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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9] 양진남북조 시대의 민란 ②


촉나라 땅의 농민과 노비의 울분


▲  조광의 민란은 농민과 노비가 힘을 합치고 파족 민족이 호응해 일으켰다. 사진은 호북 성 이창의 장강유역에서 파족 문화를 시현하고 있는 모습. ⓒ 최종명



중국 역사에서 벌어진 전투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았겠지만 고대 3대 대전을 꼽으라면 전국시대 장평대전(长平之战),삼국시대 적벽대전(赤壁之战), 남북조 시대 비수대전(淝水之战)을 손꼽는다. 장평대전은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전쟁이었으며 적벽대전은 삼국이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됐으며 비수대전은 남북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383년 오호십육국 시대의 저족 정권 전진의 황제 부견이 강남 진출을 도모하며 동진(东晋)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비수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해 가까스로 영토를 보존한 동진은 남조 시대를 열게 돼 그 동안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강남의 영토를 확장하고 경영하게 됐다. 동진의 장군은 승상 사안(谢安)이었으나 약관의 나이였던 유유(刘裕)도 하급병사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후 강남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혜로운 장군 중 한 명인 유유(刘裕)는 진공제(晋恭帝) 사마덕문(司马德文)을 폐위하고 420년 송(宋)을 건국했다. <송서(宋书)>에 의하면 '옛날 춘추시대 제후국 송나라 영토이던 수여(绥舆, 강소 동산铜山) 사람'으로 남조 첫 번째 황제로 등극했다. 송나라 초기에는 명나라 대학자 이지(李贽)가 '혼란을 멈추고 부흥을 이끈 군주'로 칭찬할 정도로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와 북방의 청주, 연주, 사주(司州, 낙양 동부)를 수복해 황하까지 진출했으며 강남은 물론 광동, 복건, 촉한 땅까지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유유 사후 장남에 이어 삼남 문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인 432년 익주자사(益州刺史) 유도제(刘道济)는 관권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앞세우며 양민을 상해하고 수탈하는 악덕관리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7월에 패망한 동진의 종실 출신 사마비용(司马飞龙)이라고 주장하며 허목지(许穆之)는 관리의 횡포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구지(仇池, 감숙 성 남부)를 다스리던 저족 왕 양난당(杨难当)의 후원을 얻어 천 여명의 군사를 모집한 후 남하해 양평군(阴平郡, 사천 광한广汉)으로 진격해 태수를 몰아냈다. 그러나 유도제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참패해 허목지는 전사했다. 


허목지의 실패 이후 사천 오성(五城, 중강中江) 출신의 조광(赵广)은 여전히 농민들과 저족 노비들의 항전 의지가 높자 또다시 사마비용의 이름을 빌어 양평 일대의 수천 명을 결집한 후 광한(广汉)을 공격했다. 사천 서쪽의 파족(巴族) 민족도 호응해 농민들과 소수민족이 연합해 사천 익주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9월에 조광이 이끄는 민란군은 성도(成都)로 진격해 갔으며 유도제는 성을 수비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민란군 규모가 점점 커지자 사람들은 사마비용이 생존하는지에 대해 의심도 커졌지만 조광은 도사 정도양(程道养)을 내세워 촉왕(蜀王)으로 삼고 문무백관을 설치해 조직을 정비했다. 10만여 명의 군대로 편재한 후 장군들을 사방으로 나누어 성도를 공격했으며 유도제는 배방명(裴方明)을 출전시켜 응전했다. 조광 민란군은 몇 차례 배방명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결국 대패해 정도양은 7천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광한으로, 조광은 5천명의 병력으로 부성(涪城, 면양绵阳)으로 물러났다. 유도제의 관군은 군량미가 바닥이 났음에도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추격해 왔지만 패전하고 되돌아가게 되니 민란의 깃발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다시 힘을 결집할 수 있었다. 


