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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공산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 후진타오와 국가부주석 시진핑

'13억의 나라'[1] 중국은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이끌고 가는 국가다.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거쳐 중앙위원회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구성하며 중앙위원회는 총서기와 당 정치국상무위원, 당 정치국위원 및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선임한다. '당 중앙'이라고 하면 중국공산당 지도자 그룹을 상징하는 최고의 권력 중심이다.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는 5년마다 열리며 당 조직의 개편과 전략적 기조를 결정한다. 2007년 제17기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204명)과 후보위원(167명)이 중국 지도자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정치국위원(25명)과 정치국상무위원(9명)을 최종 확정한다. 2012년 10월 제18기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당 중앙'의 세대교체가 단행될 예정이다.

중국 정치인은 입당 후 일정한 정치 라인에 속해 계파 사이의 경쟁과 안배를 통해 당 정치국으로 들어가는 최종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그 마지막에 공산당 총서기가 있다. 공산당 지배 체제에서 총서기는 곧 국가 주석이 된다. 13억 인구와 광활한 땅과 경제성장, G2로의 비상을 추진하는 황제의 등극이 아닐 수 없다.

천안문 사태 이후 상하이 출신의 장쩌민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격세지정(隔世指定)[2]을 약속한 덩샤오핑의 안배로 후진타오는 황제에 등극한다.

(사진설명: 후진타오 총서기 및 국가주석(왼쪽), 시진핑 국가 부주석(오른쪽))

후진타오 锦涛

중국의 1인자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공산당과 국가를 대표한다. 당과 국가의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대의 수장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 전국대회에서 먼저 총서기로 확정된 후 국회 기능을 가지는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국가 주석으로 선출된다.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 출생, '산 좋고 물 좋다'는 안후이(安徽) 지시(绩溪) 사람으로 칭화대학 수리공정학과를 졸업한다. 1964년 입당과 함께 칭화대학(清华大学)에서 정치후보원이 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좌절의 시간을 거친다. 이후 수리수전부(水电部) 산하 간쑤(甘肃) 성 류자샤(刘家峡)에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해 1974년 간쑤 성 건설위원회 비서로 업무능력을 인정 받는다.

1984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3]로 중책을 맡으며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한다. 후야오방의 실각으로 소수민족 거주지인 구이저우(贵州) 서기를 거쳐 '티베트' 독립운동이 치열했던 1988년 시짱(西藏) 자치구 서기로 부임한다. 덩샤오핑과 당 원로인 쑹핑(宋平)[4]의 후원으로 1992년 중앙 정치 무대로 화려하게 등장, 당 정치국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을 맡으며 후계자로서 자리매김을 한다.

공산당 내 공청단 계열의 리더로서 장쩌민 전 주석의 가신이기도 했던 쩡칭훙(曾庆红)의 지원을 끌어낸 후 상하이방을 무력화시켜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조성한다. 2003년 16회 3중 당 전국대회에서 표명한 과학발전관(科学发展观)은 경제 사회의 지속적 개혁과 인본 및 화해를 강조하는 통치 철학으로 현 중국의 세계 전략과 내부 조화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고충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 近平

차기 총서기 및 국가 주석으로 내정된 당 정치국상무위원 시진핑은 국가부주석, 당과 국가의 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중앙서기처 서기 및 중앙당교 교장을 겸임하고 있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출생, 산시(陕西) 푸핑(富平) 사람으로 칭화대학교에서 화공과 유기합성을 전공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옌안으로 하방, 고초를 겪은 후 1974년에 입당한다. 아버지인 당 원로 시중쉰(习仲勋)[5]의 후광으로 1979년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겅뱌오(耿飚)[6]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겅뱌오의 실각 후 돌연 군복을 벗고 1982년 허베이 성 정딩(正定) 현에서 부서기와 서기를 거치며 기층에서의 행정 경험을 쌓는다. 1985년 푸젠 샤먼(厦门)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시중쉰과 동지적 관계이자 당시 개혁파로서 푸젠 성 서기이던 샹난(项南)[7]의 지원 아래 정치 행정가로서 단련을 받는다.

