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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4] 양산박 송강과 방랍 민란의 송나라 ①


사천을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国)이라 한 까닭은 비옥한 토지, 풍부한 자원으로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녔기 때문이다. 성도(成都)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는 기원전 진소왕(秦昭王)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 세계문화유산인 도강언(都江堰)이 자리잡고 있다. 평원과 분지로 이뤄진 지형에 천연의 수리시설이 형성돼 있어 축복 받은 땅이라 할만하다.


빈부 격차가 너무 커 마음이 너무 아프니, 지금 내가 너희를 위해 빈부를 공평하게 하리라.

- <속자치통감(续资治通鉴)> "吾疾贫富不均,今为汝均之"


청성(青城, 도강언)의 농민 출신 왕소파(王小波)는 차 판매로 생계를 잇고 있었으나 송(宋) 조정은 차, 비단, 무명의 국가독점을 실시하자 살 길이 막막해졌다. 평소에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던 왕소파가 민란을 일으키며 내세운 "균빈부(均贫富)" 사상은 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구호이자 실천이었다.


▲ 송나라 시대 균등 분배를 구호로 내건 왕소파 민란의 주 무대는 사천이다. 왕소파는 성도를 점령해 '계급해방'과 나라를 건국했다. 사진은 성도의 문화거리 금대로. ⓒ 최종명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다


965년에 이르러 오대십국의 후촉을 멸망시킨 송나라는 사천 지방의 풍부한 생산물을 중원으로 강탈해갔다. 당나라 말기 황소 민란은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각 지방의 부호를 도륙했다.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있던 사천 지방은 관료, 부호, 사관(寺观) 세력이 여전히 토지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던 권력자였다. 이들 지주계급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대다수 농민은 소작농인 방호(旁户)로 전락했다.


방호란 부호 부근에 거주하는 집이라는 뜻이지만 <송사(宋史)>에 따르면 '천섬(川陜, 사천과 섬서) 지역 부호들이 많은 방호를 거느렸기에 서민도 소작농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노예처럼 일했다'고 했다. 20세기 역사학자 범문란(范文澜)의 <중국통사>에서도 '방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소작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고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마치 노비처럼 사역을 당했다.'고도 했다. 방호는 부호에게 수확 생산물에 대한 납세를 하면서도 조정에 대해서도 각종 세금 착취를 당하는 처지에 불렀다.


송나라의 2대 황제 태종이 중앙집권을 가속화하고 있던 993년 왕소파는 백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향 청성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부와 빈을 평등하게 하겠다.'는 구호는 방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열흘도 지나지 않아 동조세력이 수 만 명으로 늘어났다. 


민란은 곧 군대를 조직하고 군령을 엄중하게 하는 한편 일반 인민에게는 추호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말 것을 천명했다. 곧바로 청성 현을 함락시킨 후 곧바로 팽산(彭山)을 점령하자마자 탐관오리의 상징이자 지주와 결탁해 악명이 높았던 현령 제원진(齐元振)을 징살(惩杀)했다. 


사기가 오른 왕소파 군대는 공주(邛州, 현 공래邛崃 시)와 촉주(蜀州, 현 숭주崇州 시)로 전선을 옮겨갔으며 이윽고 강원(江原, 현 숭주 동남부)에서 처음으로 관군과 격전을 치렀다. 민란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이때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던 관군 수장 장기张玘가 쏜 불의의 화살이 왕소파의 이마를 맞추고 말았다.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왕소파는 끝까지 전투에 참가해 관군을 섬멸시키고 장기도 척살했다. 얼마 후 왕소파는 상처의 여파로 사망하고 말았다.


