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20] 명나라 멸망과 이자성의 민란 ①


1620년 명나라 황제 중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암군(暗君)으로 평가되는 희종이 즉위한 후 무사안일과 쾌락에만 몰두하자 환관 위충현(魏忠贤)은 세도정치로 전횡을 일삼으니 사회는 문란하고 정치는 부패했다. 위충현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사대부 집단인 동림당(东林党)을 탄압했으며 감찰과 특무를 전담하는 명 왕조의 비밀경찰조직 동창(東廠)을 장악하고 중앙 관료 사회는 물론 지방의 행정과 군사 조직까지 쥐락펴락하는 공포정치를 조장하니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의 삶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암울했다.


1622년 문향교도(闻香教徒) 서홍유(徐鸿儒), 왕호현(王好贤), 우홍지(于弘志) 세 사람은 중추절에 산동 운성(郓城), 하북 계주(蓟州, 현 계현蓟县), 경주(景州(현 경현景县)에서 동시에 궐기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밀고자가 발생해 봉기를 준비하던 골간들이 체포되자 서홍유는 6월에 단독으로 봉기를 일으켰으며 산동 조주(曹州, 현 하택菏泽) 일대의 백련교도와 압제에 허덕이던 운성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피의 맹세를 하고 머리에는 홍건을 묶고 손에는 칼과 창을 움켜쥐고 주변 촌락을 차례로 점령한 후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기반한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온 후 선종과 정토종 등 실천을 중시하고 중생 구원까지 염원하는 대승불교(大乘佛教) 사상이 전파되자 민간의 다양한 욕구를 받아들여 질적으로 변모해온 백련교 역시 민란의 역사와 함께 부침을 계속했다.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득도하는 소승불교보다 중생 구원 사상인 대승불교의 교의는 어쩌면 민란 지도자의 정치적 목적이나 추구하는 이상에 더욱 적합했다.


여우 꼬리에서 향기가 나다


▲ 백련교 일파인 문향교는 함정에 빠진 여우를 구해주고 얻은 꼬리에서 향기가 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하북 난주에서 창립됐다. 사진은 난주고성의 입구. ⓒ 최종명


백련교의 일파인 문향교는 대승교라고도 불리는데 북경 동쪽 지방인 하북 난주(滦州, 현 난현滦县)에서 왕삼(王森)이 창립한 민간종교로 비밀리에 교도를 조직하고 하북,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등으로 신도를 확장해나갔다. 북경 서쪽 보명사에서 여우(吕牛)가 개창한 서대승교(西大乘教)와 함께 동대승교라 불렸다. 특히 자신이 우연하게 함정에 빠진 여우 한 마리를 구해줬는데 그 보답으로 야릇한 향기가 풍기는 꼬리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말로 신도들을 규합했기에 문향교라고 불렸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혼합하고 연등불, 석가불, 미래불을 신봉하면서 세계의 종말과 창세의 신을 주장하며 미륵의 도래를 갈구하는 구세주 사상을 설파했다.


왕삼은 신도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와중에 분쟁에 휘말려 체포됐다가 뇌물을 주고 방면된 후 수도 북경을 무대로 선교하다가 또다시 체포된 후 옥사했다. 교주의 권위를 이어받은 셋째 아들 왕호현과 제자 서홍유와 우홍지는 신도의 세력을 믿고 봉기를 통해 말세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며 민란을 조직했던 것이다.


서홍유는 봉기 후 곧바로 중흥복렬제(中兴福烈帝)로 옹립됐으며 대승흥승(大乘兴胜)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관직을 두는 등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선포했다. 당시 농민들의 환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부녀자들이 나팔꽃을 꺾어 민란군의 마차에 장식했으며 곡식과 음식을 던져줬으며 다투어 환호하는 모습이 마치 극락세계인 듯 하다.'고 지방 현지에 적혀 있을 정도였다. 운성과 거야(钜野)를 점령한 후 백련교 수령들을 파견해 산동 남부 일대로 진공해 운하가 지나가는 마을을 장악하고 관군의 조운(漕运)을 통제했다.


사전에 수립한 면밀한 계획대로 민란에 참여한 가족들을 송나라 시대 민란 근거지였던 양산(梁山)에 안치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민란군은 군기를 엄중하게 유지하며 투쟁의 예봉이 미치는 지방마다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고 아버지와 남편의 복수를 하려는 남녀노소가 분연히 일어나 수만 명의 세력으로 불어나니 각 지방의 경공만상(惊恐万状)한 관료와 지주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기 바빴다.


서홍유는 다시 운하를 건너 조운의 요충지인 추현(邹县, 현 추성邹城)과 등현(滕县, 현 등주滕州)를 점령해 물자 공급의 명맥을 끊어버리자 명 조정은 '이곳을 잃었으니 국가 진로가 궁핍해졌다.'고 한탄했다. 전군 동원령을 내렸으나 만주족과의 요동전쟁으로 인해 여력이 없었기에 지방의 무장조직인 향용(乡勇)까지 가세해 민란군 진압에 나섰다. 이때 맹자의 고향 추성에 위치한 맹부(孟府)의 주인으로 66대 직계자손 맹승광(孟承光)도 진압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했으며 민란군에 의해 일가족이 살해 당했다.


서홍유는 추현을 근거지로 삼고 연주(兖州), 곡부(曲阜), 패현(沛县), 일조(日照), 담성(郯城, 현 임기临沂)의 운하들을 차례로 장악해 산동 남부를 종횡무진으로 내달렸다. 명 조정은 동원 가능한 산동의 관군과 향용에게 민란군을 포위하라고 거듭 명령을 내려 연합작전으로 민란군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6월말 형세가 불리해지자 서홍유는 사태를 총체적으로 관망해 냉정하게 분석한 후 침착하게 대응했으며 적극적으로 전세를 뒤집고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킨 다음 용감하게 전진했다. 6월 말 관군이 공격해오자 거야와 운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군사를 이동시킨 후 운하를 세 번 건너 관군의 후방을 습격하니 관민 연합군은 추현에 대한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7월에는 관군의 위치를 정찰해 강한 부분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향해 군사를 이동시켜 경항운하(京杭运河)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군량미 공급 통로 휘산(微山)의 하전(夏镇) 나루터를 장악했다. 이곳을 통과하던 양식 선박 40척을 중간에 탈취해 관군의 병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했으며 곡부를 함락시켜 대량의 군량미와 병기를 손에 넣었다.


전국 각지에서 서홍유의 민란에 자극을 받은 봉기가 급속히 확산됐는데 문향교 동지 우홍지가 봉추회(棒棰会)를 조직한 후 하북 백가둔(白家屯), 조다(赵大)와 유영명(刘永明)도 애산(艾山)에서 봉기했다. 9월까지 산동, 하북, 하남과 멀리 사천의 백련교도들도 서홍유를 본보기 삼아 봉기했으니 봉화가 만천소기(漫天烧起)하듯 전국적인 기세로 불타올랐다. 민란의 주모 그룹인 교주 왕호현과 서홍유, 우홍지와 함께 유영명은 문향교 민란의 사대금강(四大金刚)으로 불렸다. 유영명은 안민왕(安民王)으로 추대됐는데 서홍유와 연계해 전투를 벌렸다.


서홍유 민란은 위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그 활동 범위는 산동 남부 일대에 머물렀고 계획대로 각 현과 운하를 장악했지만 승리의 여세를 몰아 보다 넓은 투쟁 전략을 설정하지 못했다. 관군의 토벌에 맞서 각 성을 고수하는 소극적인 작전으로 일관했다. 9월에 이르러 연주를 잃어버린 후 추현을 고수하는 전술로 관군과 맞서느라 3개월을 포위 당하고 있었으며 11월에 이르러 양식이 소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성과 운명을 함께 할 결심으로 맞섰지만 적장의 귀순 심리전에 말렸으며 뜻밖에도 서홍유는 배신자의 간계에 빠져 생포됐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 일가친척 18명과 함께 북경으로 압송돼 목숨을 잃었다.


▲ 문향교도 서홍유은 운하가 지나는 산동 일대를 무대로 벌어진 민란으로 명나라 농민투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경항운하가 지나는 양주 부근 운하 유람선과 야경. ⓒ 최종명


서홍유의 희생 이후에도 산동 일대의 민란군은 항복하지 않고 교전을 이어갔지만 차츰 관군에게 희생되는 숫자가 늘었다. 6개월에 걸친 서홍유의 문향교 민란이 불꽃을 피우지 못하고 끝났지만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 말기 농민투쟁의 점화를 초래한 명나라의 고상종(敲丧钟)이라 평가할 만 하다. 


백련교를 모태로 발전한 문향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시기 다시 소생했다가 청나라 건국 후 당시 교주 왕가(王可)가 정부에 투항해 고위 관직을 얻기도 했으며 사후에 강희제로부터 원훈을 받기도 했다. 이에 고무된 각 지역의 교도들이 친목모임을 명분으로 종교활동을 열었다가 잔혹하게 진압됐으며 다시 포교 금지령을 당한 후에 청차문교(清茶门教)로 개명했다. 건륭제 이후 제2의 전성기가 도래해 가경제 때 발생한 천리교 민란에 합세한 후 자금성 공격에 참여했다가 왕씨 집안이 와해되는 등 큰 곤욕을 당했다. 청차문교는 점차 쇠락했지만 동대승교의 교의 사상은 기층 농민들 사이에서 계속 전승돼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에 일관도(一贯道) 조직으로 부활했으며 지금도 대만과 홍콩 등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명나라의 종말을 외치기 시작하다


명 희종 말년 섬서 지역은 기근에 시달려 가뭄과 병충해가 난무했고 전답은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굶어 죽는 백성이 도처에 널린 아표편야(饿殍遍野)의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풍부한 남방의 대규모 전답은 당시 활발했던 해외와의 교역 때문에 북방으로 공급되지 못해 양식이 더욱 궁핍한 처지였으니 그에 상응해 곡물가격이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다. 조정의 재정 수입도 급격하게 줄어 옹색한 판국이라 백성에 대한 구휼은 말 뿐이었니 살아갈 방도가 전혀 없어진 농민들은 막판에 몰려 이판사판 정이주험(铤而走险), 봉기 밖에 살아갈 돌파구가 없었다.


섬서 부곡(府谷)에서 왕가윤(王嘉胤)이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후 사망했고 왕자용(王自用)이 뒤를 이었다가 병사하자 고영상(高迎祥), 장헌충(张献忠), 나여재(罗汝才)가 연이어 민란 지도자로 떠올랐다. 민란 각 부대를 전전하며 걸출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이자성(李自成)은 북경을 점령해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1628년 왕가윤의 봉기 이후 1644년까지 중원을 휘젓고 다닌 강호의 영웅들이 벌린 치열한 '민란 무협'은 결국 동북의 만주족에게 권좌를 내놓는 계기가 됐다.


▲ 명나라 말기 황토고원의 척박한 섬서 북부에서 많은 민란영웅이 등장해 봉기를 주도했다. 사진은 섬서 북부도시 유림의 홍석협. ⓒ 최종명


왕가윤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작은 탄광에서 광부로도 사는 등 주거 부정의 깡패나 다름 없이 살다가 변방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와 봉기를 일으켰다. 목숨만 겨우 붙어 있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농민들은 물론 군량 배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하급 병사들, 거리를 떠돌던 부랑아들까지 몰려들어 갈수록 세력이 불어났다. 수덕(绥德)에서 봉기한 후 합류한 왕자용(王自用)과 함께 황용산(黄龙山)을 점령해 근거지를 확보했다. 1년 전 섬서 백수(白水)에서 봉기한 농민 왕이(王二)가 1628년 겨울 귀순해 합류하자 명실상부한 민란군의 모습을 갖추고 명나라 말기 민란의 서막을 열었다.


왕가윤은 3만 명에 이르는 조직이 갖춰지자 왕을 자칭하며 명 조정의 병부상서 홍승주(洪承畴)가 통솔하는 관군 주력부대를 격퇴시키자 섬서, 산서, 감숙 일대에 널리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다. 왕가윤의 성공을 눈 여겨 본 섬서 지역의 청년 장수들이 앞다투어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자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 참가한 왕좌괘(王左挂) 부대가 의천(宜川)에서 봉기했으며 두 번째 의탁했던 장존맹(张存孟) 부대는 낙천(洛川), 세 번째 주인 고양상은 안새(安塞)를 무대로 민란 역사에 등장했다. 그 밖에도 왕대량(王大梁)은 한남(汉南, 현 한중汉中 남부), 나여재는 연안(延安)에서 봉기한 민란지도자였으며 이자성과 라이벌이던 장헌충도 1630년 고향 정변(定边)에서 등장하는 등 수많은 맹장들이 출현했는데 대부분 왕가윤 민란군 휘하에 합류했다.


1630년에 이르러 왕가윤이 주도하는 민란군은 수만 명의 군사와 병마가 집결했으며 휘하 장군만해도 백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군 조직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각각 통솔하는 승상 관직을 도입했다. 그런데 왕가윤이 고향의 요묘촌(尧峁村) 마을의 명문세가인 장씨 집안의 규수를 빼앗아 혼례를 올렸는데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 장씨 집안은 자기 딸이 도적떼에게 강제로 뺏긴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1631년 여름 토벌군 대장 조문소(曹文绍)는 격전을 치를 때마다 매번 패퇴하자 왕가윤의 처남 장입위(张立位)가 토벌군 병사로 근무하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투항하는 계책을 꾸몄다. 민란군에 투항한 후 누나의 도움으로 왕가윤의 신임을 얻어 호위 무사가 된 장입위는 왕가윤과 동향이자 민란군 병사 왕국충(王国忠)과 공모해 기회를 엿보다가 만취해 장막에서 잠을 자는 왕가윤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왕가윤의 나이가 40세 정도였다고 하니 한참 꽃을 피울 시기에 희대의 맹장들을 두루 거느린 민란 주모자가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배신자들은 명 조정에서 봉록을 먹으며 살았는데 장입위는 청나라 군대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왕국충은 이자성 민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후 면직 처분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덕(绥德)을 지키고 있다가 이자성의 조카 이과(李过)에 의해 생포됐다. 이자성은 즉시 흉수이자 배신자를 취지정법(就地正法)으로 다스리라 명령했으니 체포 현장에서 바로 극형에 처해졌다.


왕가윤의 사망 후 당시 36개 군영의 장수들은 20여 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란군 맹주로 왕자용을 옹립했다. 왕자용은 이듬해 1632년 하남 북부로 진출해 산서 심수(沁水)를 포위했으며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유차(榆次), 수양(寿阳)을 거쳐 태원(太原)을 공략했지만 토벌군에 가로막혔다. 하남으로 후퇴한 후 하북 무안(武安)에서 전투 중 중상을 당해 은신처에서 병사했다.


왕자용 뒤를 이어 민란 연합군의 맹주가 된 고영상은 말 판매상을 했기에 말을 탄 채 화살을 잘 쐈으며 힘이 장사였고 전투 중에 흰 옷과 흰 두건을 둘렀으며 늘 선두에 서서 병사를 이끌었다. 왕가윤의 근거지 황용산에 합류한 후 민란군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왕자용을 옹립한 36개 군영 회의 당시 이자성, 나여재, 장헌충 부대를 휘하로 둔 세력을 기반으로 틈왕(闯王)이란 호칭으로 불렸다. 왕조를 멸망으로 몰며 직접 황궁을 장악한 희대의 민란 주인공 이자성이 바야흐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 명나라 말기 초기 민란군 지도자 왕가윤의 뒤를 이은 왕자용은 2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산서 유차, 수양, 태원까지 진출했다. 사진은 유차고성 앞 광장.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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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9] 계급모순과 민족의식 분출 명나라 민란 ②


환관 정치가 살아나고 9살 나이에 정통제가 황위에 오른 1439년 운남 서부 소수민족인 태족(傣族)의 터전 녹천(麓川) 지방에서 명나라 초기부터 군과 민을 관리 감독하던 선위사(宣慰司) 집안의 사임발(思任发)과 사기발(思机发)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 조정은 10년 동안 4차례에 걸친 대규모 토벌을 단행했다. 수십만의 군사가 동원되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토벌에 실패하고 봉록과 작위를 세습한다는 조건으로 맹약을 맺었다. 


