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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기고/매체연재완료

[웰스] 500년 이어온 베이징 상업 거리, 100년 넘은 가게가 즐비하다

by 최종명 작가 2021. 12. 16.

지난 3월, 삼성생명 VIP 회원을 위한 잡지인 "WEALTH"에 실린 기사입니다.

베이징 전문대가와 상업거리인 다스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00 이어온 베이징 상업 거리, 100 넘은 가게가 즐비하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남쪽에 정양문(正阳门)이 있다. 자금성 앞에 있다고 전문(前门)이라 부른다. 약 1.5km에 이르는 길을 전문대가(前门大街)라 부른다. 비포장도로였는데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맞아 대규모 공사를 한 덕분에 마치 영화 세트처럼 깔끔해졌다. 남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서쪽 방향에 대책란(大栅栏) 골목이 나온다. 전문과 대책란 일대는 15세기 명나라 시대부터 상업 거리였다. 중국 정부는 최소 50년 이상 이어온 상호를 ‘중화노자호(中华老字号)’라 부른다. 이곳에 있는 가게는 짧게는 100년, 길면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가게가 즐비하다.

 

천안문 남쪽 전문 거리

전문대가 초입에 전취덕(全聚德)이 있다. 지금은 오리 구이로 유명하지만 1864년 개업 당시 채소와 과일을 파는 덕취전(德聚全)이었다. 장사가 여의치 않아 문을 닫았다. 곧 업종을 변경하고 이름 순서를 바꿨더니 대박이 났다. 지점이 100개가 넘는 그룹으로 발전했고 상장까지 했다. 화로 하나로 백 년이나 불을 피운 ‘일로백년화(一炉百年火)’라는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요리사가 직접 나와 오리를 썰어준다.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 한 마리를 처리하는데 8분을 넘지 않고 꼭 108조각을 낸다. 맛도 좋지만 요리 문화도 창의적이니 15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한 이유가 느껴진다.

 

바로 옆에 예사롭지 않은 조각상이 있다. 청나라 건륭 황제가 붓을 들어 주인에게 도일처(都一处)라는 글자를 써주고 있다. 황제가 미복 차림으로 순행에서 돌아오는 밤길에 출출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었는데 여전히 문을 열고 백성이 길게 줄을 선 가게가 있었으니 신기했다. 꽃 모양으로 빚은 만두인 샤오마이(烧麦)를 판다. 황제도 줄을 섰다가 맛을 보고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점주에게 가게 이름을 물었다. ‘작은 가게라 이름이 없다’고 했다. 황궁에 돌아온 후 ‘세상에 하나뿐이다’는 세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 1738년에 개업했으니 이미 280년이나 지났다. 샤오마이를 주력 상품으로 고급 식당으로 변신했다.

 

대책란이라 쓴 팻말이 보인다. 명나라 영락제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후 상업 거리를 조성했다. 세월이 흘러 야간 통행 금지가 시작되자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도적이나 불량배의 출입을 통제했다. 약 270m에 이르는 상업 거리의 울타리가 유난히 높았다. 원래 지명이 랑팡쓰탸오(廊房四条)였는데 대책란으로 굳어졌다. 1900년 청나라를 지지하고 서양 제국주의를 멸망시키자는 의화단(义和团) 운동의 여파로 초토화됐다. 건물을 다시 짓고 장사를 유지했다. 청나라 말기 독일인이 찍은 사진을 보면 나무 대신에 철문이었다. 당시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상업 거리 대책란의 노자호

팻말을 따라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노자호의 터줏대감 가게가 나타난다. 무려 490년 전인 1530년에 개업한 육필거(六必居)다. 우리나라 조선 11대 왕인 중종 시대라면 믿겠는가? 개업 초기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소금, 기름, 곡식, 땔감을 판매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酱)과 초(醋)도 팔았다. 일곱 가지 생필품을 ‘개문칠건사(开门七件事)’라 하는데 차(茶)를 뺀 6가지를 판다는 뜻이다. 육필거는 주력 상품으로 간장이나 된장으로 절인 식품을 판다. 청나라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베이징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으니 진정한 노자호라 할 만하다.