왕소파 사후 민란 초기부터 동지였던 처남 이순(李顺)이 영수로 추천돼 별다른 갈등 없이 '계급투쟁' 전쟁을 이었다. 994년 1월 드디어 성도 공략에 나서 관군을 격퇴시켰으며 곧바로 성도부(成都府)를 점령했다. 왕소파의 균빈부 사상으로 무장된 민란군은 대촉을 국호로 나라를 세웠으며 연호는 응운(应运)이라 썼으며 이순은 촉왕이 됐다. 불과 1년여 만에 천부지국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은 광범위한 방호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이념에 기반한 조직적인 응집력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이순은 수 십만 군대로 발전하자 병력을 나누어 사천 일대의 모든 현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송 태종은 긴급하게 왕계은(王继恩)을 서천초안사(西川招安使)로 임명해 토벌군을 사천 북부 검문(剑门)으로 진격시켰으며 동시에 호북 성 일대의 군사를 이동시켜 사천 동부 기문(夔门) 돌파를 명령했다. 성도부에서 물러났던 군사들도 기회를 틈타 사천으로 들어가는 등 사방에서 관군이 몰려들고 있었다. 


994년 4월에 이르러 왕계은 토벌군이 성도를 맹공하자 이순의 10만 병력은 결사항전으로 수성하고 격전을 치렀다. 결국 5월에 성도 성이 함락됐으며 3만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민간에서는 이순 역시 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고도 하고 성도를 벗어나 30년 후에서야 광주에서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성도에서 체포된 후 18일 후 이순을 비롯해 민란 영수 8명이 봉상(凤翔, 현 섬서 성 보계宝鸡 시)에서 참수됐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왕계은이 성도를 빼앗았지만 성 밖에 민란의 이념에 동조하는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순의 부하장수이던 장여(张馀)는 만여 명을 다시 소집해 사천과 중경 일대의 8개 주州를 탈환하자 군사력은 다시 10만 여명으로 발전했다. 


여세를 몰아 기주(夔州, 현 중경 백제성白帝城)를 공략했으며 군대를 파병해 시주(施州, 현 호북 은시恩施)까지 진출하자 송 조정은 정규군 병력을 증파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성 부근 장강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장여의 민란군은 앞뒤로 공격을 받아 2만여 명이 전사했으며 함선 천여 척이 피해를 입었다. 장여는 잔여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후퇴해 점령지인 가주(嘉州, 현 낙산乐山 시)에 도달했으나 이미 송나라에 투항해 함락 당한 후였다. 장여는 포로로 잡혀 995년 2월 가주에서 살해 당했다.


왕소파가 설파한 '불평등' 세상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이순과 장여가 계속 이었지만 3대에 걸친 농민이자 노예나 다름없던 방호의 지지가 아주 조직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하늘이 내려준 복 된 땅을 완전 수복하지는 못했으나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자가 주인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왕소파 민란의 교훈은 그들이 흘린 피만큼이나 진하게 토지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피를 먹고 자란 생산물의 주인은 여전히 우리라는 것을 일깨우면서 말이다.


<수호전>의 허구에 담긴 송강의 진실


▲ 송강 민란을 담은 소설 <수호전>의 영웅을 묘사한 벽화. 사진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무송의 고향 청하의 무송공원. ⓒ 최종명


행장을 하늘에 원망 마라, 한신과 팽월의 멸족이 너무도 슬프지 아니한가.

한마음으로 보국하고 조정에 충성해 백전 경험으로 요를 정벌하고 방석의 난을 평정했건만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 했으나 천강성이 그 빛을 다해 탐관 도둑이 아직 여전하구나.

독배를 마시고 황토에 묻혔으니 일찍이 범려의 용퇴가 올바른 처신인 걸 배우지 못하였구나.

莫把行藏怨老天,韩彭赤族已堪怜。一心报国摧锋日,百战擒辽破腊年。 

煞曜罡星今已矣,谗臣贼子尚依然! 早知鸩毒埋黄壤,学取鸱夷范蠡船


<수호전>의 마지막 120회 끝머리에 나오는 짤막한 시구가 의미심장하다. '행장(行藏)'은 <논어(论语)>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말로 '벼슬에 나가거나 은거하거나' 주군에게 임용되는지 용사(用舍)를 뜻하는 말이니 생사나 성패 여부를 하늘의 뜻에 맡기라는 것이다. 


