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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3]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②


소금업자 황소는 왕선지 봉기에 호응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황소의 고향 원구(冤句)는 진나라가 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 기록마다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에 대한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겨우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으니 사람의 명운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멋진 '장난'을 칠 수 있겠는가?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 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八,我花开后百花杀。

冲天香阵透长安,满城尽带黄金甲。


9월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일 때이자 폭죽을 터뜨릴 만큼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괴감을 말하고 있다. 굳이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살(杀)과 운을 맞춘 것으로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당나라의 마지막 민란의 주인공 황소가 지은 시는 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황후화>를 연상시킨다. 사진은 영화가 상영되던 2008년 12월 베이징 시내의 홍보간판. ⓒ 최종명


수도 장안에 국화 향기만 만발하고 도성으로 들이닥치는 황금 갑옷의 물결, 영화 <황후화>의 원 제목이 바로 '만성진대황금갑'이다. 장예모 감독은 황소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시에서 착안하고 영리한 머리로 교묘하게 뒤집은 후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로 활용했다. 장예모가 비록 시 끝 구절을 따다가 '반혁명은 곧 몰락'이라는 통치자 편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지만 황소의 역사기록까지 뒤집을 수야 없을 것이다. 민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빌려다가 영화 자본으로 덧칠한 '비겁한' 감독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복수의 염원을 담아 시를 짓다


황소는 고향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조세를 강요하고 사역을 강제하며 퇴로조차 없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충돌이 잦았다. 심지어 사람들을 모아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지만,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산둥 지방으로 이동하며 승전고를 울리자 형제와 조카 등 8명과 함께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에는 기아에 시달리던 각 지방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으며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탈하기도 했다. 왕선지가 사망하자 황소를 흠모하던 군사들이 합류해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년 3월 황소는 변주(汴州, 하남 개봉)와 송주(宋州, 하남 상구商丘)를 직접 공략했으나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남하하며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당시 해상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12월에는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곧이어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都统)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수복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했지만,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부하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계주에서 시작해 뗏목을 타고 상강(湘江)을 따라 강릉(호북 형주)을 거쳐 장안과 직선으로 불과 만 리 거리의 상양(襄阳)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상 왕탁(王铎)을 초토도통(招讨都统)으로 삼고 강릉에 둔병을 설치했다. 또한 이계(李系)를 부도통 겸 호남관찰사로 임명해 10만의 군사를 담주(潭州, 호남 장사长沙)에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담주에 도달하자 이계는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란군은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가 상강에 흘러넘쳤다. 여세를 몰아 강릉을 돌파하자 도주하는 왕탁을 쫓아 상양을 지나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은 공세를 펴보기도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나 걸림돌이 사라지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년 토벌군의 저항과 전염병이 유행하자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8월에 이르러 회하(淮河)를 건넜고 11월에 낙양을 공격하자 한림학사 출신의 낙양유수 유윤장(刘允章)은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조정은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으로 하여금 민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대책이 무용지물이었다. 더구나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민란군의 규모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황소의 진격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치원도 막지 못한 장안 점령


▲ 황소는 역대 왕조의 수도 중 하나인 장안 성을 함락시키고 쑥대밭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 장안 성을 꾸며놓은 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내 모습. ⓒ 최종명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치원이 당시에 <토황소격문>을 썼는데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데,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많고 그다지 역사적이지도 않다. 고변은 황소의 군대를 백만 대군이라 조정에 부풀려 보고하고 토벌의 전공을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최치원의 격문은 고변의 이름으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뿌리고 다녔으니 유명세를 탄 것만은 분명했을 것이다.


황소 민란군은 '격문'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눈 하나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12월에는 드디어 수도 장안의 코 앞인 동관(潼关)과 화주(华州, 섬서 화현华县)를 점령하니 당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우국지위(忧国之危)를 맞아 성도까지 도피했던 전철을 똑같이 밟은 것이다.


881년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에서처럼,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드디어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 상양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으며 수도를 점령한 민란군답게 바로 국호를 대제(大齐), 연호를 금통(金统)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


황제에 등극한 황소는 사천으로 도주한 당희종을 가볍게 보고 군사를 몰아 추격하지 않았다. 사병들이 강도로 변해 장안이 '살인의 추억'으로 변해가고 여인네 강탈과 백성 구타가 나타나며 도처가 혼란으로 변해가는데도 황소는 저지할 수 없었다. 당나라 조정은 숨 쉴 틈이 생겼으며 곧바로 절도사 정전(鄭畋)이 토벌군을 이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소의 나라 대제에서 태위의 지위에 오른 오른팔 상양은 사천으로 진격했으나 토벌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상양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성안 곳곳에 패전을 조롱하는 시가 나붙자 관원 및 유생 3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존심이라고 하기에는 유치했고 심리작전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보복이었다.


토벌군 선봉장 정종초(程宗楚)가 장안으로 진격하자 황소는 전군을 이끌고 돌연 동쪽으로 도주했다. 무혈 입성한 토벌군이 승리에 도취돼 별다른 방비 없이 음주에 취하자 황소는 전광석화처럼 토벌군을 전멸시켰으며 다시 한 번 장안을 점령했다. 이때 토벌군을 지원했거나 내통한 백성을 한꺼번에 참수해 장안은 그야말로 피로 씻어낸 듯 세성(洗城)과 다름없다고 <자치통감>은 피를 토하며 기록하고 있다.