 

베이징 토박이는 ‘머리에 마취원(马聚源), 발에 내련승(内联升), 몸에 서부상(瑞蚨祥)’이라 한다. 대책란 거리를 대표하는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물건이 다 있다는 은유다. 골목을 들어서자 모자를 든 사람과 신발을 고치는 사람 조각상이 있다. 1817년에 창업한 모자 가게 마취원은 붉은 공작 깃을 꽂은 고관대작 모자인 홍영모(红缨帽)로 유명하다. 1858년에 창업한 신발 가게 보영재(步瀛斋)는 자수 놓은 꽃바구니라는 뜻의 면화루(棉花篓) 신발을 만들어 왕족이나 귀족이 신었다. 두 가게는 1956년에 합병했다.

 

‘발’을 대표하는 신발 가게는 1853년 문을 연 내련승이다. ‘궁궐 안 조정(朝廷) 신발’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겨 있다. 황제가 신하와 정치를 의논하는 조정과 이름이 비슷한 조정(赵廷)이 창업했다. 시골 톈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베이징 신발 가게에서 일을 배웠다. 눈썰미가 좋고 재주가 뛰어나 단골이 많았다. 인연을 맺은 귀인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창업했다. 황족이나 문무백관이 가마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 눈높이로 자연스레 신발이 드러난다. 고객의 수요를 끌어내 큰 성공을 거뒀다.

 

비단 가게인 서부상이야말로 이야기의 보고다. 1862년 산동 지난에서 맹자의 후손이 창업했다. 가업을 이어받은 맹락천(孟雒川)이 대책란에 진출했다. 유교 문화를 배우며 자란 그는 재해가 발생하거나 흉년이 들면 부채를 탕감해주는 상인으로 인덕을 쌓았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거행된 개국 행사에서 휘날린 오성홍기는 서부상의 비단으로 만들었다. 나라의 보물이 되었으니 ‘타의 모범’이 된 비단 가게다. 월마트 창업자가 자서전에서 ‘동양의 한 작은 가게가 창업에 동기부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부상을 두고 한 말이다. 곤충의 피를 묻히면 돈이 돌고 돌아 다시 온다는 청부환전(青蚨还钱) 고사를 어디선가 들었던 까닭이다. 가게 이름에 들어온 신화 속 곤충 ‘부(蚨)’에 주목했다. 지금도 비단 원단과 옷을 판다. 기성품도 있고 치수를 재고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준다.

 

육필거에 빠진 차는 장일원(张一元)에 가면 살 수 있다. 안후이(安徽) 출신의 장문경(张文卿)이 베이징에서 창업했다. 1896년에 노점 장사를 시작해 1908년에 정식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일원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일원복시(一元复始)’하면 만물이 늘 새롭다는 ‘만상갱신(万象更新)’의 속내로 지었다. 1912년에 대책란으로 진출해 지금껏 차를 판매하고 있다. 현대식으로 진공 포장된 형태가 아니라 약재처럼 하얀 종이에 차를 담아서 판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국의 좋은 차를 골라 저울로 무게를 달아 판매한다. 그러다 보니 가게에 들어서면 차 향기로 범벅이다.

 

옆자리에 우황청심환으로 유명한 동인당(同仁堂) 약국이 있다. 청나라 초기인 1669년 황실 태의원(太医院)의 관리였던 악현양(乐显扬)이 창업했다. 고대의 비방과 궁정 의술, 민간 처방과 비법을 두루 수집하고 연구해 약재를 개발했다. 강희 황제가 어린 시절 열꽃을 앓았는데 어의들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날 우울한 마음에 미복 차림으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약방 앞에 이르렀다. 주인은 황제의 고충을 아는 듯 값싼 약재인 대황(大黄)을 끓인 물로 목욕하라고 했다. 시킨 대로 계속 목욕을 했더니 3일 만에 치유됐다. 동수인덕(同修仁德), 제세양생(济世养生)이란 필체를 하사했다. 어진 덕으로 함께 하고 양생으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동인당은 시작부터 거창했다. 네 아들 중 삼남 악봉명(乐凤鸣)이 유훈을 받들었으며 대책란으로 이전해 가업을 이었다.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188년 동안 8명의 황제에게 약재를 공급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쇠락의 시기가 없었고 ‘명약(名药)’의 대명사가 됐다.

