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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2]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①


당나라 말기 절강 섬현에서 사염 밀매로 생계를 유지하던 구보는 상산에서 살신의 정신으로 민란을 일으켰다. 사진은 구보의 고향과 아주 가깝고 20세기 국민당의 장제스의 고향이기도 한 절강성 계구 마을의 시장. ⓒ 최종명


"당(唐)은 황소(黄巢)로 인해 망(亡)하고 그 화(祸)는 계림(桂林)에 있다." - <신당서(新唐书)>


당나라 말기 최대 농민전쟁인 황소 민란이 일어나기 전 그 화근이 된 사건을 계림에서 봉기한 방훈(庞勋) 민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방훈보다 10년 앞서 절강 일대에 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구보(裘甫)가 있었으니 당나라를 침몰시킨 진정한 화근이자 최초의 항거였다. 당나라 말기 혼란, 피 끓는 전쟁의 서막이다.


당나라 말기 황제는 우매하고 무능해 주색과 오락에 빠져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고 가혹한 가연잡세(苛捐杂税)로 억지를 부리고 정치는 부패해 중앙은 환관(宦官)의 전권, 지방은 번진(藩镇)이 할거하니 나라 꼴이 엉망진창인 천창백공(千疮百孔)이었다. 진흙탕에 빠지고 숯불에 타버린다는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 이후 주현(州县)에 파견되는 절도사는 점점 중앙의 통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자 세력으로 변모했으며 세습화를 통해 고착화하는 경향이었다. 토지를 대규모로 장악하는 토지겸병으로 이어져 농민들은 의지할 곳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구보는 동시대 역사학자 배정유(裴庭裕)가 집필한 <동관진기(东观秦记)>에 따르면 월인(越人)이라 기록했고 <신당서>에 섬현(剡县, 절강 승주嵊州 시) 사람이라고 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구보는 사염(私盐) 밀매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강남 일대의 소금 산업은 풍부한 생산성으로 조정의 재정을 상당 부분 담당하던 명줄이었다. 지세(地税)는 물론이고 염차주(盐茶酒)에 대한 세금이 갈수록 가중됐고 잔혹한 착취로 이중삼중으로 수탈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거리마다 원성이 터져 나오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구보는 상산(象山, 절강 영파宁波)에서 859년 12월 살신의 정신으로 반항의 깃발을 높이 드니 기다렸다는 듯 수백 명이 순식간에 동조했다.


곧바로 현성을 공격해 주변 일대를 장악하고 군대의 준동을 무력화시켰다. <자치통감>에는 현을 장악한 후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장사를 모집하니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관찰사가 토벌군을 소집해 공격해오자 구보는 유인작전을 펴 삼계(三溪, 절강 신창新昌)에 있는 강 상류의 저수지를 뚫어 강을 건너던 토벌군을 섬멸했다.


'막힌 곳을 뚫어 물이 흘러넘치게 하자!'는 구보의 삼계대첩은 꽉 막힌 조정의 약한 고리를 뚫어 행복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자는 해방의 메시지와도 같았다. 산과 바다 근처의 크고 작은 유랑 집단이 일시에 합류하자 3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번지자 고향 섬현에 농민 정권의 토대를 구축했다.


구보 민란군이 차례로 절강 일대를 장악하자 관찰사로 임명된 왕식(王式)은 대군을 소집하는 한편 강남 지방을 유랑하는 회홀(回鹘, 위구르족)과 토번(吐蕃, 티베트족) 사람을 기병으로 동원하고 각 지역의 지주까지 무장을 시켜 토벌에 나섰다. 구보는 토벌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전을 거듭하자 섬현을 수성하며 만여 명의 민란 군대와 백성이 일치단결해 3일 밤낮 83차례에 걸친 공방전을 벌였다. 끝내 과불적중(寡不敌众)으로 구보는 생포돼 참수당했으며 500여 명은 포위를 뚫고 탈출했으나 곧 전멸했다.


불과 반년 만에 끝난 민란이었지만 당나라 말기 사회모순과 계급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8년 후 또다시 강남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방훈 민란의 예고편이었다. 그런데 <신당서>는 왜 수도 장안과 4만리나 떨어진 광서 계림을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당나라 멸망의 '화', 그 뿌리라고 한 것일까?


