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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기고/오마이뉴스

마오쩌둥이 3번이나 결혼한 까닭은?

최종명작가 중국문화여행 2008.06.13 00:24

[중국발품취재67] 창사의 류사오치, 마오쩌둥 두 국가주석의 옛집

8월 26일 이른 아침, 중국사람들 틈에 끼어 일일 여행을 떠났다. 신중국을 세운 주역인 마오쩌둥(毛泽东)과 류샤오치(刘少奇)의 옛 고거(故居)를 찾아가는 길이다. 날씨는 여전히 덥지만 대형 버스는 에어컨 성능이 좋아서 충분히 움직일만하다. 일요일이어서인지 버스에 사람이 많다. 창사(长沙)는 1년 내내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인 마오쩌둥을 찾는 전국의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곳이다.

버스는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샹장(湘江)을 건너 서남쪽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화밍러우진(花明楼镇)까지 가는 동안 의외로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의아했다. 무릇 국가주석까지 지낸 후난(湖南)성의 유명인사의 고거로 가는 길치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버스는 벼가 익어가는 농촌을 하염없이 달린다. 창장(长江) 이남의 평야지대,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침 도로 양 옆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보니 우리나라 5일장과 비슷한 임시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농산물과 공산품이 다 쏟아져 나온 거리 시장이다.

  
류사오치 고향마을 입구의 패방
ⓒ 최종명
류사오치

화밍러우 마을 ‘류샤오치구리(劉少奇故里)’라고 적혀있는 패방(牌坊) 앞에 버스가 섰다. 이 패방이 바로 류사오치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패방이 바로 한 마을의 입구라는 경계 표시와도 같다. 마을이 크면 패방도 커다랗고 좁은 골목 입구라면 그만큼 조그맣게라도 만들어 세운다. 나무로도 만들어 꼽고 돌로도 세운다. 이 패방은 바로 관광지의 입장권을 파는 곳이 되기도 한다.

류사오치의 동상이 있는 동상광장(铜像广场)에 이르러 사람들은 모두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죽었다 해도 유명인의 동상 앞에서 유독 사진에 집착하는 현상, 중국에서 자주 본다.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호수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옛 농가가 몇 채 있다. 이곳이 바로 공산주의자이며 혁명가이고 신중국 성립 후 국가주석을 역임한 류샤오치의 생가인 것이다. 여행 중에 유명인의 고거를 가면 그 인물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되지만 당시의 생활상이나 가옥구조를 살펴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류샤오치는 1898년에 태어나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마오쩌둥 노선을 따라 창정(长征)에 참가했다. 신중국 성립 후 1959년 4월 마오쩌둥에 이어 중국의 국가 주석(主席)의 자리에 오른다. 문화혁명으로 인해 실각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969년에 서거할 때까지 정치사상가이면서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하이난다오 원창이 배출한 ‘황후’인 씨에페이(谢飞)는 그의 3번째 부인이다. 비록 짧은 기간 국가 주석의 지위이기는 했지만 그 역시 ‘황제’의 격으로 인정해주는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6번 결혼했다. 정말 마오쩌둥이 3번 결혼한 것에 놀랐는데 쌍벽을 이룰 정도이다. 오히려 온건주의자라는 내 선입견에 찬물을 끼얹을 정도가 아닐 수 없다.

  
류사오치 고향마을의 옛 가옥의 모습
ⓒ 최종명
류사오치

첫 번째 결혼은 봉건적인 부모의 권고에 의한 사랑 없는 결혼이었고, 이후 혁명동지이던 허빠오전(何葆贞)은 국민당 군대에 체포돼 옥사했다. 앞서 말한 활달한 성향의 씨에페이와는 혁명의 와중에 짧은 결혼생활을 했으며 4번째 부인인 간호사 왕첸(王前)과는 1남 1녀를 뒀지만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青)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비극적인 이혼을 하게 됐다. 이후 인덕이 풍부하던 주더(朱德) 부부의 도움으로 왕졘(王建)과 5번째 결혼을 하게 됐으나, 불행하게도 그 또한 누구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결혼생활은 단 며칠만에 끝났다고.

한편, 고된 혁명과 불행한 결혼이 이어지는 와중에 그는 심한 위장병을 앓고 체중이 급속하게 주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그는 왕광메이(王光美)와 6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수학 등 과학적 재능은 물론 영어 구사도 뛰어난 재원으로 1948년 혁명에 투신하자마자 류사오치와 결혼했다.

