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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기고/오마이뉴스

만리장성 끝에서 80위엔 때문에 곤욕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2008.05.15 05:14

[중국발품취재47]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새벽에 도착해 잠을 자고 나니 오후 1시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냉큼 쉬엔비(悬壁) 장성(长城)으로 달려갔다. 명나라 시대 만들어진 서쪽 끝 장성이다. 물론 한나라 시대 서쪽 끝 경계는 위먼관(玉门关)이 있긴 하지만,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군사적 개념의 명나라 장성은 이곳에서 끝이 난다.

최근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의 길이를 정확하게 새로 재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토의 개념, 정치적 의도가 명백히 있는 듯하다. 아마도 동북의 하얼빈 및 만주벌판부터 위먼관 너머까지 성곽을 쌓은 흔적을 모두 포함시킬 듯하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길이를 4천 킬로미터가 아닌 6천7백 킬로미터라거나 심지어 1만 킬로미터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만리장성은 원래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의 조(赵)나라와 연(燕)나라를 비롯해 전국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당시 인구의 1/20이나 되는 100만 명을 동원해 험준한 산악마다 성을 쌓았으니 가히 살인적인 공사가 아닐 수 없다.

강성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우려한 대부분의 왕조는 틈만 나면 성을 쌓았다. 한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쌓은 성곽은 지금에 이르러 만리가 넘는다는 장성이 된 것이다. 동쪽 산하이관(山海关)에서 서쪽 자위관(嘉峪关)까지 이어지는 이 기나긴 산봉우리마다 관문이란 뜻의 관(关)이나 커우(口), 보루라는 뜻의 빠오(堡)나 싸이(塞), 또는 청(城), 타이(台), 러우(楼), 링(岭) 등 약 150여 곳의 방어 태세를 하던 지명이 있다. 그 중 관이라 이름 붙은 곳은 대체로 관청이 있고 군인이 상주하기도 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의 씨엔비 장성에 휘날리는 깃발들
ⓒ 최종명
만리장성

자위관 관청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헤이산(黑山) 북쪽 비탈에 쉬엔비 장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장성 꼭대기에는 망루가 있는데, 관청 외곽에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원래 한나라 시대부터 망루의 형태가 있었는데 명나라 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망루 옆으로 장성을 쌓은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숨이 가쁘다. 섭씨 30도가 넘는 한낮 오후여서 그런지 숨이 차고 덥고 땀도 솟는다. 대신 오를수록 전망이 넓어지니 시야는 훨씬 시원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빛이 감도는 민둥산 헤이산에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잘 어울린다. 생긴 모습이 베이징 부근 빠다링(八达岭) 장성과 사뭇 비슷하다고 해서 서쪽 지방의 빠다링이라 부르기도 한다.

좁은 망루에서 앉아서 쉬고 있으니 여행객들이 몇몇이 올라온다. 외국에 사는 화교 일가족이 여행은 온 듯하다. 덕분에 내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물론 여러 장 찍어주기도 했다. 30분 가량 망루에 머물다 다시 내려왔다. 오를 때는 장성을 따라 올랐는데, 망루를 통과하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편안한 길이 있다. 이 길이 오히려 성곽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훨씬 좋다.

  
▲ 씨엔비 장성 자위관 북쪽 헤이산 기슭에 있는 장성 망루
ⓒ 최종명
자위관

한참 내려오다가 다시 망루를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망루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수건을 둘렀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모양과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자세가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전문가 냄새가 났다.

중국 각 왕조에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했고 실크로드의 옛길이기도 하다. 평지로 내려오니 최근(2005년)에 만든 ‘쓰처우구다오(丝绸古道)’ 전시 조소(雕塑)들이 있다. 비단길, 실크로드와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의 석상인 것이다.

  
▲ 현장법사 씨엔비 장성과 자위관과 그리고 실크로드와 관련 있는 역사적 인물 7명을 조각해 둔 곳
ⓒ 최종명
현장법사

서역으로의 통로를 개척한 한나라 시대의 여행가인 장건(张骞), 흉노족 토벌 무장인 한나라 무장들인 곽거병(霍去病)과 후한 시대의 반초(班超), 불법을 구하러 간 현장(玄奘), 동방 여행가 마르코폴로(马可波罗), 그리고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임칙서(林则徐)와 서역의 반군을 평정한 좌종당(左宗棠) 등 7명의 인물들, 그리고 5명의 수행원, 말 2필, 낙타 2마리와 마차 1대가 함께 조각돼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짜 낙타가 서 있다. 장성을 배경으로 낙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역시 기념사진 찍기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이다.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낙타 한 마리. 누군가 자기를 타 줘야 저녁 끼니를 때울 텐데 하며 무심하게 서 있다.

