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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15회 닝샤 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

 

 

닝샤(寧夏) 회족자치구는 중국 서부의 황허 상류지역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산시(陝西), 서쪽과 북쪽으로 네이멍구자치구, 남쪽으로 간쑤(甘肅)와 접해있다. 북쪽은 대부분 사막지대이지만 예로부터 중원과 서역을 잇는 실크로드가 지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강족, 융족, 흉노족 등의 터전이었으며 서기 1038년에는 강족의 일족인 당항족 지도자 이원호가 이곳에 대하(大夏)를 건국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주한 후이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신중국 성립 후 1958년 후이족자치구가 됐다. 현재 전체 인구의 1/3 정도가 후이족이며 자치구의 수도는 인촨이다.

 

인촨 북쪽에 위치한 허란산에는 고대선인들의 암화가 무더기로 보존돼 있으며 전베이바오 고성에는 중국영화의 산실인 거대한 영화세트장이 조성돼 있다.

 

1) 인촨 銀川 칭기스칸과 맞서 싸운 영웅들이 잠든 왕릉

 

닝샤 후이족자치주 수도 인촨은 구청(舊城)과 신청(新城)으로 나누어져 있다. 호텔을 비롯해 상업기능은 여전히 구청에 있는데, 기차역은 신청에 있다. 구청과 신청 사이의 거리가 꽤 멀어 기차여행을 하려면 다소 불편하다.

 

기차 역에서 서쪽으로 20 여분 가면서하릉(西夏陵)’이 나타난다. 입구 양쪽으로 망루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아래에 난생 처음 보는 이상야릇한 글자가 써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천년 전 이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의 문자인 것이다. 입장권을 산 후 차량을 타고 왕릉 안으로 이동한다.

 

소수 민족 강족(羌族)의 일파인 당항족(黨項族) 이원호(李元昊) 1038년에 세운 나라로 1227년 몽골족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90년 동안 중국의 서북지역을 통치했다. 송나라가 거란족 요나라에게 비단과 곡물을 바치게 되는 굴욕적인전연지맹(澶淵之盟)’ 이후 민족세력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틈타 나라를 건국하고 삼국 정립을 구현한 것이다.

 

칭기스칸이 대하를 공략했다가 사망했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으며 자신만의 문자를 쓰고 불교를 숭상하며 세력을 키운 이원호는 드디어 제1대 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13대에 걸쳐 나라를 이끌어온 하나라는 능의 규모 면에서 베이징 인근에 있는 명나라의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비할 수 있다. 지금은 호왕릉(昊王陵)과 쌍릉(雙陵), 그리고 북문 등 성터의 흔적만 남았지만 그 옛날 중국의 서북지방을 호령하던 나라답게 문물과 유적이 상당하다.

 

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문물은 서하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독특한 문자와 역대 황제들의 면면이나 독특한 유물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원호의 반신 조각상을 보니 부리부리한 눈매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문자의 생성 구조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으며 그릇이나 장신구, 무기에도 생경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학자이자 개국공신이기도 한 예리런룽(野利仁榮) 3년 동안 연구해 한자의 생성과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새로 창제한 문자이며 표의문자에 속한다.

 

박물관에는 당시 하나라의 생활모습과 축성이나 전투장면이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또한 이원호의 황제 등극부터 병으로 사망하는 과정과 후계를 놓고 대립하는 장면까지 모형을 만들어두고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하나라의 독특한 탑 양식이 보존돼 있다. 탑신이 좁고 고층인 탑들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서하릉 입구(왼쪽 위), 하나라 왕릉(왼쪽 아래), 하나라 황제 이원호 상(오른쪽)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가면 하나라 왕릉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9개의 능원이 조성돼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관람이 가능한 3호릉만 공개하고 있다. 그 옛날 중국 서북지방을 호령하던 나라답게 외성과 내성의 구분은 물론이고 황궁에 어울리는 능원의 형태와 규모는 상당해 보인다. 고대의 종법제(宗法制)에 따른 각 능원의 배치가 천년 전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원형이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7미터가 넘는 취에타이(鵲台)라는 이름의 돈대가 보인다. 이어 능원을 지키는 작은 규모의 위에청(月城)을 지나면 링청(陵城)이 나타난다. 입구인 남문이 보이고 제를 올리던 8각형의 셴뎬(獻殿) 터를 지나 움푹 파인 능묘 길을 가면 링타(陵塔)가 보인다. 무덤은 탑 바로 앞에 조성됐다고 한다. 그 뒤 북문으로도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왕릉이 바로 하나라의 개국황제 이원호의 무덤이니 하오왕링(豪王陵)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중국은 대하를 비롯 동북쪽에는 여진족의 금나라, 북쪽에는 몽골, 대하 서쪽에는 거란족의 요, 중원에서 창장 이남으로 이주한 남송, 서남쪽에는 토번(吐蕃)과 다리(大理)가 할거하며 영토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구도는 이후 몽골족의 원나라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지속된다.

