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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12회 헤이룽장 조선족 동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헤이룽장 성은 무려 45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강인 헤이룽장(黑龍江)의 이름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이라 부르는 강으로 1900년 서양8개국 연합군이 중국을 침범할 때 이 강을 너머 러시아군이 들어오게 된다.

 

성의 수도는 하얼빈이며 중국 동북3성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러시아와 길게 국경을 마주 하고 있다. 반 이상이 삼림지대이고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이다.

 

원래는 만주족 등 북방민족의 거점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신중국 이후 한족 이주정책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중국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성이 됐다.

 

발해의 옛 상경유적지가 있는 동경성과 만주벌판을 달려 최북단 조선족 자치 향을 거쳐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을 소개한다.

 

1)   닝안 寧 옛 발해의 성터를 지나 만주벌판을 달리다

 

옌지(延吉)에서 만난 화촨(樺川) 주태호(朱泰虎) 부현장과 함께 헤이룽장 성으로 을 향해 떠났다. 주 현장은 조선족으로서 화촨 현 인민정부의 공식 선거로 당선됐다고 한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이다. 옌지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초록색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부드러운 심성의 주 현장은 1994년부터 한국과 무역 등 다양한 교류활동을 해 한국의 상황을 매우 소상히 이해하고 있다.

 

건강이 악화돼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조선족 동포를 비롯 우리 민족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각성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노하우를 지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려는 그의 자세가 참 마음에 들었다. 어느 정도 내정된 것이긴 해도 공식선거를 거쳐 어렵게 당선됐다고 한다.

 

산골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선족 거주지역인 왕칭() 현을 지나 서북 방향으로 1시간을 달리니 닝안 현 둥징청(東京城) 진에 도착했다.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발해 유적지를 소개해 준다며 발해상경(渤海上京) 유적지로 데리고 갔다.

 

헤이룽장 성 닝안 일대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발해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옛 발해상경 터에 있는 박물관을 찾았다. 상경 용천부(龍泉府)는 발해의 다섯 중요 도시 중 하나로, 이곳 보하이 진은 동경성이라 부르던 도읍지이다.

 

동경 용원부(龍原府)는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 있으며 팔연성(八連城)이라고도 하며, 중경 현덕부(顯德府)는 옌볜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 남경 남해부(南海府)는 지금의 북한 청진 시, 서경 압록부(鴨綠府)는 지금의 지린 성 바이산(白山)에 있었다고 한다.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민족과 말갈족 연합 왕국인 발해는 당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해 698년 건국한 나라로 초기에는 진국(震國)이라 했다. 이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로 개명했는데 이후 229년 동안 독자적인 민족 문화와 정치 체제, 5 15부에 이르는 영토를 경영하며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기도 했다.

 

발해 상경용천부 박물관은 아주 작은 규모이다. 박물관 관리인은 사진을 찍는 것을 몹시 꺼렸다. 박물관이라고는 하나 건물 한 채에 썰렁한 분위기인데다가 부근 성터에서 채집했다고 하는 문물 몇 점만이 전시돼 있을 뿐이다.

 

부근에 있는 발해 상경 유적지도 역시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나라 수도이던 장안(長安) 성의 건축양식을 따라 5분의 1의 크기로 건축됐다는 상경 동경성은 동서 4.68킬로미터, 남북 3.47킬로미터에 이른다.

 

당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밭 터 곳곳에 있는 정방형의 주춧돌만이 여전히 당시 역사를 무겁게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최근에 가지런히 만든 흔적이 역력한 성벽과 성문을 따라 걸으며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배웠던 발해의 땅을 두 발로 디딘다는 감회만큼은 새록새록 솟아난다. 역시 이곳 입장권과 입구 팻말에는중국 당나라 시대의 지방 민족정권이라고 써 있으며 고구려를 의식해서인지말갈족이 주체가 되어 건립했다고 써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있는 <대조영>이 이곳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발해 성터(왼쪽), 조선족 식당 ‘엄마손 장국집’(오른쪽 위), 만주벌판(오른쪽 아래)

 

다시 차를 타고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 국도는 랴오닝 다롄(大連) 부근의 뤼순(旅順)에서부터 시작해 동북 최북단 도시 허강(鶴崗)을 잇는 1964킬로미터의 도로이다.