왕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상호 협약은 토벌군의 동선이 길기도 했지만 녹천의 반란으로 인해 군사력을 귀주 부근으로 대거 동원하자 절강과 복건에서 군사력 공백을 틈타 민란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토벌군의 전진기지인 귀주 지방의 소수민족들도 지속적인 병역 동원과 가혹한 세금 수탈의 이중고를 참지 못하고 대규모 민란이 발생했고 북방에는 몽골계 오이라트 민족이 침입해 친정을 나온 황제가 생포되는 토목보의 참변까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절강 출신의 광부 엽종유(叶宗留)는 수백 명과 함께 생업을 위해 복건 복안(福安)에 있는 광산촌으로 가서 채광을 하고 있었는데 1444년 9월 관군이 들이닥쳐 민간 채굴을 금지하고 체포하려 하자 저항하며 군인과 관리를 살해하고 복건과 절강 일대의 광부와 농민을 규합했다. 강서 출신의 소작농 등운(邓云)은 복건 사현(沙县, 현 삼명三明)으로 이주해 소작을 하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군 지주를 살해한 후 등무칠(邓茂七)로 개명하고 부랑배로 살았다. 


마침 엽종유의 광부 민란이 일어나 혼란한 시기였던 1447년이 되자 당시 세금 외에 추가로 명절마다 각종 닭, 오리, 생선, 육류를 바치는 관례인 '동생(冬牲)' 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자신을 구금하러 온 관병을 살해하고 소작농을 규합했다. 엽종유는 대왕(大王)을, 등무칠은 산평왕(铲平王)을 각각 자칭하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서로 연합해 복건 일대와 강서, 절강, 광동까지 장악했다. 1499년 2월 등무칠은 관군이 보낸 내부 첩자의 참언을 믿고 공세를 취하다가 매복에 걸려 사망했지만 세금 거부운동과 소작농이 주도가 된 민란의 선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민족 대동단결로 한족 정권과 한판 붙자


▲ 명나라 초기 운남의 태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사진은 운남 곤명의 민족원에서 민속무용을 선보이는 장면. ⓒ 최종명


1449년부터 1461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귀주와 호남, 광서 지역에 거주하는 각 소수민족이 일제히 일어나 지속적인 민란을 일으킨 것은 명나라 중기의 일대 사건이었다. 녹천 반란으로 귀주 일대의 백성들은 오랜 징집과 세금 수탈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마침 만 여명에 달했던 관군이 운남 전쟁터로 떠난 1449년 3월 삼수(三穗)의 묘족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신속하게 사주부(思州府, 현 잠공岑巩)을 점령했으며 오개(五开, 현 여평黎平) 지방의 묘족도 청량(清浪, 현 장공 남부)과 진원(镇远)으로 진공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서쪽으로 영녕(永宁, 현 청융晴隆), 동쪽으로 호남 원주(沅州, 현 지강芷江), 북쪽으로 파주(播州, 현 준의遵义), 동남쪽으로 무강(武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각 민족들이 분연히 일어나 민란에 참가한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렀다. 


명 조정은 깜짝 놀라 광서와 귀주, 후광 등지의 관군을 대거 소집해 토벌을 시작했고 4월에는 녹천에 출병한 병부상서 왕기(王骥)가 급히 귀주로 회군해 합세했지만 워낙 숫자가 많은 민란군에게 계속 패전을 거듭했다. 끊임없이 관군을 급파했으며 9월에는 7만 명에 이르는 토벌군 연합군으로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1450년 4월에 이르러 민란군은 안남(安南, 현 청륭晴隆)으로 진격했으며 5월부터 명나라 군사의 운남으로의 진군 통로인 수서(水西, 현 대방大方)와 귀주(贵州, 현 귀양贵阳)에 이르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관군이 증군되자 서서히 민란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1450년 7월이 되자 귀주 흥륭(兴隆, 현 황평黄平) 출신의 묘족 위동열(韦同烈)이 묘왕(苗王)이라 선포하고 묘족과 포의족(布依族) 등을 결집해 운남으로의 통로를 장악하고 있던 관군을 공격해 평월(平越, 현 복천福泉), 청평(清平, 현 개리凯里), 신여(新添, 현 귀정贵定)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여전히 관군의 수성이 강력해 대치국면이 점점 불리해져 갔다. 


1451년 1월 민란군은 호남 정현(靖县, 현 정주靖州)에서 토벌당해 3천여 명이 참수되고 6백여 명이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판세가 민란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4월에는 동서 양쪽에서 공격해오는 토벌군에 맞섰으나 패배한 위동열 민란군은 향로산(香炉山)으로 은거했다. 


관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가운데 내부 배신자에게 생포돼 북경으로 소환된 후 사형에 처해졌으며 민란군은 진압되고 소멸됐다. 그러나 7월에 귀주의 영현(今县, 현 보정普定)과 영녕을 비롯해 오개, 청량의 묘족이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며 호남, 광서 일대의 여러 민족도 동시에 호응하고 나서자 조정도 또 다시 토벌군을 급파했다. 1453년 3월 토벌군과 민란군 사이의 격전이 벌어진 후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한동안 조용하던 귀주가 폐위당했던 주원장의 서출 손자인 광통왕(广通王) 주휘잡(朱徽煠) 수하에 있던 동족 출신의 몽능(蒙能)이 광서 용승(龙胜)에서 봉기한 후 토벌군의 진압에도 굳건히 버티다가 1454년 9월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출해 귀주 동부 일대를 섭렵했다. 


1455년 11월에 이르러 몽왕(蒙王)을 자칭하며 묘족 3만여 명을 더 결집시킨 후 융리(隆里, 현 용리龙里)를 공격했다. 12월에는 평월(平越, 현 복천福泉) 출신의 왕아방(王阿榜), 묘금호(苗金虎) 등이 묘왕(苗王)을 자칭하고 봉기해 투쟁을 이어갔다. 봉기하고 토벌하고 전투를 벌리고 민란군이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진압을 위해 관군이 등장하기를 반복했는데 역시 조정은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며 진압을 서둘렀다. 


녹천 반란의 진압에 참여했던 방영(方瑛)의 관군에 의해 1457년 4월에 몽능의 민란군을 비롯 각 민족 단위의 민란군이 참패해 수천 명의 수급이 참수되자 호남과 광서 지역의 묘족 민란군도 진퇴를 놓고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1458년 4월에는 귀주의 13개 부락 묘족 지도자들이 연합해 도균(都匀)을 공격하자 방영 장군이 귀주 서남부 관군을 동원해 토벌하자 1459년 4월까지 민란군 1만여 명이 참수당하고 6천여 명이 생포됐다. 이어서 귀주 일대의 모든 마을로 토벌이 이어졌으며 1460년 8월에 또다시 귀주 서부 서보(西堡, 현 육지六枝)에서 묘족의 봉기가 일어나 1461년 1월에서야 진압됐다. 


귀주와 호남 광서 일대의 소수민족들은 한족 정권 명나라의 횡포에 맞서 가열찬 투쟁을 이어왔는데 조정이 허약한 틈만 보이면 언제라도 봉기할 조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묘족, 동족, 포의족, 장족 등은 민족공동체라는 일심동체의 조직력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왕을 자칭하며 민란의 깃발을 들었으며 1643년 이자성(李自成)의 민란에 호응해 호남에 전선을 형성하고 묘족의 강역을 선포하는 등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민족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 왕조가 건국했다고 해서 투쟁은 멈출 수 없었으며 19세기 말까지 늘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중앙정부의 구심력이 미약해지면 호시탐탐 독립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이 소수민족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노상강도가 북경을 도모하다


▲ 동족 출신의 몽능은 봉기 후 동족과 묘족 연합군으로 귀주 동부 융리를 공격했다. 사진은 융리고성 입구. ⓒ 최종명


황제가 북방민족 오이라트에게 생포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명나라 조정은 환관과 탐관에 의해 부패한 정치가 난무하고 토지겸병이 가속화돼 계급모순이 격화되고 있어서 각 지역의 농민봉기가 연면부단(连绵不断),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하북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조정의 군마 수급정책인 비양마(备养马) 제도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초기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하북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농민들에게 말을 길러 보급하는 마호(马户)의 의무를 부여했다. 마호로 지정되면 생각보다 훨씬 부담이 컸는데 농사 짓기에도 바쁜 와중에 기르던 말이 죽거나 종마 번식이 목표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엄청난 배상을 치러야 했다. 씻겨 나간 듯 가진 것 하나 없는 일빈여세(一贫如洗)한 농민은 어쩔 수 없이 전답을 팔거나 아들 딸을 팔아버리는 매아육녀(卖儿鬻女)를 해서라도 충당해야 하니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회자되는 말로 '강남의 최대 화근은 양식이고, 하북의 최대 우환은 말이다.'는 말이 나돌 만큼 심각했으며 명 무종의 재위기간인 1508년 파산한 농민들이 노상 강도질을 하거나 관청과 부호의 집을 절도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유랑민들은 '모두 말을 하나씩 타고 말에 소리 나는 방울을 달고 화살 공격을 신호탄으로 타가겁사(打家劫舍)해 재물을 약탈하고 밤에도 수 백리를 내달리니 흩어지면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은 <명사기사본말>의 하소연이었으며 향마도(响马盗)라 부르며 관군들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 명나라 초기 하북 일대를 주름잡고 민란의 주체로 등장하는 노상강도는 대부분 말을 길러 조정에 공급하던 마호 출신이다. 사진은 하북 공중초원의 마부 대장으로 늙은 마호의 모습과 닮았다. ⓒ 최종명


말을 휘달리며 화살 공격까지 하는 노상강도가 하북 문안(文安) 관청까지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유육(刘六)과 유칠(刘七) 형제를 불러 도적을 잡는 일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명사>에 따르면 두 형제의 본명은 총(宠)과 신(晨)으로 둘 다 담력이 세고 용맹했으며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재주가 뛰어나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 두 형제는 동네의 소위 잘 나가는 장사들 34명을 모집해 강도 체포를 전담하면서 치안을 담당하는 소분대(小分队)를 조직해 문안 일대 3개 현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체포해 구금하고 완벽하게 치안을 유지하자 문안을 관장하는 패주(霸州)의 수장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이후 조정에도 알려져 큰 상을 받게 됐다.


당시 전권을 휘두르는 환관 유근(刘瑾)이 군정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하 양홍(梁洪)이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을 시기해 금은보석을 강탈하려 했으나 유육 형제는 엄중하게 거절했다. 소갈머리도 없이 야비한 양홍은 강탈에 실패하자 더욱 분노가 치밀었는지 자기 주인 유근에게 유육 형제가 사실상 패주 일대의 강도라고 무고했다. 유육 형제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피해 행방을 감췄는데 관군이 집을 불살라 태우고 처자식을 체포하자 두 형제는 막다른 골목에서 낙초위구(落草为寇)의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결국 장무(张茂)가 이끄는 무리에 들어가 스스로 향마도가 되고 말았다. 


노상강도가 수도 턱 밑에서 기승을 부리자 환관 유근은 감찰어사 영고(宁杲)를 파견해 하북 남부 일대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도록 했는데 고압적이고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과 처형이 이뤄지자 민심은 가마솥의 개미처럼 소란스러웠다. 향마도 두령들이 속속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장무까지 체포되자 유육과 유칠은 의지할 곳 없이 막막해졌으며 조정에 끈을 연결해 옛날 공적을 들먹여 귀순해 목숨을 연명하려 했으나 '헌금 만금을 내면 용서한다.'는 터무니없는 대답만 들었다. 


1510년 정세가 바뀌어 환관 유근이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진 후 조정이 자수를 허용한다는 조서가 반포되자 유씨 형제는 곧바로 관청으로 달려가 투항을 했다. 하지만 조정에 사면을 요청한 이후 강도를 잡고 치안을 유지하는데 협조하고 있을 때 사면령은 일망타진을 위한 야비한 계책인 것을 알게 됐다. 


허망하게 앉아서 죽을 수 없으며 퇴로도 막혔다고 판단해 관부의 친구 주량(朱谅)과 함께 패주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곧이어 안숙(安肃, 현 서수徐水) 감옥을 공격해 자기가 체포했던 향마도 두령 제언명(齐彦名)을 구출했다. 인근 지방의 조수(赵鐩)와 양호(杨虎)도 빈곤한 처지에 떨어진 농민을 규합해 봉기를 일으켜 합류하니 빠른 속도로 세력이 커졌다. 


유씨 형제의 민란에 참가한 농민들은 대부분 말을 길러 조정에 공급하던 마호 출신이 대부분이라 말을 질주하는데 밤낮도 없고 쏜 살처럼 재빨리 이동해 하북을 거쳐 산동으로 진격해 일조(日照), 곡부(曲阜), 태안(泰安) 등 20여 개 현을 순식간에 공략했다. 각 지역의 농민들은 없는 살림에도 양식과 마초(马草)를 공급해 민란에 적극 동조하니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지주와 관료는 살해하고 관청은 불사르고 병기 창고를 획득했으며 죄인들은 석방했으며 지속적으로 승리해나가며 '건국부현(建国扶贤)'의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다. 


하북과 하남을 정복하고 병마를 확충한 다음 남경을 점거해 나라를 세울 방침을 세웠다. 수재인 조수의 책략에 따라 민란군은 유씨 형제와 제언명이 인솔하는 동로군과 양호, 조수가 인솔하는 서로군으로 나누어 동로군은 산동 방향으로 남하했고 서로군은 하남을 거쳐 산서로 진격했다. 


동로군은 산동을 시작으로 하남과 호남, 광서로 진입한 후 강서를 거쳐 다시 북상해 직접 하북 패주를 공략했으며 서로군은 산서로 진입하고 다시 하북으로 진격해 문안을 공략한 후 두 군이 합동으로 수도를 향해 곧장 돌진했다. 명 조정은 1449년 오이라트가 북경 도성까지 침공해 오자 필사의 경사보위전(京师保卫战, 또는 북경보위전北京保卫战)을 펼친 이후 60여 년 만에 또다시 수도 북경에 계엄을 선포하고 황궁의 구문(九门)을 닫아거는 치욕을 당했다. 


통주(通州), 양향(良乡), 탁주(涿州) 등지의 근왕(勤王)에게 유씨 형제의 민란군이 수도 공격을 늦추도록 하북의 모든 현이 나설 것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시에 수도를 경비하는 정예부대를 출동시켰으며 남북 합동 공격으로 민란군을 토벌할 방침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 외곽의 요동(辽东), 하북 선부(宣府, 현 선화宣化), 산서 대동(大同), 섬서 연수(延绥, 현 부곡府谷)를 지키는 변방군까지 동원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도로 이동했던 변방 부대를 외사가(外四家)라 부르며 향후 명나라 말기 변방 부대의 수도 진입의 시초가 됐다. 


유씨 형제의 민란군은 어사 육완(陆完)이 남북으로 협공을 펼치는 전술로 진격을 가로막고 공격해오자 하북 창주(沧州)로 공격 방향을 바꿨으며 함장산(陷长山, 현 무강武强)을 전전하다가 남쪽으로 철수해 하남까지 후퇴했다. 1512년 유씨 형제의 민란군은 육완의 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형세가 불리해지자 호북 황주(黄州, 현 황강黄冈)에 이르러 명 조정이 집결시킨 10만 명의 토벌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유육은 투신자살했고 유칠과 제언명은 말을 버리고 배에 올라타고 장강을 따라 강소 통주(通州, 현 남통南通)까지 도주했다. 유칠은 화살을 막고 강물로 떨어져 죽었으며 제언명은 창을 맞고 사망했다. 


민란군의 전략가 조수는 민란 실패 후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한 후 회충(怀忠)이라 개명하고 도첩(度牒)을 품고 멀리 달아났는데 호북 강하(江夏, 현 무한武汉)의 한 주막에서 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체포되고 말았는데 북경으로 압송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래도 분이 덜 풀린 황제 무종이 조수의 인두겁으로 말 안장을 만들었는데 조수가 민란 초기부터 황색 깃발에 새기고 달렸다는 글귀를 보노라면 황제의 이런 유치한 복수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용사 3천으로 곧장 수도를 점령한 후 제왕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열리라! 