 

중국 정부는 서북방면의 지방정권이라는 뜻으로 서하라 부르고 있는데 동북방면에서 고구려를 지방정권이라 칭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록 13세기경 몽골족의 침입으로 대하는 사라졌지만 독특한 자기문화와 색채를 지니고 역사 앞에 우뚝 서 있다.

 

2)   허란산 賀蘭山 수 만년 전 선민들의 마음이 바위 속에 오롯이 새겨 있다

 

인촨(銀川) 시에서 서북쪽 50킬로미터 부근에 건축시기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쌍탑(雙塔)이 있다. 서탑 12층 동편에 하나라 문자가 쓰여있는 것과 석가모니 불상을 신봉한 하나라 불조원(佛祖院)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해 하나라 시대에 건축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두 탑 사이의 거리는 80여 미터이고 대칭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탑은 39미터 13층이고 서탑은 36미터 14층이다. 천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그 자태와 풍모를 그대로 간직한 쌍탑이 파란 하늘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의연해 보인다.

 

하나라의 궁궐 뒷산인 허란산에서 평야를 바라보며 세월을 반추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소 썰렁한 입구와 1시간 가량 머무르는 동안 외국인 관광객 한 명과 겨우 만났을 뿐인 외로운 쌍탑이다. 비바람에도 버텨온 두 탑의 조화와 균형은 참으로 아름답다.

 

쌍탑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가면 허란산 계곡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신비한 암화(岩畫)를 만날 수 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암석마다 갖가지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쌍탑(왼쪽 위), 허란산 입장권(왼쪽 아래), 허란산 암화(오른쪽)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이런 암화들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북방의 유목민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하나라 시대까지 이런 서민적인 암화를 허란산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원숭이, , , 당나귀, 사슴, , 이리 등 동물 그림이 많다. 특히, 원숭이의 동그랗고 귀여운 인상이 마음에 들어 자꾸 눈길이 간다.

 

북방민족이란 흉노, 선비, 돌궐, 회흘(위구르), 토번, 당항 등을 말한다. 서민들이 정서와 삶을 단순하지만 해학적이면서도 진솔하게 새겨 넣은 암화들이 계곡을 따라 바위마다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일 듯 말 듯 찾기 힘들다. 바위의 모양과 암화의 위치를 빨갛게 스티커처럼 붙여놓은 표지판만 잘 찾으면 된다.

 

이 독창적이고 희귀한 허란산 암화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된 상태라고 한다. 허란산 일대를 비롯해 몽골공화국에도 꽤 광범위하게 암화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마침 며칠 전 비가 많이 와서 계곡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계곡을 건너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 본다. 황폐한 산인 줄 알았기에 물살이 센 계곡이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공기도 아주 맑고 나무들도 많다. 그 옛날 서민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바위에 그림을 새기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파랗고 하얀 구름도 아주 순백한 색깔 그 자체이다. 그런데 허란산 계곡이 조화를 부리는지 산 위로 나타난 구름들이 마치 용이 솟구치듯 번져가고 있다.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 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암화가 산재해 있는 계곡은 푸른 하늘과 쭉 뻗은 나무, 그리고 하얀 구름이 어울리는 한 폭의 동양화라 할 정도로 화사하다.

