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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34] 장춘의 위만황궁박물관

  
▲ 장춘 시내에서 만난 뻥튀기 장수 우리나라와 똑같은 뻥튀기 장수를 장춘 시내를 걷다가 만났다.
ⓒ 최종명

5월 29일 오전 8시 션양(沈阳)에서 창춘(长春)행 기차를 탔다. 랴오닝(辽宁) 성에서 지린(吉林) 성으로 올라간 것이다. 채 3시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도착해서 호텔 잡고 나니 점심 시간이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웨이만황궁뽀우관(伪满皇宫博物院)을 찾아갔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를 만나고 싶어서이다.

창춘시 동북쪽에 위치한 꽝푸베이루(光复北路)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뻥튀기 장수를 만났다. 옥수수 넣고 '뻥'하고 튀기는 모습이 우리랑 완전 똑같다. 물론 그 맛도 똑같은데, 한 봉지(2위엔) 사서 먹으며 걸었다. 계속 입가에 구수한 내음이 남는데 먹을수록 약간 우리 옥수수랑 다른 듯하다. 바삭바삭 하기는 하지만 씹을 때 약간 쓴맛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인지 모르겠다.

  
▲ 파란 하늘과 위만황궁박물관 파란 하늘, 구름과 어울린 장춘의 위만황궁박물관의 전경
ⓒ 최종명
장춘

하늘이 너무 파랗다. 한적한 매표소 그리고 택시 한 대, 그 너머 살짝 박물관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 위로 하늘을 가르는 구름이 짓누르는 모습이 사뭇 청아하다. 멋진 하늘이야말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소 같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AAAA급 박물관답게 조경도 아주 깨끗하다. 기분 좋은 취재가 될 듯하다.

웨이만황궁뽀우관 공원에 들어가 잘 정리된 산책로 같은 길을 걸으니 흥운문(興運門)이란 번체로 써 있는 뽀우관 정문에 이른다. 문에 들어서자 왼편으로 깔끔한 단청과 회색빛 벽돌로 둘러싸인 궁내부(宫内府)가 나타난다. 이곳은 만주국 시절 부속실 정도 되는데 지금은 작은 역사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주국 정부 인물들이 눈에 뜨인다.

황궁으로 쓰던 건물이긴 해도 급조된 탓인지 규모가 크지는 않다. 그런데 건물마다 오밀조밀하게 가꿔져 있고 소박해 보이기도 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햇살과 그늘을 절묘하게 나눈 듯한 장면을 보니 아름답다.

  
▲ 즙희루와 강택민의 '잊지말자 9.18' 위만황궁의 황제 부의와 황후 완용가 기거하던 거처 즙희루 앞
ⓒ 최종명
장춘
이후 푸이는 만주제국의 황제로 다시 등극하게 되는데 지씨(缉熙) 두 글자를 푸이가 직접 붙였다. 그 의미가 바로 깡씨(康熙) 황제를 되살려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니 만주족의 청나라를 회복한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보인다. 푸이 자신이 괴뢰국 만주제국 황제로서 내건 명분일 터이니 푸이를 활용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의도에도 맞았겠다.

  
▲ 아편에 빠진 마지막황후 완용의 모습 위만황궁박물관 내 완용 모습
ⓒ 최종명
장춘
푸이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후 마지막황제로서 자금성에서 거주하는 동안 완롱을 황후로, 원쎠우(文绣)를 황비로 맞아들인다. 마지막황후 완롱은 질투가 심했으며, 원쎠우를 시기하고 저주했다고 한다. 게다가 푸이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는데 사적으로 통정을 해 딸을 낳기조차 한다. 대노한 푸이는 이 신생아를 끓는 화로에 던져 죽여버린다. 후일 완롱은 아편에 빠진 채 심약한 생활을 하다가 1946년 병사한다.

14살에 푸이의 황비로 들어간 원쎠우는 자금성을 나와 생활의 곤란을 겪다가 황제와 이혼소송을 제기한다. 이러한 쎠우푸(休夫,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는 중국 봉건황제의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된다. 원쎠우는 1950년에 병사한다. 푸이는 완롱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원쎠우으로부터도 이혼당하게 되는 참 불행하기 그지 없는 황제라 할 수 있다.

  
▲ 위만황궁의 회의실 모습 위만황궁의 황제와 대신들의 회의실
ⓒ 최종명
장춘

지씨러우 2층은 당시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거실과 침실도 깨끗하게 꾸며져 있어 그 당시 생활을 유추해볼 수 있다. 완롱이 아편에 빠져 있는 모습은 왠지 음울하기도 하다.

친민러우(勤民楼)는 만주제국 업무를 보던 공관이다. 이곳에는 집무실도 있고 회의실도 있고 간혹 공연을 즐기는 문화공간도 있는데 황제와 황후 의자가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황제에서 평민까지' 전시관 포스터 위만황궁박물관에 있는 마지막황제 부의 일생 포스터
ⓒ 최종명
장춘

푸이는 만주국 황제가 된 후 새롭게 귀인(贵人)을 맞이하게 된다. 귀인이란 황후(皇后), 황비(皇贵妃), 귀비(贵妃), 비(妃), 빈(嫔), 귀인(贵人), 상재(常在), 답응(答应)으로 나누어지는 청나라 황제의 부인 서열에서 여섯째 등급의 신분을 가리킨다.

