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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1] 수나라 민란 장백산과 와강채 ②



▲  하북 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두건덕의 고향은 고성으로 서커스로 유명한 오교 부근이다. 사진은 오교의 시장 모습. ⓒ 최종명


두건덕(窦建德)은 장남(漳南, 하북 고성故城)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약속을 천금처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곤한 동네에 살며 사람들이 부모 상을 당하면 밭을 갈다가도 즉시 달려가 장례를 도왔으며 필요한 물품을 내주기도 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이런 성품 덕분에 마을 이장을 하기도 했는데 두건덕의 부모 장례식에 천여 명이나 찾아와 예물을 주려고 했으나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 모두 사절했다고 <구당서(旧唐书)>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인품이다.


고구려 침공에 대한 전국적 반발이 거세지고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도망치고 난민이 많아질 즈음, 마을 주민 손안조(孙安祖)의 집이 떠내려가고 부인과 아이가 굶어 죽는 일이 생겼다. 홀로 남은 손안조에게 군대에 들어가라는 현령의 조언을 거부하자 잔인하게 곤장 치도곤을 당했다. 손안조는 현령을 죽이고 도망쳐 두건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고구려에 대패한 올해 홍수가 발생해 백성은 빈곤하건만 황제는 백성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체혈민정(体恤民情)' 하나 없이 또 다시 요동으로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전 서방을 정벌할 때 입은 손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백성의 피로가 극심한데 연이어 전쟁이니 일년 내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출병한다면 세상은 동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사내대장부가 죽지 않고 공을 세워 업적을 세워야지 어찌 도망치다가 포로의 운명으로 세상을 마칠 것입니까? 


내가 잘 아는 지인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숨어서 의적으로 생활하다가 기회를 틈타 사람과 말을 얻어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반드시 일어나 한바탕 경천동지할 대업을 벌여보시오."


두건덕이 손안조에게 한 말인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두건덕은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거나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를 대장으로 황하 인근의 험난한 근거지로 도피시켰다.


도적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지만 두건덕이 사는 고향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이런 내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관청이 손안조를 비롯한 도적들과 결탁했다는 밀고와 의심으로 두건덕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두건덕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해 당한 후였다. 


두건덕은 전 가족이 몰살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수하에 있던 장수 이백 명을 이끌고 당시 수현(蓨县, 하북 경현景县)에서 봉기한 고사달(高士达) 군대에 합류했다. 이때 손안조가 사망하자 함께 하던 수천 명의 군사들도 두건덕을 찾아와 투항했으며 동고동락의 동지가 돼 함께 군세를 확대해 나갔다.


616년 탁군(涿郡) 유수(留守) 곽현(郭绚)이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고사달은 지혜와 책략이 두건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군사마(军司马) 직책을 양도하고 군권을 전부 일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과 짜고 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고 선전하고 포로 중 한 명을 두건덕의 부인으로 위장해 공개적으로 살해해 기정사실로 믿게 했다. 두건덕은 거짓 항복 후 기습공격으로 토벌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도주하는 곽현을 참수해 수급을 고사달에게 바치니 두건덕의 권위가 날로 높아졌다.


수나라 조정은 고관인 태복경(太仆卿) 왕의신(杨义臣)이 또다시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맞서 싸우면 불리하니 도주했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급습하자는 두건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공격에 나선 고사달은 5일만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왕의신이 공격해오자 군사들은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두건덕은 수백 명의 군사만 이끌고 도주한 후 요양(饶阳, 하북 형수衡水)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의 시신을 수습해 따뜻한 곳에 안장한 후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전군에 흰색 상복을 입게 했다. 제각각 도망했던 군사들이 다시 모이니 수천 명의 군대로 복귀했다. 사기가 다시 충천해지자 복수를 위해 수나라의 관리와 지방 유지를 모두 처형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두건덕은 흥분을 누르며 반드시 '마땅한 예의로 상대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요양 현 장관(长官, 중앙에서 파견한 현령)이 투항해 두건덕을 귀빈으로 여기고 수나라를 토벌할 대계를 상의했다. 이후 수나라 군현의 장관들이 점점 현을 내주고 투항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군대의 기세가 날로 번창했으며 수많은 인재와 병사가 모여 십만 군대의 명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수양제가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되자 618년 두건덕은 그 옛날 천명을 받은 하우(夏禹)를 따른다는 취지로 국호를 하(夏)라고 선포하고 왕이 됐다고 <구당서>는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호랑이의 위세와 용의 위엄을 지닌 호거용반(虎踞龙蟠)의 명성을 얻으며 하북 일대를 장악했다.