("虎贲三千,直抵幽燕之地;龙飞九五,重开混沌之天")


▲ 유육 유칠 형제의 민란군이 북경을 향해 진격하자 명나라 조정은 구문을 닫고 전 병력을 동원해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사진은 구문 중 하나인 정양문ⓒ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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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8] 계급모순과 민족의식 분출 명나라 민란 ①


▲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쿠데타로 즉위한 3대 황제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거대한 황궁 자금성을 건설한다. 사진은 경산공원에서 바라본 겨울 자금성. ⓒ 최종명


1368년 중원에 세운 한족의 마지막 정권 명나라가 건국해 남경에 도읍을 정한 후 태조 주원장의 홍무지치(洪武之治), 태종 주체의 영락성세(永乐盛世), 인종 주고치와 선종 주첨기의 인선지치(仁宣之治)로 이어지는 명나라 초기가 강성하고 사회 안정기라는 평가는 관변 역사 기록의 평가일 뿐이다. 주원장이 빈농 출신으로 16세에 출가한 후 '땡중'으로 떠돌다가 명교의 이념을 동경해 곽자흥(郭子兴) 민란군에 합류한 후 나라를 세웠지만 여전히 전국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1370년 광서 산골 주민 10만 명이 민란을 일으켰으며 복건 천주(泉州)에서 진동(陈同)이 민란을 일으켜 영안(永安), 덕화(德化), 안계(安溪)를 공격했을 뿐 아니라 산동 청주에서는 손고박(孙古朴)이 민란을 일으킨 후 영주(莒州, 현 일조日照)를 공격했을 때 영주 관리가 '나라는 하해와 같은 마음이며 백성은 모두 즐겁게 일할 따름이다. 만약 개과천선하면 전화위복일 것이다. 항복하지 않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씨를 남기지 않을 터이니 내 의무는 모두 죽이는 일뿐이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했다. <명사> '태조본기'의 짤막한 기록이지만 명나라 초기 민란의 양상이 전국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민란을 일으킨 이들이 의연한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81년 광동 광주(广州)에서 해적 출신 조진(曹真)은 광동참의(广东参议)를 살해한 후 농민 만여 명과 천여 척의 함선을 동원해 동관(东莞), 조경(肇庆), 옹원(翁源) 일대를 공격해서 명 조정이 보낸 만 오천 명에 이르는 관군과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지주의 사병까지 동원된 토벌이 계속되자 수로를 이용해 바다로 달아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모두 체포됐다.


1386년에는 복건 서북부 장악(将乐)의 스님 출신 팽옥림(彭玉琳)이 강서 동남부 신감(新淦, 현 신간新干)에서 미륵불조사(弥勒佛祖师)를 자칭하며 향을 피우고 백련회를 조직했으며 진왕(晋王)에 등극하고 연호를 천정(天定)이라 하며 명 조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1395년에는 광서의 요족과 장족 수만 명이 민란을 일으켰는데 명 조정은 총관 양문(杨文)을 정남장군(征南将军)으로 임명해 토벌에 나서 8천여 명을 참수했다.


명나라 초기 가장 치열했던 대규모 항쟁은 1378년에 시작된 동족(侗族) 지도자 오면(吴勉)의 농민 민란이었다. 귀주 오개(五开, 현 여평黎平) 사람인 오면은 명 조정이 동족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무자비하게 백성들을 유린하자 격분해 1378년 6월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주(靖州, 현 정주묘족동족자치현)를 직접 공격해 수비병을 돌파한 후 지휘부를 척살했다. 명 조정이 토벌군을 파병하자 오면은 중과부적으로 다시 고향 오개로 후퇴한 후 여평 일대의 심산유곡을 돌아다니며 동족뿐 아니라 묘족 등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항쟁을 설파하고 때때로 산에서 내려와 관청을 공격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조직을 결집한 오면은 1385년 6월에 대규모의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여평부지(黎平府志)>에 따르면 오면은 '하루 낮에 7~8천 명을 조직하며 하룻밤에 8만 명을 모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초반에 전투에서 승승장구했다. 잔평왕(剗平王)을 자칭하자 귀주 고주(古州, 현 용강榕江) 일대 12곳의 장관사(长官司, 당시 소수민족지역의 통치기관)가 모두 동조해서 8곳의 동족마을 팔동(八洞)을 해방시켰다. 20만 명에 육박하는 무장대오로 발전하자, 호남, 계림, 귀주 일대 동족 거주지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명 조정이 30만 대군을 몰고 진군해 오더니 민란 주둔지는 물론이고 산채까지 뿌리 뽑을 기세로 무자비하게 학살하자 이번에는 동족뿐 아니라 묘족까지 함께 봉기했으며 두 민족이 연대해 보다 강력한 대응으로 맞섰다.


결국 민란은 실패로 돌아가 4천 여명이 참수 당했으며 오면과 구족에 이르는 일가족이 포로로 잡혀 남경으로 압송된 후 처형됐다. 오면의 민란이 끝났지만 여파는 지속돼 인근 지역인 동고(铜鼓, 현 금병锦屏)의 상파동채(上婆侗寨)에 사는 임관(林宽)이 1397년 3월에 봉기해 8개월 동안 관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명사>에는 오반아(吴奤儿)라고 기재돼 있는데 '반'은 얼굴이 크고 뚱뚱하다는 귀주 방언이다. 오면이 주도한 동족과 묘족의 연합 민란은 비록 8년 만에 종식됐지만 그의 영웅적인 업적은 귀주 일대의 동족인민들에 의해 세세손손 이어오며 칭송되고 있다. 오면의 고향이자 최후의 저항지인 귀주성 동남부 여평현 중람동채(中蓝侗寨)에는 600여 년의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3층 높이의 낡은 오면고루(吴勉鼓楼)가 보존돼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12월 21일 탄생일에 면왕절(勉王节) 행사를 기념하며 그의 영웅적인 투쟁을 잊지 않고 있다.


▲ 명나라 초기 동족 지도자 오면의 민란이 발생해 귀주 일대가 전운에 휩쌓였다. 계급모순과 민족의식이 결합된 민족 민란은 명나라 조정을 경악시켰다. 지금도 오면의 탄생일에는 동족마을에서는 그를 기념한다. 사진은 여평 조흥고진 동족마을의 민족 상징이 고루 모습. ⓒ 최종명


1396년에는 한중 분지이자 삼국지 영웅 마초(马超)의 묘와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 섬서 면현(沔县) 무후진(武侯镇)의 관아 서리 고복성(高福星)이 강족(羌族) 스님 전구성(田九成)과 함께 농민으로 구성된 백련교도들을 규합해 민란의 깃발을 들고 고복성은 미륵불, 전구성은 한명황제(汉明皇帝)를 자칭했다.


긴급 보고를 받고 관군이 체포하러 파병해오자 전구성은 민란군을 이끌고 섬서와 감숙의 경계 지역인 영강(宁羌, 현 영강宁强) 일대의 마면산(马面山)으로 이동해 근거지를 확보하고 군사 훈련을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러 해 동안의 기근으로 사방의 이재민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산채로 합류했다. 전구성은 세력이 확대되자 다시 무후진의 양평관(阳平关)을 공격해 관군을 물리치고 곧바로 가릉강(嘉陵江)을 거슬러 북상해 약양(略阳)과 휘주(徽州, 현 휘현徽县)를 점령하니 소문을 듣고 감숙과 섬서 일대의 소외받던 민족과 고초를 겪던 농민이 대거 합세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긴급히 무정후(武定侯) 곽영(郭英)과 장흥후(长兴侯) 경병문(耿炳文)이 낮과 밤을 달려 황급히 군대를 이끌고 와 민란군을 포위했다. 수개월 동안 혈전을 벌렸지만 수적으로 뒤지는 민란군은 영강까지 후퇴하게 됐다. 이때 고복성이 체포되자 전구성은 나머지 인원을 모두 망라해 다시 마면산 근거지로 철수한 후 해자와 보루를 쌓고 항전을 준비했다.


관군이 몰려오자 전구성은 솔선수범 전투에 나서 혈전을 독려했는데 서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시체가 산을 뒤덮었다. 한파가 밀려오자 민란군은 옷과 식량이 소진되고 화살도 남지 않아 결국 전구성을 비롯해 모두 4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명 조정은 전구성과 공모한 자는 모두 주살하고 단순 추종자는 돌려보내라는 조서를 내린 후 상비군을 주둔시키게 됐는데 이후 강족 등 소수민족들의 터전이던 영강 지역은 중앙 정부가 직접 관장하는 한중 서부의 군사요지로 변모했다.


'내가 불모다' 외친 '신비한' 여걸


▲ 명나라가 북경으로 천도 후 북방민족의 남하를 대비해 대규모로 만리장성 축성과 보수를 단행했다. 사진은 줄지어 뻗은 북경 외곽 황화성 장성의 일부 구간. ⓒ 최종명


유교경전 <서경>의 '우공(禹贡)' 편에 등장하는 중국 고대 영토인 구주의 흔적이 있는 산동 청주에 있는 태화산(泰和山) 입구에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멋진 모습의 천마 7마리 조각상 옆에 준마의 말고삐를 잡고 갑옷 차림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정난지변(靖難之變)을 일으켜 조카를 사살하고 황제를 찬탈한 영락제가 통치하던 1420년에 백련교 민란을 일으켜 산동 일대를 주름잡던 당새아(唐赛儿)다. 결국 명 조정의 체포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후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탓에 드라마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영락제 주체는 반란이 성공하자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해 지금의 거대한 고궁인 자금성을 지어 위엄과 명분을 세웠으며 북방 민족의 남하를 염려해 대대적인 만리장성 보수와 축성을 단행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를 잇달아 벌이기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데 강남 일대의 물자를 수도로 보급하기 위한 운하를 파기 위해 산동 지방의 인력을 10만 명 이상 동원했다. 


황제 쿠데타 때도 양 세력 사이의 주요 전쟁터이던 산동의 백성은 고충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또다시 노역이 가중되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의 고역이었다. 게다가 수해와 가뭄 재해까지 발생하고 전염병까지 유행해 산동과 하남은 물론 산서와 섬서 등 중원 일대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남녀노소 막론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돌아다녔으며 처자식을 파는 사례까지 빈번했다.


명나라가 건국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말세 상황이 속출하던 시기에 태어난 당새아는 춘추시대 정치인이자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孙武)의 고향 산동 빈주(滨州) 시 포대(蒲台, 현 박흥博兴)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무예와 병법을 익혀 15세 즈음 출중한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당새아는 아버지가 노역에 끌려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남편 임삼(林三)과 함께 관청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졸지에 남편이 살해됐으며 아버지도 분을 참지 못하다 목숨을 잃은 데다가 어머니마저 중병으로 사망하자 민란을 일으킬 결심을 했다.


1420년 1월 당새아는 스스로 '불모(佛母)'라 부르며 민란에 동조하는 백련교도 및 농민들과 청주 남부 숭산(崇山) 석회암 준령의 사석붕채(卸石棚寨)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기회를 틈타 현청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한 후 다시 산채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관군이 후미를 쫓아오면 산 계곡에 매복했다가 포위해 공격하거나 야밤에 기습해 몰살시켰다.


민란군이 초전에 관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청주 인근의 농민들이 분연히 함께 떨쳐 일어났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열혈 청년들이 합세하니 산채는 마치 농민해방구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청주는 물론 내주(莱州), 거주(莒州, 현 거현莒县), 교주(胶州), 안구(安丘), 수광(寿光), 제성(诸城), 즉묵(即墨) 등을 석권하면서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와 지주를 징벌하고 관부를 점령하고 창고를 불사르니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수만 명의 군사력으로 발전했다.


민란군이 득세하자 산동 지방의 관리들이 공포에 떨어 황제에게 긴급하게 보고하니 조정은 관리를 산채로 파견해 귀순을 타진했으나 당새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명 조정은 일찍이 남쪽의 교지(交趾, 현 베트남), 동쪽의 왜구, 북쪽의 몽골을 격파한 공로로 작위를 받은 안원후(安远侯) 유승(柳升)을 총사령관으로 진용을 갖춘 5천 명의 기마병을 동원해 산채를 포위했다. 유승이 교만에 빠져 민란군이 '오합지졸'이자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고 얕잡아 본다는 것을 간파한 당새아는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산채가 극심한 물 부족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져 동쪽 문으로 빠져나가 물을 수급해 올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유승은 병력을 동쪽 요충지에 집결시키자 민란군은 야음을 틈타 허술한 병영을 직접 급습하니 관군이 갈팡질팡 황급히 도주하는 사이 선봉부대가 화살을 쏴 병영에 남아있던 사령관들을 사살했다. 날이 밝자 계략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유승의 토벌군 본대가 다시 공격해오자 민란군은 후퇴하면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토벌군에 원군이 합세하자 민란군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약 1달 동안 명 영락제를 격노하게 만든 당새아의 민란은 더 이상의 진전 없이 수그러들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당새아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모자를 생포하지 못한 것을 안 영락제는 대노했다. 총사령관 유승을 하옥시키고 당새아가 점령했던 지역의 고위급 관리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청나라 초기 사관 곡응태(谷应泰)가 편찬한 <명사기사본말(明史纪事本末)>에 따르면 당새아 체포를 위해 2달여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는 구우이호(九牛二虎)의 노력으로 산동 일대의 비구니와 여도사를 북경으로 잡아들여 조사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해 찾았지만 끝내 종적을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주에는 지금까지 당새아에 대한 '신비한' 전설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백성들은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사석봉채를 당새아채(唐赛儿寨)라 부르고 있으며 민란군이 사용하던 돌절구나 맷돌 등 생활도구와 산채의 담장을 보존하고 있다.


당새아는 남편이 죽자 묘를 짓고 제사를 지낸 후 산으로 들어갔는데 우연히 돌 틈 사이에서 도술 책과 보검이 담긴 상자를 발견하고 검술을 익혔는데 신비한 능력을 지닌 보검은 오직 당새아만이 다룰 수 있었다. 당새아를 체포한 후 사형을 집행하는데 칼날이 들어가지 않아 몸과 다리를 나무와 쇠사슬로 묶어 하옥했지만 스스로 탈옥해 홀연히 사라졌고 최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군현의 장수와 관리 모두 도적을 놓친 죄로 사형을 당했다.


정사인 <명사>의 기초가 된 역사 자료집 <명사기사본말>에 기록된 내용으로, 당새아는 마치 무협소설이나 신마소설(神魔小說)에나 나올 법한 '영웅'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면서도 신비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당새아전기>가 <서유기>나 <봉신연의>처럼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민란의 영웅은 역사에서 매우 드물지만 나라를 세우거나 민심을 배반하고 기회주의자로 살았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도 없이 참수 당했던 것이 민란의 역사이다. 조정의 성화와 정예군과의 전투를 하고서도 유유히 사라진 당새아는 '불모''를 자처했듯 부처님의 보우가 있었나 보다.


▲ 백련교 영향을 받은 당새아 민란은 산동 청주를 기반으로 발생해 확산됐다. 체포 후 탈주해 사라지자 격노한 황제는 고급관리들을 참수하는 등 신비한 여걸로 민란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사진은 청주 문화거리 패방.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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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7]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②


▲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등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팽화상은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은 김용 소설의 무대를 성곽으로 만든 운남 대리의 '천룡팔부성'의 황제 출성식 장면. ⓒ 최종명


홍콩의 <명보(明报)> 잡지를 창간하고 낮에는 정치평론을 쓰고 밤에는 무협소설을 쓴 소설가 김용(金庸)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애독자가 없을 정도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는 중국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중원의 6대문파인 소림사,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공동파, 화산파와 명교의 무공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무협 장편소설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에는 민란과 관련한 주목할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 주인공이자 명교의 교주가 되는 장무기를 비롯해 대부분 등장인물은 당연하게도 소설가의 창작이다. 무공이 상당한 수준인 다섯 명의 명교 교주 오산인(五散人)에는 스님 두 명이 포함돼 있는데 포대화상(布袋和尚)으로 등장하는 설부득(说不得)과 팽화상 팽영옥(彭莹玉)이다. 소설 주인공 중 완전 허구는 아닌 역사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팽영옥이다.