1938년 모택동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지도자가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를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모택동은 황소 외에도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민란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 신중국 건립의 교훈을 얻었다. 근거지란 세력도 중요하지만, 명분이야말로 생명줄이거늘 장안은 점령하고도 어찌 할바 모르고 불사진취(不思进取)했으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자 황소 민란은 점차 실패의 나락으로 치닫게 됐다.


882년이 되자 사천의 조정은 반격 조건을 다시 갖추고 격전에 대비했다. 이때 동주(同州, 섬서 대려大荔)에서 토벌군과 교전 중이던 황소의 맹장 주온(朱温)은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돌연 당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휘 당산(砀山) 출신의 유생 주온은 일찍이 황소 민란에 참여했으며 이윽고 배반의 화신이 됐다. 당 황제는 하늘이 내려준 복으로 기뻐하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토벌군 지휘를 맡겼다. 


주전충은 당시만 해도 '하늘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데 황소 민란을 진압하면서 군대를 장악하고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인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후량을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연 주전충은 황소의 민란을 거치며 일약 시대의 풍운아가 된 주온이었다.


'황소'의 살인 공장 도마채


황소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가 발생했다. 서돌궐계로서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온 것이다. 거침없이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황소는 결국 장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주의 시간을 벌여야 했으며 황금 보화를 거리에 뿌리고 추격을 늦출 정도로 다급했다.


게다가 군량 공급이 문제가 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살생해 인육을 식량으로 만드는 작업공장인 도마채(捣磨寨)를 운영하기도 했다. 인간 방앗간이 따로 없었으며 참혹한 실상이 <구당서>, <신당서>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장안에서의 도륙도 모자라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육을 담식(啖食)했으니 '살인마'라는 황소의 불명예를 도저히 지울 길이 없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 중에 인육을 먹은 최초의 인물은 수말당초의 '비정한' 반란군 수괴 주찬(朱粲)이었지만 황소 역시 '식인의 명부'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황소는 884년 봄, 이극용의 5만 군대에 연패하며 하남을 지나 산동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주온 토벌군과도 정주와 개봉 사이 왕만도(王满渡, 하남 중무中牟)에서 대패했는데 황소의 핵심 부하장군들이 대거 투항해 버려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6월에는 왕선지 민란에 참여했다가 황소에게 의탁한 최고의 오른팔 상양조차 무녕절도사가 이끄는 토벌군에 투항했다. 황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게 되자 산동 태산의 협곡 낭호곡(狼虎谷)으로 은신했다.


▲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태산 부근 낭호곡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사진은 태산의 가파른 계단. ⓒ 최종명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외조카이자 수행 장군인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헌납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며 최후의 순간을 준비했다. 임언이 감히 칼을 들지 못하자 황소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민란 주모자의 죽음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당연하지만,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역사의 정설 외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상존하고 있다. 중국당사협회의 한 역사학자는 황소가 자결했지만, 미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임언이 다시 수급을 베어 투항했지만 임언 역시 사타족 군인에 의해 살해돼 황소와 함께 수급이 당 조정에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황소의 죽음과 관련돼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1900년 돈황(敦煌)에서 도사 왕원록(王圆箓)이 우연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동굴을 발견했으니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돼 있던 동굴로 잘 알려진 막고굴에서 황소의 사인과 관련된 감숙 숙주 현 <숙주보고(肃州报告)>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황소는 그의 오른팔인 상양에 의해 살해돼 수급이 서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으로 상양이 투항할 때 이미 황소는 살해됐으며 태산으로 가지도 못했다는 주장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언제 어떻게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 제각각 근거와 기록을 남긴 황소는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 민란'이었으니 '당은 황소에 의해 망했다.'는 기록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민란의 영웅이었기에 살인마가 됐거나 혹은 누명을 썼겠지만 황소의 인생은 비참한 인민을 일으켜 세웠지만 스스로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지금껏 살아있다.


당나라의 멸망 속에 오대십국이 숨 쉬다


▲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수급이 감숙 성 숙주로 옮겨졌다'는 <숙주보고> 문서가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 건립된 돈황 막고굴을 상징하는 9층루. ⓒ 최종명


당나라뿐 아니라 모든 왕조는 망했지만, 황소 민란만큼 전국을 휘젓고 수도까지 점령했던 역사는 많지 않다. 사천으로 도망간 황제가 황소의 대제 정권 토벌을 위해 재물을 바짝 수탈하자 농민의 부담이 가중됐다. 치아를 치료하는 관리인 천능(阡能)이 촉나라 땅에서 882년 농민주도의 민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본영 주위에서 9개월 동안이나 치열하게 울분을 토하는 민란으로 골치 아픈 당 조정에게 황소의 장군 주온의 투항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충성해 달라는 전충이란 이름까지 하사하며 배반의 오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주전충은 황소가 사망하자 23년 후 민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907년 국호를 양梁이라고 하고 건국했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했다. 이에 격분한 황소 토벌의 또 다른 주축이던 이극용은 당나라 연호를 지키며 부흥을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908년 병사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주황이 개국하자 지방 절도사들이 번진을 기반으로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화북 지방의 오대와 화남 지방의 십국이 차례로 집권했는데 70여 년의 할거 시대는 조광윤의 송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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