계림의 탈출, 장안을 위협했지만


805년에 서주(徐州), 사주(泗州, 강소 사홍泗洪), 숙주(宿州), 호주(濠州, 안휘 봉양凤阳) 4주를 지배했던 번진 무녕군(武宁军)이 설치됐다. 신라인 장보고(張寳高)가 무녕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819년 고구려 유민 집단이자 산동지방 절도사로 재직하던 이사도(李師道)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데 종군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녕군은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는 번진으로 절도사의 횡포에 맞서 장병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당나라 멸망의 '화'가 되는 계림 방훈의 민란 원인은 무녕군과 관련된다. 당시 무녕군 군인이던 장보고,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산동 영성(榮城)의 적산법화원 ⓒ 최종명


862년 7월 서주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신임 절도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돌연 절도사를 축출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 해도 하극상치고는 돌발적이었다. 구보 민란을 진압해 명성을 얻고 있던 왕식이 다시 절도사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하극상을 벌린 장병 수천 명을 학살하고 무녕군을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목숨을 건진 장병들은 모두 도망쳐 산으로 들어갔으며 비적으로 평생 살 운명이었다.


당시 운남 지방에는 백족 등이 중심이 된 남조(南詔) 정권이 세력을 키워 북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주의 하극상 사건 2년 후 864년, 조정에서는 서주와 사주 일대의 '비적화한' 장병을 끌어들여 남조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약 800여명이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로 내려가 주둔하게 됐다.


멀리 이국땅에서 용병의 시간을 견디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으니 비적과 조정은 애당초 서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던 셈이다. 거래는 약속에 기반하는 것인데, 애초에 약속한 주둔 기간 3년이 지났건만 조정은 귀향 명령 대신에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해버렸다. 불신이 팽배해지자 불만의 고름이 터져 나왔으며 게다가 관찰사의 가혹한 훈련과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등점을 넘고 있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수병(戍兵) 복무를 감당하라는 것은 잔혹한 고통이었다.


868년 7월 전직 무녕군 장교 허길(许佶)은 마침 계주 관찰사가 전근 간 틈을 노려 계주도장(桂州都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식량창고를 약탈한 후 군량과 사료를 관리하는 양료관(粮料官)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해 서주로의 귀향을 도모했다.


반란군이 된 방훈 군대는 병기 창고를 열어 무장한 후 계림을 출발해 호남, 호북, 안휘, 절강을 거쳐 서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 당시 지방 번진의 횡포에 고통 받던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군대병력도 점점 늘어나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못하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일부 장병의 단순 반란이 서서히 농민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훈은 '조정이 우리를 모두 주살하려 하니 어차피 싸우다 죽는 것이 백번 낫다.'고 외치며 서주의 본거지 팽성(彭城, 강소 서주)을 공격했다. 애초에 계림으로 보냈을 뿐 아니라 복무 연장을 주도한 서주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을 체포해 원한을 갚았으며 부하장수들은 물론이고 그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서주를 장악하고 장강 일대를 차단하자 수도 장안까지 위협에 빠지게 됐는데 이때 농민들의 참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됐다. 조정이나 민란군 지도자 모두 서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규모로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방훈에게 서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20만 명의 토벌군을 모집해 절도사 강승훈(康承训)에게 지휘하게 했다. 선봉장 대가사(戴可师)가 3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방훈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쳐 방심하도록 유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토벌군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방훈은 토벌군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만하고 향후 공격방향이나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방심했다. 게다가 음주와 오락에 점점 빠졌는데 마음 속으로는 반란군 두목으로 최후를 맞기 보다는 조정이 자신을 절도사로 인정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인 계림의 방훈 민란.사진은 '산수갑천하'의 계림의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과 소수민족 이미지가 혼합된 세외도원. ⓒ 최종명


"예로부터 교만에 빠져 사치로 나태하면, 얻었으나 다시 잃게 되며 이겼으나 다시 패하는 것인데, 하물며 얻은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사 주중(周重)은 직언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방훈은 듣지 않았다. 지도자가 그러니 덩달아 계림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수병들도 거만하고 난폭해지더니 무고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란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방훈도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지 않자 서서히 군율이 떨어지고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군 복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군인들은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명분과 규모를 키웠으나 본래 군인의 최고 로망인 절도사에 편재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절도사를 얻을지 말지'에 대한 동요까지 아이들이 시장 곳곳에 널리 유행할 정도였다. 절도사를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전투를 하다가도 또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된 것으로 봐서 방훈의 지략과 풍모는 한 나라를 세울만한 됨됨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웃음거리가 된 지도자를 비웃는 노래는 곧 고난을 살아가는 인민의 애환이자 바람이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난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는 속성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조정은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 절도사의 녹봉을 줄 것처럼 심리전을 펼쳐 안심시키면서 대대적인 토벌을 준비한 후 공격해왔다. 민란 지도자로서의 신임이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군대를 이탈해 투항하는 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전투가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다. 숙주와 서주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팽성이 함락당한 후에 계림 출신 핵심 장병의 일가친척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자 급속도로 사기가 꺾였다. 