<의천도룡기>만큼 맹활약한 화상


팽영옥은 강서 원주(袁州, 현 의춘宜春) 출신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10세 때 인근에 있는 유명 사찰 자화사(慈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됐다. 원나라의 잔혹한 통치가 계속돼 백성이 고통 받고 명절이 와도 쌀 한 톨 구경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행사에 겨우 의탁해 위안을 찾는 지경임을 느꼈던 팽영옥은 당시 백련교가 농민들 깊이 뿌리내리자 자신도 교도로 가입했다. 


시간이 흘러 지역 내 백련교의 수장에 오르고 비밀스레 반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의술에 뛰어났던 그는 명성을 듣고 사찰 부근으로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면서 법술도 뛰어나 '미륵이 강림하고 건곤(乾坤, 역경의 뒤 괘, 음양이나 천하를 뜻함)이 변화한다'는 교리를 선전하면서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신도가 수 천명에 이르게 됐고 일가를 이루거나 종파를 창립한 사람에게만 존칭하는 팽조사(彭祖师)로 불렸다.


팽영옥은 1338년 자신의 제자인 주자왕(周子旺)을 주왕(周王)으로 옹립하고 백련교도 5천 여 명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정교합일의 나라를 세웠다.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으나 곧 진압된 후 주자왕은 체포돼 살해됐다. 팽영옥은 제자 황천(况天)과 함께 교도들을 이끌고 회서(淮西, 안휘 서남부) 지방으로 도피해 포교를 지속했다. 신도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능력이 돋보이는 신도 중 리더로서 소질이 보일 경우 황천을 황보천(况普天)으로 개명한 것처럼 모두 가운데 이름에 '보(普)' 자를 넣어 '팽당(彭党)'을 결성했다.


<의천도룡기>에서도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우며 쉽게 살생을 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듯이 신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매우 조직적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신도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홍건군 민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많았으니 '사관학교'나 다름 없었다. 오죽하면 김용과 쌍벽을 이루는 무협작가 양우생(梁羽生)의 소설이자 드라마로도 유명한 <평종협영(萍踪侠影)> 속에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과 장사성이 모두 팽영옥의 제자로 등장할 정도다.


1348년 팽영옥은 황보천을 데리고 고향 원주로 잠입해 반원 활동을 재개하면서 인근 호남 유양(浏阳)과 강서 만재(万载)에서 적극적인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관군의 추적이 더욱더 극심해지자 부득이하게 도피해 멀리 호북 마성(麻城 )에 있던 제자 추보승(邹普胜)에게 의탁하게 됐다.


1351년 5월에 유복통이 홍건군 민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팽영옥은 8월에 추보승, 서수휘 등과 함께 호북 기주(蕲州, 현 기춘蕲春)에서 또다시 미륵 강림의 구호를 걸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곧바로 10월에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를 점령한 후 서수휘를 옹립해 국호를 천완(天完),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으며 관료사회에서 왕명 출납을 전담하는 중서성(中书省)의 기능을 두고 그 이름을 연대성(莲台省)이라 불렀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추밀원(枢密院) 및 6부 체제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홍건군 민란에 호응해 붉은 두건을 두르고 향군답게 향을 피우며 전투에 참여했으며 정보랑(丁普郎)처럼 '보' 자 이름의 추밀원 맹장을 여럿 임명하는 등 군사조직을 편재했다.


▲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은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다. 사진은 대웅전 앞에 '불'자가 또롯한 조벽을 세운 소주 태호의 석공사. ⓒ 최종명


남부 홍건군의 시조가 된 팽영옥은 호북과 강서 일대의 모든 현을 공략하며 지방 관료나 지주를 무참히 살해했는데 '성마다 불을 뿜으니 관리는 도처에 숨고 성에는 사람 하나 없고 홍군만이 윗자리에 앉았네'라는 민요가 유행할 정도였다. 1352년 팽영옥은 부하 장수인 이보승(李普胜)과 조보승(赵普胜)에게 안휘 무위(无为)와 함산含山)을 공략하도록 한 후 두 군대를 모아 장강을 건넜다. 이후 팽영옥이 안휘 일대를 지나 절강 항주를 점령하자 크게 놀란 원 조정이 토벌군을 보내자 항주에서 후퇴해 강소 일대를 공략하며 북상해 집경(集庆, 현 남경)에 이르렀다.


1353년 원나라 토벌군이 다시 추격하자 팽영옥은 군대를 이끌고 강서에 있던 황보천과 합세한 후 고향 근처 강서 서주(瑞州, 현 고안高安)를 점령했는데 성을 함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벌군에게 겹겹이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팽영옥은 황보천과 함께 전력으로 방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돼 모두 학살당하니 남녀노소 모두 살아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의천도룡기>의 명교 교주이면서 무공 보유자이거나 양우생의 소설에서 '천하제일고수'이자 주원장과 장사성의 사부로 등장하는 팽화상은 실제로는 평생 민란을 꿈꾼 종교지도자였다. 당시 백련교 중심의 홍건군에게 백성들이 주목한 점은 배불리 먹고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염원을 실현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고 토벌군에 맞서 싸우고 승리하는 것만큼 백성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사교이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곧바로 자신의 정치적 자양분이던 명교를 배반하고 '사교'로 규정했던 것을 보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황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승화된 민란 주인공


▲ 백련교 민란으로 명옥진이 세운 대하의 수도는 중경이다.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 중경은 가릉강과 장강이 흐른다. 사진은 중경 도심과 장강 남단을 잇는 장강케이블카. ⓒ 최종명


남송 시대 공주(恭州)를 관장하던 효종(孝宗)의 셋째 아들 조돈(赵惇)은 1189년 1월 황태자로 지명돼 공왕(恭王)이 되자마자 2월에 선위를 받아 황제로 등극했으니 광종(光宗)이다. 연이어 이중 경사를 축하한다는 뜻의 쌍중희경(双重喜庆)으로 자랑할만한 일이라 했고 중경부(重庆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의 5대 직할시이자 서부대개발의 중심 도시 중경이다. 일부 기자조차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이 떠오른다는 무지한 농담을 하는 중경은 경사가 겹치듯 두 개의 강이 남북으로 나란히 흐르고 있다. 북쪽에는 가릉강(嘉陵江)이 흐르는데 옛날부터 유수(渝水)라 불렀기에 지금도 중경의 약칭을 '유(渝)'라 한다. 남쪽에는 중국의 젖줄 장강(长江)이 거쳐간다.


가릉강과 장강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대불사(大佛寺)에는 대웅보전, 관음전 등 흔히 볼 수 있는 전각 외에도 중국 어느 사원에서도 보기 힘든 오불전(五佛殿)이 있다. 높이 7미터, 너비 12미터 가량에 깊이 1미터의 불감에는 모두 다섯 분의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毗卢遮那佛), 왼편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释迦牟尼佛), 오른편에 보신(報身) 노사나불(卢舍那佛)이 봉공돼 있다. 만물을 자비할 듯한 손 모양인 비로자나불의 설법인(說法印)도 눈길을 끌지만 삼신불을 향해 봉공하듯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萨)과 보현보살(普贤菩萨)의 예사롭지 않은 모양을 자꾸 살펴보게 된다. 두 보살의 형상은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을 일으킨 서수휘와 명옥진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서수휘는 호북 라전(罗田) 출신으로 포목을 팔던 상인으로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비범했으며 정직한 성품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기에 평소에 사람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지니고 있던 백련교도였다. 1351년 8월 기주에서 팽영옥과 추보승이 중심이 된 홍건군 민란이 일어난 후 황제로 옹립됐다. 국호 천완(天完)은 대원(大元)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대(大)에 일(一)을 더했으며 원(元)에 갓머리 면(宀)으로 누른 것이다. 서수휘의 홍건군은 건국 후 '부자를 무너뜨리고 빈농에게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최부익빈(摧富益贫)을 구호로 했기에 수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삽시간에 수 십만 명의 군대로 발전했다.


서수휘는 초기에 호북 황강(黄冈)에 근거지를 두고 군대를 나누어 강서와 호남으로 진출했다. 홍건군은 기율이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는데 전쟁을 통해 성을 함락시켜도 함부로 살인하지 않았고 귀순하는 사람은 용서해주고 나머지도 괴롭히지 않았으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따르는 이가 백만 명에 육박했다. 1353년 원 조정의 토벌이 시작된 후 홍건군 근거지를 포위해오고 천완 정권의 핵심 지도자인 팽영옥이 전사하고 수도 방어 중 핵심 장수 4백여 명이 희생되자 호북 황매(黄梅)의 험준한 요새 나보원(挪步园)으로 후퇴한 후 군 조직을 정비했다.


이듬해 다시 반격에 나선 홍건군은 강서와 호남 일대를 진압했으며 사천과 섬서 일대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한양(汉阳)에 새로운 수도를 마련했다. 서수휘는 자신의 4대금강(四大金刚)이라 불리는 추보승, 예문준(倪文俊), 조보승, 부우덕(傅友德)과 초기부터 민란 동지이자 피를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1356년에 이르러 승상이던 예문준의 견제를 받아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게 됐다.


예문준은 어부 출신으로 민란에 참가해 대장군을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정치제도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주 서수휘의 지휘를 듣지 않고 사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은 원나라 왕자의 처를 자신의 첩으로 삼기도 해 인심도 잃고 명예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원나라 토벌군이 공격해오자 수치스럽게도 서수휘를 살해하고 투항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서수휘 살해 기도가 사전에 발각돼 도주했다가 자신의 부장 진우량(陈友谅)에 의해 피살됐다.


진우량은 호북 면양(沔阳, 현 홍호洪湖)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서수휘의 천완 정권이 탄생할 때 같은 어부 출신의 예문준 휘하로 참여했다가 역시 주군을 배신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1359년 서수휘는 강주로 천도했을 때 정권욕에 미혹돼 한왕(汉王)을 자칭한 진우량에 의해 서수휘의 심복 부장들이 차례로 살해 당하고 말았다. 1360년 서수휘는 유인작전을 펼친 진우량의 매복에 걸려 안휘 태평(太平, 현 당도当涂) 부근에서 머리에 철퇴를 맞고 즉사했다. 남방 지역 홍건군을 이끌며 기층농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서수휘의 운명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주검을 확인하자 부근 작은 사찰에서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汉), 연호를 대의(大义)라 선포한 후 환궁했다. 하늘도 대의라는 연호가 못마땅했던지 즉위 당일 폭풍우가 쏟아져 행사 진행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우량의 배신과 악행에 분노한 명옥진(明玉珍)은 관계를 단절하고 중경 남쪽에 서수휘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사철 제사를 지냈으며 신위를 추존하고 묘호(庙号)를 세종(世宗)이라 썼다. 서수휘를 따르던 신하들 대부분 진우량의 등극을 치하하며 민란의 뜻을 망각하고 이전투구의 영토 싸움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명옥진만이 의리를 지키며 서수휘가 추구한 민란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명옥진은 호북 매구(梅丘, 현 수현随县)의 농민 출신으로 원말 민란이 광풍처럼 불어오자 고향 농민 천 여명을 이끌고 산채를 짓고 근거지 마련을 하던 중 1351년 서수휘의 민란이 일어나자 홍건군에 참여했다. 명옥진은 주로 서쪽으로 진군해 사천과 섬서 지역을 공략했는데 1357년에 이르러 중경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원나라 장수 하마투(哈麻秃)와의 전투 중에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아 애꾸눈 장군으로 통했다.


1361년에는 만승(万胜)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해 운남으로 진출, 원나라와 대리국 연합군과 전투를 벌리기도 했다. 부하장수들의 옹립을 받아들여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하(大夏)라 했으며 수도를 근거지 중경에 설치했다. 명옥진은 서수휘의 천완 정권을 본받아 중서성과 추밀원, 6부를 두는 관리제도를 도입했으며 한림원을 설치해 과거제도를 실시했으며 명교의 이념에 따라 선정을 베풀어 사회 안정을 이루고 생산 발전을 이루니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통치했다.


1363년 명옥진은 사신을 주원장에게 보내 친교를 맺자고 하니 주원장은 기뻐하며 '삼국시대 유비와 손권의 연맹처럼 서로 이해를 같이하는 순치(唇齿) 관계가 됐다'는 서신을 보내왔다고 <명사(明史)> '명옥진전'은 기록하고 있다. 선정을 베풀던 명옥진은 1366년 여름 신하들에게 '사천의 촉 땅을 고수하고 중원을 도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6세에 불과한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0세의 아들 명승(明升)이 뒤를 잇고 태후가 섭정을 했다.


1368년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후 친교의 약속을 배신하고 이듬해 사신을 보내 투항을 권고했지만 무조건 항복할 수는 없었다. 주원장이 대군을 보내 중경을 공략하니 중과부적으로 긴급히 성도(成都)로 도망갔는데 명옥진의 부인인 팽태후(彭太后)는 '촉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고 만약 출전하면 반드시 사상자가 속출할 것인데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항복해, 생명이 있는 자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는 것만 못하다'고 선언하며 투항했다. 


팽태후와 명승을 비롯 관속들은 모두 남경으로 끌려갔는데 주원장은 명승이 유약한 성품임을 알고 작위를 내려 관리했다. 1372년 주원장의 명령에 따라 팽태후와 명승 일행 수십 명은 수만 리 떨어진 고려(공민왕 시절) 황해도의 연안(延安)으로 유배나 다름 없는 이주를 하면서 중원 땅을 떠나게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 연안 명씨의 조상은 바로 명옥진이다.


중경 대불사 오불전에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사람 얼굴을 조각한 진용조상(真容雕像)이다. 사자 위에 앉아서 매부리코 형상을 한 문수보살은 천완 황제 서수휘이며 코끼리 위에 앉아서 외눈박이 형상을 한 보현보살은 대하 황제 명옥진이다. 대불사 전각은 명나라 영락(永乐)제 재위 때인 1421년 처음 건축된 것인데 고증에 따르면 홍건군의 후손인 이름 모를 장인(匠人)이 비밀리에 조각한 것으로 추측되며 2011년에 명옥진의 부하장수이자 개국원훈인 만승의 후예가 발견했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인물에 대한 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비록 돌 조각에 새겼어도 그냥 돌이 아닌 것이 역사이자 민란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 백년교 민란 주인공 명옥진은 요절했으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애초의 상호불가침 약속을 배신하고 항복한 명씨 일가를 체포 후 고려로 추방한다. 사진은 주원장의 묘원이 있는 남경의 효릉 입구. ⓒ 최종명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는 백련교를 동경했다?


백련교도이자 홍건군의 중심인물을 보면 농민이거나 소작농, 어부나 뱃사공, 의술이나 법술로 먹고 살았거나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치 <수호지>의 108 영웅들이 흉내 내고 있는 듯 모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며 기층인민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사형 사제로 묶어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나 지혜를 짜내어 전투를 하는 장면은 어쩐지 <삼국지>를 닮았으며 현장 법사를 중심으로 구법 여행을 다녀오는 <서유기>는 백련교나 명교의 지향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읽힌다.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대중들에게 널리 읽혔고 모두 오늘날 인기 절정의 고대소설은 대부분 백련교의 홍건군 민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위 촉 오로 나누어 의리와 술수가 난무하는 소설, 협객들의 반정부 투쟁을 그린 소설, 악마와 사악한 신에 맞서 미륵을 찾아 떠나는 소설 모두 어쩌면 권력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울분을 토하고 싶은 마음을 긁어주며 용기까지 주었던 소설임에 틀림없다. 세심하게 원나라 말기 민란을 살펴보면 왜 소설이 현실처럼 보이고 또 현실이 소설보다 더 지독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3대 소설을 만든 작가의 상상력은 작가만의 몫이 아닌 당시 백성들의 치열한 투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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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6]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①


중국민란 역사에서 원, 명, 청 시대를 아우르는 코드는 피지배계급의 질곡을 줄기차게 담아낸 민간 종교결사 백련교(白莲教)를 주시해야 한다. 서기 4세기 동진 시대 강서 여산(庐山)의 동림사(东林寺)에서 발원한 대승불교 정토종(净土宗)의 한 계파로 남송 시대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백련종(白莲宗)이 민란의 염원을 담아내며 백련교로 발전했다.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아미타불을 숭상하고 '살생, 절도, 음란, 망언, 음주'를 행하지 않는 지계(持戒)를 염불해 서방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결사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모자원은 1069년 강소 곤산(昆山)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9세에 출가했다. 동림사에서 정토종을 창건한 혜원(慧远) 스님이 연못을 파고 백련을 심은 것에 유래한 종교집회인 백련사(白莲社)의 유풍을 흠모해 <백련신조참의(白莲晨朝忏仪)>를 편찬했으며 1131년 상해 서쪽 전산호(淀山湖)에 백련참당(白莲忏堂)을 세우고 혜원 스님이 제창한 백련사의 계승을 자임했다.


