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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4)

 

청와대는 구중궁궐인가? 조선이 세운 경복궁 후원에 황제처럼 자리 잡고 있다. ‘부도덕무능력에 더해 국정농단’, ‘헌법파괴의 주범 박근혜 대통령은 수백만의 촛불과 함성에도 불구하고 귀 막고, 눈 가리고, 입 다물고있는 삼불후(三不猴) 원숭이마냥, 꼭두각시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이 세운 집에서 예가 아니면 삼불하라는 공자님 말씀한 가닥에 기대는 것인지 도무지 내려올 생각이 없다.

 

기원전 한나라 무제는 동중서(董仲舒)대일통논리를 이용해 제자백가(诸子百家)분서갱유하고 오로지 충 하라, 효 하라는 한심한 유교만으로 통치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역대 왕조가 공자를 황제 대우로 격상해 존중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백성은 그저 통치의 대상일 뿐이라는 황제의 논리일 뿐이다. 구중궁궐에 숨어 백성을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봉건의 허구를 민란의 역사는 꿰뚫고 있다.

 

명나라가 세운 자금성(紫禁城)을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라고 부른다. 이 권위적인 철옹성 고궁()도 민란의 현장에서는 금단의 땅이 아니었다. 명나라 말기 민란 영웅 이자성(李自成)은 고궁의 주인을 차지했으며 청나라 중기에는 황제 체포를 위해 고궁 침입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명 희종 말년 서북지역은 기근에 시달려 가뭄과 병충해가 난무했고 전답은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굶어 죽는 백성이 곳곳에 널린 아표편야(饿殍遍野)의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풍부한 남방의 대규모 전답은 당시 활발했던 해외와의 교역 때문에 북방으로 공급되지 못해 양식이 더욱 궁핍한 처지였다. 곡물 가격이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고 조정의 재정 수입도 급격하게 줄어 백성에 대한 구휼은 말뿐이었다.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어진 농민은 막판에 몰려 이판사판, 봉기밖에 살아갈 돌파구가 없었다.

 

 

온 사방에서 민란 봉기가 발발했고 연합군을 형성했다. <명사>에 따르면 토벌군이 압박해오자 163513개 민란집단의 72개 군영 지도자의 공동대책 회의에서 이자성은 분병정향(分兵定向)이라는 기발한 작전계획을 제시해 역사에 등장한다. 이자성의 작전은 군사를 다섯으로 나누어 넷은 동 서 남 북으로 출격하고 부대 하나는 각 방향의 상황에 따라 지원 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연합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창의적인 계획이었다. ‘장부 한 명이 남아도 분발할진대 하물며 10만 군사나 있다.’고 호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민란 연합군 내에서 위상이 격상된 이후 개국 황제 주원장의 고향이자 명나라의 국도(国都)로 일컬어지는 봉양(凤阳) 점령, 역사상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자오고도(子午古道) 돌파작전 실패 후 구사일생, 와신상담을 거치기도 했다. 1640년 다시 민란의 깃발을 들고 사회 비판의식이 컸던 거인(举人)들의 동참, 혁명적인 정책을 받아들여 전 농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이암(李岩) 제시한 균전면부(均田免)의 입장을 받아들여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세금을 면제한다는 혁명적인 정책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탈취해 농민에게 되돌려 주는 구호였다. 우금성(牛金星) 제창한 형벌을 줄이고 백성을 구휼하고 인심을 얻으라는 정책도 받아들여 유랑 농민들에게 소와 종자를 배급해 축산과 농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민생 정책을 펼쳤다.

 

1644 1월 장안에서 대순()을 건국하고 연호를 영창(永昌)로 선포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곧 군사를 총동원해 북경을 향해 동진, 황하를 건너 파죽지세로 수도를 향했다. 서북부 관문이자 만리장성인 거용관(居庸) 돌파하니 수도 인근의 태수와 대학사가 연달아 투항했다. 9대문 중 하나인 서북쪽 서직문(西直)에서 대포 공격을 감행했으며 태감이 열어준 외성 서쪽 광녕문(广宁)을 통해 내성 복흥문(复兴门)으로 들어섰다. 1644 4 25일 이자성은 드디어 자금성 내전으로 들어섰다.

