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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초, 중국 쟝수(江苏)성 난징(南京)을 찾았다. 난징에는 중국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孙文)의 묘지인 쭝샨링(中山陵)이 있다. 1911년 반봉건혁명의 성격을 갖는 신해혁명을 주도해,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국 정부인 중화민국을 탄생시킨 주인공인 쑨원은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했다. 1925년 병사한 그는 마치 황릉만큼 큰 쭝샨링에 누워있다.

쭝샨링 입구, 암석에 그의 얼굴과 이름, 살다간 생애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서거 80주년을 기념해 2005년 3월, 대형 음악무용극(音舞剧)인 '박애의 꽃'(博爱之花)의 장면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박애의 꽃'은 쑨원의 위대한 삶을 조명한 것으로 노래, 무용, 시낭송 등 다양한 형식으로 80분간 공연했다 한다. 특히, 쑨원과 그의 동반자이면서 비서이고 혁명가였던 쏭칭링(宋庆龄)이 일본에서 결혼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한다. 쑨원의 사망 후 그의 혁명정신과 삼민주의를 계승한 그녀는 쟝제스(将介石)의 중화민국 대신에 마오쩌똥(毛泽东)의 중국공산당을 지지한다. 쟝제스의 부인인 쏭메이링(宋美龄)의 언니이기도 한 그녀는 공산당원이 되어 베이징 호우하이(后海) 부근에서 여생을 마친다.

'박애의 꽃'에 등장하는 매화(梅花), 장미(玫瑰), 연꽃(荷花)은 각각 공화(共和), 박애(博爱), 대동(大同)을 뜻한다. 꽃으로 인간의 정신을 형상화한다는 발상이야 아주 자연스럽긴 한데 장미꽃이 박애와 연상되는지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쭝샨링의 음악무대(音乐台) 뒤에 솟아있는 회음벽(回音壁)은 높이가 11.3미터, 길이가 16.7미터에 이른다. 벽 중심에 가득한 '박애의 꽃'(博爱之花)이 인상적이다.

쭝산링 입장료는 40위엔. 산 중턱에 자리잡은 쑨원을 만나려면 우선, 쑨원의 책 중에서 따온 글자인 '뽀아이'(博爱)에 쓰여진 '파이팡'(牌坊) 문을 들어서야 한다. 하늘로 솟아있는 3개의 문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하는데 가운데 문으로 들어서면 저멀리 어슴프레 쑨원의 묘역이 보인다. 더운 날씨라 여자들은 대부분 우산으로 햇살을 가리고 들어선다.

'뽀아이파이팡'(博爱牌坊)에서 '링먼'(陵门)까지 480미터에 이르는 기나긴 길을 걸어야 한다. 양 옆은 나무가 잘 정돈돼 서있으니 그늘진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구분된다. 사람들이 모두 양쪽 구석으로 걷는다.

1866년생인 쑨원은 광동(广东)성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보낸 그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으며 성장과정에서 청나라의 부패를 보면서 반청사상을 지니게 됐으며 외국열강과의 전쟁을 보면서 반외세 민족주의, 애국사상을 체득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나서게 된다. 1894년 자신의 조직기반이 된 '흥중회'(兴中会)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든다.

이후 그의 조직 강령들은 대체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주공화국 지향' '토지 소유의 균등'으로 요약된다. 반봉건 민주혁명을 지향하면서도 민족주의와 민생주의가 어우러진 그의 사상은 많은 개혁적 혁명세력에게 호응을 얻는다.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한 그는 삼민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직을 구성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무창봉기를 계기로 중국으로 들어왔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 청나라 마지막황제를 퇴위시킨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을 이뤘으나 보수세력의 압박과 내부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凯)에게 정권을 물려 주고 만다.

'링먼'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베이팅'(碑亭)이 있다. '베이팅'이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정자다.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반혁명 음모를 타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14년 6월 국민당의 전신인 중화혁명당(中华革命党)을 조직했다. 이후 1915년 쏭칭링과 결혼했으며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이 성공하자 소련과 접촉했다. 1919년 5.4운동 이후 당 이름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고 광동성 광조우(广州)를 중심으로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전국 도처의 봉건적 성향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소련의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과 연합하기도 한다. 1924년 광조우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러시아와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정하고 공산당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한다.

쑨원은 점차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해 외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군벌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군벌들과 협력을 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1924년 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닦기 시작한다.

이 시기 베이징은 군벌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당시 북경정권은 직계(直系)군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장학량의 아버지인 장작림의 봉계(奉系)군벌은 1924년 9월 2차 직봉(直奉)전쟁을 통해 직계군벌을 전복시킨 후 쑨원에게 국정논의를 위해 상경할 것을 요청했다. 쑨원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베이팅'(碑亭)에는 1929년에 만들어졌을 비석이 내장돼 있다. 중화민국 정부는 건국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니 말이다.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이어간다고 하는 대만에서는 대만력을 쓰는데, 이 때문에 간혹 웃지못할 일들이 생긴다.