▲ 중국 대승불교 정토종은 강서 여산 동림사에서 발원했다. 여산은 남송 시대 백련종을 창립한 모자원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사진은 동림사가 있는 여산의 풍광 모습. ⓒ 최종명


그러나 백련종은 지계를 지키면서도 스님이 출가하지 않고 처자식을 두는 등 불교의 교리를 왜곡하고 세속적인 외도로 사교로 알려지면서 포교 금지령을 당했으며 모자원은 체포돼 강주(江州, 현 구강 九江)에 유배됐다. 모자원은 이후 비밀리에 포교하기 시작했으며 30년이 흐른 1166년에는 황제의 초청을 받아 정토법문을 강연하기도 했다. 명예를 회복하자마자 곧바로 원적(圆寂)했다.


모자원이 창건한 백련종은 미륵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이단으로 중국으로 들어온 명교까지 흡수하는 등 점차 정토종의 범주에서 벗어나 신흥종교인 백련교로 발전해갔다.


몽골족이 1234년 여진족 금을 멸망시켰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1271년 중원 지방에 원을 세운 후 남하해 송나라까지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강남 땅 임안을 수도로 했던 남송은 복건으로 도주 후 마지막 황제가 바다에 투신해 자살한 1279년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송의 멸망을 전후한 3년간 강서 북부 판양호(鄱阳湖)를 끼고 있는 도창(都昌)에서 역사상 최초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된 민란이 발생했다. 1277년부터 도창에서는 원나라의 침공에 항거한다는 명분으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돼 '온 세상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민란을 일으켰다. <원사>에 따르면 그들을 따르는 농민이 수만에 달했으나 원 조정의 정토(征讨) 명령에 따라 주동자를 체포해 능지처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1780년 4월에는 백련교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두가용(杜可用)이 만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반원의 기치를 내걸고 천왕(天王)을 자칭했으며 만승(万乘)이란 연호까지 선포했다. 송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원에 이어 강남을 장악하고 통치하자 혼란기를 틈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분출구였던 것이다. 3년여 동안 민란 봉기를 일으키고 주모자가 살해되는 과정이 반복됐지만 백련종이 추구한 미래의 구세주 도래를 믿었던 도창의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힘을 결집했다.


두가용은 농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와 웅변으로 농민들을 결집시켰으나 대도(大都, 북경)에 수도를 정하고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한 원 세조 쿠빌라이는 크게 놀라 강력한 토벌을 진행했다. 9일간의 격전을 치렀으나 군사력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결국 두가용 등 핵심 주동자들이 체포돼 강서 용흥(龙兴, 현 남창南昌)으로 압송돼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혹형인 책사(磔死)를 당했다. <신원사(新元史)>는 '두가용이 만승 원년이라 허위로 사칭하니 복주(伏诛, 사형 집행)했다.'고 짤막하고 무미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 년을 이어 피지배계급 인민의 염원을 담아내고자 했거나 이용하고자 했던 백련교 최초의 민란이라는 평가는 굳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민란의 이상, 미륵의 구원


▲ 원나라 민란은 백련교도가 주도했다. 백련교나 명교 등은 백성의 염원과 미륵불의 구원 사상을 연결하는 지혜를 담았다. 사진은 중국 미륵불의 성지인 절강 설두사의 미륵대불. ⓒ 최종명


원나라가 중원을 통치한 후 이민족으로부터 학정을 당하고 있던 농민들은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자연스럽게 현실 세상을 뒤바꾸는 '구원'의 손길과 연결됐다. 1308년 원 무종(武宗)이 '처자식도 두고 이미 청정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멸시와 함께 백련교를 금지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지만 석가모니의 후임이자 미래불인 미륵보살의 출현을 선포하면서 민란을 주모하는 백련교 결사조직의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에 기록된 불교 통사적 기록인 <석문정통(释门正统)>에서도 재가제자를 두거나 가내 불당을 두는 등 승속(僧俗)이 결합된 백련교를 우려해 '백의를 입고 포교를 오락가락하는 건 착오가 없을 수 없다.'고 기록했는데 산속이 아닌 속세에 있는 백련교가 점차 사교로 낙인 찍히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1312년 정토종의 본산인 동림사 보도(普度) 스님은 백련교의 복교를 도모하며 '미륵불이 태어났다.'거나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왔다.'며 공개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종교결사 모임인 백련교도가 하남, 강남, 장강 일대에 빠르게 퍼져나가자 1322년 원 영종(英宗)은 또다시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백련교를 전파하는 스님들은 민간에서 비밀리에 전해오던 미륵신앙인 미륵교, 화엄경을 경전으로 유, 불, 선 삼교귀일을 신봉하던 백운교, 중국에 들어온 마니교인 명교와 혼합되면서 점차 비밀종교조직으로 변모해갔다.


1315년 강서 간주(赣州)에서 채오구(蔡五九)는 논밭에 부과하는 세금 증세를 위한 조사에 맞서 봉기했으며 1321년 섬서 주지(周至)의 스님 원명(圆明)은 궐기해 황제를 칭했으며 산서 합양(郃阳)의 도사 유지선(刘志先)은 종교결사를 이끌고 봉기했다. 


1325년 하남의 식주(息州, 현 신양信阳)에서 '미륵불이 세상에 왔다.(弥勒佛当有天下)'는 구호를 내걸고 조추시(赵丑厮)와 곽보살(郭菩萨)이 민란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건이 발발했는데 그 기반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미래로의 기원으로 치환하려는 농민들의 바람이 깔려있었다.


1333년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즉위했는데 중앙의 통치질서는 무너지고 재정은 심각한 수준인 데다가 과중한 세금 부과에 따라 물가는 치솟고 하북, 하남 일대와 장강 하류에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이 1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흉년까지 겹쳤는데도 권신들의 독단과 조정의 무능은 곧 패망의 징조였다. 


1337년 1월 광동 귀선(归善, 현 혜주)의 주광경은 민란을 일으킨 후 석가모니에게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 정광불(定光佛)을 갑옷에 붙이고 무기를 들고 증성(增城)을 점령한 후 연호를 적부(赤符)라 하고 대금(大金)을 세우고 7개월 동안 토벌군과 맞서 싸웠다.


2월에는 하남 진주(陈州, 현 회양淮阳)에서 어릴 때부터 노자의 태자라고 믿으며 예닐곱 자나 되는 봉을 신출귀몰, 자유자재로 휘둘러 봉호(棒胡)라는 별명을 지닌 호윤아(胡闰儿)가 등장해 미륵불 강생을 주장하며 백련교도를 규합했다. 결사조직을 군대조직으로 개편한 후 녹읍(鹿邑)을 돌파해 진주성을 불바다로 만든 다음 둔병 근거지를 설치해 장기전에 돌입하니 주변 지역의 농민들도 호응했는데 이듬해 4월 토벌군에 참패 후 포로가 됐으며 대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천성이 총명해 깨달음이 뛰어났으며 의술과 점복에 탁월했던 한유(韓蕤)는 한법사(韓法師)라는 별칭으로 1325년 하남 정주(郑州) 일대에서 백련교를 창건, 원말 백련교의 비조로 손꼽힌다. 한법사는 1336년 사천 대족(大足)에서 교도들을 결집한 후 원나라 반대를 천명하고 여러 곳을 섭렵하다가 마침내 중경(重庆)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자 1337년 4월 조왕(赵王)을 자칭하며 송나라를 회복했다. 민란을 일으킨 한법사는 중경 주변 7개 현을 장악해 원 조정을 충격에 빠트렸지만,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체포된 후 살해됐다.


백련교 형성과 함께 훗날 홍건군 민란의 좌표가 된 한법사는 당시 불교사원에서 군중이 모일 수 있는 합법적인 영역을 이용했으며 명교에 상당히 경도돼 있었다. 백련교와 명교의 교리는 미륵을 숭상한다는 측면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당시 통치계급에게 '마교'로 알려진 명교의 교주였기에 백련교의 엄호를 받아 은폐했던 것이며 반원복송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도 연합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월(日月)을 숭상하고 광명의 신을 존경하는 마니교와도 일맥상통하게 되는데 모든 교도가 백색을 입고 채식을 하며 음주를 끊고 매장하는 교리나 화목하게 한 가족처럼 서로 돕는 생활 풍습을 지니게 된 것도 당시 기층 농민의 염원과 잇닿아 있었으며 광명의 세력이 힘을 합쳐 암흑세계를 반드시 물리친다는 실천적인 마인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의 중심에서 힘을 기른 주원장 역시 명교의 교도로서 국호를 '명'이라 한 것도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민중적' 사상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기층 농민의 결사체로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던 주원장은 백련교 등을 금지시킨 것도 당시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들불처럼 홍건군 민란을 시작하다


외눈박이 석인이 나타나면, 황하가 요동치고 천하가 뒤집힌다. (石人一只眼,挑动黄河天下反)


1351년 원 순제의 조정은 15만 명에 이르는 백성에게 황하의 제방을 쌓는 일에 동원령을 내렸다. 조정의 기강은 부패했고 세금 가중은 극심했으며 게다가 끊임없이 재해가 발생하는 마당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도처에 원성이 자자해지자 기층 농민들의 기원을 한몸에 받고 있는 백련교 지도자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미륵의 강림과 명왕의 출현'을 선전하며 민란을 준비하며 황하와 가까운 지역인 안휘 영주(颍州, 현 부양阜阳)에 살던 유복통(刘福通)은 한산동(韩山童), 두존도(杜遵道) 등과 거사를 도모했다. 한법사의 민란을 눈여겨 봤던 유복통은 '불만'과 '염원' 외에도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다. 유복통은 동지들과 함께 '외눈박이' 민요를 만들어 널리 퍼트렸으며 석인 등에 '천하가 뒤집힌다.'는 가사를 새긴 후 황하의 요도인 황릉강(黄陵冈, 현 조현曹县) 강변에 매장했는데 곧 사람들이 캐내자 민심이 급속도로 동요했다. 유복통 등은 백련교도의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며 광범위하게 농민들의 참여를 도모했던 것이다.


유복통은 집안이 부유했으며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했으며 어릴 때 백련교에 가입해 영주의 교주 중 한 명이었으며 잠시 지방 관리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1351년 4월 유복통은 하북 영년(永年)에서 난성(栾城) 현 출신의 농민이자 백련교도인 한산동을 송 휘종의 8대손으로 추대하고 민란을 결의했다. 뜻밖에 비밀리에 집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누설돼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천국에서 강림한 명왕이자 송 황실의 후예를 자임했던 한산동이 체포돼 곧바로 살해됐다.


유복통은 고향 영주로 돌아가서 5월에 드디어 안휘 영상(颍上, 현 대관代管)에서 봉기하고 신속하게 영주 성을 점령했다. <명사>에 따르면 '백마와 흑우를 죽여 천지에 경고하고 군사를 모아 도모해 홍건(红巾)의 깃발을 들었다.'고 기록했으니 홍건군 민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머리에 홍건을 두르고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새로운 왕조를 지향하고 있었다.


유복통의 홍건군은 영주를 점령한 후 하남 남부 지방으로 진격해 수많은 현을 돌파했으며 9월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여녕부(汝宁府)와 광주(光州, 현 황천潢川), 식주(息州, 현 식현息县)를 장악하니 10만 명의 군사력으로 확충됐다. 가는 곳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며 빈농을 구휼했으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사기가 충천한 홍건군은 1352년 원나라 30만 명의 토벌군을 물리치는 등 연승했다. 원나라 군사와 결탁한 지주 이사제(李思齐)가 배후에서 기습을 해오자 안휘 박주(亳州)로 후퇴하기도 했다. 유복통은 안휘 성으로 진입한 후 관군을 연달아 돌파한 후 려주(庐州, 현 합비合肥)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1355년에 이르러 박주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韩林儿)를 영접해 '소명왕'으로 옹립했으며 국호를 대송(大宋), 연호를 용봉(龙凤)이라 했으니 역사에서는 한송(韩宋)이라 부르고 있다. 홍건군의 건국은 전국을 동요하기에 충분했고 각 지역에서 호응했는데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의 서수휘(徐寿辉), 안휘 소현(萧县)의 이이(李二), 하남 남양(南阳)의 포왕삼(布王三), 호북 형번(荆樊, 현 양번襄樊)의 맹해마(孟海马), 안휘 호주(濠州, 현 봉양凤阳)의 곽자흥(郭子兴) 등이 민란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 백련교도 유복통은 민란을 일으키고 수도를 개봉으로 하는 대송을 건국했다. 사진은 개봉부. ⓒ 최종명


1357년 유복통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군했는데 동로군은 모귀(毛贵)가 이끌고 산동과 하북을 거쳐 수도 대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후 제남으로 후퇴했다. 중로군은 관탁(关铎)과 반성(潘诚)이 이끌고 산서와 하북 일대, 대동을 경유해 원의 상도(上都, 현 내몽고 다윤多伦) 황궁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였고 1359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고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서로군은 백불신(白不信), 이희희(李喜喜)가 이끌고 관중(关中)을 공략했으며 사천, 감숙, 영하 지역을 공격했다.


대군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군시킨 후 유복통도 1358년 5월 북송의 수도 변량(汴梁, 현 개봉)을 향해 진격해 한송의 도성으로 삼았다. 이때의 홍건군을 일러 정인지(郑麟趾)는 <고려사> '공민왕세가'에서 '동쪽으로 제나라와 노나라, 서쪽으로 함곡관 넘어 진나라, 남쪽으로 복건과 광동, 북쪽으로 유주와 연주에 다다랐다.'고 했으니 세력이 가장 절정일 때였다.


원 조정은 마치 화로 속에 떨어진 개미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파견한 군대가 연이어 패배해 군수물자가 거의 남아나지 않았음에도 지주들의 사병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승부수를 던지는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건군은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작전을 벌인 것에 더해 탄탄한 근거지 구축을 하지 않았으며 세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점령했던 지역을 잃곤 했다. 북벌을 나선 삼로군도 서로 고립돼 개별 작전을 수행하면서 차츰 패전이 잇따르자 형세가 역전될 조짐이 보였다.


1359년 8월에 차칸테무르와 폴로테무르가 통솔하는 원나라 대군이 변량을 공격해 성곽이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유복통은 한림아를 호위해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안휘 안풍(安丰, 현 수현寿县)까지 달아난 후 후일을 도모했다.


4년이 지나자 각 지역에서 발발한 민란군의 판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강소 고우(高邮)에서 대주(大周)를 건국한 사염업자 장사성(张士诚)이 안풍을 공격해왔다. 1363년 2월 장사성의 선봉장 여진(吕珍)이 기습하자 전투 중에 유복통은 전사하고 한림아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주원장(朱元璋)의 도움을 받아 남경 서북부 저주(滁州)에 은거했다가 익사로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이 둘의 죽음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데 전투 중에 둘 다 전사했다고도 하고 둘 모두 주원장에 의해 보호 받다가 살해됐다고도 한다.


붉은 두건을 두르고 전쟁터를 주름잡던 유복통의 홍건군은 피비린내보다 더 진한 분향(焚香)을 뿜어 향군(香军)이라 불리며 원나라 말기 무려 13년 동안 전국을 섭렵했다. 비록 백련교의 이념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원나라의 숨통을 죄며 관료사회와 지주계급에 경종을 울리며 기층 농민의 마음 속에 커다란 희망이던 세월이었다.


