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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6]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①


중국민란 역사에서 원, 명, 청 시대를 아우르는 코드는 피지배계급의 질곡을 줄기차게 담아낸 민간 종교결사 백련교(白莲教)를 주시해야 한다. 서기 4세기 동진 시대 강서 여산(庐山)의 동림사(东林寺)에서 발원한 대승불교 정토종(净土宗)의 한 계파로 남송 시대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백련종(白莲宗)이 민란의 염원을 담아내며 백련교로 발전했다.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아미타불을 숭상하고 '살생, 절도, 음란, 망언, 음주'를 행하지 않는 지계(持戒)를 염불해 서방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결사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모자원은 1069년 강소 곤산(昆山)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9세에 출가했다. 동림사에서 정토종을 창건한 혜원(慧远) 스님이 연못을 파고 백련을 심은 것에 유래한 종교집회인 백련사(白莲社)의 유풍을 흠모해 <백련신조참의(白莲晨朝忏仪)>를 편찬했으며 1131년 상해 서쪽 전산호(淀山湖)에 백련참당(白莲忏堂)을 세우고 혜원 스님이 제창한 백련사의 계승을 자임했다.


▲ 중국 대승불교 정토종은 강서 여산 동림사에서 발원했다. 여산은 남송 시대 백련종을 창립한 모자원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사진은 동림사가 있는 여산의 풍광 모습. ⓒ 최종명


그러나 백련종은 지계를 지키면서도 스님이 출가하지 않고 처자식을 두는 등 불교의 교리를 왜곡하고 세속적인 외도로 사교로 알려지면서 포교 금지령을 당했으며 모자원은 체포돼 강주(江州, 현 구강 九江)에 유배됐다. 모자원은 이후 비밀리에 포교하기 시작했으며 30년이 흐른 1166년에는 황제의 초청을 받아 정토법문을 강연하기도 했다. 명예를 회복하자마자 곧바로 원적(圆寂)했다.


모자원이 창건한 백련종은 미륵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이단으로 중국으로 들어온 명교까지 흡수하는 등 점차 정토종의 범주에서 벗어나 신흥종교인 백련교로 발전해갔다.


몽골족이 1234년 여진족 금을 멸망시켰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1271년 중원 지방에 원을 세운 후 남하해 송나라까지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강남 땅 임안을 수도로 했던 남송은 복건으로 도주 후 마지막 황제가 바다에 투신해 자살한 1279년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송의 멸망을 전후한 3년간 강서 북부 판양호(鄱阳湖)를 끼고 있는 도창(都昌)에서 역사상 최초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된 민란이 발생했다. 1277년부터 도창에서는 원나라의 침공에 항거한다는 명분으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돼 '온 세상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민란을 일으켰다. <원사>에 따르면 그들을 따르는 농민이 수만에 달했으나 원 조정의 정토(征讨) 명령에 따라 주동자를 체포해 능지처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1780년 4월에는 백련교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두가용(杜可用)이 만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반원의 기치를 내걸고 천왕(天王)을 자칭했으며 만승(万乘)이란 연호까지 선포했다. 송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원에 이어 강남을 장악하고 통치하자 혼란기를 틈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분출구였던 것이다. 3년여 동안 민란 봉기를 일으키고 주모자가 살해되는 과정이 반복됐지만 백련종이 추구한 미래의 구세주 도래를 믿었던 도창의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힘을 결집했다.


두가용은 농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와 웅변으로 농민들을 결집시켰으나 대도(大都, 북경)에 수도를 정하고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한 원 세조 쿠빌라이는 크게 놀라 강력한 토벌을 진행했다. 9일간의 격전을 치렀으나 군사력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결국 두가용 등 핵심 주동자들이 체포돼 강서 용흥(龙兴, 현 남창南昌)으로 압송돼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혹형인 책사(磔死)를 당했다. <신원사(新元史)>는 '두가용이 만승 원년이라 허위로 사칭하니 복주(伏诛, 사형 집행)했다.'고 짤막하고 무미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 년을 이어 피지배계급 인민의 염원을 담아내고자 했거나 이용하고자 했던 백련교 최초의 민란이라는 평가는 굳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민란의 이상, 미륵의 구원