  
류사오치 고거 카오훠우에 있는 약을 달이는 기구
ⓒ 최종명
류사오치

수학여왕이라는 별명답게 원자물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석사이며 20세기 중국 최고의 화제를 낳은 베이징 출신의 여성이기도 하다. 둘은 20년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했고 류사오치의 사망 후에도 그는 사회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그는 특히, '가난한 어머니'들을 지원하는 궁핍 탈피 프로젝트인 행복공정(幸福工程)을 주창했다. 1921년 생인 그녀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2006년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류사오치 고거는 당시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웠다. 창문 앞에 있는 나무책상과 침실, 아궁이가 있는 부엌도 인상적이다. 바닥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화롯불을 두고 약을 달이는 기다란 기구가 있는 카오훠우(烤火屋)는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1961년 고향에 돌아온 주석이 이 마을 탄즈총(炭子冲) 촌민들에게 강의를 했다는 방에 의자와 칠판이 놓여있기도 하다. 류사오치 어머니의 방에는 물레도 있고 많은 농기구들이 놓여 있다. 붉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농가는 지금도 몇 채 남아 있어 탄즈총 마을의 민속촌으로 꾸며놓기도 했다.

근처에는 류사오치 기념관도 있다. 그림으로 이어진 그의 일생과 일대기를 읽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와 현대사를 일람하는 느낌이다. 특히, 1963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 방중 당시 함께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류사오치 기념관에 있는 방중한 김일성 주석을 환영하고 있는 사진
ⓒ 최종명
류사오치

더 재미있는 것은 설명과 함께 김일성(金日成)의 영문 설명이다. ‘Kim Re-cheng‘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Liu Shao-qi’처럼 중국어 병음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데 ‘金’은 ‘Jin’이라고 발음하는데 ‘Kim’이라고 쓴 것이다. 그렇다면 ‘Il-sung’처럼 쓰던가 해야지 성과 이름이 따로 노는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日’의 병음은 ‘Ri’이지 ‘Re’가 아닌데 말이다.

한참 보고 있는데 가이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오라는 것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일일 여행은 편리하게 이동할 수는 있지만 늘 시간이 문제다.

다시, 버스는 마오쩌둥의 고향이 있는 샤오산(韶山)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됐는데 30여명이나 되는 일행을 마오쩌둥 상품 전시장으로 데리고 간다. 실내에서 사진도, 영상도 찍지 못한다는 문구가 있어서 대단한 전시장인 줄 알았는데, 100% 상품 매장이다.

20세기 초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마오쩌둥은 농민봉기로 기틀을 잡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자신만의 중국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확립하면서 장정을 통해 지도자로 조명 받았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신중국을 건국했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과도한 좌파주의였던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정치지도자로서, 혁명가로서 성공과 실패가 점철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최고지도자를 관광 및 캐릭터 상품화하는 독특한 문화적 정서를 만들어냈다.

역시 마오쩌둥은 훌륭한 캐릭터 상품이다. 반신상과 전신상도 있으며 인장(印章)도 있다. 사상전집부터 다큐멘터리 DVD, 우표, 시를 적어놓은 쟁반, 사진이 들어있는 목걸이, 리본으로 묶은 부채, 휘장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자그마한 동상은 몇 백 위안도 하지만 몇 천 위안하는 것도 있고 순금으로 만든 동상은 2만위안(약 25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

  
마오쩌둥을 캐릭터로 한 상품들
ⓒ 최종명
마오쩌둥

1시간 정도 상품을 둘러봤더니 과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이다지도 위대한 것인가, 아니면 온 국민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왜 이렇게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인물로서 각광을 받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임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정도로 인간적인 품성을 지닌 것 같지도 않고 감동적인 인물은 더더욱 아닌 것인데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저우언라이 총리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상품화는 또 다른 우상화의 일환인가. 신중국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그 자체, 또는 당 중앙에 대한 신뢰를 영원히 채워가기 위한 전략인가 말이다. 중국을 이해하는 복잡한 코드인 마오쩌둥을 생각하는데 식사시간이다. 그래 식후경이지.

