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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8] 계급모순과 민족의식 분출 명나라 민란 ①


▲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쿠데타로 즉위한 3대 황제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거대한 황궁 자금성을 건설한다. 사진은 경산공원에서 바라본 겨울 자금성. ⓒ 최종명


1368년 중원에 세운 한족의 마지막 정권 명나라가 건국해 남경에 도읍을 정한 후 태조 주원장의 홍무지치(洪武之治), 태종 주체의 영락성세(永乐盛世), 인종 주고치와 선종 주첨기의 인선지치(仁宣之治)로 이어지는 명나라 초기가 강성하고 사회 안정기라는 평가는 관변 역사 기록의 평가일 뿐이다. 주원장이 빈농 출신으로 16세에 출가한 후 '땡중'으로 떠돌다가 명교의 이념을 동경해 곽자흥(郭子兴) 민란군에 합류한 후 나라를 세웠지만 여전히 전국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1370년 광서 산골 주민 10만 명이 민란을 일으켰으며 복건 천주(泉州)에서 진동(陈同)이 민란을 일으켜 영안(永安), 덕화(德化), 안계(安溪)를 공격했을 뿐 아니라 산동 청주에서는 손고박(孙古朴)이 민란을 일으킨 후 영주(莒州, 현 일조日照)를 공격했을 때 영주 관리가 '나라는 하해와 같은 마음이며 백성은 모두 즐겁게 일할 따름이다. 만약 개과천선하면 전화위복일 것이다. 항복하지 않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씨를 남기지 않을 터이니 내 의무는 모두 죽이는 일뿐이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했다. <명사> '태조본기'의 짤막한 기록이지만 명나라 초기 민란의 양상이 전국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민란을 일으킨 이들이 의연한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81년 광동 광주(广州)에서 해적 출신 조진(曹真)은 광동참의(广东参议)를 살해한 후 농민 만여 명과 천여 척의 함선을 동원해 동관(东莞), 조경(肇庆), 옹원(翁源) 일대를 공격해서 명 조정이 보낸 만 오천 명에 이르는 관군과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지주의 사병까지 동원된 토벌이 계속되자 수로를 이용해 바다로 달아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두 체포됐다.


1386년에는 복건 서북부 장악(将乐)의 스님 출신 팽옥림(彭玉琳)이 강서 동남부 신감(新淦, 현 신간新干)에서 미륵불조사(弥勒佛祖师)를 자칭하며 향을 피우고 백련회를 조직했으며 진왕(晋王)에 등극하고 연호를 천정(天定)이라 하며 명 조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1395년에는 광서의 요족과 장족 수만 명이 민란을 일으켰는데 명 조정은 총관 양문(杨文)을 정남장군(征南将军)으로 임명해 토벌에 나서 8천여 명을 참수했다.


명나라 초기 가장 치열했던 대규모 항쟁은 1378년에 시작된 동족(侗族) 지도자 오면(吴勉)의 농민 민란이었다. 귀주 오개(五开, 현 여평黎平) 사람인 오면은 명 조정이 동족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유린하자 격분해 1378년 6월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주(靖州, 현 정주묘족동족자치현)를 직접 공격해 수비병을 돌파한 후 지휘부를 척살했다. 명 조정이 토벌군을 파병하자 오면은 중과부적으로 다시 고향 오개로 후퇴한 후 여평 일대의 심산유곡을 돌아다니며 동족뿐 아니라 묘족 등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항쟁을 설파하고 때때로 산에서 내려와 관청을 공격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조직을 결집한 오면은 1385년 6월에 대규모의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여평부지(黎平府志)>에 따르면 오면은 '하루 낮에 7~8천 명을 조직하며 하룻밤에 8만 명을 모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초반에 전투에서 승승장구했다. 잔평왕(剗平王)을 자칭하자 귀주 고주(古州, 현 용강榕江) 일대 12곳의 장관사(长官司, 당시 소수민족지역의 통치기관)가 모두 동조해서 8곳의 동족마을 팔동(八洞)을 해방시켰다. 20만 명에 육박하는 무장대오로 발전하자, 호남, 계림, 귀주 일대 동족 거주지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명 조정이 30만 대군을 몰고 진군해 오더니 민란 주둔지는 물론이고 산채까지 뿌리 뽑을 기세로 무자비하게 학살하자 이번에는 동족뿐 아니라 묘족까지 함께 봉기했으며 두 민족이 연대해 보다 강력한 대응으로 맞섰다.


결국 민란은 실패로 돌아가 4천 여명이 참수 당했으며 오면과 구족에 이르는 일가족이 포로로 잡혀 남경으로 압송된 후 처형됐다. 오면의 민란이 끝났지만 여파는 지속돼 인근 지역인 동고(铜鼓, 현 금병锦屏)의 상파동채(上婆侗寨)에 사는 임관(林宽)이 1397년 3월에 봉기해 8개월 동안 관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명사>에는 오반아(吴奤儿)라고 기재돼 있는데 '반'은 얼굴이 크고 뚱뚱하다는 귀주 방언이다. 오면이 주도한 동족과 묘족의 연합 민란은 비록 8년 만에 종식됐지만 그의 영웅적인 업적은 귀주 일대의 동족인민들에 의해 세세손손 이어오며 칭송되고 있다. 오면의 고향이자 최후의 저항지인 귀주성 동남부 여평현 중람동채(中蓝侗寨)에는 600여 년의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3층 높이의 낡은 오면고루(吴勉鼓楼)가 보존돼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12월 21일 탄생일에 면왕절(勉王节) 행사를 기념하며 그의 영웅적인 투쟁을 잊지 않고 있다.