▲ 원나라 민란은 백련교도가 주도했다. 백련교나 명교 등은 백성의 염원과 미륵불의 구원 사상을 연결하는 지혜를 담았다. 사진은 중국 미륵불의 성지인 절강 설두사의 미륵대불. ⓒ 최종명


원나라가 중원을 통치한 후 이민족으로부터 학정을 당하고 있던 농민들은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자연스럽게 현실 세상을 뒤바꾸는 '구원'의 손길과 연결됐다. 1308년 원 무종(武宗)이 '처자식도 두고 이미 청정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멸시와 함께 백련교를 금지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지만 석가모니의 후임이자 미래불인 미륵보살의 출현을 선포하면서 민란을 주모하는 백련교 결사조직의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에 기록된 불교 통사적 기록인 <석문정통(释门正统)>에서도 재가제자를 두거나 가내 불당을 두는 등 승속(僧俗)이 결합된 백련교를 우려해 '백의를 입고 포교를 오락가락하는 건 착오가 없을 수 없다.'고 기록했는데 산속이 아닌 속세에 있는 백련교가 점차 사교로 낙인 찍히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1312년 정토종의 본산인 동림사 보도(普度) 스님은 백련교의 복교를 도모하며 '미륵불이 태어났다.'거나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왔다.'며 공개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종교결사 모임인 백련교도가 하남, 강남, 장강 일대에 빠르게 퍼져나가자 1322년 원 영종(英宗)은 또다시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백련교를 전파하는 스님들은 민간에서 비밀리에 전해오던 미륵신앙인 미륵교, 화엄경을 경전으로 유, 불, 선 삼교귀일을 신봉하던 백운교, 중국에 들어온 마니교인 명교와 혼합되면서 점차 비밀종교조직으로 변모해갔다.


1315년 강서 간주(赣州)에서 채오구(蔡五九)는 논밭에 부과하는 세금 증세를 위한 조사에 맞서 봉기했으며 1321년 섬서 주지(周至)의 스님 원명(圆明)은 궐기해 황제를 칭했으며 산서 합양(郃阳)의 도사 유지선(刘志先)은 종교결사를 이끌고 봉기했다. 


1325년 하남의 식주(息州, 현 신양信阳)에서 '미륵불이 세상에 왔다.(弥勒佛当有天下)'는 구호를 내걸고 조추시(赵丑厮)와 곽보살(郭菩萨)이 민란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건이 발발했는데 그 기반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미래로의 기원으로 치환하려는 농민들의 바람이 깔려있었다.


1333년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즉위했는데 중앙의 통치질서는 무너지고 재정은 심각한 수준인 데다가 과중한 세금 부과에 따라 물가는 치솟고 하북, 하남 일대와 장강 하류에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이 1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흉년까지 겹쳤는데도 권신들의 독단과 조정의 무능은 곧 패망의 징조였다. 


1337년 1월 광동 귀선(归善, 현 혜주)의 주광경은 민란을 일으킨 후 석가모니에게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 정광불(定光佛)을 갑옷에 붙이고 무기를 들고 증성(增城)을 점령한 후 연호를 적부(赤符)라 하고 대금(大金)을 세우고 7개월 동안 토벌군과 맞서 싸웠다.


2월에는 하남 진주(陈州, 현 회양淮阳)에서 어릴 때부터 노자의 태자라고 믿으며 예닐곱 자나 되는 봉을 신출귀몰, 자유자재로 휘둘러 봉호(棒胡)라는 별명을 지닌 호윤아(胡闰儿)가 등장해 미륵불 강생을 주장하며 백련교도를 규합했다. 결사조직을 군대조직으로 개편한 후 녹읍(鹿邑)을 돌파해 진주성을 불바다로 만든 다음 둔병 근거지를 설치해 장기전에 돌입하니 주변 지역의 농민들도 호응했는데 이듬해 4월 토벌군에 참패 후 포로가 됐으며 대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천성이 총명해 깨달음이 뛰어났으며 의술과 점복에 탁월했던 한유(韓蕤)는 한법사(韓法師)라는 별칭으로 1325년 하남 정주(郑州) 일대에서 백련교를 창건, 원말 백련교의 비조로 손꼽힌다. 한법사는 1336년 사천 대족(大足)에서 교도들을 결집한 후 원나라 반대를 천명하고 여러 곳을 섭렵하다가 마침내 중경(重庆)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자 1337년 4월 조왕(赵王)을 자칭하며 송나라를 회복했다. 민란을 일으킨 한법사는 중경 주변 7개 현을 장악해 원 조정을 충격에 빠트렸지만,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체포된 후 살해됐다.