방훈은 869년 9월에 이르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서북에서 출전한 돌궐계 용병 사타족(沙陀族) 기병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게다가 패잔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이미 투항한 옛 동지가 토벌군 선봉대로 나타나 앞길을 막자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한때 장안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침 없었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한계에 다다르면 어떻게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군인이 주도하고 농민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백성들이 호응해 1년 이상 전국을 휩쓸던 기세는 이후 황소의 난을 촉발했으며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导火线)이 됐다.


소금으로 망한 나라


황소를 등장시키려면 먼저 왕선지(王仙芝)를 앞세워야 한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민란을 일으켰으며 왕선지가 전사한 후 황소가 그 이념과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다.


왕선지도 구보처럼 당시 횡행하던 소금 밀매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균전제가 파탄 나고 번진의 겸병이 겹쳐 재정이 극도로 결핍해지자 조정은 차, 소금, 술의 전매를 강화했으며 그에 따른 세금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조정은 관염을 통해 거듭 폭리를 취하는 한편 밀매로 운영되던 사염을 가혹하게 단속하니 필수품인 소금이 사회모순의 핵심으로 적나라하게 부상했다. 당나라가 소금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민란의 주인공은 대부분 소금밀매 조직을 기반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왕선지는 874년 말 가혹한 폭정과 잔혹한 세금 징수는 물론이고 가뭄으로 인해 기아가 극도로 치닫자 장원(长垣, 하남 신향新乡)에서 기아 선상에서 헐떡거리던 3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민란 봉기를 주도했다. '천보평균대장군(天补平均大将军)'이라 자칭한 왕선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뜻으로 천하를 '평균'으로 수선(补)하고 싶었다. '평균'은 진승 오광의 난이나 태평도의 민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 구호로서 만인 평등을 처음으로 제창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균'에 대한 인민의 염원이 왕선지에 의해 처음 등장한 이후 '평등'에 대한 갈망은 이후 북송 초기 민란을 일으킨 왕소파(王小波)의 '균빈부(均贫富)' 구호에서 다시 등장한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 이를 균등하게 바로 잡으려는 사상이었고 인민의 호응을 얻어 나라를 세웠으니 이상적인 공산주의적 국가가 이미 중국 역사에 '원시적'이나마 출현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 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하남 일대에서 봉기한 왕선지는 875년 5월 연이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와 복주(濮州, 산동 견성鄄城)를 공략하니 인근 지방마다 봉기에 호응해 민란의 깃발을 드는 세력이 출몰했다. 왕선지는 이때 원구(冤句, 산동 하택 부근 추정)에서 봉기한 황소와 회합을 해 의기투합했다.


왕선지는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던 중 876년 7월 절도사 송위(宋威)가 이끄는 군대와 싸워 패배하자 도주했다. 토벌군이 승리한 후 조정에 왕선지가 이미 죽었다는 '이해하기 힘든' 보고가 올라갔는데 9월에 이르러 왕선지가 다시 나타나자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왕선지가 동도(东都) 낙양(洛阳)을 공격하자 도성 내 군관민이 모두 가족을 데리고 성을 탈출했다고 <자치통감>이 기록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희종(唐僖宗)은 수도 장안에서 중양절(음력9월9일) 행사도 취소하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토벌 대신에 회유를 모색할 정도로 다급했다.


왕선지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남, 호북, 안휘 일대를 공략하니 반년 만에 30만 군대로 확산됐다. 기주(蕲州)자사는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성을 열어 환대했으며 회유 책략의 일환으로 하사한 감찰어사 책봉에 왕선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왕선지는 투항할 생각도 있었지만 황소가 크게 책망하고 수하들이 강력히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생각을 포기했다. 황소는 왕선지로부터 떨어져 따로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왕선지 민란군은 약화된 세력으로 악주(鄂州, 호북 무창武昌)를 공략했지만 형남(荆南, 호북 강릉江陵)에서 포위를 당하는 등 토벌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다가 878년 2월 황매(黄梅)에서 토벌군 수장 증원유(曾元裕)에게 패해 참수당하고 말았다. 왕선지가 이끌던 반란군 중 1만여 명은 상양(尚让)의 인솔로 안휘 박주(亳州)에서 황소와 합류했다.


당나라 말기 왕선지 민란군과 토벌군이 일대 격전을 벌인 강릉은 삼국지 관우가 지키던 형주 땅이기도 하다. 사진은 형주고성으로 들어가는 대로.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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