문경지우가 원수가 되다니


수나라 말기 민란을 주동한 두복위와 보공석은 모두 제남 사람으로 문경지우의 관계였다. 민란이 발전하면서 서로 앙숙이 됐으며 원수 사이로 변했다. 사진은 제남 시내의 골동품 상가. ⓒ 최종명  


제주(齐州, 산동 제남济南) 사람 두복위(杜伏威)와 보공석(辅公祏)은 어릴 때부터 둘 다 가난했지만 서로 친분이 깊었다. 보공석은 목양업을 하는 고모네의 양을 훔쳐 나이가 더 많은 두복위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부자 집 담을 넘어 물건을 강탈해 배를 채우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는데 새싹은 날 때부터 알아볼만한 것인가 보다.


613년 산동과 하북 일대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 전시상황이었다. 두복위와 보공석은 자신들이 저지른 절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관청에 체포될 위기에 이르자 도적이 되기로 했다. 왕박이 민란 근거지로 삼았던 장백산으로 들어갔지만 도적 공동체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자 자기를 따르던 부대를 이끌고 나와 회북(淮北, 안휘 북부)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보공석이 하비(下邳, 강소 비현邳县)에서 봉기한 묘해조(苗海潮)와 담판을 벌여 그가 인솔하고 있던 민란군을 포섭했으며 강회(江淮, 강소와 안휘) 일대로 조직을 확대하자 보공석의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보공석이 농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자 두복위는 평소에 대장군이 아닌 형이라 부르는 것에 살짝 질투의 마음이 쌓이기 시작했다. 양자로 삼은 장군들을 중용하고 보공석에게는 화살부대를 관장하는 복사(仆射) 업무에 임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문경지교(刎颈之交)라는 명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대업을 도모할만한 절친인지는 잘 가려봐야 하겠다. 토벌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점점 남하해 강회 일대를 장악하자 농민혁명정권을 선포하고 두복위는 대총관(大总管)에 올랐으며 보공석은 그저 한 부서를 담당하는 장사(长史)에 임명됐다.


수양제가 죽고 중원은 난세에 접어들어 이연이 아들 이세민과 함께 당나라를 건국한 상태였다. 619년 두복위는 당나라에 투항 의사를 밝히며 보공석에게는 병권이 없는 벼슬을 주라는 당부를 했다. 


처음부터 투항할 의사가 없던 보공석은 마침 두복위가 군사 천명을 주고 10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한 농민반란군인 이자통(李子通)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공석은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전투를 이끌어 의외로 이자통 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고 쉽게 단양(丹阳, 남경)을 점령했다.


두복위는 단신으로 수도 장안으로 가기 전에 보공석과 부하 장수에게 '장안에 도착해 관직을 받게 되면 너희도 함께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를 내려놓지 마라'고 했다. 또한, 30여 명의 양자 중 가장 신임했던 왕웅탄(王雄诞)에게 병권을 주면서 보공석이 필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항상 감시하라고 거듭 주문했다. 