한 고조 유방을 도왔지만 구족이나 삼족의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역사라고 '담대'하게 감상에 젖기도 한다. 거란족 요의 침입을 막고 방석의 민란 토벌에 참여했다는 것은 실제로 벌어지기 불가능한 일이자 허무맹랑한 소설적 구성일 뿐이다. 천강성(天罡星)은 원래 북두칠성이지만 소설다운 작명에 따라 송강을 우두머리로 민란을 일으킨 36명 영웅 집단을 상징한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와신상담해 복수극을 기획하고 실현한 브레인으로 성공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홀연히 용퇴한 후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변모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간신의 모략에 의해 독배를 마시고 사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소설 <수호전>의 서사적인 마무리를 끝맺는 말이니 굳이 전권을 읽어보지 않아도 작가의 주제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으로 읽혀진다.


소설 <삼국지>가 국호, 지명, 등장 인물과 시대 배경만 빼고 대부분이 허구라면 <수호지>는 윤곽만 빼고 에피소드는 모두 소설인데다가 등장 인물도 대부분 상상력으로 창조된 인물이다. 실제 인물은 송강(宋江)을 비롯 서너 명 정도가 겨우 역사에 짤막하게 기재돼 있으며 그나마 108 영웅호한 중 서열 5위이자 관우의 후예로 등장하는 관승(关胜)이 제주(齐州, 현 산동 제남) 소속의 장령(将领)으로 <송사>나 <금사>에 전해지는 정도이다. 


호랑이 때려잡은 무송(武松)이나 장비 캐릭터의 노지심(魯智深), 금군교두(禁軍敎頭) 임충, 다혈질의 정의파 이규(李逵), 지략과 성품이 뛰어난 노준의(盧俊義) 등 수많은 영웅호걸은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인물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수호지> 인물도 조조, 유비, 손권, 제갈량처럼 유명하지는 않아도 '정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리따운' 명기 이사사(李师师)와 염문을 뿌린 송 휘종(徽宗) 시대에 이르러 여섯 명의 간신 '육적(六贼)'이 방종과 방탕으로 온갖 못된 짓으로 전횡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 수탈에 여념이 없었다. 관직에 따라 정가를 정해놓고 하는 매관매직도 가관일 뿐 아니라 궁궐과 원림 중건에만 혈안이 됐으며 수많은 장인을 동원해 민간에서 착취한 각종 재료로 공예품을 제조했으며 심지어 휘종이 좋아하는 기화이석(奇花异石)이 많은 동남 지역(북송 의 산동,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운하를 통해 수도 개봉까지 운반했다. 


집단 운송 조직을 강(纲)이라 하는데 돌만 잔뜩 실어 나르는 화석강(花石纲)이 한번 움직이면 모두 10척의 함선이 동원됐다고 하니 강남의 기암괴석이 모두 중원으로 이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미 동남 지역 농민들은 겪어야 할 고통은 다 맛 본 상태였는데 당 조정과 관료사회는 제멋대로 흥청망청 사의휘곽(肆意挥霍)하니 연간 재정수입을 아홉 달 만에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화폐가 과도하게 발행됐으며 세금도 증가해 물가가 폭등했다. 게다가 실물 수입을 늘릴 목적으로 일반 민간의 논밭을 공전으로 전환해 국가 소유로 묶어버리는 시행령을 단행했는데 이를 괄공전(括公田)이라 했다. 관료와 지방 토호들도 겸병을 통해 대지주로 변해갔는데 육적의 채경(蔡京)이 점유한 토지가 50만 무(약 333km²)에 이르렀다고 한다.


