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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이 다 갔다. 올해는 참 전과 달리 중국전문블로거에게는 베이징올림픽이라는 화두가 있었다. <올림픽아웃사이드>에서 즐거운 기사를 찾던 중, 사실 대부분의 취재를 마치고 마무리를 하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이징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매하고, 당일 티켓이 여의치 않아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김해공항에 도착. 그렇게 몇년 동안 병환을 앓던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난 다음, 집에 머물며 아버지와 집안에 남아있는 옷가지를 비롯해 어머니 흔적을 지우고 있었는데, 불현듯 30년전의 일기장이 등장했다.    



혹시라도? 하는 심정으로 30년 전에 '근제(近製, 아마도 근래에 제작됐다는 뜻일 것이리라)'라는 독특한 표시까지 30년 세월을 되살리게 하는 천일사를 인터넷으로 뒤져봤다. 역시 무슨 전축회사 이름만 있고 이 'Landscape' 브랜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앞면에는 'World Report'라고 써 있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올 법한 사진이 낯설다.

뒷면에는 10장의 사진이 있다. 말달리고 배가 떠다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노을이 지는 모습, 알프스 산맥도 모두 처음 보는 기억이다.

더 재미난 일은 일기장 속에 적힌 내용들이다. <79년 1월 30일 화요일, 흐림>부터 시작된 일기장 속에는 '나 아닌 나'가 30년이라는 세월만큼 멀리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억이란 기억해보자고 애쓰기 시작하면 할수록 점점 새털같은 가벼움으로부터 되살아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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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다음 날이어서 그런지 매우 쌀쌀했다. 구정이어서 노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 친구들도 보고 싶고 빨리 내일 과외수업이 오기가 기다려진다. 친구들 모두 연합고사에 합격했는 지도 궁금하다. 혹시 떨어진 친구가 있으면 친구의 입장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 않니. 오늘이 낙방을 내일의 영광이 되게 노력해라'라고 말하고 싶다."

30년 전, 중학교 3년을 마치고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봐야했다. 친구들에 대한 '유치(?)'해 보이는 걱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꽤 진지한 고민이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약간 낯 뜨겁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정도 다른 어떤 정에 의해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바로 모정, 어머니의 정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계몽주의자의 교훈같은 메시지를 머리 속에 담고 살았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그다지 효성스럽지 못했던 아들이 당시에 이다지도 간절한 염원으로 일기를 썼더란 말인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일기장은 학교에 숙제로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글쓰기가 좋았던 30년전의 '나'의 비밀스런 기록일 뿐이었던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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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고됨을 내일의 행복을 위해 어머님 말씀대로 '3년만' 열심히 공부하고 놀아야겠다."

이 일기장에는 중3을 마치고 고1의 생활과 고뇌가 다 담겨져 있었다. 2월 19일 고등학교 배정을 받은 날, 3월 7일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공부하는 방법 훈시, 4월 15일 처음으로 3월 고사시험 성적이 나온 날, 5월 23일 중간고사 석차 목표, 7월 15일 방학을 앞두고 나태해진 마음, 9월 26일 매일 3,400워닉 쓰는 용돈에 대한 일기까지 차곡차곡 한자한자 읽어가니 타임머쉰만큼은 아니어도 당시 상황들이 생생하게 다시 겪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30년전에도 이다지도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중3이 되는 우리 아들을 비롯해 아이들이 받는 공부에 대한 느낌이나 학교생활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부담을 무엇으로 풀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을까? 또는 지금의 아이들은?

나는 아마도 농구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을 닮아 아들 우혁이도 매일같이 농구장에서 몸을 풀며 시합도 하고 친구랑도 사귄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아마도, 소위 '시'라는 것을 썼다. 일기장 뒤쪽부터에서 시작해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베껴놓기도 했다. 한자로 <世界名詩>라고 쓰고서는 '바이런', '하인리히 하이네', '테오도르 슈토름', '헤르만 헤세', '롱펠로우'의 시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어서, 간혹 썼던 자작시를 보노라니 아무도 보는 이 없건만 얼굴이 붉어지고 낯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일기장을 덮어야 했다.


1979년 9월 25일, 나는 왜 '울리어야 하는 사랑의 기쁨'이란 제목의 시를 쓰고 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었을까.

온 세상이 다 변한다 하여도
이 세상에 기쁨이 사라진다 하여도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걷는다 하여도
막지 못 할 우리의 아픔이 있다고 하여도
나를 위한 미소를 지어준다면
그 누구를 위한 나의 인생의 종을 울리리라.

괴로움과 슬픔이 뒤섞이어
마음이 혼란하여 정신이 없다 하여
사랑의 말을 할 수 없다면
그와 아니 그녀와 나에게서 붉은 신호등이 켜진다 하여도
저 높은 좋을 향해 머나먼 인생항로를 위해
그 누구를 위한 사랑의 기쁨을 나누어 주리라.


도대체 무슨 뉘앙스의 감성을 담은 것일까. 이 시를 끝으로 <내 30년 전의 일기장>은 끝이 났다.

툭 튀어나온 과거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저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 오랫동안 묵혀 있던 와인이건 된장이건 맛과 취향에 따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갖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고서는 긴 세월에게 맛갈스런 초대를 받은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가셨다. 30년 동안이나 아들의 일기장을 어디다 숨겨두셨다가 이제서야 햇빛을 보게 하시는가. 쏜살같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오랫동안 <내 일기장>은 어머니가 남기고자 하신 마음의 징표가 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머니 얼굴을 오랫동안, 매일같이 바라볼 수 있도록 <내 일기장> 대신에 <블로그>에 남기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4년 가까이 손수 병치레를 맡아 하셨다. 워낙 아버지의 놀라운 끈기와 애정으로 돌보신 지라... 떨어져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아버지랑 함께 2주일 가량 생활 했었는데, 어머니를 향한 그 진한 정이 핏줄기보다 더욱 붉게 내 온몸을 파고 들더라.

발인을 마치고 저녁 먹는 자리에서 '엄마는 정말, 여자로서, 엄마보다 더한 여자다운 사람은 없을거다' 하셨는데, 병치레 내내 이야기와 돌아가시는 상황을 두루 말하신 후의 말씀이라, 눈 속 가득 눈물 담고 하신 말씀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납골당 안에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날, 함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라 하셨다. 처음 만나 한번에 마음에 드셨기에, 중국말로 '이졘중칭(一见钟情)' 하신 것이다. 그 당시의 사진이자 두 분의 최초의 사진이니 45년도 더 지난 사진인 것이다.

다소곳 피어난 한떨기 싱그런 꽃잎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존경과 사랑의 시작, 일생의 출발이 된 징표. 이 사진을 챙긴 아버지는 액자에 고이고이 넣고 아들들과 손자 손녀 앞에서 이 '최초의 사진'을 공개하신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 앨범을 보면서 간혹 봤던 바로 그 사진이 '처음 만나 맺은 약속'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세월을 두루 묶어 <일기장>과 <사진>까지 다 모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는 듯하다.

30년 전의 추억같은 일기장을 여전히 남겨두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45년 전의 아리따운 어머니를 여전히 남겨두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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