쉬엔삐 장성 남쪽에는 자위관(嘉峪关) 관청(关城)이 있다. 표를 사고 관청 앞 호수를 지나 걷다 보니 한 건물 옆에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늘 가을에 만나던 코스모스를 만나니 고향이 그립다. 벌써 발품취재가 2달이 넘었던가.

관청에 도착하니 마침 관청에서 의식이 준비되고 있다. 멀리 전쟁을 떠나는 장수를 환송하는 행사인 것이다. 재미있는 행렬이기도 하고 여행객 중에서 뽑아 장군과 부인으로 분장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피리도 불고 낙타도 등장하고 전통 복장까지 겸비했으니 나름대로 잘 갖춰진 행사였다.

  
관청 의식을 위해 도열해 있는 병사들
ⓒ 최종명
자위관

관청 안을 한 바퀴 돌아 문 밖으로 나가더니 행렬이 멈췄다. 부인들이 바친 환송 술잔을 받아 마시고 말을 타고 전쟁터로 가는 의연한 모습이 연출된다. 장군과 부인 역을 맡은 여행객은 남자와 여자 모두 잘 생기고 예쁘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주 자연스레 포즈도 취한다. 좀 친해져 볼까 했는데 대신에 말수가 적고 약간 낯을 가리는 통에 아쉬웠다.

  
▲ 관청 의식 행렬 자위관 관청 의식에 참가해 낙타를 타고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여행객들
ⓒ 최종명
자위관

자위관(嘉峪关) 관청은 명나라 시대인 홍무 5년, 1372년에 세워졌다. 외성(外城)과 내성(内城) 그리고 옹성(瓮城)으로 구성돼 있다. 성벽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며 그 모습이 사뭇 웅장해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关)’이라 하며 변방의 요새(连陲锁钥)라고 불린다.

관청 성곽에는 작은 길이 있어 걸어 다니면서 이곳 저곳 성 안의 구조를 지켜볼 수 있다. 주변이 온통 벌판인지라 멀리 눈 덮인 설산이 한눈에 보이기도 하고 서쪽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 길과 도로도 보인다.

  
자위관 관청 성곽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쏘는 곳이고 성벽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 최종명
자위관

성곽 위에 활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서 봤더니 그 옆에 장사꾼이 앉아 있다. 화살 10개를 성곽 아래를 향해 쏘는데 10위엔을 받는다. 짚으로 사람 모형과 과녁이 있다. 활 쏘는 연습장인 셈인데 아래를 향해 쏘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이나 옛 병사들의 전쟁 장면을 연상할 수 있을까. 날씨가 더워서인지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도 숨가쁘다.

관청 내에는 재미난 볼거리가 많은데 그 중에 지스옌밍(击石燕鸣), 즉 돌을 치면 제비 우는 소리가 난다는 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제비 한 쌍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숫제비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암제비가 성벽에 스스로 부딪혀 죽었다 한다.

그 이후로 제비가 앉았던 돌을 치면 제비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사람들도 제비는 길조라 여겨 장군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 돌을 치면서 무사기원을 했다고 전한다.

관청 내 작은 사당이 있어 들어갔다. 산하이관과 마찬가지로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형이 있어 당시 분위기를 살려두고 있다. 회의실 벽에 호랑이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호랑이야말로 용맹의 상징이니 이 변방의 요새를 지키는 자위관 관청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하겠다.

관우의 사당도 있다. 신의 경지로 서민들의 우상인 관우야말로 전쟁의 와중에 목숨이 위태한 병사들에게 위로가 될 존재일 것이다.

  
자위관 관청에서 장군 복장을 하고 사진 찰칵
ⓒ 최종명
자위관

땡볕이 서서히 지고 해가 저물어 간다. 관청을 나서다 말고 갑자기 장군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별 이유도 없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옛날 군복을 입고 내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했다. 10위엔을 주고.