▲ 유복통의 백련교 홍건군은 진한 분향을 뿜어 향군이라 불렸다. 사진은 1주일이나 향기를 내며 타는 향으로 북경 외곽 담자사.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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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5] 양산박 송강과 방랍 민란의 송나라 ②


▲ 신중국 초대 문화 부총리 곽말약, 송나라 민란 방랍을 기념해 그가 사망한 동굴에 기념 친필을 썼다. 사진은 곽말약의 친필인 자금성 후문 '고궁박물원' ⓒ 최종명


북경 십찰해(什刹海) 부근 후통 골목에 곽말약기념관을 가면 문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엄청난 저작을 남기고 간 그의 공적에 감탄한다. <시경>, <서경>, <역경>에 두루 능통하고 시, 소설과 희곡 작품은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탁월해 번역서도 많다. 중국 최초의 유물사관에 따라 집필한 <중국고대사회연구>나 <갑골문자연구>, <중국사고> 등은 그의 천재적 지식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인 곽말약(郭沫若)은 1949년 신중국 정부에서 중화전국문확예술회 주석으로 선임됐으며 중국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를 역임해 '중국은행(中国银行)', 자금성 후문 신무문에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을 비롯해 수많은 필적을 남기기도 했다. 곽말약은 1964년 항주와 황산 사이 순안(淳安) 현에 있는 동굴을 위해 친필 3글자를 썼으니 바로 '방랍동(方腊洞)'이다.


방랍은 청계(青溪, 현 절강 순안淳安) 사람으로 원래 옻을 재배하는 칠원(漆园) 집안 출신이지만 소작 머슴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호탕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며 생활이 매우 어려운 농민을 잘 돌봐주던 성품이었다. 송 휘종 시대 '육적'의 횡포와 강남 지방의 공예품이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특산물을 대량으로 운송하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고 동원하고 있었다.


1120년 10월 방랍은 민란을 일으키며 선포한 결의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오늘날 가렴주구가 심각하고 가무나 즐기며 개나 말, 토목까지 동원해 사당 짓기에 여념이 없고 병사들은 화석을 운송하는데 낭비하고 뇌물에 여념이 없으니 곧 우리 동남 지방의 순박한 백성의 고혈이구나.'라고 하며 하늘의 부첩(符牒)을 받아 일어섰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는 북송 시대 관리이자 의사였다고 전해지는 방작(方勺)이 고향 이름을 따 편찬한 <박택편(泊宅编)>에 고스란히 기록된 말로 이어지는 말은 현장 중계를 하듯 생생하면서도 명쾌한 웅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농민은 오로지 늙어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해도 처자식은 늘 춥고 굶주리니 단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찌해야 하는가? 独吾民终岁勤动,妻子冻馁,求一日饱食不可得,诸君以为何如?


청계의 농민은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만여 명이 호응했으며 방랍을 '성공(圣公)'이라 추대했다. 송 휘종은 강남 자원을 중원으로 운송하는 화석강(花石纲)을 일시 중지하고 '육적' 권신인 동관(童贯)을 강절선무사(江浙宣抚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선 방랍 민란군은 11월에 이르러 청계 현 서쪽 지역에 상주하고 있던 관군 5천 명을 섬멸한 후 청계 현을 공략했으며 현위 등 관리들을 생포했다. 이어 목주(睦州, 현 항주 서남부)를 공략하고 섭주(歙州, 현 안휘 황산 일대)로 남하했다가 곧바로 당시 화석강 지휘를 총괄하던 항주로 공격 목표를 정하고 진격했다.


▲ 송나라 시대에는 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을 중원으로 이동하는 화석강이 모순의 결정체이었다. 사진은 지금도 물류수단으로 활용 중인 강소 성 상주의 경항운하. ⓒ 최종명


방랍의 민란 소식을 듣자 남쪽 처주(处州, 현 절강 여수丽水)의 농민을 비롯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항배상망(项背相望)하듯 전투에 참여했으며 구주(衢州)의 마니교(摩尼教) 조직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에 의해 탄생했으며 비교적 체계적인 우주론에 입각해 인간의 운명을 조율하는 종교적 구원으로 3세기에서 7세기에 융성했으며 경전의 세계적 번역에 따라 위구르어와 중국어로 번역돼 전해졌고 위구르민족의 국교로 성장하기도 했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혼란하던 당 대종(代宗) 시기 중국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16대 무종(武宗)에 이르러 종교 활동이 금지됐다. 이후 비밀리에 전파되던 마니교 조직은 14세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받던 농민의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보통 명교(明教)라고도 부르는데 김용 무협소설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조직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명교 조직이 처음으로 민란에 참여한 것은 오대의 후량 시대 920년 진주(陈州, 현 하남 회양淮阳)에서 봉기한 모을(母乙) 민란으로 알려져 있다.


방랍을 주모자로 한 민란군은 바야흐로 강소, 절강, 안휘, 강서 일대의 6주, 52현을 일시에 평정해 권력을 틀어쥐니 송나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도 남았다. 드디어 승승장구하며 항주를 점령해 고위 관리들의 수급을 거두는 한편 당시 전국적인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채경(蔡京)의 조상 무덤을 도굴해 해골을 부관참시하고 백성의 원성을 어루만지니 민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때 한 태학생(太学生)이 천하를 군림할 자리에 오를 계책이라며 먼저 강녕부(江宁府, 현 남경)로 진공해 장강의 요새를 점령한 후 관군의 도강을 저지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다. 방랍은 '천하가 부패해 백성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나선 것이지 천하를 주무를 수 없다'며 어쩌면 '천자'를 위한 전략적 방향이었을지 모를 건의를 듣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언제 어디로 군사를 움직일지에 대한 전략의 선택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순간의 선택이란 늘 어려운 것인가 보다.


방랍이 항주 서남부 무주(婺州)와 구주로 군사를 이동하자 토벌군도 동관(童贯)과 담진(谭稹)을 대장으로 15만의 수륙 양군을 동서로 나누어 항주와 섭주로 진격해 왔다. 1121년 1월에 방랍은 북상을 결정하고 오른팔 대장군인 방칠불(方七佛)을 파견해 숭덕(崇德) 현을 함락시키고 항주 동북부에 위치한 수주(秀州, 현 가흥嘉兴)를 지나 후주(湖州)로 진격해 왕품(王禀)이 이끄는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참패해 항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식량 보급이 단절되자 항주를 버리고 후퇴했다가 3월에 이르러 다시 항주를 공격해 성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왕품 군대에게 참패했다.


항주를 잃은 후 국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유진(刘镇)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섭주를 점령 당하는 등 차곡차곡 주변 현들을 내줬으며 4월에는 구주의 마니교 교주 정마왕(郑魔王)이 생포됐다. 거듭 승리하던 민란군은 점점 거듭 패배하고 말았으며 방랍은 후퇴를 거듭해 결국 최초의 근거지 청계 현으로 돌아왔다. 이때에도 방랍의 군사는 20만 명에 육박했으나 전투력은 크게 떨어져 관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후에는 방원동(帮源洞)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1121년 4월 토벌군이 방원동을 포위했으나 방랍의 군사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혜의 동굴 속에 숨어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을 엄호하는 비장(裨将)에 불과하던 한세충(韩世忠)이 동굴의 침투경로를 찾아내 방랍이 숨은 곳을 찾아내 수천 명을 격살하고 민란 주모자들을 생포했으며 동굴 속에서 반항하던 7만 명의 군사를 살해했다고 하니 그 참혹을 연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방랍 등 주모자급 52명은 수도 변경(汴京, 현 개봉开封)으로 압송돼 8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민란의 주모자이자 영수가 사망했으나 도주했거나 남았던 이들은 절강성 곳곳에서 1년여를 더 항쟁을 벌였다. 비록 장기적인 민란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남 일대를 섭렵했으니 <송사>에서도 방랍 열전을 따로 둘 만했다.


천 년이 지나도 씻기지 않을 22m 깊이의 방원동은 방랍동이라 개명됐으며 피비린내를 안타까워 한 것인지 방랍이 품었던 민란의 뜻에 공감한 것인지는 몰라도 흔쾌히 써 내린 곽말약의 '방랍동'은 아담한 비석이 되어 동굴을 지키고 서 있다.


여진족 금나라는 북송을 남쪽으로 쫓아내다


방랍과 양산박 민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송나라는 여진족 금과의 동맹을 맺어 거란족 요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강력한 여진족을 중원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여진족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요를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아내더니 1126년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해 화의가 성립됐다. 송 조정은 어설프게 내부교란을 획책하다가 나라를 잃었고 태상황 휘종과 흠종을 비롯 3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당하고 말았다.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赵构)가 응천부(应天府) 상구(商丘)에서 왕조를 복원했다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자 장강을 넘어 임안(临安, 현 항주)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 불렀다.


여진족이 남하해 중원을 점령하자 송 조정의 탐관부패 정권의 수탈 못지 않게 농민들의 고충은 커져갔다. 민란의 성격에 민족항쟁의 기치를 올린 항금 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1127년 장령이던 왕언(王彦)은 태행산 太行山에서 농민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하남과 섬서, 사천 지방으로 이동하며 항금 민란을 주도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금나라 도적 살해를 맹세한다(赤心报国,誓杀金贼)'는 8글자를 새겼기에 팔자군(八字军)의 항금 민란이라고 불렸다. 소흥(邵兴, 현 산서 운청运城)에서도 농민들은 군영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침공으로부터 스스로 운명을 보호하고 나서는 등 중원 곳곳은 민중 항거와 민족 항쟁이 결합된 민란이 발생했다.


항금 민란은 당시 사회 저변에 광범위하게 조직돼 있던 명교, 미륵교, 백련교 등 종교집단의 항거를 촉발하기도 했다. 1127년 그들은 산서와 하북 일대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붉은 두건을 쓰고 등장해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렸는데 이후 13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조직적인 항거로 발전했다.


불 난 틈에 도적질 하다니... 평등의 나라를 만들자


▲ 송나라 시대 동정호에서 민란을 일으킨 종상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사진은 상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상구고성. ⓒ 최종명


동정호(洞庭湖) 서쪽 정주(鼎州, 현 호남 상덕常德)의 소상인인 종상(钟相)은 마니교의 종교이념을 신봉했으며 왕소파의 '균빈부' 사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다. 송나라가 정강지변으로 멸망하자 종상과 장자 종자앙(钟子昂)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应天府(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종상 부자는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 종상 부자는 금에 대항하기 위한 물자보급을 위해 농민수탈, 세금 과중으로 이중의 재난에 직면하자 천하가 이미 대란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오를 결성하고 기치를 내걸고 갑옷을 중시하는 것은 곧 민란의 뜻이 있다.'고 민병대원들에게 설파했다.


금나라 군사에 대패한 후 후퇴한 장군 공언주(孔彦舟)가 불 난 틈을 노려 도적질 하는 진화타겁(趁火打劫)하듯 최량핍조(催粮逼租)하니 동정호 주변 농민은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1130년 초 현물을 독촉하고 세금을 강요하는 현실이 예사롭지 않게 흐르자 종상은 '법이 귀천과 빈부를 나누면 그것은 좋은 법이 아니며, 내가 행하는 법은 귀천을 평등하게 하고 빈부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다.'는 생각을 웅변한 후 농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고 공언주 군대에 대항해 소요를 이끌었다. 종교적 메시지와 강력한 지도력을 함축한 천대성(天大圣)이란 존칭을 자칭한 종상은 자신이 제창한 '법(法)'을 따르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나자 성곽을 점령하고 관청을 불태웠으며 부호를 습격했다. 불과 1개월 만에 종상의 민란은 동정호 주변 19개 현을 점령할 정도로 파급이 컸다. 종상은 '평등한 법'을 기치로 내걸고 초나라 정권을 세웠으며 왕의 자리에 올랐다.


송 조정은 기겁을 해 공언주에게 민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공언주가 정면공격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빈민으로 위장한 간첩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호응하라고 지시한 후 급습해 오자 민란 군대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종상과 가족은 체포돼 목숨을 잃었으며 종자앙은 도주했다.


그렇게 끝날 것 같던 민란은 다시 양요(杨么)가 수령이 된 후 계속해서 관군과 격전을 이어갔다. 양요는 원래 이름이 양태(杨太)인데 젊고 혈기가 넘쳤기에 초나라 지방 사투리로 '유소(幼小)'라는 뜻으로 '요(么)'라고 불렸다. 양요는 동정호 부근에 병영을 설치하는 한편 동정호 곳곳의 물길이 이어지는 요지마다 벌목을 해 선박을 구축한 후 평시에는 농사나 어획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기전에 돌입하니 민란의 대오는 갈수록 늘어났다.


6월이 되자 송 조정이 다시 정창우(程昌寓)를 대장으로 토벌군을 보냈다. 정주에 도착한 토벌군도 천 여명을 실을 수 있으며 선원이 발을 굴려 이동하는 대형 선박을 건조해 민란의 병영으로 진격해 토벌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병영은 수심이 얕았기에 모래사장에 빠져 오고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민란 군대가 재빨리 공격해 오자 토벌군은 선박을 버리고 도주했다. 양요는 확실하게 동정호에 민란 근거지를 확보했으며 민란에 참여한 농민이 20만 명에 육박했으며 점령지도 점점 늘어나는 형세였다. 1133년 양요는 종상의 아들 종자의(钟子仪)를 태자로 삼고 자신은 대승천왕(大圣天王)이라 호칭했으며 모든 노역과 세금을 면제할 것을 선포하니 백성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1월에 이르러 송 왕조의 요충지에서 거듭 확대일로에 있는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왕섭(王躞)을 대장으로 한 6만 명의 토벌군이 진격해 왔다. 민란 함선에서는 단단한 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마치 까마귀 입처럼 생긴 목노아(木老鸦)라 불리는 무기를 만들어 토벌군의 선박을 공격해 반파시켰다. 또한 선박에 깃발을 내리고 탈취한 인장을 찍은 항복 문서를 달고 흰 옷을 입은 채 피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섭이 지휘하는 본선으로 다가가 거짓 항복하는 담대한 계략을 쓰자 토벌군은 대패하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동정호 호반의 지형을 이용한 전술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때 송나라를 배반하고 금나라 괴뢰 정권인 제나라를 세운 유예(刘豫)가 관원을 파견해 합공으로 송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양요는 거절했다. 얼마 후 다시 공식 녹봉 문서와 함께 금대(金带)와 금포(锦袍)를 들고 투항을 권고하러 찾아왔으나 만찬을 베풀어 술을 먹인 후 모두 살해해 버렸다. 송이나 금의 포위와 토벌, 투항 권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종상이 민란을 일으킨 지 6년째가 되는 1135년 2월 송 조정은 당시 4대 명장으로 꼽히는 두 장군을 모두 투입할 정도로 다급했는데 항금 전쟁의 와중에 병마도독(兵马都督) 장준(张俊)과 치제사(置制使) 악비(岳飞)를 대장으로 20만 명의 병력이나 동원했다. 동정호를 포위 당하니 민란 병영도 긴장이 고조됐으며 5월에는 호수 전체와 요소요소의 나루터를 모두 통제한 후 맹장으로 잘 알려진 악비가 선봉에 선 토벌군 대부대가 병영을 향해 진격하며 투항을 권유하니 양흠(杨钦)을 비롯한 장수들이 잇달아 항복하기 시작했으며 양요는 동정호 호반의 병영을 고수하며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정호의 수심과 지형에 어두웠던 악비는 투항한 양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수문을 열어 호수의 물을 배출하고 커다란 뗏목으로 곳곳의 물길을 막은 후 호반에 광범위하게 청초(青草)를 뿌렸다. 그런 다음 양흠의 인솔로 양요의 병영을 향해 진격했다. 동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양요는 수군을 직접 인솔해 출전했는데 갑자기 수심이 얕아진데다 함선의 동력장치인 바퀴에 풀들이 엉켜 붙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양요는 희생돼 허망하게 농민정권은 무너졌지만 부하장수들에 의해 유지된 병영들은 1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 종상과 양요의 민란으로 6년 이상 동정호 일대는 긴장이 고조됐다. 송나라 조정은 악비를 비롯한 정규군 장군을 총동원했다. 사진은 동정호를 끼고 있는 악양에서 맛본 지역특산물.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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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4] 양산박 송강과 방랍 민란의 송나라 ①


사천을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国)이라 한 까닭은 비옥한 토지, 풍부한 자원으로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녔기 때문이다. 성도(成都)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는 기원전 진소왕(秦昭王)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 세계문화유산인 도강언(都江堰)이 자리잡고 있다. 평원과 분지로 이뤄진 지형에 천연의 수리시설이 형성돼 있어 축복 받은 땅이라 할만하다.