이듬해 2월 유도제가 사망했으나 배방명은 민심을 우려해 알리지 않았다. 이때 정도양이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광한으로 퇴보했다. 3월에 형주자사가 지원병을 이끌고 배방명과 합세한 토벌군이 공격해오자 민란군은 부성과 오성까지 후퇴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에는 조광의 부대가 참패했으며 9월에는 정도양의 부대가 광한의 계곡에서 패전하자 조광의 민란은 1년 2개월 만에 끝났다.


호적을 박탈 당한 백적


▲  호적이 박탈된 백적이 뭉친 당우지 민란은 남조 시대 절강 항주 주변을 무대로 일어났다. 항주 서호의 모습. ⓒ 최종명


송나라가 멸망한 후 제나라를 건국한 소도성(萧道成)은 한나라 재상 소하(萧何)의 24대손으로 아버지 소승지(萧承之)는 유유의 우장군을 역임했다. 소도성은 하급 병사를 시작으로 출세해 권력을 손에 쥐자 선양의 형식으로 479년 남조의 대권을 획득했다. 북송학자 사마광은 <계고록(稽古录)>에서 소도성을 평가하기를 '명성이 번창해 난세와 폭정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순리를 지킨 훌륭한 군주'라고 했다. 


제나라는 개국공신 우완지(虞玩之)의 건의에 따라 세금 수입의 확대와 부역 체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송나라 때의 호적제도로 본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제도인 검적(检籍) 정책을 시행했다. 호적을 조작하고 신분을 세탁한 사례를 적발해 호적을 기준으로 국가재원을 회복하려는 정책이었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가짜 호적을 지닌 자를 찾아내 벌을 주고 멀리 변경으로 부역을 보내는 강력한 정책을 지주와 관리가 오히려 작폐(作弊)의 수단으로 악용하자 파산하고 도피하는 농민이 수 없이 늘어났다. 탐관들의 장난이 심해져 바로잡아야 할 사람는 피해가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각적(却籍)'으로 낙인 찍혀 끌려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부당하게 호적을 박탈 당한 사람들을 백적(白籍)이라 불렀는데 원래 호적의 색깔이 황색인 것에 빗댄 것이다. 


부춘(富春, 항주 부양富阳 구) 사람인 당우지(唐寓之)는 대대로 풍수지리에 능해 택묘(择墓)의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혀 담대했으며 주변의 가난을 구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485년 당우지는 신성(新城, 절강 신등新登)에서 '검적에 항거하라(抗检籍), 소도성의 제나라에 반대(反萧齐)'하는 구호를 내걸고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했다. 이듬해 1월 회계태수가 수도 건강(남경)으로 황제를 조배(朝拜)하러 가자 당우지는 거병을 해 부양(富阳, 항주 서남)을 공략했다. 그러자 삼오(三吴, 절강 동부) 일대의 농민이자 백적이 분연히 합류했는데 모두 3만 명에 이르렀다. 


당우지의 민란군은 곧바로 동려(桐庐)와 전당(钱塘, 항주 서남), 염관(盐官, 해녕海宁 남부), 제기(诸暨), 여항(余杭)을 공격했다. 당우지는 절강 지역을 장악하자 황제를 칭하고 전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오(吴)라 했으며 문무백관을 앞세워 통치를 시행했다. 동양(东阳, 금화金华)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살해했으며 산양(山阴, 소흥)으로 진격해 전선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무분별한 강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서만(舒湾, 항주 서남부)에 기나긴 성곽을 쌓았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의  <동려현지(桐庐县志)>에는 당우지성(唐寓之城)이라 기재돼 있다. 지금도 부양 현 부춘강을 바라보고 있는 서만촌(舒湾村)에는 옛 발자취가 남아있다. 