1937년에 푸이는 완롱을 못마땅하게 여겨 귀족 출신의 탄위링(谭玉龄)을 귀인으로 맞는다. 탄위링은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푸이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돌연 1942년에 병사하게 되는데 실제로 알려진 대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관동군이 살해한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푸이는 자서전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내 인생의 전반부(我的全半生)>에 '가장 사랑했던 위링(我的最亲爱的玉龄)'이라 토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혈통의 여자를 푸이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푸이는 결국 1943년에 평민 출신의 리위친(李玉琴)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한다. 일본 관동군이 붕괴할 때 민중 봉기군을 피해 푸이와 리위친은 함께 도망친다.

이후 전범으로 체포된 푸이가 있는 여순감옥에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 차례 서신 왕래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리위친은 푸이와 이혼의사를 밝힌다.

  
▲ 수감 중인 부의 전범으로 수감 중인 마지막황제 부의의 모습
ⓒ 최종명
장춘
푸이는 특사로 석방된 후 평민이 됐고 중국인민정부의 소개로 항저우(杭州) 출신 간호사인 리슈씨엔(李淑贤)과 1962년 4월 30일 결혼한다. 1967년에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망인 리슈씨엔은 1997년 사망했다.

웨이만황궁뽀우관에는 총황띠따오꽁민(从皇帝到公民)이라는 마지막황제 푸이의 일생을 기록한 전시관이 있다. 푸이는 맹자의 호연지기에서 따온 호연(浩然)이 자(字)이다.

푸이는 1906년에 베이징 스차하이(什刹海) 부근 순왕부에서 도광제의 증손이며 광서제의 동생인 재풍(载沣)의 장자로 태어난다. 서태후 자희태후(慈禧太后)의 결정에 의해 3살의 나이로 황제에 오른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봉건제 국가 청나라가 멸망하자 자금성 내 양심전(养心殿)에 칩거한다. 1917년에 캉여우웨이(康有为) 등의 복황으로 잠시 복벽(复辟)하기도 하지만 불과 10여일 만에 다시 퇴위하게 된다.

1924년에 이르러 군벌 장수인 루쭝린(鹿钟麟)에 의해 자금성을 떠나 아버지 재풍의 집인 진북부(进北府)로 옮기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핍궁사건(逼宫事件)이라 한다.


  
▲ 부의의 선거권을 보여주는 공민증 평민으로 돌아간 후 처음으로 나온 평민임을 증명하는 선거권이 기재된 공민증
ⓒ 최종명
장춘

일본인들의 호송 아래 톈진으로 옮긴 푸이는 1932년에 이르러 만주 괴뢰정권의 집정(执政)으로 부활하게 된다. 1934년에는 만주제국(满洲帝国)을 칭한 뒤 황제로 등극하고 연호를 캉더(康德)라 칭하게 된다.

연호로 캉더(康德)를 쓰고 주거 건물 이름을 지씨(缉熙)라 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자들 비호아래 만주족의 나라를 꿈꿨음직한 푸이의 소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힘 없는 만주족의 마지막황제에게 새로운 부활을 약속해주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자 8월 17일 션양(沈阳)으로 피신했으나 곧 소련군에 의해 푸루(俘虏)가 되어 하바로브스키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에 중국으로 호송되기에 이른다.

푸이는 푸순(抚顺) 전범관리소에서 교육받고 소위 정신개조 과정을 거쳐 1959년 12월 4일 마오쩌둥(毛泽东) 주석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북경식물원의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중국공산당 정부를 지지하는 '신중국 옹호' 발언으로 가능했던 삶이라 하겠다.

3살에 마지막황제가 되었고 자금성을 살아서 떠난 황제가 되었으며 괴뢰 만주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범으로 체포된 후 다시 평범한 평민으로 돌아온 푸이. 그리고 '신중국'에 대한 반성과 지지성명.

그 모든 과정에 자신의 적극적인 의사가 반영되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그는 베스톨루치의 영화 <마지막황제>의 소재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아닐까.

  
▲ 주은래 총리와의 만남 부의와 그의 마지막부인인 이숙현과 함께 주은래총리와 만난 사진
ⓒ 최종명
장춘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황제로부터 평민에 이르는 극단적인 불행을 안고 태어났기에 그의 인생 전시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의 기개는 그에 의해 더욱 역설적으로 부각된다. 산해관을 넘어 중국 중원을 장악했던 만주족의 화려했던 영광도 함께 사라졌다. 푸이의 마지막 여생 8년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주족 마지막황제가 보낸 여생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1967년 10월 푸이는 병사했다.

  
▲ 위만황궁박물관 밖의 열차 파란 하늘과 어울린 박물관 밖에 있는 열차
ⓒ 최종명
장춘

4번 결혼하여 5명의 부인을 두었던 푸이. 불운했던 자신의 운명처럼 그의 부인들은 미치기도 했고, 도망가기도 했으며 돌연 죽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아내인 리슈씨엔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황제와 평민 사이의 직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웨이만황궁뽀우관을 4시간 동안 관람했다. 일일이 푸이의 일생을 살피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기차가 있다. 어디로 달려가는 것인지 알 길 없는 기차가 말이다.

푸이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인생 철로를 달렸다는 말인가. 천천히 밖으로 나오는 데 갑자기 푸이가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그는 신중국의 평범한 노동자로서 행복했을까. 인자한 저우언라이의 화사한 웃음에 화답하는 그의 미소는 너무 자연스럽다. 가짜 나라, 웨이만황궁에는 푸이의 미소는 진짜일까. 진심일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갑자기 슬퍼졌다. 정확하게는 눈물이 핑 돌았다. 푸이의 일생 속으로 너무 깊게 들어갔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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