빈부 격차가 너무 커 마음이 너무 아프니, 지금 내가 너희를 위해 빈부를 공평하게 하리라.

- <속자치통감(续资治通鉴)> "吾疾贫富不均,今为汝均之"


청성(青城, 도강언)의 농민 출신 왕소파(王小波)는 차 판매로 생계를 잇고 있었으나 송(宋) 조정은 차, 비단, 무명의 국가독점을 실시하자 살 길이 막막해졌다. 평소에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던 왕소파가 민란을 일으키며 내세운 "균빈부(均贫富)" 사상은 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구호이자 실천이었다.


▲ 송나라 시대 균등 분배를 구호로 내건 왕소파 민란의 주 무대는 사천이다. 왕소파는 성도를 점령해 '계급해방'과 나라를 건국했다. 사진은 성도의 문화거리 금대로. ⓒ 최종명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다


965년에 이르러 오대십국의 후촉을 멸망시킨 송나라는 사천 지방의 풍부한 생산물을 중원으로 강탈해갔다. 당나라 말기 황소 민란은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각 지방의 부호를 도륙했다.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있던 사천 지방은 관료, 부호, 사관(寺观) 세력이 여전히 토지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던 권력자였다. 이들 지주계급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대다수 농민은 소작농인 방호(旁户)로 전락했다.


방호란 부호 부근에 거주하는 집이라는 뜻이지만 <송사(宋史)>에 따르면 '천섬(川陜, 사천과 섬서) 지역 부호들이 많은 방호를 거느렸기에 서민도 소작농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노예처럼 일했다'고 했다. 20세기 역사학자 범문란(范文澜)의 <중국통사>에서도 '방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소작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고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마치 노비처럼 사역을 당했다.'고도 했다. 방호는 부호에게 수확 생산물에 대한 납세를 하면서도 조정에 대해서도 각종 세금 착취를 당하는 처지에 불렀다.


송나라의 2대 황제 태종이 중앙집권을 가속화하고 있던 993년 왕소파는 백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향 청성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부와 빈을 평등하게 하겠다.'는 구호는 방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열흘도 지나지 않아 동조세력이 수 만 명으로 늘어났다. 


민란은 곧 군대를 조직하고 군령을 엄중하게 하는 한편 일반 인민에게는 추호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말 것을 천명했다. 곧바로 청성 현을 함락시킨 후 곧바로 팽산(彭山)을 점령하자마자 탐관오리의 상징이자 지주와 결탁해 악명이 높았던 현령 제원진(齐元振)을 징살(惩杀)했다. 


사기가 오른 왕소파 군대는 공주(邛州, 현 공래邛崃 시)와 촉주(蜀州, 현 숭주崇州 시)로 전선을 옮겨갔으며 이윽고 강원(江原, 현 숭주 동남부)에서 처음으로 관군과 격전을 치렀다. 민란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이때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던 관군 수장 장기张玘가 쏜 불의의 화살이 왕소파의 이마를 맞추고 말았다.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왕소파는 끝까지 전투에 참가해 관군을 섬멸시키고 장기도 척살했다. 얼마 후 왕소파는 상처의 여파로 사망하고 말았다.


왕소파 사후 민란 초기부터 동지였던 처남 이순(李顺)이 영수로 추천돼 별다른 갈등 없이 '계급투쟁' 전쟁을 이었다. 994년 1월 드디어 성도 공략에 나서 관군을 격퇴시켰으며 곧바로 성도부(成都府)를 점령했다. 왕소파의 균빈부 사상으로 무장된 민란군은 대촉을 국호로 나라를 세웠으며 연호는 응운(应运)이라 썼으며 이순은 촉왕이 됐다. 불과 1년여 만에 천부지국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은 광범위한 방호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이념에 기반한 조직적인 응집력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이순은 수 십만 군대로 발전하자 병력을 나누어 사천 일대의 모든 현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송 태종은 긴급하게 왕계은(王继恩)을 서천초안사(西川招安使)로 임명해 토벌군을 사천 북부 검문(剑门)으로 진격시켰으며 동시에 호북 성 일대의 군사를 이동시켜 사천 동부 기문(夔门) 돌파를 명령했다. 성도부에서 물러났던 군사들도 기회를 틈타 사천으로 들어가는 등 사방에서 관군이 몰려들고 있었다. 


994년 4월에 이르러 왕계은 토벌군이 성도를 맹공하자 이순의 10만 병력은 결사항전으로 수성하고 격전을 치렀다. 결국 5월에 성도 성이 함락됐으며 3만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민간에서는 이순 역시 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고도 하고 성도를 벗어나 30년 후에서야 광주에서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성도에서 체포된 후 18일 후 이순을 비롯해 민란 영수 8명이 봉상(凤翔, 현 섬서 성 보계宝鸡 시)에서 참수됐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왕계은이 성도를 빼앗았지만 성 밖에 민란의 이념에 동조하는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순의 부하장수이던 장여(张馀)는 만여 명을 다시 소집해 사천과 중경 일대의 8개 주州를 탈환하자 군사력은 다시 10만 여명으로 발전했다. 


여세를 몰아 기주(夔州, 현 중경 백제성白帝城)를 공략했으며 군대를 파병해 시주(施州, 현 호북 은시恩施)까지 진출하자 송 조정은 정규군 병력을 증파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성 부근 장강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장여의 민란군은 앞뒤로 공격을 받아 2만여 명이 전사했으며 함선 천여 척이 피해를 입었다. 장여는 잔여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후퇴해 점령지인 가주(嘉州, 현 낙산乐山 시)에 도달했으나 이미 송나라에 투항해 함락 당한 후였다. 장여는 포로로 잡혀 995년 2월 가주에서 살해 당했다.


왕소파가 설파한 '불평등' 세상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이순과 장여가 계속 이었지만 3대에 걸친 농민이자 노예나 다름없던 방호의 지지가 아주 조직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하늘이 내려준 복 된 땅을 완전 수복하지는 못했으나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자가 주인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왕소파 민란의 교훈은 그들이 흘린 피만큼이나 진하게 토지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피를 먹고 자란 생산물의 주인은 여전히 우리라는 것을 일깨우면서 말이다.


<수호전>의 허구에 담긴 송강의 진실


▲ 송강 민란을 담은 소설 <수호전>의 영웅을 묘사한 벽화. 사진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무송의 고향 청하의 무송공원. ⓒ 최종명


행장을 하늘에 원망 마라, 한신과 팽월의 멸족이 너무도 슬프지 아니한가.

한마음으로 보국하고 조정에 충성해 백전 경험으로 요를 정벌하고 방석의 난을 평정했건만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 했으나 천강성이 그 빛을 다해 탐관 도둑이 아직 여전하구나.

독배를 마시고 황토에 묻혔으니 일찍이 범려의 용퇴가 올바른 처신인 걸 배우지 못하였구나.

莫把行藏怨老天,韩彭赤族已堪怜。一心报国摧锋日,百战擒辽破腊年。 

煞曜罡星今已矣,谗臣贼子尚依然! 早知鸩毒埋黄壤,学取鸱夷范蠡船


<수호전>의 마지막 120회 끝머리에 나오는 짤막한 시구가 의미심장하다. '행장(行藏)'은 <논어(论语)>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말로 '벼슬에 나가거나 은거하거나' 주군에게 임용되는지 용사(用舍)를 뜻하는 말이니 생사나 성패 여부를 하늘의 뜻에 맡기라는 것이다. 


한 고조 유방을 도왔지만 구족이나 삼족의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역사라고 '담대'하게 감상에 젖기도 한다. 거란족 요의 침입을 막고 방석의 민란 토벌에 참여했다는 것은 실제로 벌어지기 불가능한 일이자 허무맹랑한 소설적 구성일 뿐이다. 천강성(天罡星)은 원래 북두칠성이지만 소설다운 작명에 따라 송강을 우두머리로 민란을 일으킨 36명 영웅 집단을 상징한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와신상담해 복수극을 기획하고 실현한 브레인으로 성공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홀연히 용퇴한 후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변모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간신의 모략에 의해 독배를 마시고 사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소설 <수호전>의 서사적인 마무리를 끝맺는 말이니 굳이 전권을 읽어보지 않아도 작가의 주제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으로 읽혀진다.


소설 <삼국지>가 국호, 지명, 등장 인물과 시대 배경만 빼고 대부분이 허구라면 <수호지>는 윤곽만 빼고 에피소드는 모두 소설인데다가 등장 인물도 대부분 상상력으로 창조된 인물이다. 실제 인물은 송강(宋江)을 비롯 서너 명 정도가 겨우 역사에 짤막하게 기재돼 있으며 그나마 108 영웅호한 중 서열 5위이자 관우의 후예로 등장하는 관승(关胜)이 제주(齐州, 현 산동 제남) 소속의 장령(将领)으로 <송사>나 <금사>에 전해지는 정도이다. 


호랑이 때려잡은 무송(武松)이나 장비 캐릭터의 노지심(魯智深), 금군교두(禁軍敎頭) 임충, 다혈질의 정의파 이규(李逵), 지략과 성품이 뛰어난 노준의(盧俊義) 등 수많은 영웅호걸은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인물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수호지> 인물도 조조, 유비, 손권, 제갈량처럼 유명하지는 않아도 '정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리따운' 명기 이사사(李师师)와 염문을 뿌린 송 휘종(徽宗) 시대에 이르러 여섯 명의 간신 '육적(六贼)'이 방종과 방탕으로 온갖 못된 짓으로 전횡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 수탈에 여념이 없었다. 관직에 따라 정가를 정해놓고 하는 매관매직도 가관일 뿐 아니라 궁궐과 원림 중건에만 혈안이 됐으며 수많은 장인을 동원해 민간에서 착취한 각종 재료로 공예품을 제조했으며 심지어 휘종이 좋아하는 기화이석(奇花异石)이 많은 동남 지역(북송 의 산동,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운하를 통해 수도 개봉까지 운반했다. 


집단 운송 조직을 강(纲)이라 하는데 돌만 잔뜩 실어 나르는 화석강(花石纲)이 한번 움직이면 모두 10척의 함선이 동원됐다고 하니 강남의 기암괴석이 모두 중원으로 이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미 동남 지역 농민들은 겪어야 할 고통은 다 맛 본 상태였는데 당 조정과 관료사회는 제멋대로 흥청망청 사의휘곽(肆意挥霍)하니 연간 재정수입을 아홉 달 만에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화폐가 과도하게 발행됐으며 세금도 증가해 물가가 폭등했다. 게다가 실물 수입을 늘릴 목적으로 일반 민간의 논밭을 공전으로 전환해 국가 소유로 묶어버리는 시행령을 단행했는데 이를 괄공전(括公田)이라 했다. 관료와 지방 토호들도 겸병을 통해 대지주로 변해갔는데 육적의 채경(蔡京)이 점유한 토지가 50만 무(약 333km²)에 이르렀다고 한다.


▲ 송강 민란을 주제로 만든 소설 <수호전>의 노지심. 사진은 개봉의 대상국사에 설치된 노지심 조각상. ⓒ 최종명


하남과 가까운 산동의 양산박(梁山泊, 현 산동 양산 현과 운성郓城 현 사이) 호반에서 고기도 잡고 창포도 기르던 농민들이 무거운 세금과 암흑 통치를 견딜 수 없었다. 1119년 송강과 사빈(史斌, <수호전> 등장인물이 아님)을 비롯 36명이 민란을 일으키고 하삭(河朔, 황하 북부 하북 일대)을 공격하는 등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송강과 36명의 전사는 거침 없이 청주(青州)를 지나 제주, 복주(濮州, 현 견성鄄城) 등 10여 개 주를 파상공세로 진격했다. 송 휘종이 '산동의 도적 송강을 복종시키라'는 초무(招抚) 조서를 내릴 정도로 조정을 진동시켰으며 송나라의 통치 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송사>에 따르면 호부상서를 역임한 호주(毫州) 지주(知州) 후몽(侯蒙)은 '송강 등 36명이 횡행하는데도 관군 수만 명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청계(青溪, 현 절강 순안淳安 서북부)에도 방석의 민란이 일어났으니 송강을 사면해 방석을 토벌해 속죄토록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후몽의 상소를 본 휘종은 '외지에 나갔어도 짐을 잊지 않는 충신이다.'고 했다. 나름대로 차도살인지계의 묘수이긴 했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후몽이 병사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소설 <수호전>은 후몽의 상소를 모티브로 화려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산동 청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송강 무리는 송 조정이 섭주(歙州, 현 안휘 섭현) 지주 증효온(曾孝蕴)이 토벌군을 이끌고 북상하자 기주(沂州, 현 산동 임기临沂)로 남하했다. 1121년 2월에 이르러 회양군(淮阳军) 주둔의 하비(下邳, 현 강소 휴녕睢宁 서북부)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술향(沭阳) 현에서 배를 타고 해주(海州, 현 강소 연운항连云港)에 이르렀고 초주(楚州, 현 강소 회안淮安)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조정으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은 해주 지주 장숙야(张叔夜)의 유인작전에 허망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장숙야는 첩자를 파견해 송강 민란군이 10여 척의 함선에 식량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송강 무리는 유인작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해안으로 올라온 후 토벌군의 매복에 걸렸으며 함선도 불에 타버리자 퇴로도 막히게 되자 모두 투항해 포로가 됐다. 결국 3년도 되지 않아 송강의 민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란 항전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양산박 일대의 반항 투쟁은 계속돼 1121년 송강 등이 체포되자마자 괄공전의 환관이자 '육적'인 양전(杨戬) 등의 악행을 폭로했다. 그럼에도 착취는 멈추지 않았으며 농민의 삶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끊임없이 항거하고 있었다. 


양산박 일대 농민들이 지속적으로 조정에 불만을 품고 반항하자 1124년 운주(郓州) 지주 채거후(蔡居厚)가 농민 5백 명을 유인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어민 장영(张荣)은 양산박에 농민들을 규합해 총 백여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송강 민란이라기보다 양산박 민란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양산박 농민들의 모순 인식은 적대적이었다.


중국 민란의 역사를 유추해 보면 송강과 36명은 투항 후 최소한 우두머리는 참수 당했을 것이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은 소설 <수호전>은 '확실히 귀순이라는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졌다.'고 했으며 소설이 회자된 명나라 시대도 탐관들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간신들에 의해 송강 등이 조정에 충성한 영웅으로 묘사된 것은 비극이자 분민(愤闷)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유교적 발상으로 송강의 민란이 소설로 둔갑했지만 송나라 말기의 관료의 부패와 암울한 사회를 드러낸 것을 평가할 만하다고 했는데 명나라 말기 사상가 이탁오(李卓吾)도 관료사회가 농민의 요구를 살피지 않고 민란 진압만 우선하는 것에 대해 통찰했던 지식인답게 <수호전>을 평가하며 '북송 말기를 반성의 시각에서 살펴보며 채경 등의 부패집단에 대한 비판과 반항을 드러낸 소설로서 군신의 황음무도와 부도덕을 질타한 것'이라고 독후감을 쏟아냈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야말로 곧 '민란'이다. 김용이나 이탁오가 지적한 송강 민란은 적절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소설에 대한 평가일 때 타당하지 실제 역사에 대한 접근일 경우 사뭇 달라진다. 역대 민란에서 귀순 후 충성했다는 사례는 원나라 때 귀순 흥정을 했던 왕선지 정도였고 민란의 우두머리가 어떤 운명을 지녔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되며 귀순 후 조정에 충성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史实)이다. 