 

도로 옆 식당에 잠시 내려 점심을 먹었다. ‘엄마손 장국집이라는 친근한 우리말 식당이다. 중국 CCTV가 방영한 26부작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媽媽的醬湯館)>이 생각난다. 조선족 작가인 김인순 원작 소설로 엄마가 남긴 장국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가족애가 있는 드라마이다. 나름대로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국배우들도 출연한 드라마였는데 기대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다시 국도를 따라 벌판을 달린다. 그야말로 만주벌판이라 할 수 있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만큼 왼쪽 오른쪽 모두 한 없이 넓게 펼쳐진 들판이다. 게다가 곡창지대에 걸맞게 논두렁이 한없이 길게 형성돼 있다. 부러울 따름이다. 오후 내내 3시간을 달리는데도 그 모습이 똑같은 벌판이 하염없이 펼쳐지니 생산량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중국 북단의 가장 큰 도시인 자무스(佳木斯)를 지나니 서서히 해가 진다. 오후 내내 맑던 하늘에서도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자무스 시내를 통과하는데 시내 분위기가 러시아 영향을 받은 도시라 그런지 이국적이다. 여기서 불과 두어 시간만 가면 러시아 영토이니 그럴 법도 하다.

 

발해의 옛 땅을 살펴보고 우리 조상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달리던 만주벌판을 지나니 감회가 새롭다. 어느덧 중국의 동북 끝이다.

 

2)   화촨 川 최북단 조선족 동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화촨은 자무스 시에 속해 있는 쑹화강(松花江) 하류의 작은 현이다. 주 현장의 소개에 의하면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재정자립도가 굉장히 높은 곳이라 한다. 아침을 먹고 쑹화강 강변의 멋진 모습과 맑은 공기를 마셨더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화촨 현 내 리펑() 향 인민정부 소개로 돼지 키우는 곳을 찾았다. 원래는 소를 목축하는 곳을 찾았는데 현 내에는 아마도 없었나 보다. 땅이 질퍽해 신발에 온통 흙을 묻히고 향 서기와 함께 지독한 냄새 나는 우리를 방문했다.

 

인민정부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무엇보다 신나는 것은 쫄깃하고 맛 좋고 영양가 풍부한 개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 주방에 가보니 시끄럽게 요리하는 모습이 활기차고 뜨겁다. 푸짐한 음식 때문에 정부 관료들이 주는 술을 흔쾌히 받아 마셨다.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브스키와 불과 1시간 거리에 있는 푸진(富錦) 시로 갔다. 화촨에서 1시간 30분 정도 가는 동안 취기가 올라 내내 잤던가 보다. 푸진 시 역시 러시아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담한 도시이며 파란 하늘과 흰 구름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러시아 부근 도시 푸진시(위쪽), 리펑 향 농가(아래쪽 왼), 조선족 자치 향 요리(아래쪽 오른)

 

다시 화촨으로 돌아오면서 주 현장이 조선족 자치 향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초대했다고 한다. 향은 현 속에 있는 최소 행정단위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조선족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 옛날 만주벌판을 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져 흔쾌히 따라갔다.

 

싱훠(星火) 조선민족향(朝鮮民族) 1,500여 가구에 5천여 명의 조선족 동포가 살아가는 자치마을이다. 1950년대 초에 개발된 중국 최초의 집단농장(集體農莊)이다. 집단농장이 꾸려지자 점차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조선족 동포들이 모여들어 지금의 규모를 형성하게 됐다고 한다. 최북단 조선족 자치마을이기도 하고 헤이룽장 성의 조선족 최대 거주지이기도 하다.