 

고궁 건설로 나온 흙으로 쌓은 경산에서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276년 명나라의 영화를 뒤안길로 바라보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리장성, 궁궐 대문, 외성, 내성, 해자를 아무리 겹겹이 쌓는다고 통치가 유지되지 않는다. 정당성과 명분이 없는 황제의 나라는 단 하루도 고궁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19세기 초 도탄에 빠진 청나라 백성도 고궁을 주목했다. 1812년부터 하남과 수도 인근, 산동 지방에 천재지변이 일어 흉년이 되자 농사가 파탄이 났는데 관리들은 백성을 돌보기는커녕 강압적으로 세금 거두기에 정신이 팔렸다. 이 시기에 이르러 팔괘와 방위의 개념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유, , 선 통합의 삼교합일사상을 추구하며 현실 세상을 비판하는 천리교가 일반 백성의 탄탄한 지지를 받게 됐다. 민란의 시대에는 유교의 반대편에서 민간신앙과 종교의 힘을 빌려 인간 세상을 꿈꾸는 격변의 시대를 잉태한다. 천리교 역시 당대의 민란 이념으로 등장했다. 교도들은 기공이나 무술을 수련했으며 재물을 모아 빈곤한 백성에게 나눈다는 사상으로 무장하고 설파하자 점차 민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꽃이 피려면, 된서리가 오길 기다려야 한다. (若要红花开须待严霜来)

 

천리교 지도자 이문성(李文成)하남 지방의 민요로 유행하던 노래를 참언으로 활용해 엄상십팔자(严霜十八子)’라는 말을 퍼뜨렸다. 붉은 꽃이 피는 새 세상이 도래하려면 겨우내 된서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이자 십팔자의 합자인 이씨 성이 구원자로 등장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늘의 뜻이 도래했으며 이씨 성은 명나라 말기 민란 주동자이자 전설인 이자성(李自成)의 환생이 곧 이문성이라고 설파했다. 정사에서 역적으로 분류되는 이자성은 민란의 역사에는 민중의 신이자 구세주와 다름 없다.

 

천리교의 또 다른 지도자 임청()빈농으로 태어나 떠돌이 생활과 온갖 고생을 하다가 천리교에 가입한 후 교주가 됐다. 미래를 예언하고 새로운 세상을 설파하면서 교도에게 금품이나 토지를 받아 재산을 늘렸다. 이 재산을 아낌없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1813 9 14, 세상을 모두 놀라게 한 엄청난 계획을 수립한다. 청나라의 심장 침공과 황제 생포 작전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200명의 돌격대를 차출해 자금성 습격을 감행했다. 황궁의 동서 양쪽 동화문과 서화문을 통해 진입해 사전에 내통한 환관들의 길 안내를 받아 황궁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돌격대는 개별적으로 당일 새벽 황성으로 진입한 후 집결장소에 모였다. 비수를 품고 성루 아래에서 기다렸다.

 

이때 동화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돌격대 일부가 사소한 일로 석탄 배달부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옷 속에 숨겨놓은 비수를 발견한 석탄 배달부가 급히 비명을 지르자 관군이 급히 궁문을 닫아걸었는데 곧장 문 안으로 들어간 인원은 6명에 불과했다. 동화문으로 들어간 돌격대장 진상(陈爽)은 태감 유득재(刘得财)의 인솔을 따라 관군을 제압하고 협화문(协和门)으로 진입한 후 황족이 거처인 경운문(运门) 들어섰다. 이때 급보를 받고 나온 둘째 황태자이자 훗날 도광제에 즉위하는 만녕(曼宁)의 소총 공격을 받아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화문으로 들어간 인원 50여명은 성문을 닫아걸어 외부 관군의 진입을 차단한 후 성루에 올라 천리교 민란의 상징인 깃발을 높이 달았다. 주력부대는 황제의 침궁인 양심전(养心殿)을 목표로 진격했다. 태감 고광복(高广福)의 길 안내를 받으며 대명천순(大明天)순천보민(顺天保)이라 적힌 흰색 깃발을 앞세웠다. 관문을 돌파해 궁궐의 한복판 좌측의 융종문(隆宗)까지 빠른 속도로 달려갔지만,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일부는 환관 집무실인 상의감(尚衣监) 일대에서 근위대와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주력부대는 융종문 담을 넘으려 했으나 가로막혔다. 활을 쏘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무참히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양심전으로 침입에 성공한 2명도 급히 달려온 만녕의 소총에 맞아 살해됐다. 궁궐 곳곳에 침입한 돌격대는 오후까지 숨 막히는 전투 끝에 결국 모두 살해되거나 체포됐다. 30여 명이 체포당했으며 고민 끝에 근거지에 은닉했던 임청도 9 17일 북경으로 압송됐다. 10일 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중국역사는 임청의 고궁 침공작전을 계유지변(癸酉之)이라 기록하고 있다.한당송명宋明 시대에도 없던 변란이라고 황제는 자책했다. 융종문 편액에 박혀있는 화살촉은 그대로 두고 후대의 교훈으로 삼으라 했다. 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돌격대가 쏜 화살이 깊이 박혀있다.

 

지난 11 26 5차 민중총궐기의 행진대열이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로 향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수백만의 함성은 활이었고 촛불은 화살이 되어 청와대 지붕 위로 날아갔다. 처마 밑에 꽂힌 민중의 화살은 횃불로 되살아나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을 불태우고 있다. 허구적 통치이데올로기도 한 줌 재로 변할 날이 머지않았다



  • 민란에 관한 대 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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