▲ 송강 민란을 주제로 만든 소설 <수호전>의 노지심. 사진은 개봉의 대상국사에 설치된 노지심 조각상. ⓒ 최종명


하남과 가까운 산동의 양산박(梁山泊, 현 산동 양산 현과 운성郓城 현 사이) 호반에서 고기도 잡고 창포도 기르던 농민들이 무거운 세금과 암흑 통치를 견딜 수 없었다. 1119년 송강과 사빈(史斌, <수호전> 등장인물이 아님)을 비롯 36명이 민란을 일으키고 하삭(河朔, 황하 북부 하북 일대)을 공격하는 등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송강과 36명의 전사는 거침 없이 청주(青州)를 지나 제주, 복주(濮州, 현 견성鄄城) 등 10여 개 주를 파상공세로 진격했다. 송 휘종이 '산동의 도적 송강을 복종시키라'는 초무(招抚) 조서를 내릴 정도로 조정을 진동시켰으며 송나라의 통치 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송사>에 따르면 호부상서를 역임한 호주(毫州) 지주(知州) 후몽(侯蒙)은 '송강 등 36명이 횡행하는데도 관군 수만 명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청계(青溪, 현 절강 순안淳安 서북부)에도 방석의 민란이 일어났으니 송강을 사면해 방석을 토벌해 속죄토록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후몽의 상소를 본 휘종은 '외지에 나갔어도 짐을 잊지 않는 충신이다.'고 했다. 나름대로 차도살인지계의 묘수이긴 했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후몽이 병사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소설 <수호전>은 후몽의 상소를 모티브로 화려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산동 청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송강 무리는 송 조정이 섭주(歙州, 현 안휘 섭현) 지주 증효온(曾孝蕴)이 토벌군을 이끌고 북상하자 기주(沂州, 현 산동 임기临沂)로 남하했다. 1121년 2월에 이르러 회양군(淮阳军) 주둔의 하비(下邳, 현 강소 휴녕睢宁 서북부)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술향(沭阳) 현에서 배를 타고 해주(海州, 현 강소 연운항连云港)에 이르렀고 초주(楚州, 현 강소 회안淮安)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조정으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은 해주 지주 장숙야(张叔夜)의 유인작전에 허망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장숙야는 첩자를 파견해 송강 민란군이 10여 척의 함선에 식량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송강 무리는 유인작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해안으로 올라온 후 토벌군의 매복에 걸렸으며 함선도 불에 타버리자 퇴로도 막히게 되자 모두 투항해 포로가 됐다. 결국 3년도 되지 않아 송강의 민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란 항전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양산박 일대의 반항 투쟁은 계속돼 1121년 송강 등이 체포되자마자 괄공전의 환관이자 '육적'인 양전(杨戬) 등의 악행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착취는 멈추지 않았으며 농민의 삶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끊임없이 항거하고 있었다. 


양산박 일대 농민들이 지속적으로 조정에 불만을 품고 반항하자 1124년 운주(郓州) 지주 채거후(蔡居厚)가 농민 5백 명을 유인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어민 장영(张荣)은 양산박에 농민들을 규합해 총 백여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송강 민란이라기보다 양산박 민란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양산박 농민들의 모순 인식은 적대적이었다.


중국 민란의 역사를 유추해 보면 송강과 36명은 투항 후 최소한 우두머리는 참수 당했을 것이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은 소설 <수호전>은 '확실히 귀순이라는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졌다.'고 했으며 소설이 회자된 명나라 시대도 탐관들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간신들에 의해 송강 등이 조정에 충성한 영웅으로 묘사된 것은 비극이자 분민(愤闷)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유교적 발상으로 송강의 민란이 소설로 둔갑했지만 송나라 말기의 관료의 부패와 암울한 사회를 드러낸 것을 평가할 만하다고 했는데 명나라 말기 사상가 이탁오(李卓吾)도 관료사회가 농민의 요구를 살피지 않고 민란 진압만 우선하는 것에 대해 통찰했던 지식인답게 <수호전>을 평가하며 '북송 말기를 반성의 시각에서 살펴보며 채경 등의 부패집단에 대한 비판과 반항을 드러낸 소설로서 군신의 황음무도와 부도덕을 질타한 것'이라고 독후감을 쏟아냈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야말로 곧 '민란'이다. 김용이나 이탁오가 지적한 송강 민란은 적절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소설에 대한 평가일 때 타당하지 실제 역사에 대한 접근일 경우 사뭇 달라진다. 역대 민란에서 귀순 후 충성했다는 사례는 원나라 때 귀순 흥정을 했던 왕선지 정도였고 민란의 우두머리가 어떤 운명을 지녔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되며 귀순 후 조정에 충성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史实)이다. 


정사와 소설을 구분해 봐야 하지만 어쩌면 <수호전> 주인공 송강의 별명이 '때 마침 내리는 단비' 급시우(及时雨)인 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인민의 염원을 담아낸 멋진 작명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 항주 서호 호반에 있는 소설 <수호전>의 주인공 무송의 묘.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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