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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0] 수나라 민란 장백산과 와강채 ①


▲ 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산동의 장백산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계획으로 인해 발발한 민란의 근거지이다. ⓒ 최종명


백두산, 중국은 장백산(长白山)이라 부른다. 장백산이라 불린 것은 12세기경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북위 때에는 도태산(徒太山)이었고 당나라는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서안 남쪽 진령산맥(秦岭山脉)의 주봉을 태백산이라 한다. 우리나라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과 이름이 같다. 


당나라 시대에는 지금의 백두산이 태백산이기도 했다. 산 이름만 놓고 보면 역사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왜 산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일까? 산세가 바뀔 만큼 기나긴 시간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산동지방에도 장백산이 있으며 적어도 수나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렸고 지금은 장백산맥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사실 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장백산 도적

보라 내 모습! 붉은 옷 비단 바지 입었다네!

긴 창 공중을 반으로 가르듯 휘두르니

눈 부신 햇살 머금어 칼날이 번쩍이네!

산에서 토비처럼 노루와 사슴을 먹고 살며

산을 내려가 도적으로 지주의 소와 양을 먹고 사네.

관군이 침범하면 앞서 나가 칼을 들고 맞설 거야.

어차피 요동으로 가면, 헛되이 죽느니만 못해

설령 내 머리 잘린다 해도 뭐 어떠리! 


'세상을 꿰뚫어 보는 강도' 지세랑(知世郎)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왕박(王薄)이 쓴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라는 시로 청나라 가경제 때 관리였던 두문란(杜文澜)이 편찬한 고대 민요와 속담 수록집 <고요언(古谣谚)>에 기재돼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당시 돌궐을 진압해 서북 방면을 안정시킨 후 고구려 침공을 준비했는데 오랜 전쟁과 대규모 운하 건설, 자연재해, 농민수탈에 이은 계급 모순이 겹쳐 인민의 삶은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간에는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전쟁에 이겨 장군들은 상을 받을지 몰라도 나만 들풀처럼 죽는다.'는 노래가 유행하며 요동병역(辽东兵役)을 거부하는 추세였다. 


610년에 이르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며 탁군(涿郡, 북경 인근)에 백만의 군사를 집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농민을 동원해 양식과 무기를 이동시켰다. 한번 차출된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으니 경작할 인원이 부족해 전답은 황폐해졌다. 안문(雁门, 산서 대현代县)과 동도(东都) 낙양에서는 흥분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전운이 감도는 조정 분위기와는 달리 백성의 고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자치통감>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고구려 토벌 계획을 위해 산동에 부서를 설치하고 말을 기르고 군역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부(民夫)를 동원해 쌀을 운반해 쌓게 하고 소달구지가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망한 병졸이 과반이 넘었다. 경작할 때를 놓쳐 전답은 황폐해지고 기근이 겹쳐 물가는 오를 대로 올랐다. 탐관오리가 설치고 백성은 가난이 극심해 재물은커녕 추위와 굶주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고 약탈이 자행되었는데 군도(群盗)가 모이기 시작했다.


수의 고구려 침공 1년 전인 611년, 수해로 산동과 하남 일대 30여 군이 수몰되자 대지가 엉망진창으로 변했는데도 고구려 침공 계획에 따라 세금 징수와 병역 징발은 멈추지 않았다. 산동 추평(邹平) 사람인 왕박은 참다못해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산동은 수군의 집결지로 군함 건조로 인한 고통이 가중돼 있었기에 장백산을 근거지로 삼고 시를 지어 '민심을 추동'하니 각 지방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던 농민들이 분연히 일어났으니 수나라 말기 거대한 농민봉기의 서막이었다. 


왕박의 민란군이 수차례 관군을 격퇴하며 1년 만에 수만 명으로 늘어나자 노군(鲁郡, 산동 연주兖州)을 빼앗아 근거지를 확대할 계획으로 남쪽으로 진격했으나 수나라 장군 장수타(张须陀)가 이끄는 군대와 태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장수타의 기습작전에 말려 잔여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임읍(临邑, 산동 덕주德州)에서 다시 패전했다. 왕박은 두자강(豆子冈, 산동 혜민惠民)에서 봉기한 손선아(孙宣雅)와 평원(平原)에서 봉기한 학효덕(郝孝德)과 연합해 십만의 병력으로 정비한 후 다시 남하해 장구(章丘)를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타의 정규군 2만 명과 싸워 승리하지 못하자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지역 민란군을 지원하고 연합전투에 참가할 뿐 산동 북쪽 일대를 근거지로 관망했다. 