후난 요리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요리인 홍샤오러우(红烧肉) 맛을 볼 수 있었다. 베이징이나 다른 곳에서도 가끔 먹었지만 본토에서 먹는 원조 맛에 비할 수 있으랴. 홍샤오러우는 비계가 두툼한 돼지고기를 재료로 하는데 우리가 먹는 삼겹살(五花肉)에 비해 훨씬 통통한 원육을 깍두기처럼 두텁게 썰어서 삶고 볶은 후 여러 가지 향료를 넣고 만든다. 향기도 좋지만 약간 단맛도 일품이다. 장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맛 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맛있다고 할 것이다.

  
후난요리 중 하나인 홍샤오러우
ⓒ 최종명
후난요리

마오쩌둥이 아주 즐겨 먹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이 요리는 마오씨(氏) 또는 마오자(家) 홍샤오러우라는 이름으로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 퍼져있다. ‘마오자쟈샹차이(毛家家乡菜)’나 ‘샹차이(湘菜) 요리’ 식당에 가면 언제든지 먹어볼 수 있다.

일행들과 함께 홍샤오러우를 먹는데, 중국사람들이 요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할 때 자주 먹어서 잘 알고 좋아한다고 했더니 신기한 듯 쳐다본다. 게다가 자랑스럽게 홍샤오러우에 대해 설명까지 해주더니 많이 먹으라고 한다. 사실 한 테이블에 한 접시씩 나오는 이 요리는 겨우 몇 점 맛볼 정도인데 덕분에 아주 많이 먹었다.

후난성(湖南省) 샹탄(湘潭)의 샤오산(韶山)은 마오쩌둥이 태어난 고향이다. 맛 있는 점심을 먹고 마오쩌둥이 청년시절 즐겨 찾던 해발 500여m의 자그마한 산봉우리 샤오펑(韶峰)을 올랐다.

청년시절에 썼다는 시구(诗词)들을 바위에 새겨놓은 비림(碑林)에는 하얀 대리석에 깃발을 들고 진군하는 그림이 새겨진 벽화가 있고 그 앞에는 마오쩌둥이 농민과 군인들과 함께 동상으로 서 있다. 1893년생인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것이라 한다. 청년기의 혈기를 드러내듯 시 중에 ‘복수’라는 뜻의 빠오처우(报仇), 치욕이란 뜻의 치츠(奇耻)와 같은 글귀가 있기도 하다.

  
샤오산 베이린에 있는 마오쩌둥 조각상
ⓒ 최종명
샤오산

숴다오(索道)를 타고 산을 오르면 관음각(观音阁)이 있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는 샤오펑쓰(韶峰寺)라는 사원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고대시대에 봉화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주위가 한눈에 다 드러나는 높은 봉우리 정상에 사원 하나가 있고 향불을 피우는 화로 하나가 한가로운 모양으로 향을 태우고 있다. 사원 뒤에서 종이 울려서 가보니 그냥 길에서 주웠을 것 같은 나무로 종을 치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무나 와서 종을 치고 가도 된다. 사원이긴 하지만 거의 관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산을 내려와 마오쩌둥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 동상 아래서는 많은 사람들이 화환을 바치는(敬献花篮) 행사를 하고 묵념을 올린다.

  
마오쩌둥 고향에 있는 동상광장 앞에 많은 화환이 놓여있다
ⓒ 최종명
마오쩌둥

앞서 말한 6번에 걸친 류사오치의 결혼은 대체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던 혁명 시기에 이뤄진 불행한 삶이어서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반면 마오쩌둥의 3번의 결혼은 그의 인간적인 품성이 그의 사상과 철학, 혁명이론에 비해 너무나 그 격이 떨어져서 안타깝다고 하겠다.

마오쩌둥은 1920년 당시 창사에 있던 은사 양창지(杨昌济)의 딸인 양카이후이(杨开慧)와 동거를 한다. 1919년 베이징에 있던 마오쩌둥은 양창지의 소개로 리다오자오(李大钊)를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게 된다. 이 시기 마음에 두었던 양카이후이를 찾아 결혼을 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조직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마오쩌둥은 농민폭동의 실패로 징강산(井冈山)으로 들어갔고 1927년 장씨(江西) 출신으로 고향 융씬(永新)의 ‘한 떨기 꽃(一枝花)’ 또는 ‘제일미녀(第一美女)’라 불리던 당시 17세의 나이의 허즈쩐(贺子珍)과 동거를 시작한다.