 

3)   전베이바오 北堡 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

 

닝샤후이족자치구 인촨 시 외곽 황량한 벌판에 전베이바오 고성이 있다. 흙으로 담을 쌓은 이 오래된 보루는 촬영세트장으로 변했다. 황야 위에 구축한 중국영화와 드라마 촬영 장소인 화샤서부영화성(華夏西部影視城)이다.

 

입구로 들어서면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中國電影從這裡走向世界)’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영화성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신중국 시대, 명나라,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각각 조성돼 있다.

 

80년대에 주스마오(朱時茂)가 주연한 영화 <목마인(牧馬人)> 세트가 먼저 보인다. 이 영화가 중국영화제의 상징인 백화장(百花)을 수상하자 이곳이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 된 장이머우(張藝謀)신비한 보물의 땅이라 극찬했다고 한다.

 

여행대학 학생들이 실습을 나왔길래 설명을 부탁해 봤는데 부끄러운지 웃기만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농촌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돼 있으며 백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리네 시골 집처럼 신문지로 벽지를 대신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의 사진이 한가운데 붙어 있다. 침실과 부엌도 옛날 모습 그대로인데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의 장면들이 나오고 있어서 놀랐다. 텔레비전은 최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벽에도 주연배우와 감독들 사진이 걸려 있다.

 

신중국 이후, 문화대혁명 시대를 보여주는 세트장은 난전()혁명위원회라는 마을 이름이다. 시골까지 마오쩌둥 정권의 혁명이론과 사상이 뿌리박고 있던 당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궈룽(張國榮), 거여우(葛優), 장펑이(), 궁리(鞏俐) 등이 출연한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패왕별희(霸王別姬) 촬영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한 쪽 벽면에 걸려 있다. 궁리와 거여우 주연의 중국 근현대사의 인생 역정을 그린 장이머우 감독의 <훠저(活著)>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훠저는 우리나라에 <인생>이란 제목으로 개봉됐는데 중국에서는 상영금지 영화로 분류돼 있기도 하다.

 

마을 식당도 보이고 부대 지휘부가 있던 집도 있다. 지휘부 집은 그야말로 혁명구호와 붉은 색깔로 온통 칠이 돼 있어 생경해 보이기조차 하다.

 

원래는 소나 말 같은 동물 우리였지만 문화대혁명 시대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주자파(走資派)나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가둬두던 곳인 뉴펑(牛棚)도 보입니다. 혁명선동을 하던 책상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한다. 책상 위에는 빨간 색의 마오 주석 어록이 놓여있다.

 

중국현대사 셋트장(왼쪽), 전베이바오 영화셋트장(오른쪽 위), 마오쩌둥 시대 셋트장(오른쪽 아래)

 

마오쩌둥 주석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구호가 적힌 광장에는 마이크가 놓여 있다. 아마도 주민들을 모아놓고 선전과 선동을 하는 공간일 것이다. 바로 앞에는 반동분자의 모형이 밧줄에 묶여 있다. 목에는 반혁명분자 타도라는 글자의 팻말이 걸려 있는데 소위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인 듯 보인다.

 

꽤 높은 혁명 탑 위에는 붉은 별이 하나 걸려 있고 오성홍기도 나부끼고 있다. 그 앞에 붉은 원 안에는 마오쩌둥이 미소를 짓고 있는 초상화가 활활 불 타오르고 붉은 깃발을 든 사람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뒷면에는 노동자와 농민, 군인과 공산당원이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도 있다.

 

홍보영화를 상영하던 스크린과 함께 앰프도 걸려 있다. 스크린 앞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나무와 돌이 놓여 있고 영사기를 돌리는 사람도 보인다.

 

지금은 1960년대의 신중국의 사회 모습을 살펴볼 기회가 많지 않다. 촬영세트로 꾸며놓은 곳이니 비교적 상세하게 고증된 장면이라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보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세계를 감동시킨 영화들이 촬영됐다니 정말 중국영화의 산실이라고 할만하다.

 

온통 구호가 난무하고 오성홍기 물결이다. 비록 세트장이긴 하지만 파란 하늘을 가르는 바람 따라 펄럭이는 깃발은 중국 현대사의 질곡을 알고도 남는 것인지 아무런 말이 없다.