관청 밖으로 나와 장성박물관 옆에 웅관서화원(雄关书画院)이라는 팻말이 붙은 집이 보였다. 집 벽이 고풍스러워 살짝 시선을 옮겨봤다. 그 앞에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끄는 석상과 마차를 끄는 말의 석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각각 얼뉴타이강(二牛抬杠)과 따구루처(大轱辘车)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석상들은 춘추전국시대의 농경생활 모습을 구현한 것이라 한다.

특히, 구루(轱辘)에 관심이 많이 갔다. 발음이 구루? 그렇다. 구루마는 우리가 일본어에서 온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말이다.

구루의 뜻 역시 ‘구르는 바퀴’이다. 우리가 쓰던 말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한자문화권 내에서 그 발음의 유사성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하여간 ‘구루마’와 ‘구루’의 연관성이 재미있다.

  
▲ 따구루처 춘추전국시대 농경생활의 모습을 재현해 둔 말과 마차
ⓒ 최종명
농경

호텔로 돌아왔다. 2층 식당에서 오랜만에 체력 보강을 위해 60위엔을 투자했다. 고기요리 하나, 두부와 채소로 만든 국, 볶음밥을 시켰다. 깔끔한 고급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은 적이 언제였던가. 혼자 여행하는 도중에 맛 있는 식당에서 먹기가 좀 어색한데, 호텔이면 조금 마음이 편하긴 하다.

깔끔한 호텔이어서 잠 자는 것, 밥 먹는 것 다 좋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날이다. 체크아웃에 문제가 발생했다. 29일 새벽 그러니깐 정확하게는 5시30분에 체크인을 하고 하루 호텔비용 190위엔과 야진(押金)을 포함해 300위엔을 달라고 해서 줬다. 아침 포함이니 식사 쿠폰도 한 장 받았다.

갑자기 80위엔을 더 내라는 것이다. 이틀 숙박비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중국 호텔에서 야진을 챙기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아침도 하루만 먹었으니 호텔 측 잘못이라 주장했다. 호텔 매니저가 오더니 죽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침 지갑에 돈도 없기도 했지만 하는 짓이 얄밉기 그지 없다. 말투도 80위엔을 내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못나간다는 둥 협박이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저녁 한끼
ⓒ 최종명
자위관

그런데, 버스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다. 그래서, 일단 배낭을 메고 호텔을 나오니 매니저가 따라온다. 배낭을 잡길래 터미널에 가서 주겠으니 따라오라고 하고 택시를 탔다. 도망 가면 신고하겠다고 한다. 지갑을 보여주며 100달러 밖에 없으니 거슬러 달라고 하니 잔돈이 없으니 다시 호텔로 가자고 한다. 티켓을 보여주며 시간이 없다고 맞불을 놨다. 터미널에서 돈을 찾아서 주고 말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공교롭게도 ATM이 없다. 매니저는 다시 은행으로 가자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참 나 원. 보통 화 내는 일이 없는데 완전 남의 사정은 통 배려하지 않으니 답답했다.

일단 버스에 탔다. 따라 오길래 계좌번호를 주면 둔황에 도착해서 송금해주겠다고 하니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컥. 그러더니, 100달러를 주면 거스름돈을 송금해주겠다고 한다. 나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신뢰가 없어진 것 아니냐고 한 말은 매니저가 택시 타고 오면서 한 말이다.

일부러 80위엔을 떼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시간만 넉넉하면 요모조모 따져서 호텔의 과실을 이해시키거나 할 텐데. 하여간 난감했다. 매니저는 버스 출발을 막고서는 계속 생떼다. 버스는 출발하는데 계속 말다툼이었다. 핸드폰 번호와 이름도 적어주고 전화하면 송금해줄 테니 믿어라 했는데도 혼자 화를 내고 난리를 피더니만 그제서야 버스에서 내린다. 이 정도였다면 좋았는데, 내리면서 욕을 한다. ‘한궈런 뻔단(韩国人笨蛋)’, 대충 ‘한국 사람 XXX’ 정도다.

중국에서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욕 먹을 정도로 잘못한 것은 없는데, 참 80위엔 때문에 자위관에서 별 경우를 다 당한다. 나로 인해 한국 사람 욕까지 대표로 들었으니 고개 들기도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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