이후 17년 동안 푸젠 성의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을 이끌었으며 2000년 성장이 된다. 2002년 저장 대리성장과 서기를 거쳐 2007년 3월 상하이 서기로 전격 발탁된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권력 경쟁 과정에서 상하이 시의 부패 사건과 서기인 천량위(陈良宇)[8]의 낙마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불과 7개월 만에 2007년 10월 당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입성, 공청단의 리커창보다 서열이 앞서며 후계자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공청단과 상하이방의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태자당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쩡칭홍(曾庆红)[9]의 승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후진타오와 장쩌민 양 조직으로부터 적대적 관계가 없으며 기층으로부터 단련된 행정 경험, 당 원로로부터도 인정받는 무난한 지도자인 것이 장점이다. 군 경험이 없는 리커창에 비해 인민해방군 최연소 문관 장군이자 인민군 가수인 부인 펑리위안(彭丽媛)도 군의 지지와 관련, 유력하게 작용했다는 평가이다.

13억 중국의 황제, 국가 주석이자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는 시진핑으로 권력을 승계한다. 하지만 양위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파벌의 승계까지 고려하면 매우 복잡한 내부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전 충칭 시 서기 보시라이의 부정 부패 사건은 차기 당 대회에서 실권을 노린 권력 투쟁의 양상이기도 하다. 전국적, 전 방위적, 각 계파 별로 치열한 자리 다툼과 권력 라인 구축을 도모하는 시기이다.

태상황 장쩌민과 태상황이 될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을 내세운 쩡칭훙은 이전투구 하면서도 합리적인 타협의 결과물을 내놓을 전망이다. 더불어 시진핑 '황제'의 리더십도 향후 10년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것이다.


참고--------------------------------------------------------------

[1] 국가통계국은 2011년 말 기준 중국 대륙(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 해외 화교 불 포함)의 총 인구는 13억4천7백3십5만 명이라고 발표 (2012.1.17)

[2] 한 세대를 거쳐 다음 지도자를 지정한다는 뜻으로 태상황이 될 장쩌민의 후계 구도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3] 1922년 창단 이래 서기(또는 총서기)와 집행위원 체제이다. 1957년 후야오방이 '제1서기'가 된 이래 줄곧 제1서기와 서기 체제로 운영된다.

[4] 1917년 출생한 중국 공산당 원로로 당 정치국상무위원 및 중앙조직부 부장을 역임. 후진타오 총서기의 정치적 후견인이다. 2011년 7월 당 창립 90주년 행사에 나타나기도 했다.

[5] 1913년 출생(2002년 사망)한 혁명가로 마오쩌둥이 '제갈량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할 정도로 지략과 인품을 겸비, 개혁개방 시대 광둥 성 서기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며 두루 신임을 얻어 시진핑에게 커다란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

[6] 1909년 출생(2000년 사망)한 혁명가, 군사전문가로 문혁 이후 국무원 부총리와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국방부장을 역임, 덩샤오핑 노선과 충돌해 한직으로 밀려난다.

[7] 1918년 출생(1997년 사망)한 혁명가로 푸젠 출신으로 제1기계공업부 부부장 및 1980년대 푸젠 성 서기를 역임했다.

[8] 1946년 출생, 평생을 상하이에서 근무했으며 2006년 서기 재임 당시 후진타오의 상하이방 척결을 도모한 사회보장기금 유용 사건으로 수뢰 및 직권 남용으로 18년의 유기징역 등을 선고 받았다.

[9] 1939년 출생, 공산당 원로 쩡산(曾山)의 아들로 1960년 입당했으며 2003년부터 후진타오에 이어 국가 부주석을 역임했으며 시진핑에서 자리를 물려준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겪으며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한 태자당의 실질적 리더. 시진핑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다.

Global News Network '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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