 

건너편에 만두를 먹고 있는 서태후 조각상이 보인다. 1858년 톈진에서 개업한 구불리(狗不理)다. 창업자인 고귀우(高贵友)는 늦둥이로 태어나 아명이 강아지라는 구자(狗子)였다. 꽃처럼 생긴 모양도 독특하고 만두 맛도 좋아 인산인해였다. 손님 거들떠볼 여유조차 없이 너무 바빴다. 사람들 모두 구자가 사람을 무시한다는 ‘구자불리인(狗子不理人)’이라 했다. 톈진에 거주하던 위안스카이가 만두를 좋아하는 서태후를 즐겁게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베이징오페라 무대의 공간

대책란 거리를 대표하는 가게 몇 군데를 살펴봤지만, 여전히 꼭꼭 숨은 노자호가 많다. 물론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난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백 년 이상 문을 닫지 않고 지금도 가치를 지키고 있는 가게가 수두룩하다. 베이징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로 손꼽는 거리가 됐다. 먹고 마시고 모자 쓰고 신발 신고 비단으로 치장하며 활보하던 거리였다.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레 놀이 문화도 발달했다. 특히 베이징 사람들을 울고 웃기던 베이징 오페라, 경극(京剧) 공연 무대가 많았다.

 

1790년 건륭 황제의 팔순을 맞이해 축하 사절단이 멀리 안후이에서 왔다. 지방색이 묻어난 휘극(徽剧) 공연을 펼쳐 황제와 황후, 비빈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공연을 펼친 극단은 귀향하지 않고 베이징에 머물렀다. 경극의 모태가 된다. 대책란 부근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봉장작희(逢场作戏)’라는 말이 있다. 배우는 장소만 있으면 연기를 펼친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대책란 상업 거리를 열광시킨 무대는 1796년 설립한 삼경원(三庆园)이다. 상설 무대가 열리자 황제도 감탄한 공연을 백성도 향유하기 시작했다. 인기 폭발이었으니 차례로 문을 연 무대가 5개가 넘었다. 같은 해에 설립된 광덕루(广德楼)와 함께 지금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만담인 상성(相声) 상설 공연장으로 변해 다소 아쉽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경극 공연을 볼 수 있는 무대는 많다.

 

청나라 말기가 되면 경극은 더욱 번창한다. 최고의 경극 배우 담흠배(谭鑫培)가 삼경원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면 난리가 났다. 특히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황충(黄忠)을 연기한 정군산(定军山)은 최고였다. 노익장을 과시해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충직하고 결의에 찬 장군을 멋지게 연기했다. 이 정군산 공연을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1892년 풍태(丰泰) 사진관을 창업하고 일본에서 서양 필름을 배운 임경태(任庆泰)였다. 경극을 30분가량의 영화로 촬영했다. 동인당 옆 대관루(大观楼)에서 무료로 상영했다. 중국 최초의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경극 속 노래를 제창하며 감동의 물결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황제가 거주하는 자금성 남쪽에 서민의 삶과 애환이 깃든 상업 거리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부러운 일이다. 500년 세월을 담은 공간에 생명처럼 숨쉬는 노자호가 있어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16년동안 중국 곳곳을 답사해 중국문화여행 작가로 글쓰기와 강의, 여행 동행을 한다. 저서로 중국문화 이야기 <13억 인과의 대화>, 중국 민중의 항쟁 기록 <민,란>이 있다. 가칭 <차이나는 발품 기행> 시리즈(전 7권)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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