 벌렸으나 손실이 극심했고 번우까지 철수했다. 하지만 7년 동안 근거지이던 번우는 이미 관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이듬해 411년 2월 서도부는 전사했으며 4월 노순 역시 참패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손은과 노순의 민란은 강남 일대를 10년 이상 큰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민란 초기에는 일부 지주계급의 참여도 있었지만 기본 성격은 종교적 색채가 깔린 농민 주도의 민란이었다.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은 강남의 빈곤한 농민과 노예들이었으며 동진 대부분의 지역을 초토화시켜 신흥 사대부 호족의 기반을 잘라버렸다. 오랜 전쟁으로 동진 정권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며 민란을 잠재운 유유는 지명도와 세력을 넓혀 송나라를 건국하는 기반이 됐다. 유유는 송나라를 세운 후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는 조치를 통해 강남 경제의 번영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  주산반도, 소흥, 항주, 가흥, 영파, 상해 등 강남 해안도시를 드나들며 항쟁을 지속한 손은과 노순 민란. 해안 도시를 포괄하고 있는 항주만 바다는 현재 약 36킬로미터에 이르는 대교가 건설돼 있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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