제나라 조정은 민란군을 백적(白贼)이라 부르고 금군 수 천명과 전마 수백 필을 동원해 토벌을 시작했다. 민란군은 호적 비리에 불만을 품고 임시방편으로 모인 군대였기에 정규군에게 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우지는 피살됐으며 점령했던 군현은 대항하지 못했으며 민란에 참여했던 수 많은 농민들은 북쪽 회하(淮河) 변경으로 끌려가 10년이나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비록 민란은 쉽게 끝났지만 제나라의 검적 정책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 490년에 이르러 폐지됐으며 불합리한 호적 정책에 항거해 민란에 참여했다가 변경에서 고통 받던 이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서북 지방의 민족연합 민란


▲  북위 정권에 맞서 싸운 개오 민란은 감숙, 섬서, 산서 일대와 황하를 무대로 발생했다. 감숙 난주의 황하 강변. ⓒ 최종명



개오(盖吴)는 갈족, 저족, 강족과 혼혈을 이루며 공동산(崆峒山, 감숙 평량平凉) 일대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반농반목 흉노족 계열의 노수호(卢水胡) 후예이다. 445년 9월 관중 땅 행성(杏城, 섬서 황릉黄陵 서남부)에서 궐기했는데 이 일대의 민족과 농민들이 호응해 순식간에 10만여 명의 병력을 결집했다. 북위 초기 서북지방에 진(镇)을 설치하면서 선비족과 각 민족사이의 갈등이 내재돼 있었는데 드디어 민족연합의 대규모 민란으로 발전했다. 


개오 민란군은 북위의 장군 척발흘(拓跋纥)이 이끌고 온 군대를 단번에 패퇴시키자 조정은 병주(并州, 산서 태원), 진주(秦州, 감숙 천수), 옹주(雍州, 섬서 풍상凤翔)의 기마병을 총동원했다. 민란군은 대규모 토벌군과 맞서지 않고 군대를 나누어 섬서와 감숙 일대를 기민하게 동서로 움직였다. 동쪽 임진(临晋, 섬서 대려大荔)에서 북위 군대를 섬멸시켜 황하에 3만 명을 수장시켰으며 서쪽 위북(渭北, 섬서 보계宝鸡)에서도 대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촉나라 출신 설영종(薛永宗)이 행성(杏城, 섬서 황릉黄陵)에서 봉기를 일으켜 개오 민란에 호응했다. 북위 조정은 두 부대의 연합을 막고자 토벌군을 분산해 공격했으나 민란 연합군의 합류를 막을 수 없었다. 규모가 배가된 민란연합군은 11월에 행성에서 개오를 천태왕(天台王)으로 옹립하고 문무백관을 갖췄다


446년 1월 북위 태무제 척발도(拓跋焘)가 직접 출군해 토벌에 나서자 설영종 부대는 동옹주(东雍州, 산서 임분临汾)에서 맞서 싸웠지만 때마침 불어온 엄청난 북풍으로 인해 참패했다. 설영종은 가족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안(서안) 북쪽에 머물고 있던 개오의 민란군을 향해 척발도가 직접 황하를 넘어 공격해오자 인근 산으로 은거했다. 대군이 지속적으로 압박해오자 산을 내려온 민란군은 행성에서 대패한 후 개오는 긴급히 남조의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개오는 송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행성에서 다시 봉기해 진지왕(秦地王)으로 개명한 후 북위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8월에 이르러 참패한 후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부하에 의해 살해 당했다. 중원 밖 서역에 사는 여러 민족을 이끌고 북위 정권에 항거하고 남북조 시대의 힘의 균형을 활용했던 독특한 민란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 민란의 역사는 분단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 시대로 흘러간다. 두도, 손은과 노순, 조광, 당우지, 개오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민란 주인공들을 만났던 시대였다. '어떤 규모의 어떠한 민란인가'가 중요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처지와 아픔을 공감하고 '시대정신'에 입각해 인민의 절규를 대변한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공부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거나 기록에 있더라도 너무도 많은 민란을 다 가슴에 끌어안고 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어느 시대라도 지배계급의 통치 모순으로 인해 핍박 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언제나 '민란의 역사'는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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