본처인 양카이후이가 징강산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마오쩌둥은 당이 둘 사이의 이혼을 불허하게 되자 당시 후난 군벌이던 허젠(何建)의 손을 빌어 그녀가 죽도록 방조했다. 군사를 동원해 허젠을 압박하고 밀서를 전달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군벌에 체포된 그녀는 29세의 나이로 영웅적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의 자료들을 보면 수호지를 즐겨 읽었던 그가 차도살인(借刀杀人)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겠다고 발표하면 살려주겠다는 군벌의 요구에, 죽어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양카이후이는 결국 사형 당하게 된다.

함께 체포됐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포함해 세 아들은 양카이후이의 사형 이후 곧바로 상하이로 보내지고 그 직후 당은 마오쩌둥과 허즈쩐의 결혼을 허가하게 된다. 양카이후이 아버지 양창지의 제자이고 마오쩌둥과 동문수학한 쌰오즈셩(萧子升)은 <마오쩌둥과 함께 구걸하다(和毛泽东一起行乞记)>라는 책에서 이를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마오쩌둥이 가장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허즈쩐과는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을까. 기록을 보면 허즈쩐은 1937년 갑자기 옌안(延安)을 떠나 씨안(西安)을 거쳐 소련으로 병을 치료하러 간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후 1948년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장정(长征)을 함께 한 부부이자 비서이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상하다.

  
마오쩌둥 고거를 방문한 중국사람들
ⓒ 최종명
마오쩌둥

그것은 1937년 당시 옌안에 있던 미국기자인 스메들리(史沫特莱)의 통역인 우리리(吴莉莉)와의 연분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예뻤다는 양귀비에 필적할(杨贵妃相媲美)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던 우리리를 마음에 두고 있던 마오쩌둥은 어느 날 그의 숙소를 찾아가다가 허즈쩐에게 들통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마오쩌둥의 반대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떠났고 결국 둘 사이는 파경을 맞게 된 것이다. 허즈쩐은 귀국 후 전국정협위원까지 지내는 등 활동하다가 1984년 사망하게 되지만 마오쩌둥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허즈쩐이 떠난 이듬해인 1938년, 막 옌안에 온 24살의 리윈허(李云鹤) 즉, 장칭(江青)과 결혼한다. 신중국 건립 후 주로 당 선전 영화 부문에서 활동하던 장칭은 문화대혁명의 4인방 중 한 명으로 천하를 주무르지만 1977년 출당조치를 당하고 사형 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1991년 5월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양카이후이를 본처라는 뜻의 위엔페이(原配), 허즈쩐을 후처라는 뜻의 지페이(继配), 그리고 장칭은 재취라는 뜻으로 자이취(再娶)라 한다. 이렇게 마오쩌둥과 결혼한 부인들을 나누어 부르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다. 문제는 마오쩌둥의 결혼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없다. 가난, 혁명, 투쟁 속에 피어난 감흥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실망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이고 사상가이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그리 본 받을 만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억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살아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대통령이 비리 등에 연루되면 바로 엄청난 후 폭풍이 생기는데 비해 마오쩌둥은 수많은 캐릭터 상품 속에 여전히 살아있고 1년 내내 방방곡곡에서 그의 탄생지를 방문하니 말이다.

신중국의 국가주석으로 중국인들의 지도자로 남아있는 그의 고거(故居)에는 1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공안(公安)이 감시하지만 관람은 공짜다. 집 내부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 그대로 별로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람들은 연꽃이 무성한 작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마오쩌둥이 태어난 고향 집 앞에서
ⓒ 최종명
마오쩌둥

후난성은 공산혁명의 발원지라 할 정도로 유명인들의 고거가 많다. 출생지는 아니더라도 혁명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라 이곳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 샹탄(湘潭) 시는 마오쩌둥, 류샤오치와 함께 인민해방군 원수(元帅)를 지낸 펑더화이(彭德怀)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증국번(曾国藩), 요절한 인민해방군 군인 레이펑(雷锋), 20세기 중국 최고의 화가이며 서예가인 치바이스(齐白石), 인민해방군 창건자 중 한 명인 뤄룽환(罗荣桓), 인민해방군 대장인 천겅(陈赓), 소수민족인 투자족(土家族)으로 최초의 여성당원 중 한 명인 샹징즈(向警予) 등 20세기 전후 중국을 움직인 인물들이 대거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중국 공산당 혁명사를 읽은 느낌이다. 더운 날씨 때문일까. 두 국가주석의 생애를 따라가는 과정에 땀이 많이 난다. 그들의 삶을 읽는 것은 지금의 중국을 보는 힘이기도 하지 않을까. 땀이 나더라도 열심히 쫓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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