619년에 이르러 왕박은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투항했으며 우문화급이 당시 민란군 두건덕(窦建德)에 의해 포위당하자 기회를 틈타 민란에 합세했다. 얼마 후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에게 항복해 종군했다. <신당서(新唐书)>에 따르면 622년 왕박은 군량 창고인 담주(潭州)와 수창(须昌, 산동 동평东平)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사 이의만(李义满)의 옥사를 방조했다가 그의 조카 이무의(李武意)의 복수 때문에 살해당했다. 


왕박은 수나라 말기 스스로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지도자로 나섰으며 전국적 민란의 포문을 연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수당영웅(隋唐英雄)이 판치던 시대에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강도'에서 지세왕(知世王)으로 불리며 장군으로서의 면모도 남긴 민란 주동자였다. 


와강채로 집결하라


수양제의 장녀 남양공주는 나라가 망한 후 하북성 창암산에 사당을 짓고 불교에 귀의했다. 청말 광서제에 의해 자우보살로 명예회복이 될 정도로 그녀는 설법을 통해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의 동생 우문사급의 부인이기도 했다. 창암산 사당 옆에 '가친'이란 사당이 애틋해보인다. ⓒ 최종명



호북 녹림채(绿林寨), 산동 양산채(梁山寨)와 함께 고대 3대 민란 근거지에 속하는 와강채(瓦岗寨)는 하남 동북부 안양(安阳)시 활현(滑县)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뛰어난 상인이자 정치가, 사상가인 여불위(吕不韦)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활현 남부에 위치한 인구 5만여 명의 조그만 향(乡)에 3억 위안(약 550억 원)을 투자해 와강채 관광지가 조성돼 있다. 수당 교체기에 농민 반란을 통해 성장한 와강군의 기세가 전국을 휩쓸었고 그 여운이 지금도 전해지니 역사의 복원력은 정말 탁월하다.


여불위에 이어 고향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한 인물은 적양(翟让)이다. 낙양의 법률 담당 하급관리로 재직하던 중 죄를 범해 사형당할 처지였는데 한눈에 영웅임을 알아본 옥리(狱吏)가 비밀리에 풀어줘 살아남았다. 감옥을 탈출한 적양은 고향 부근 와강채로 달아난 후 가난한 농민을 규합해 민란의 대오를 조직했다. 


와강채는 멀지 않은 곳에 황하가 흐르고 있으며 범람의 흔적으로 사구(沙丘)가 솟아있으며 초목이 무성하고 갈대가 도처에 쌓여 인가가 드물다. 민란군이 은폐하기에도 좋고 출격하기에도 유리한 산채였다. 북쪽의 황하와 남쪽의 변하(汴河)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진퇴와 공수에 유리한 군사요충지로 적합했기에 민란군은 사방 20km에 이르는 토담을 정비해 보루로 삼았다. 


▲ 중국민란사의 3대 민란근거지 중 하나인 와강채의 창업자 적양의 고향은 안양시 활현이다. 안양시는 기원전 상나라의 중요도읍이었고 갑골문자 등이 출토됐다. 사진은 안양의 은허박물관 입구. ⓒ 최종명


수나라 말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상황에서 삶의 출구를 찾던 청년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와강채로 찾아온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지략가이자 무장으로 유명한 17살의 서세적(徐世绩)도 있었다. 그는 당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고 3대에 걸쳐 중용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 이연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 받았고 이세민(李世民)이 황제가 되자 그의 이름 세(世)를 휘(讳)해 이적(李勣)으로 개명했으며 수호장군인 능연각(淩煙閣) 24공신 중 한 명이 됐다. 


와강군의 군사(军师) 서세적은 적양에게 '이곳 인근 지역은 빈곤한 마을이므로 주민들을 괴롭히면 안 되니 풍요로운 땅 형양(荥阳, 정주郑州 서부)일대의 관청과 부호를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관청의 식량 창고와 금고를 털어 재원이 늘어나자 화강군을 찾아오는 농민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때 당나라의 마지막 반란 수장이 되는 이밀(李密)도 합류했다. 이밀은 장안(서안)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으로 수양제가 그의 용모가 범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시켜 이름을 물어본 것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은거했다. 포부가 컸던 이밀은 반란에 가담해 체포와 탈출을 겪는 우여곡절 끝에 활 솜씨가 신의 경지라는 왕백당(王伯当)의 소개로 와강군에 투신했다. 