백련교 형성과 함께 훗날 홍건군 민란의 좌표가 된 한법사는 당시 불교사원에서 군중이 모일 수 있는 합법적인 영역을 이용했으며 명교에 상당히 경도돼 있었다. 백련교와 명교의 교리는 미륵을 숭상한다는 측면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당시 통치계급에게 '마교'로 알려진 명교의 교주였기에 백련교의 엄호를 받아 은폐했던 것이며 반원복송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도 연합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월(日月)을 숭상하고 광명의 신을 존경하는 마니교와도 일맥상통하게 되는데 모든 교도가 백색을 입고 채식을 하며 음주를 끊고 매장하는 교리나 화목하게 한 가족처럼 서로 돕는 생활 풍습을 지니게 된 것도 당시 기층 농민의 염원과 잇닿아 있었으며 광명의 세력이 힘을 합쳐 암흑세계를 반드시 물리친다는 실천적인 마인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의 중심에서 힘을 기른 주원장 역시 명교의 교도로서 국호를 '명'이라 한 것도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민중적' 사상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기층 농민의 결사체로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던 주원장은 백련교 등을 금지시킨 것도 당시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들불처럼 홍건군 민란을 시작하다


외눈박이 석인이 나타나면, 황하가 요동치고 천하가 뒤집힌다. (石人一只眼,挑动黄河天下反)


1351년 원 순제의 조정은 15만 명에 이르는 백성에게 황하의 제방을 쌓는 일에 동원령을 내렸다. 조정의 기강은 부패했고 세금 가중은 극심했으며 게다가 끊임없이 재해가 발생하는 마당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도처에 원성이 자자해지자 기층 농민들의 기원을 한몸에 받고 있는 백련교 지도자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미륵의 강림과 명왕의 출현'을 선전하며 민란을 준비하며 황하와 가까운 지역인 안휘 영주(颍州, 현 부양阜阳)에 살던 유복통(刘福通)은 한산동(韩山童), 두존도(杜遵道) 등과 거사를 도모했다. 한법사의 민란을 눈여겨 봤던 유복통은 '불만'과 '염원' 외에도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다. 유복통은 동지들과 함께 '외눈박이' 민요를 만들어 널리 퍼트렸으며 석인 등에 '천하가 뒤집힌다.'는 가사를 새긴 후 황하의 요도인 황릉강(黄陵冈, 현 조현曹县) 강변에 매장했는데 곧 사람들이 캐내자 민심이 급속도로 동요했다. 유복통 등은 백련교도의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며 광범위하게 농민들의 참여를 도모했던 것이다.


유복통은 집안이 부유했으며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했으며 어릴 때 백련교에 가입해 영주의 교주 중 한 명이었으며 잠시 지방 관리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1351년 4월 유복통은 하북 영년(永年)에서 난성(栾城) 현 출신의 농민이자 백련교도인 한산동을 송 휘종의 8대손으로 추대하고 민란을 결의했다. 뜻밖에 비밀리에 집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누설돼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천국에서 강림한 명왕이자 송 황실의 후예를 자임했던 한산동이 체포돼 곧바로 살해됐다.


유복통은 고향 영주로 돌아가서 5월에 드디어 안휘 영상(颍上, 현 대관代管)에서 봉기하고 신속하게 영주 성을 점령했다. <명사>에 따르면 '백마와 흑우를 죽여 천지에 경고하고 군사를 모아 도모해 홍건(红巾)의 깃발을 들었다.'고 기록했으니 홍건군 민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머리에 홍건을 두르고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새로운 왕조를 지향하고 있었다.