언젠가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대만 인기가수의 나이를 잘못 계산한 적이 있다. 2004년 당시, 1970년 출생이면 나이가 35살일 터. 작가는 인터넷으로 이 정보를 알고 이상했지만, 여러 사이트가 다 똑같아 확신을 하고서는 리포터에게 대본을 넘겼다. 리포터 역시 자랑스럽게 이 가수 정말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인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는 11살의 차이가 나니 그럴만도 하다. 이런 촌극이 없게 주의해야 한다.

'베이팅'을 지나면 드디어 '지탕'(祭堂)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 쑨원의 묘가 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하나씩 오르려면 꽤 숨이 찰 듯하다. 긴 길을 쑨원의 인생을 생각하며 왔는데 또다시 길고 긴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계단이 가파르지 않으니 천천히 오르면 생각보다 달리 숨이 찰 정도는 아니다. 사람들 모두 오로지 쑨원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오르고 있다. 하나같이 한 방향으로 오르니 마치 순교자 숭배의 행렬같다는 느낌이 든다.

쑨원은 중국 대륙사람들도 좋아하고 중국대만 사람들도 좋아한다. 더구나, 1912년에 성립한 중화민국에는 중국공산당원들도 참여했기도 하거니와, 1925년 쑨원 사망 이후 국민당을 장악한 쟝제스와 중국공산당과의 전쟁과 합작을 거치면서 싸우기도 협력하기도 했다.

이후 송칭링의 공산당 입당으로 쑨원 삼민주의 사상은 중국공산당, 즉 대륙 정부에 의해 그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대만으로 건너간 중화민국 역시 당연히 자신들이 정당한 계승자라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신해혁명의 선구자이며 근대 민주혁명의 아버지, 쑨원이야말로 13억 중국인들 모두로부터 진정한 대중적 혁명가로서 인정 받는 셈이 된 것이다.

그가 안장된 '지탕'을 앞두고 경건하게 모자 벗고 사진을 한장 찍었다. 국가의 이념이나 정책은 하나지만 사람들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다 다르니 이게 사람사는 동네이리라. 베이징 치엔먼 부근 시장에서 입고 간 옷이 땀에 홀딱 젖어 급히 30위엔 주고 샀던 빨간 옷이 튄다. 가운데 경극 가면이 나름대로 이뻐서 산 옷이다. 나중에 다른 옷과 같이 빨래하는데 시뻘건 물감이 한 트럭은 나온 거 같다. 정말 싼 게 비지떡.

'지탕'에서 방향을 반대로 아래를 내려보니 그 모습도 가관이다.

들어서면 중앙에 쑨원의 동상이 있다. 옆으로 끼고 뒤쪽으로 묘혈 입구가 있다.

원형의 대리석으로 만든 묘혈이 있다. 그 묘혈 중앙, 쑨원의 와상이다. 쑨원은 사망하기 하루 전날 3개의 '이쭈'(遗嘱), 즉 유서에 서명했다 한다. '꾸어스이쭈'(国事遗嘱)에는 자신의 혁명이념이 성공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며 '지아스이쭈'(家事遗嘱)에는 자신의 유품을 모두 송칭링에게 물려주며 자신의 혁명유지를 계승해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소련에 보내는 유서'에는 양국이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염원을 전달했다 하니 당시 국민당 내 민족주의자들이 일본 등 제국주의에 긴장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천정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은 알고보니 촬영금지 지역이었다. 한참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사진 찍지 말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더니 먼 하늘 아래 산들이 누운 듯 하고 사람들은 넓은 전망을 마음껏 즐긴다.

민족주의자 쑨원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도 참 많은 것으로 안다. 나도 그 중 하나이긴 하다. 정치이념이 무엇인가 보다는 삶의 열정과 민중에 대한 사랑이 절실했던 역사적 인물을 좋아하니 쑨원도 나의 진지한 우상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의 삶을 느끼며 쭝샨링을 떠났다. 아쉬워 어렵사리 중국사람에게 사진 한장을 부탁했다.

쭝샨링의 '지탕' 입구에 노란색으로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 세글자가 또렷하다. 그의 삼민주의가 분명 오늘날 중국을 있게 한 것이고 그로 인해 서구열강과의 치열한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의식적 투쟁으로 민중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난징의 뜨거운 더위만큼 그의 삶은 뜨거웠다. 사랑도 그랬고 구국도 그랬으니 진정 영웅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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