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중국발품취재48] 둔황 모까오 굴과 밍사산

자위관(嘉峪关)에서 312번 국도로 따라 안씨(安西)를 지나는 길은 정말 사막 한복판을 달린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저 황량한 벌판뿐. 다시 안씨에서 서남쪽으로 두 시간 더 달리면 둔황(敦煌)이다.

둔황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정말 ‘이 멀리까지 왔구나’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 찬란한 교류를 꽃 피우고 실크로드라는 반짝이는 이름까지 얻게 된 곳. 둔황이야말로 실크로드의 상징이 아닌가.

쉼 없이 흩날리는 사막 모래는 여전히 그 옛날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버스 차창에서 바라보노라니 이런 황폐한 토지 위에서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싶은 상념에 젖었다.

  
국도에서 둔황 시내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 최종명
둔황

터미널에 도착해 지도 한 장을 사고 거리를 거닐었다.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둔황 시내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도시다. 외국 관광객들이 주로 집결하는 밍산루(鸣山路)를 거쳐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페이톈(飞天) 시장에 갔다.

공예품을 파는 시장은 정말 이곳이 둔황이구나 하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실크로드와 낙타, 그리고 둔황 석굴의 불상을 직접 현장에서 새겨 파는 것이 아주 신기하다. 거리의 예술가들이 너무도 많다.

거리에서 은근하게 들려오는 악기 소리가 흥미를 끈다. 가만히 보니 바로 쉰(埙)이다. 동그란 돌에 대여섯 개 뚫린 구멍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주 달콤한 악기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쉰으로 대장금을 연주하고 있다.

  
둔황시 페이톈시장 공예품거리에서 파는 나무 조각품으로 낙타와 실크로드, 둔황석굴을 주제로 해서 인기가 많다
ⓒ 최종명
둔황

둔황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씽피쉐이(杏皮水)가 참 시원하고 맛있다. 맥주도 한잔에 샤오츠(小吃) 요리 하나로 허기를 채우며 오후의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가게 주인인 할아버지는 돈만 받고 아주머니는 요리만 하고 청년은 부지런히 주문을 받고 요리를 나르고 한다.

다 좋은데 맥주가 10위안이나 한다. 자리값 치고는 좀 비싼 편이다. 햇살이 저물어가니 야시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서역이 가까워서인가. 도대체 현지시각으로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질 않는다. 여전히 대낮이다.

  
둔황의 특산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수
ⓒ 최종명
둔황

7월 1일 오전 내내 호텔에서 빈둥거렸다. 좀 쉬고 싶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야 게으름을 떨칠 수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잘못하다가는 일사병에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 사막 벌판을 한 시간가량 달려 세계적 보물이라는 둔황석굴 모까오굴(莫高窟)에 이르렀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참 많다. 역시 세계문화유산. ‘모까오’라는 말은 ‘사막의 높은 곳’이라는 말로 모까오(漠高)라 하다가 漠와 발음이 같은 莫로 변형돼 불리게 됐다.

안타까운 것은 입장료가 160위안으로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 중국에서 가장 비싸지 싶다. 게다가 가이드가 붙으면 20위엔을 더 내야 한다. 카메라, 캠코더는 물론이고 가방조차도 못 가지고 들어가게 한다. 가방을 맡겨야 하고 그러면 다시 보관료를 내야 한다. 거의 강매 수준이다. 간혹 가이드에게 특별요금을 내면 더 많은 곳을 관람도 시켜준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사기에 가깝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관람해, 꽤 감명 깊었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는데 막상 혼자 와서 보니 막막하다. 그럼에도, 공개된 3곳의 큰 석굴과 웅장하고 세밀한 불교문화를 호흡하기에 나쁘지 않다.

그 외 많은 동굴은 다 나무문으로 막았고 자물쇠로 굳게 닫아걸어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처음 이 석굴이 발견됐을 당시에는 석굴의 석상이나 벽화가 그대로 노출돼 있었는데, 문화재 보호 차원이겠지만 입구를 시멘트로 꽉 발라놔서 섬찟할 정도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보존의 필요가 있으니 그렇긴 하겠지만 굉장히 난감했다.