유복통의 홍건군은 영주를 점령한 후 하남 남부 지방으로 진격해 수많은 현을 돌파했으며 9월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여녕부(汝宁府)와 광주(光州, 현 황천潢川), 식주(息州, 현 식현息县)를 장악하니 10만 명의 군사력으로 확충됐다. 가는 곳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며 빈농을 구휼했으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사기가 충천한 홍건군은 1352년 원나라 30만 명의 토벌군을 물리치는 등 연승했다. 원나라 군사와 결탁한 지주 이사제(李思齐)가 배후에서 기습을 해오자 안휘 박주(亳州)로 후퇴하기도 했다. 유복통은 안휘 성으로 진입한 후 관군을 연달아 돌파한 후 려주(庐州, 현 합비合肥)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1355년에 이르러 박주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韩林儿)를 영접해 '소명왕'으로 옹립했으며 국호를 대송(大宋), 연호를 용봉(龙凤)이라 했으니 역사에서는 한송(韩宋)이라 부르고 있다. 홍건군의 건국은 전국을 동요하기에 충분했고 각 지역에서 호응했는데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의 서수휘(徐寿辉), 안휘 소현(萧县)의 이이(李二), 하남 남양(南阳)의 포왕삼(布王三), 호북 형번(荆樊, 현 양번襄樊)의 맹해마(孟海马), 안휘 호주(濠州, 현 봉양凤阳)의 곽자흥(郭子兴) 등이 민란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 백련교도 유복통은 민란을 일으키고 수도를 개봉으로 하는 대송을 건국했다. 사진은 개봉부. ⓒ 최종명


1357년 유복통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군했는데 동로군은 모귀(毛贵)가 이끌고 산동과 하북을 거쳐 수도 대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후 제남으로 후퇴했다. 중로군은 관탁(关铎)과 반성(潘诚)이 이끌고 산서와 하북 일대, 대동을 경유해 원의 상도(上都, 현 내몽고 다윤多伦) 황궁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였고 1359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고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서로군은 백불신(白不信), 이희희(李喜喜)가 이끌고 관중(关中)을 공략했으며 사천, 감숙, 영하 지역을 공격했다.


대군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군시킨 후 유복통도 1358년 5월 북송의 수도 변량(汴梁, 현 개봉)을 향해 진격해 한송의 도성으로 삼았다. 이때의 홍건군을 일러 정인지(郑麟趾)는 <고려사> '공민왕세가'에서 '동쪽으로 제나라와 노나라, 서쪽으로 함곡관 넘어 진나라, 남쪽으로 복건과 광동, 북쪽으로 유주와 연주에 다다랐다.'고 했으니 세력이 가장 절정일 때였다.


원 조정은 마치 화로 속에 떨어진 개미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파견한 군대가 연이어 패배해 군수물자가 거의 남아나지 않았음에도 지주들의 사병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승부수를 던지는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건군은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작전을 벌인 것에 더해 탄탄한 근거지 구축을 하지 않았으며 세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점령했던 지역을 잃곤 했다. 북벌을 나선 삼로군도 서로 고립돼 개별 작전을 수행하면서 차츰 패전이 잇따르자 형세가 역전될 조짐이 보였다.


1359년 8월에 차칸테무르와 폴로테무르가 통솔하는 원나라 대군이 변량을 공격해 성곽이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유복통은 한림아를 호위해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안휘 안풍(安丰, 현 수현寿县)까지 달아난 후 후일을 도모했다.


4년이 지나자 각 지역에서 발발한 민란군의 판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강소 고우(高邮)에서 대주(大周)를 건국한 사염업자 장사성(张士诚)이 안풍을 공격해왔다. 1363년 2월 장사성의 선봉장 여진(吕珍)이 기습하자 전투 중에 유복통은 전사하고 한림아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주원장(朱元璋)의 도움을 받아 남경 서북부 저주(滁州)에 은거했다가 익사로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이 둘의 죽음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데 전투 중에 둘 다 전사했다고도 하고 둘 모두 주원장에 의해 보호 받다가 살해됐다고도 한다.


붉은 두건을 두르고 전쟁터를 주름잡던 유복통의 홍건군은 피비린내보다 더 진한 분향(焚香)을 뿜어 향군(香军)이라 불리며 원나라 말기 무려 13년 동안 전국을 섭렵했다. 비록 백련교의 이념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원나라의 숨통을 죄며 관료사회와 지주계급에 경종을 울리며 기층 농민의 마음 속에 커다란 희망이던 세월이었다.


▲ 유복통의 백련교 홍건군은 진한 분향을 뿜어 향군이라 불렸다. 사진은 1주일이나 향기를 내며 타는 향으로 북경 외곽 담자사.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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