이밀:유방과 항우는 원래 평범한 백성이었는데 진나라를 전복시켰지요. 현 황제는 우매하고 포학하고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며 관군은 대부분 멀리 요동에 가 있지요. 수하의 군대가 전투력이 강하니 동도와 대흥을 공격해 폭군을 타도하는 것은 아주 수월한 일이 아닌가요?

적양:장군 의견 아주 좋아요. 난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군요

이밀:우선 형양을 도모한 후 곧바로 진격하는 게?

적양:그렇게 합시다.


사실 적양은 수양제를 전복할만한 지략이나 포부가 없었기에 대흥(장안의 수나라 지명) 출신인 데다가 동도(낙양)를 공략했던 이밀을 신뢰했다. 616년 10월 형양을 향해 와강군이 진격하자 태수는 다급하게 조정에 보고하니 왕박의 민란을 토벌한 장수타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했다. 이밀은 적양을 앞세워 토벌군과 정면으로 맞서게 하는 한편 자신은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잠복해 유인전술을 펼쳤다. 


장수타는 적양이 이끄는 본대와의 전투에 승세를 보이자 일부러 도망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거침없이 추격해 왔다. 이밀은 매복하고 있던 밀림으로 토벌군이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전멸시켰다. 명성이 높던 정규군 장군 장수타를 살해하는 전과를 올리자 이밀의 인기가 치솟았다. 귀족 출신의 이밀은 군령을 바르게 세우고 소박한 생활 자세를 유지했으며 노획물을 장병들에게 공평하게 나누니 신망이 더욱 두터워졌다. 


617년 봄 와강군은 수나라 최대의 군량 창고를 공격해 탈취한 후 곧바로 창고를 열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자 백발노인부터 어린아이를 짊어진 아낙네까지 곡식을 받아 들고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화강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온 사방에 메아리처럼 퍼지게 됐다. 이때 와강군의 지휘권은 점점 이밀에게로 향했으며 적양은 자신의 능력이 이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민란의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도 수령의 지위를 공개적으로 양도했다. 


이밀은 위공(魏公)으로 추앙됐으며 자연스레 건국과 왕조 전복 운동으로 발전해 갔으며 농민의 합류와 하급 관리의 투항이 이어졌다. 지속적으로 낙양을 공략하는 한편 수양제의 만행을 알리고 토벌의 정당성을 알리는 격문을 뿌리니 중원은 완전 경천동지했다. 


그렇지만 민란의 와중에 지도자의 권력 양도는 예상하지 않은 불운도 함께 가져왔다. 와강군이 나라의 위용을 드러내며 수나라 멸망을 위해 분투할 적기에 내부 분열이란 곧 불행일 수 밖에 없다. 이밀에게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선뜻 내준 적양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적양이 권력을 다시 탈취하자는 의도를 눈치챘다며 고자질을 했다. 


이밀은 적양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만찬에 초대해 활 시위를 당기게 유도한 후 배반의 누명을 씌워 살해해버렸다. 이때 서세적은 칼에 베이고 다른 장군들도 다치거나 머리를 조아려 겨우 살아남게 됐다. 이후 이밀은 도량이 좁고 배은망덕한 자로 알려져 신임을 잃게 됐으며 점점 전투력도 쇠락해져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적양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농민의 울분과 함께 하고자 와강채를 기반으로 수많은 인재를 불러모아 대세의 흐름을 바꾼 민란의 영웅이었다. 자신보다 리더십이 뛰어나 동지와 조직의 비전에 더 적합한 사람이 나타나면 흔쾌히 자리를 비울 수 있겠는가? 지장보다 덕장이 인재 관리에 소질이 있기만 하면 충분히 리더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역사는 보여주고 있어 적양의 선택은 아쉬운 점이 있다. 적양이 와강군을 끝까지 이끌었다면 민란의 역사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와강채 민란의 군사 서세적은 이후 이적으로 개명해 당나라 이세민의 '능연각 24공신'이 됐다. 당나라 대명궁 서북쪽에 있는 도관인 삼청전 옆 누각 능연각에 공신 초상화를 걸었다. 능연각은 전쟁 중에 훼손됐으며 사진은 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본당이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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