▲ 명나라 초기 동족 지도자 오면의 민란이 발생해 귀주 일대가 전운에 휩쌓였다. 계급모순과 민족의식이 결합된 민족 민란은 명나라 조정을 경악시켰다. 지금도 오면의 탄생일에는 동족마을에서는 그를 기념한다. 사진은 여평 조흥고진 동족마을의 민족 상징이 고루 모습. ⓒ 최종명


1396년에는 한중 분지이자 삼국지 영웅 마초(马超)의 묘와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 섬서 면현(沔县) 무후진(武侯镇)의 관아 서리 고복성(高福星)이 강족(羌族) 스님 전구성(田九成)과 함께 농민으로 구성된 백련교도들을 규합해 민란의 깃발을 들고 고복성은 미륵불, 전구성은 한명황제(汉明皇帝)를 자칭했다.


긴급 보고를 받고 관군이 체포하러 파병해오자 전구성은 민란군을 이끌고 섬서와 감숙의 경계 지역인 영강(宁羌, 현 영강宁强) 일대의 마면산(马面山)으로 이동해 근거지를 확보하고 군사 훈련을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러 해 동안의 기근으로 사방의 이재민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산채로 합류했다. 전구성은 세력이 확대되자 다시 무후진의 양평관(阳平关)을 공격해 관군을 물리치고 곧바로 가릉강(嘉陵江)을 거슬러 북상해 약양(略阳)과 휘주(徽州, 현 휘현徽县)를 점령하니 소문을 듣고 감숙과 섬서 일대의 소외받던 민족과 고초를 겪던 농민이 대거 합세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긴급히 무정후(武定侯) 곽영(郭英)과 장흥후(长兴侯) 경병문(耿炳文)이 낮과 밤을 달려 황급히 군대를 이끌고 와 민란군을 포위했다. 수개월 동안 혈전을 벌렸지만 수적으로 뒤지는 민란군은 영강까지 후퇴하게 됐다. 이때 고복성이 체포되자 전구성은 나머지 인원을 모두 망라해 다시 마면산 근거지로 철수한 후 해자와 보루를 쌓고 항전을 준비했다.


관군이 몰려오자 전구성은 솔선수범 전투에 나서 혈전을 독려했는데 서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시체가 산을 뒤덮었다. 한파가 밀려오자 민란군은 옷과 식량이 소진되고 화살도 남지 않아 결국 전구성을 비롯해 모두 4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명 조정은 전구성과 공모한 자는 모두 주살하고 단순 추종자는 돌려보내라는 조서를 내린 후 상비군을 주둔시키게 됐는데 이후 강족 등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던 영강 지역은 중앙 정부가 직접 관장하는 한중 서부의 군사요지로 변모했다.


'내가 불모다' 외친 '신비한' 여걸


▲ 명나라가 북경으로 천도 후 북방민족의 남하를 대비해 대규모로 만리장성 축성과 보수를 단행했다. 사진은 줄지어 뻗은 북경 외곽 황화성 장성의 일부 구간. ⓒ 최종명


유교경전 <서경>의 '우공(禹贡)' 편에 등장하는 중국 고대 영토인 구주의 흔적이 있는 산동 청주에 있는 태화산(泰和山) 입구에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멋진 모습의 천마 7마리 조각상 옆에 준마의 말고삐를 잡고 갑옷 차림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정난지변(靖難之變)을 일으켜 조카를 사살하고 황제를 찬탈한 영락제가 통치하던 1420년에 백련교 민란을 일으켜 산동 일대를 주름잡던 당새아(唐赛儿)다. 결국 명 조정의 체포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후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탓에 드라마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영락제 주체는 반란이 성공하자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해 지금의 거대한 고궁인 자금성을 지어 위엄과 명분을 세웠으며 북방 민족의 남하를 염려해 대대적인 만리장성 보수와 축성을 단행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를 잇달아 벌이기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데 강남 일대의 물자를 수도로 보급하기 위한 운하를 파기 위해 산동 지방의 인력을 10만 명 이상 동원했다. 


황제 쿠데타 때도 양 세력 사이의 주요 전쟁터이던 산동의 백성은 고충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또다시 노역이 가중되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의 고역이었다. 게다가 수해와 가뭄 재해까지 발생하고 전염병까지 유행해 산동과 하남은 물론 산서와 섬서 등 중원 일대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남녀노소 막론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돌아다녔으며 처자식을 파는 사례까지 빈번했다.