 

4)   전베이바오 北堡 장이머우를 유명하게 한 영화 세트

 

전베이바오 고성에 만들어진 화샤서부영화성 3부분 중 중국 60년대 세트장과 명나라와 청나라 세트장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명나라 세트장인 밍청(明城)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들이 있고 인상적인 촬영세트가 곳곳에 보존돼 있다. 역시 시대극은 전쟁 장면이 많아서 그런지 전쟁무기가 많다.

 

영화 속 감동을 담아내기에 충분히 멋진 곳이 많지만 그 중에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영화 <신용문객잔> 촬영 장소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와 객잔의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말과 낙타도 있고 당시 풍속도 많다. 아이들은 북을 치기도 한다. 칼과 창, 방패들이 그대로 널려 있어서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양털로 모포를 만드는 간잔(擀氈) 공예를 한 아저씨가 열심히 시연하고 있다. 간잔은 서북지역 유목민들의 옷이나 신발, 바지나 모자를 만드는 생활공예이다. 양털로 여러 공정을 거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나뭇가지로 가벼운 양털을 떨어내는 모습이 신기해 보인다.

 

보루의 성곽을 하나 넘어가니 분위기가 다소 바뀐다. 게다가 갑자기 거미 귀신인지 흡혈귀인지 모를 영화를 찍었다는 곳이 나타난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곧 낯익은 영화 하나가 반갑게 맞아준다. 바로 1988년 제작된 장이머우의 영화 <홍까오량(紅高粱)>입니다. 궁리를 세계적인 배우로 탄생시킨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는 <붉은 수수밭>으로 잘 알려진 영화이다.

 

영화 중에 등장하는 위에량먼(月亮門)도 그대로 보존돼 있고 궁리가 살던 집과 이불, 시집 갈 때 탔던 마차, 술 제조하는 항아리와 창고도 잘 보존돼 있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직접 술도가를 만들어 술을 빚었다 하니 역시 좋은 영화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 멋진 술도가는 우리 드라마 <선덕여왕>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어린 시절 이곳에서 성장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 술도가가 대번에 떠올랐다.

 

장이머우와 궁리는 영화 작업을 함께 하면서 공공연한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비록 유부남이던 장이머우가 궁리의 결혼 제안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헤어지게 됐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영화 황진자(黃金甲, 황후화)를 통해 재회한다. 연기하는 궁리를 바라보는 장이머우 사진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명나라 셋트장(왼쪽 위), 청나라 셋트장(왼쪽 아래), 장이머우 영화 촬영장소(오른쪽)

 

땡볕 아래에서 2시간 가까이 수많은 영화와 만나고 살펴보니 정신이 몽롱하다. 담배 한대 피면서 그늘에서 쉬었다. 정말 무지하게 넓고도 크다.

 

명나라 세트장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는 청나라 세트장이다. 주로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중화민국 국기가 걸린 곳을 지나니 청나라 세트장 거리가 마치 풍물 전시장 같다. 만두와 닭고기를 비롯 다양한 먹거리가 있고 염직과 구두수선 등 서민적인 거리의 모습이다.

 

최근 드라마 중 인기를 많이 끌었던 <챠오자다위엔(喬家大院)> 세트 장이 있어서 반가웠다. 장친친(將勤勤)이 주연한 드라마로 산시(山西) 성 핑야오(平遙)를 배경으로 청나라 말기 상인이었던 집안을 그린 드라마이다. 쓰촨 출신의 장친친은 몇 년 전 톈진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서 더욱 기뻤다.

 

이 영화성은 유명 소설가이면서 사업가이기도 한 장시엔량(張賢亮)이 조성했다. 그는 일찍이 영화세트장을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이라 판단해 황량한 땅 위에 중국 대중문화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으로 중국의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중국영화의 미래를 열어나가고 있다. 마치중국영화는 이곳에서 세계로 향한다는 메시지처럼 말이다.

 

청나라 세트장 입구에 엄청나게 큰 차 주전가가 있는 찻집이 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베이징에서 오려면 기차를 타도 15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벌판의 고성을 통째로 영화 세트장으로 꾸밀 수 있다는 것도 참 부럽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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