 

마을에 가니 한 줄로 정연하게 세워진 집들이 집단농장이 있던 마을답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아주머니 몇 분이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인사를 하고 모두 정겹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 요리는닭곰이다. 우리가 먹는 닭 백숙과 거의 비슷하다. 향 서기를 비롯 향장과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향 서기는 50대 초반인데 우리 말이 약간 서투르긴 해도 열심히 우리말과 중국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고향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조선족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때로는 한족 중심의 정책에 대해 다소 비판을 하기도 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현재 한국으로 일하러 가서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도 한다. 하루 빨리 온 가족이 모여 행복을 꾸려야겠다고도 다짐한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밤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정겨운 동포애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취하지도 않다. 북위 47도에까지 와서 우리말로 대화하는 동포들을 만났으니 마음이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지.

 

헤어지기 너무 섭섭했던지 주 현장의 제안으로 주변 도시 중 가장 번화하다는 허강까지 드라이브도 했다. 자무스 시로 이동해 노래방에서 음주가무도 즐겼다. 우리 노래도 부르고 중국 노래도 부르고 서로 한 곡씩 불렀다.

 

화촨으로 시집 와 향 정부의 문화부문을 담당하는 아주머니는섬마을선생님, 주 현장은나 혼자 만이’, 부 향장은위에량다이뱌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을 불렀다. 화면에 갑자기 누군가가 영화 <신화>의 주제가를 신청했는데 마침 헤어질 시간이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청룽(成龍)과 김희선이 함께 부른 노래션화(神話)’를 계속 듣고 있다. 밤이 늦어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지만, 노래 말처럼 중국 최북단 조선족 자치마을 사람들에게 '사랑한단 말도 못'하고 왔나 보다.

 

3)   하얼빈 哈爾濱 러시아 분위기 물씬 풍기는 동방의 파리

 

하얼빈의 명동거리 중양다제(中央大街)는 차량이 없는 보행거리이다. 하얼빈은 청나라 시대인 1898년에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구열강이 청나라를 할거하던 시기에 대규모의 철로부설과 함께 조성된 도시이다. 이 거리는 주로 중국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라 중궈다제(中國大街)라고도 불렸다.

 

1925년 이후 외국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 모피, 영국 방직, 프랑스 향수, 독일 의약품, 일본 면직, 미국 등유, 스위스 시계, 인도네시아 자바의 사탕, 인도의 삼베 등 상품박람회를 방불하게 하는 거리였다고 한다.

 

러시아 기술자가 새롭게 거리를 설계하고 조성하면서 중양다제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풍의 건축물들이 길 양 옆을 수놓고 있다. 한 건물에는 ‘1925부터 장사를 해왔다고 써 있기도 하다.

 

한 러시아 인이 유랑 끝에 하얼빈에 당도해 1906년에 문을 연 마뗴얼(馬迭爾)이라는 이름의 호텔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바이녠라오뎬(百年老店)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이 호텔 이름은 모던(Modern)을 뜻하는 러시아 어를 음역한 중국어라고 한다.

 

쑹화강 강변까지 조성된 약 1.5㎞의 밤 거리를 거닐어본다. ‘동방의 작은 파리’(東方小巴黎)라 불리는 거리는 러시아 건물 양식과 클래식한 동상들로 가득하다.

 

러시아 상품 가게(왼쪽), 중양다제(오른쪽 위), 성 소피아 성당(오른쪽 아래)


이 거리에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성당이 하나 있다. 1907년에 건립된 극동에서 가장 큰 그리스정교 성당인 둥정자오탕(東正)이다. 둥정은 시라(希臘) 희랍정교를 줄여 말하는 것이며 시라는 곧 그리스입니다. 자오탕은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스정교를 막론하고 다소 포괄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소피아 성당 광장은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고 있다. 하얼빈 옛 거리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도 조명 속에 푹 파묻혀 있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나 학생들, 어른들 모두 여유를 즐기고 있다.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서 주위의 강렬한 조명을 받아 성당의 자태가 더욱 빛나 보인다.