명나라가 건국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말세 상황이 속출하던 시기에 태어난 당새아는 춘추시대 정치인이자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孙武)의 고향 산동 빈주(滨州) 시 포대(蒲台, 현 박흥博兴)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무예와 병법을 익혀 15세 즈음 출중한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당새아는 아버지가 노역에 끌려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남편 임삼(林三)과 함께 관청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졸지에 남편이 살해됐으며 아버지도 분을 참지 못하다 목숨을 잃은 데다가 어머니마저 중병으로 사망하자 민란을 일으킬 결심을 했다.


1420년 1월 당새아는 스스로 '불모(佛母)'라 부르며 민란에 동조하는 백련교도 및 농민들과 청주 남부 숭산(崇山) 석회암 준령의 사석붕채(卸石棚寨)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기회를 틈타 현청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한 후 다시 산채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관군이 후미를 쫓아오면 산 계곡에 매복했다가 포위해 공격하거나 야밤에 기습해 몰살시켰다.


민란군이 초전에 관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청주 인근의 농민들이 분연히 함께 떨쳐 일어났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열혈 청년들이 합세하니 산채는 마치 농민해방구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주는 물론 내주(莱州), 거주(莒州, 현 거현莒县), 교주(胶州), 안구(安丘), 수광(寿光), 제성(诸城), 즉묵(即墨) 등을 석권하면서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와 지주를 징벌하고 관부를 점령하고 창고를 불사르니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수만 명의 군사력으로 발전했다.


민란군이 득세하자 산동 지방의 관리들이 공포에 떨어 황제에게 긴급하게 보고하니 조정은 관리를 산채로 파견해 귀순을 타진했으나 당새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명 조정은 일찍이 남쪽의 교지(交趾, 현 베트남), 동쪽의 왜구, 북쪽의 몽골을 격파한 공로로 작위를 받은 안원후(安远侯) 유승(柳升)을 총사령관으로 진용을 갖춘 5천 명의 기마병을 동원해 산채를 포위했다. 유승이 교만에 빠져 민란군이 '오합지졸'이자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고 얕잡아 본다는 것을 간파한 당새아는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산채가 극심한 물 부족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져 동쪽 문으로 빠져나가 물을 수급해 올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유승은 병력을 동쪽 요충지에 집결시키자 민란군은 야음을 틈타 허술한 병영을 직접 급습하니 관군이 갈팡질팡 황급히 도주하는 사이 선봉부대가 화살을 쏴 병영에 남아있던 사령관들을 사살했다. 날이 밝자 계략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유승의 토벌군 본대가 다시 공격해오자 민란군은 후퇴하면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토벌군에 원군이 합세하자 민란군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약 1달 동안 명 영락제를 격노하게 만든 당새아의 민란은 더 이상의 진전 없이 수그러들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당새아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모자를 생포하지 못한 것을 안 영락제는 대노했다. 총사령관 유승을 하옥시키고 당새아가 점령했던 지역의 고위급 관리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청나라 초기 사관 곡응태(谷应泰)가 편찬한 <명사기사본말(明史纪事本末)>에 따르면 당새아 체포를 위해 2달여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는 구우이호(九牛二虎)의 노력으로 산동 일대의 비구니와 여도사를 북경으로 잡아들여 조사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해 찾았지만 끝내 종적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주에는 지금까지 당새아에 대한 '신비한' 전설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백성들은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사석봉채를 당새아채(唐赛儿寨)라 부르고 있으며 민란군이 사용하던 돌절구나 맷돌 등 생활도구와 산채의 담장을 보존하고 있다.


당새아는 남편이 죽자 묘를 짓고 제사를 지낸 후 산으로 들어갔는데 우연히 돌 틈 사이에서 도술 책과 보검이 담긴 상자를 발견하고 검술을 익혔는데 신비한 능력을 지닌 보검은 오직 당새아만이 다룰 수 있었다. 당새아를 체포한 후 사형을 집행하는데 칼날이 들어가지 않아 몸과 다리를 나무와 쇠사슬로 묶어 하옥했지만 스스로 탈옥해 홀연히 사라졌고 최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군현의 장수와 관리 모두 도적을 놓친 죄로 사형을 당했다.


정사인 <명사>의 기초가 된 역사 자료집 <명사기사본말>에 기록된 내용으로, 당새아는 마치 무협소설이나 신마소설(神魔小說)에나 나올 법한 '영웅'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면서도 신비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당새아전기>가 <서유기>나 <봉신연의>처럼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민란의 영웅은 역사에서 매우 드물지만 나라를 세우거나 민심을 배반하고 기회주의자로 살았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도 없이 참수 당했던 것이 민란의 역사이다. 조정의 성화와 정예군과의 전투를 하고서도 유유히 사라진 당새아는 '불모''를 자처했듯 부처님의 보우가 있었나 보다.


▲ 백련교 영향을 받은 당새아 민란은 산동 청주를 기반으로 발생해 확산됐다. 체포 후 탈주해 사라지자 격노한 황제는 고급관리들을 참수하는 등 신비한 여걸로 민란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사진은 청주 문화거리 패방.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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