  
160위안이나 하는 둔황 석굴 입장권
ⓒ 최종명
둔황

중국 3대 석굴인 윈깡석굴(云冈石窟)이나 룽먼석굴(龙门石窟)에서 느낀 감동이 이어지지 않는 듯해서 서운했다. 약간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산과 강과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룬 불상들이 돋보이는 룽먼이나 은근한 자태와 영롱한 채색이 아름다운 윈캉에 비해 그렇게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지나친 통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여 개의 동굴이 있다고 해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부르는 이 석굴의 역사적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크로드의 허씨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에 자리잡고 십육국(十六国)과 북조(北朝), 수(隋), 당(唐), 오대(五代), 서하(西夏)와 원(元) 나라를 거치며 한편 군사적 요지이면서 동서양의 교류 거점으로 수많은 숭불정책의 상징이던 곳이 아닌가. 기원전부터 흉노(匈奴)와 토번(吐蕃)도 이곳을 도모했으니 말이다.

발굴된 492개의 석굴과 4만5천 제곱미터의 넓이에 수많은 불상과 벽화가 화려한 빛깔을 띠고 있다. 불교예술이 꽃 피던 당나라 시대 작품들은 아주 화려한 채색으로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각종 문서를 보관하던 기능도 있었는데 제17굴인 장경동(藏經洞)에서는 신라 승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됐다. 아쉽게도 20세기 초 프랑스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伯希和)가 수집(?)해 갔다.

  
▲ 제96호굴 9층 누각 모습으로 둔황에서 가장 높은 석굴
ⓒ 최종명
둔황

펠리오는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이란어 등 무려 13개 국어를 소화하는 언어 천재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越南) 하노이(河内)의 중문과 교수로 있던 1906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약 2년 동안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사하는 도중에 둔황에 이르렀다. 장경동에 있던 6천여 권의 문서와 만난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 자료를 토대로 10여 년이 흐른 후 프랑스 파리에서 둔황석굴의 역사적 가치를 소개한 도록(图录)을 발간했다. 모까오굴은 남북으로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굴이다. 막혀있는 동굴, 그리고 일련번호가 줄줄이 붙여져 있는 굴 속에는 펠리오가 다 가져가지 못한 진귀한 예술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높은 석굴인 9층 높이의 제96석굴(第96窟) 앞에서 한참 역사의 장구함을 느끼며 쉬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 밍산루(鸣山路)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호텔이 즐비하다. 길거리에 서양 레스토랑 분위기가 산뜻하다.

존스 인포메이션 카페(John’s Information Café). 이곳은 세계적 여행가이드 북에도 소개된 곳이다. 서양사람들 입맛에 맞는 그런 곳이니 당연하다. 실크로드 노상에 일종의 연쇄점처럼 몇 군데 있어서 여행가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차가 오가는 길에 있어서 약간 소음이 있긴 하지만 야외식당이고 답답하지 않아 좋다. 테이블마다 장미 한 송이씩 자리 잡고 있으니 더 좋다. 치킨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값도 싸고 주인도 친절하다. 편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쉬었는데, 역시 문제는 현지 시각으로 밤 9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노을이 진다는 것이다. 실크로드 선상에서 보는 노을은 너무 붉어서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금세 어둠이 몰려 온다.

사막 오아시스 밍사산을 가다

다음날도 늦게 점심을 먹고 밍사산(鸣沙山)으로 갔다. 둔황(敦煌)에서 남쪽으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졌으니 아주 가깝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20분이면 도착한다.

밍사산은 사람들이 사막 모래를 밟으며 지나가면 ‘모래가 흐르는 소리’를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산도 꽤 높다. 동서 40킬로미터, 남북 20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에 우뚝 솟은 산이다. 해발은 1650미터 정도이나 가까이 가서 보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등산로가 보이기도 한다. 너무 더워 감히 오를 생각을 못했다.

  
▲ 밍사산 사막의 오아시스인 밍사산 위에야취엔, 햇살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그늘이 인상적이다
ⓒ 최종명
밍사산

밍사산에는 위에야취엔(月牙泉)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밍사산에 둘러싸인 작은 샘인데 그 생김새가 초승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에야(月牙), 달과 이빨? 초승달을 말한다.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샘으로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호감을 준 이 위에야취엔은 아쉽게도 최근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인공적으로 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고 한다.