 

터어키에 있는 성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이름의 이 건물은 철로공사에 투입된 제정러시아 동시베리아 제4보병대의 종군 성당이었다고 한다. 군인들을 위한 종교성당으로는 그 규모가 꽤 큰데 서구열강의 패권 쟁탈의 의지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100년도 더 된 건물인데다가 종교의 성지이니 경건해진다. 종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보장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소피아 성당. 이 성당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건물 본체가 훼손됐으며 성당 내 벽화와 십자가가 유실됐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국가 문물로 보호하고 있다. 성당 입구에문화대혁명 시기 성당의 문화적 가치를 훼손한 점 반성한다는 팻말 하나라도 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4)   하얼빈 哈爾濱 이등박문 쏜 안중근의사 닮지 않은 동상

 

베이징 행 기차표를 예매하고 나니 시간이 남았다. 안중근의사기념관(安重根義士紀念館)을 보려고 기차 시간을 맞춘 것이다. 중국정부가 조선족을 위해 건물을 내주고 기념관을 만들어 활용하도록 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안중근의사 동상이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기념관을 관리하는 아주머니는 안중근 의사 실제 모습과 닮지 않은 동상이라며 아쉬운 소리를 한다. 그래서인지 옆에 걸린 사진과 얼핏 비교해봐도 좀 달라 보인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꼭 똑같이 닮아야 할 까닭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느끼듯 다르다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기념관은 작은 공간이지만 많은 볼거리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의거를 형상화한 모형도 있다. 많은 조선족 서예가들의 애국에 관한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11일간이라는 짧은 기간 머무르면서 의거를 기획하고 달성했다.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규식, 김구, 김일성, 쑨원, 저우언라이 등의 친필도 전시돼 있으며 안중근 의사 여동생의 며느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하사한 기념주도 기증돼 전시 중이다.

 

방명록에도 진한 감동이 있다. '조선민족 만세, 얼을 지켜주시는 조선족에 감사합니다', '안중근 의사님 마음 속 깊이 사랑합니다', '중국인들 가슴 속에도 안중근 의사님의 성함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시는 뜨거운 마음, 의지 가슴 가득 안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한 당신의 희생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We truly appreciate your dedication for our nation!)’ 한국인 중국인 외국인 등 많은 사람들의 방문 기록이 있다.

 

안중근의사 저격장면(위쪽), 고 노무현대통령 하사주(아래쪽 왼), 안중근의사 동상(아래쪽 오른)

 

안중근 의사의 '거룩한 손'에 눈길이 멈췄다. 손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려는 인장과 글씨를 보면서 고개가 숙연해진다. '위대한 얼' 앞에서도 발걸음이 멈춰야 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된 후 조사 받는 도중 아주 당당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사형집행 앞에서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청을 높였다.

 

몇 년 전 중양다제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의 훼방으로 지금은 한 백화점 건물 지하로 밀려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중국정부가 조선족들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고 허락했다고 하는데 동상은 하얼빈 주재 한인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하얼빈에서도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사업에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로 힘을 합치면 좋을 것을 그게 잘 안 되는가 보다.

 

2층에는 조선족민족예술관(朝鮮族民族藝術館)이 있다. 조선족 사회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인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얼빈 지역에 거주해 온 조선족 인물과 그에 대한 역사, 그리고 유물 몇 점을 전시하는 것이 사진 촬영을 막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족 동포의 항일운동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지만 그냥 눈으로 한번 기억에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타러 하얼빈 역 앞에 도착했다. 다른 역 앞에서는 늘 바삐 서둘렀는데 이곳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며 잠시 머물렀다. 의거의 현장은 지금의 하얼빈 역 내 플랫폼 어느 곳이라 하는데 눈을 감고 조용히 마음으로부터 안중근 의사를 생각했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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