두복위가 장안으로 떠난 후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보공석은 왕웅탄이 병으로 누운 사이 병권을 탈취했다. 623년 9월 보공석은 장안으로 제 살길 찾아 떠난 두복위와 절연하고 단양에서 10만 군대를 통솔하며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했다. 수나라에 항거해 일어났던 민란군은 이제 당나라와 대항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수나라 3대 민란과 당의 건국


황하 북쪽으로 천리 길에 밥 짓는 연기 없고, 강소와 안휘 지방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수서(隋書)>에 나오는 말인데 수나라의 3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으로 황폐하게 변한 중원과 강남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온전히 굶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두건덕은 민심이 우리 편이고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사내대장부라면 대업을 추구하라고 했다. 왕박이 일으킨 장백산 민란을 시작으로 누구나 뜻과 인품만 있으면 농민들이나 병역 기피자의 호응을 얻어 혼란의 현장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양제(煬帝)는 자신의 시호(谥号)처럼 온 나라를 불태워버리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제 민란이 촉발한 군웅할거(群雄割据)는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하남 일대 이밀의 와강군, 하북 일대 두건덕의 하북의군, 강남 일대 보공석의 강회의군은 새로운 정권의 창출, 오로지 하나만이 살아남자는 피 말리는 세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나라 말기 태원유수 이연은 민란 토벌이냐 반란이냐 갈림길에서 아들 이세민의 권유에 따라 반란의 길로 접어든다. 사진은 태원 시내의 영택공원 입구. ⓒ 최종명


우문화급에 의해 수양제가 살해되기 1년 전인 617년, 민란 토벌의 명령을 받은 태원유수 이연(李淵)은 도저히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권력의 누수, 레임덕이 오면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지 선택이 쉽지 않은데 아들 이세민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반란의 깃발을 드는 것을 따랐다. 


수나라 군사 대부분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수도 장안을 점령한 후 수양제가 죽자 618년 당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됐다. 이후 3대 의군과의 경쟁과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수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적양을 살해하고 신임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와강군을 이끌고 있던 이밀은 낙양 공략에 치중하고 있었다. 수양제를 살해한 경도병변(江都兵变)을 일으킨 우문화급이 공격해오자 그를 물리쳐 북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민란 토벌로 세력을 크게 키운 왕세충(王世充)에게 대패한 후 장안으로 도주해 당나라에 투항했다.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이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산동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견을 가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619년 1월 당나라 장군 성언사(盛彦师)의 매복작전에 걸려 산동 남부 웅이산(熊耳山)에서 37살의 나이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북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두건덕은 619년 북쪽으로 도주한 우문화급을 공격해 살해했다. 이듬해 낙양을 점령하고 있던 왕세충이 이세민의 공격을 받아 전세가 불리하자 두건덕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621년 낙양을 구원하러 남하했다. 춘추전국시대 및 초한쟁패의 격전지였던 호뢰관(虎牢关, 하남 형양荥阳 서북부)에서 이세민에게 체포돼 장안으로 압송된 후 49살의 나이로 참수됐다.


두복위가 당나라에 투항하자 강회의군을 이끌고 있던 보공석은 점차 강력해지는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내느라 힘에 부쳤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공격해오자 보공석은 안휘 당도(当涂) 현에 위치한 박망산(博望山)과 청림산(青林山)에 병사를 배치하고 철벽으로 산성을 쌓고 저항했으나 보급로가 끊겨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결국 절강으로 도주했는데 불과 수십 명만 남아 항전하다가 무강(武康, 절강 덕청德清)에서 체포된 후 단양(丹阳, 남경)으로 압송돼 참수당했다.


왕박의 장백산 봉기와 보공석의 죽음까지 약 14년 동안 중원은 하루도 피로 물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농민들은 민란에 의연히 일어섰다가 피로 얼룩진 벌판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지만 역사 속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피의 흔적을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 침공이라는 야망으로 폭발하는 농민들의 울부짖음과 격렬한 기세에 밀려 수나라는 건국한 지 35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 수나라는 양제의 무리한 침략전쟁이 불러온 민란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고 결국 민란과 내란의 와중에 우문화급에게 살해 당했다. 수양제의 장녀 남양공주는 우문화급의 동생을 남편으로 둔 애절한 주인공이다. 사진은 남양공주가 수행하고 설법하던 창암산 절벽.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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