초승달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마도 저녁 무렵이나 밤에 와야 할 듯싶다. 이곳의 석양이나 밤은 정말 장관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요조숙녀의 입술(窈窕淑女的嘴唇) 같은 위에야취엔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둔황에 가면 꼭 밤에 가는 것이 좋겠다. 저녁 6시 티켓을 예매하지 않았다면 하루 더 묵으며 밤새 사막에 머물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위에야취엔
ⓒ 최종명
오아시스

파란 하늘과 양념 같은 약간의 흰 구름, 그리고 온통 사막으로 덮인 위에야취엔이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신기하다. 앙상한 가지만이지만 줄기차게 꿋꿋해 보이는 나무 몇 그루도 이곳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10위엔 아끼느라 장화를 빌리지 않고 사막을 걸었더니 신발 속에 잔뜩 모래가 들어갔다. 온몸이 찌는 듯한데 발바닥까지 완전 사우나 버금, 아니 그 이상이다.

밍사산(鸣沙山) 역시 관광지라 낙타와 모터 자동차를 탈 수 있다.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꽤 영화적이다. 고등학교 때인가 본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인가. 막 그런 장면이 연상되고 그랬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 사막과 낙타 밍사산
ⓒ 최종명
밍사산

사막과 초원에서 모터 자동차를 탔다고 하니 ATV라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좀 있다. 뭐 그냥 ATV라 해도 되겠지만, 까칠해서 우리말로 바꿔본다고 한 것이 모터 자동차인데, 사실 꼭 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ATV(all terrain vehicle)라 하니 아마도 온 동네, 사막이나 초원 등 지형을 극복하고 잘 달리는 차량이겠다.

중국에서는 ‘全地形越野摩托车’이는 긴 이름으로 부르는데 관광지마다 그저 모퉈처(摩托车)라고 많이 통용하고 있어서 그냥 모터자동차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摩托车’라고 하면 보통 오토바이를 이르는데, 개인용 차량의 통칭처럼 됐으니 그냥 그렇게 써도 무방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말에는 ATV를 뭐라 할까. 사전에 찾으니 ‘산악오토바이’라 한다. 가만 보면 오토바이보다는 자동차에 더 가까운데 왜 그럴까. 하여간 어쩌다 편하게 ‘모터자동차’라고 하니 더 편해서 그렇게 쓰는 것이니 알아서 ATV, 또는 산악오토바이 등으로 이해하면 될 듯.

  
사막 위에 앙상하게 가지를 달고 있는 나무, 그늘과 하늘, 구름이 잘 어울린다
ⓒ 최종명
밍사산
네이멍구(内蒙古) 초원에서 탔던 모터 자동차가 재미있었던 기억이 났다. 가격을 흥정(50위안)하고 탔다. 울퉁불퉁한 사막을 넘고 넘는다. 운전사가 운전대를 나에게 건넨다. 부릉부릉 거리며 달렸다. 정말 신난다. 그리고 이게 참 말을 잘 듣다가도 안 듣는다. 사막을 넘어가는데 사막이 어디 똑바른 길이던가. 좌우로 확 기울다가 쓰러질 듯 불안하다.

다시 내려오는 길에 운전사 뒤에서 캠코더를 들고 찍었다. 그저 평범한 길로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물론 가파른 길을 거의 날아서 달리는 장면은 너무 빠르고 위험해 찍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많이 남은 ‘발품 취재’인데 캠코더 고장 나면 안 되니.

이제 다음 여행지 우루무치(乌鲁木齐)로 떠날 시간이다. 버스로 10시간 이상 가야 한다. 미리 밥을 먹고 가야지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한글로 ‘한국여행자들의 여행기록이 있습니다’라고 문 입구에 써 있는 식당이 있다. 테이블이 네 개뿐이다. 정말 2002년 7월부터 한국여행자들이 남긴 방명록이 있는데, 그걸 읽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나라 요리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여행자들의 이야기로 머리가 이미 배부르다.

정작 중국인 주인은 한국말은 못하고 대신 일본어를 좀 하는 듯하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여행 중인 한국 학생을 만났다. 그 역시 혼자 여행이고 다음날 우루무치로 온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이곳은 여행자들이 연락처로 삼고 있기도 하다.

  
둔황 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한국요리도 팔고 한국 여행객들의 방명록도 있다
ⓒ 최종명
둔황

터미널 부근에 한국에서 단체로 문화탐험을 온 고등학생들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 방명록에 누군가 남긴 메모가 기억났다. 책 속에 파묻혀 있는 것보다 현장체험을 위해 이 먼 둔황까지 온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꿋꿋하게 자라 ‘너희 중 훌륭한 고고학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하며 버스를 탔다. 버스 침대에 누웠다. 이제 우루무치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