정사와 소설을 구분해 봐야 하지만 어쩌면 <수호전> 주인공 송강의 별명이 '때 마침 내리는 단비' 급시우(及时雨)인 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인민의 염원을 담아낸 멋진 작명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 항주 서호 호반에 있는 소설 <수호전>의 주인공 무송의 묘.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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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3]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②


소금업자 황소는 왕선지 봉기에 호응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황소의 고향 원구(冤句)는 진나라가 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 기록마다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에 대한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겨우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으니 사람의 명운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멋진 '장난'을 칠 수 있겠는가?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 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八,我花开后百花杀。

冲天香阵透长安,满城尽带黄金甲。


9월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일 때이자 폭죽을 터뜨릴 만큼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괴감을 말하고 있다. 굳이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살(杀)과 운을 맞춘 것으로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당나라의 마지막 민란의 주인공 황소가 지은 시는 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황후화>를 연상시킨다. 사진은 영화가 상영되던 2008년 12월 베이징 시내의 홍보간판. ⓒ 최종명


수도 장안에 국화 향기만 만발하고 도성으로 들이닥치는 황금 갑옷의 물결, 영화 <황후화>의 원 제목이 바로 '만성진대황금갑'이다. 장예모 감독은 황소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시에서 착안하고 영리한 머리로 교묘하게 뒤집은 후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로 활용했다. 장예모가 비록 시 끝 구절을 따다가 '반혁명은 곧 몰락'이라는 통치자 편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지만 황소의 역사기록까지 뒤집을 수야 없을 것이다. 민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빌려다가 영화 자본으로 덧칠한 '비겁한' 감독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복수의 염원을 담아 시를 짓다


황소는 고향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조세를 강요하고 사역을 강제하며 퇴로조차 없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충돌이 잦았다. 심지어 사람들을 모아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지만,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산둥 지방으로 이동하며 승전고를 울리자 형제와 조카 등 8명과 함께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에는 기아에 시달리던 각 지방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으며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탈하기도 했다. 왕선지가 사망하자 황소를 흠모하던 군사들이 합류해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년 3월 황소는 변주(汴州, 하남 개봉)와 송주(宋州, 하남 상구商丘)를 직접 공략했으나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남하하며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당시 해상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12월에는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곧이어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都统)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수복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했지만,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부하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계주에서 시작해 뗏목을 타고 상강(湘江)을 따라 강릉(호북 형주)을 거쳐 장안과 직선으로 불과 만 리 거리의 상양(襄阳)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상 왕탁(王铎)을 초토도통(招讨都统)으로 삼고 강릉에 둔병을 설치했다. 또한 이계(李系)를 부도통 겸 호남관찰사로 임명해 10만의 군사를 담주(潭州, 호남 장사长沙)에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담주에 도달하자 이계는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란군은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가 상강에 흘러넘쳤다. 여세를 몰아 강릉을 돌파하자 도주하는 왕탁을 쫓아 상양을 지나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은 공세를 펴보기도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나 걸림돌이 사라지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년 토벌군의 저항과 전염병이 유행하자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8월에 이르러 회하(淮河)를 건넜고 11월에 낙양을 공격하자 한림학사 출신의 낙양유수 유윤장(刘允章)은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조정은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으로 하여금 민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대책이 무용지물이었다. 더구나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민란군의 규모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황소의 진격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치원도 막지 못한 장안 점령


▲ 황소는 역대 왕조의 수도 중 하나인 장안 성을 함락시키고 쑥대밭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 장안 성을 꾸며놓은 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내 모습. ⓒ 최종명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치원이 당시에 <토황소격문>을 썼는데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데,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많고 그다지 역사적이지도 않다. 고변은 황소의 군대를 백만 대군이라 조정에 부풀려 보고하고 토벌의 전공을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최치원의 격문은 고변의 이름으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뿌리고 다녔으니 유명세를 탄 것만은 분명했을 것이다.


황소 민란군은 '격문'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눈 하나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12월에는 드디어 수도 장안의 코 앞인 동관(潼关)과 화주(华州, 섬서 화현华县)를 점령하니 당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우국지위(忧国之危)를 맞아 성도까지 도피했던 전철을 똑같이 밟은 것이다.


881년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에서처럼,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드디어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 상양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으며 수도를 점령한 민란군답게 바로 국호를 대제(大齐), 연호를 금통(金统)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


황제에 등극한 황소는 사천으로 도주한 당희종을 가볍게 보고 군사를 몰아 추격하지 않았다. 사병들이 강도로 변해 장안이 '살인의 추억'으로 변해가고 여인네 강탈과 백성 구타가 나타나며 도처가 혼란으로 변해가는데도 황소는 저지할 수 없었다. 당나라 조정은 숨 쉴 틈이 생겼으며 곧바로 절도사 정전(鄭畋)이 토벌군을 이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소의 나라 대제에서 태위의 지위에 오른 오른팔 상양은 사천으로 진격했으나 토벌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상양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성안 곳곳에 패전을 조롱하는 시가 나붙자 관원 및 유생 3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존심이라고 하기에는 유치했고 심리작전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보복이었다.


토벌군 선봉장 정종초(程宗楚)가 장안으로 진격하자 황소는 전군을 이끌고 돌연 동쪽으로 도주했다. 무혈 입성한 토벌군이 승리에 도취돼 별다른 방비 없이 음주에 취하자 황소는 전광석화처럼 토벌군을 전멸시켰으며 다시 한 번 장안을 점령했다. 이때 토벌군을 지원했거나 내통한 백성을 한꺼번에 참수해 장안은 그야말로 피로 씻어낸 듯 세성(洗城)과 다름없다고 <자치통감>은 피를 토하며 기록하고 있다.


1938년 모택동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지도자가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를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모택동은 황소 외에도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민란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 신중국 건립의 교훈을 얻었다. 근거지란 세력도 중요하지만, 명분이야말로 생명줄이거늘 장안은 점령하고도 어찌 할바 모르고 불사진취(不思进取)했으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자 황소 민란은 점차 실패의 나락으로 치닫게 됐다.


882년이 되자 사천의 조정은 반격 조건을 다시 갖추고 격전에 대비했다. 이때 동주(同州, 섬서 대려大荔)에서 토벌군과 교전 중이던 황소의 맹장 주온(朱温)은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돌연 당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휘 당산(砀山) 출신의 유생 주온은 일찍이 황소 민란에 참여했으며 이윽고 배반의 화신이 됐다. 당 황제는 하늘이 내려준 복으로 기뻐하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토벌군 지휘를 맡겼다. 


주전충은 당시만 해도 '하늘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데 황소 민란을 진압하면서 군대를 장악하고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인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후량을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연 주전충은 황소의 민란을 거치며 일약 시대의 풍운아가 된 주온이었다.


'황소'의 살인 공장 도마채


황소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가 발생했다. 서돌궐계로서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온 것이다. 거침없이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황소는 결국 장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주의 시간을 벌여야 했으며 황금 보화를 거리에 뿌리고 추격을 늦출 정도로 다급했다.


게다가 군량 공급이 문제가 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살생해 인육을 식량으로 만드는 작업공장인 도마채(捣磨寨)를 운영하기도 했다. 인간 방앗간이 따로 없었으며 참혹한 실상이 <구당서>, <신당서>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장안에서의 도륙도 모자라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육을 담식(啖食)했으니 '살인마'라는 황소의 불명예를 도저히 지울 길이 없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 중에 인육을 먹은 최초의 인물은 수말당초의 '비정한' 반란군 수괴 주찬(朱粲)이었지만 황소 역시 '식인의 명부'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황소는 884년 봄, 이극용의 5만 군대에 연패하며 하남을 지나 산동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주온 토벌군과도 정주와 개봉 사이 왕만도(王满渡, 하남 중무中牟)에서 대패했는데 황소의 핵심 부하장군들이 대거 투항해 버려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6월에는 왕선지 민란에 참여했다가 황소에게 의탁한 최고의 오른팔 상양조차 무녕절도사가 이끄는 토벌군에 투항했다. 황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게 되자 산동 태산의 협곡 낭호곡(狼虎谷)으로 은신했다.


▲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태산 부근 낭호곡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사진은 태산의 가파른 계단. ⓒ 최종명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외조카이자 수행 장군인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헌납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며 최후의 순간을 준비했다. 임언이 감히 칼을 들지 못하자 황소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민란 주모자의 죽음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당연하지만,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역사의 정설 외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상존하고 있다. 중국당사협회의 한 역사학자는 황소가 자결했지만, 미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임언이 다시 수급을 베어 투항했지만 임언 역시 사타족 군인에 의해 살해돼 황소와 함께 수급이 당 조정에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황소의 죽음과 관련돼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1900년 돈황(敦煌)에서 도사 왕원록(王圆箓)이 우연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동굴을 발견했으니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돼 있던 동굴로 잘 알려진 막고굴에서 황소의 사인과 관련된 감숙 숙주 현 <숙주보고(肃州报告)>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황소는 그의 오른팔인 상양에 의해 살해돼 수급이 서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으로 상양이 투항할 때 이미 황소는 살해됐으며 태산으로 가지도 못했다는 주장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언제 어떻게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 제각각 근거와 기록을 남긴 황소는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 민란'이었으니 '당은 황소에 의해 망했다.'는 기록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민란의 영웅이었기에 살인마가 됐거나 혹은 누명을 썼겠지만 황소의 인생은 비참한 인민을 일으켜 세웠지만 스스로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지금껏 살아있다.


당나라의 멸망 속에 오대십국이 숨 쉬다


▲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수급이 감숙 성 숙주로 옮겨졌다'는 <숙주보고> 문서가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 건립된 돈황 막고굴을 상징하는 9층루. ⓒ 최종명


당나라뿐 아니라 모든 왕조는 망했지만, 황소 민란만큼 전국을 휘젓고 수도까지 점령했던 역사는 많지 않다. 사천으로 도망간 황제가 황소의 대제 정권 토벌을 위해 재물을 바짝 수탈하자 농민의 부담이 가중됐다. 치아를 치료하는 관리인 천능(阡能)이 촉나라 땅에서 882년 농민주도의 민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본영 주위에서 9개월 동안이나 치열하게 울분을 토하는 민란으로 골치 아픈 당 조정에게 황소의 장군 주온의 투항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충성해 달라는 전충이란 이름까지 하사하며 배반의 오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주전충은 황소가 사망하자 23년 후 민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907년 국호를 양梁이라고 하고 건국했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했다. 이에 격분한 황소 토벌의 또 다른 주축이던 이극용은 당나라 연호를 지키며 부흥을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908년 병사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주황이 개국하자 지방 절도사들이 번진을 기반으로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화북 지방의 오대와 화남 지방의 십국이 차례로 집권했는데 70여 년의 할거 시대는 조광윤의 송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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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2]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①


당나라 말기 절강 섬현에서 사염 밀매로 생계를 유지하던 구보는 상산에서 살신의 정신으로 민란을 일으켰다. 사진은 구보의 고향과 아주 가깝고 20세기 국민당의 장제스의 고향이기도 한 절강성 계구 마을의 시장. ⓒ 최종명


"당(唐)은 황소(黄巢)로 인해 망(亡)하고 그 화(祸)는 계림(桂林)에 있다." - <신당서(新唐书)>


당나라 말기 최대 농민전쟁인 황소 민란이 일어나기 전 그 화근이 된 사건을 계림에서 봉기한 방훈(庞勋) 민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방훈보다 10년 앞서 절강 일대에 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구보(裘甫)가 있었으니 당나라를 침몰시킨 진정한 화근이자 최초의 항거였다. 당나라 말기 혼란, 피 끓는 전쟁의 서막이다.


당나라 말기 황제는 우매하고 무능해 주색과 오락에 빠져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고 가혹한 가연잡세(苛捐杂税)로 억지를 부리고 정치는 부패해 중앙은 환관(宦官)의 전권, 지방은 번진(藩镇)이 할거하니 나라 꼴이 엉망진창인 천창백공(千疮百孔)이었다. 진흙탕에 빠지고 숯불에 타버린다는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 이후 주현(州县)에 파견되는 절도사는 점점 중앙의 통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자 세력으로 변모했으며 세습화를 통해 고착화하는 경향이었다. 토지를 대규모로 장악하는 토지겸병으로 이어져 농민들은 의지할 곳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구보는 동시대 역사학자 배정유(裴庭裕)가 집필한 <동관진기(东观秦记)>에 따르면 월인(越人)이라 기록했고 <신당서>에 섬현(剡县, 절강 승주嵊州 시) 사람이라고 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구보는 사염(私盐) 밀매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강남 일대의 소금 산업은 풍부한 생산성으로 조정의 재정을 상당 부분 담당하던 명줄이었다. 지세(地税)는 물론이고 염차주(盐茶酒)에 대한 세금이 갈수록 가중됐고 잔혹한 착취로 이중삼중으로 수탈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거리마다 원성이 터져 나오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구보는 상산(象山, 절강 영파宁波)에서 859년 12월 살신의 정신으로 반항의 깃발을 높이 드니 기다렸다는 듯 수백 명이 순식간에 동조했다.


곧바로 현성을 공격해 주변 일대를 장악하고 군대의 준동을 무력화시켰다. <자치통감>에는 현을 장악한 후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장사를 모집하니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관찰사가 토벌군을 소집해 공격해오자 구보는 유인작전을 펴 삼계(三溪, 절강 신창新昌)에 있는 강 상류의 저수지를 뚫어 강을 건너던 토벌군을 섬멸했다.


'막힌 곳을 뚫어 물이 흘러넘치게 하자!'는 구보의 삼계대첩은 꽉 막힌 조정의 약한 고리를 뚫어 행복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자는 해방의 메시지와도 같았다. 산과 바다 근처의 크고 작은 유랑 집단이 일시에 합류하자 3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번지자 고향 섬현에 농민 정권의 토대를 구축했다.


구보 민란군이 차례로 절강 일대를 장악하자 관찰사로 임명된 왕식(王式)은 대군을 소집하는 한편 강남 지방을 유랑하는 회홀(回鹘, 위구르족)과 토번(吐蕃, 티베트족) 사람을 기병으로 동원하고 각 지역의 지주까지 무장을 시켜 토벌에 나섰다. 구보는 토벌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전을 거듭하자 섬현을 수성하며 만여 명의 민란 군대와 백성이 일치단결해 3일 밤낮 83차례에 걸친 공방전을 벌였다. 끝내 과불적중(寡不敌众)으로 구보는 생포돼 참수당했으며 500여 명은 포위를 뚫고 탈출했으나 곧 전멸했다.


불과 반년 만에 끝난 민란이었지만 당나라 말기 사회모순과 계급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8년 후 또다시 강남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방훈 민란의 예고편이었다. 그런데 <신당서>는 왜 수도 장안과 4만리나 떨어진 광서 계림을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당나라 멸망의 '화', 그 뿌리라고 한 것일까?


계림의 탈출, 장안을 위협했지만


805년에 서주(徐州), 사주(泗州, 강소 사홍泗洪), 숙주(宿州), 호주(濠州, 안휘 봉양凤阳) 4주를 지배했던 번진 무녕군(武宁军)이 설치됐다. 신라인 장보고(張寳高)가 무녕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819년 고구려 유민 집단이자 산동지방 절도사로 재직하던 이사도(李師道)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데 종군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녕군은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는 번진으로 절도사의 횡포에 맞서 장병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당나라 멸망의 '화'가 되는 계림 방훈의 민란 원인은 무녕군과 관련된다. 당시 무녕군 군인이던 장보고,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산동 영성(榮城)의 적산법화원 ⓒ 최종명


862년 7월 서주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신임 절도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돌연 절도사를 축출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 해도 하극상치고는 돌발적이었다. 구보 민란을 진압해 명성을 얻고 있던 왕식이 다시 절도사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하극상을 벌린 장병 수천 명을 학살하고 무녕군을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목숨을 건진 장병들은 모두 도망쳐 산으로 들어갔으며 비적으로 평생 살 운명이었다.


당시 운남 지방에는 백족 등이 중심이 된 남조(南詔) 정권이 세력을 키워 북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주의 하극상 사건 2년 후 864년, 조정에서는 서주와 사주 일대의 '비적화한' 장병을 끌어들여 남조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약 800여명이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로 내려가 주둔하게 됐다.


멀리 이국땅에서 용병의 시간을 견디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으니 비적과 조정은 애당초 서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던 셈이다. 거래는 약속에 기반하는 것인데, 애초에 약속한 주둔 기간 3년이 지났건만 조정은 귀향 명령 대신에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해버렸다. 불신이 팽배해지자 불만의 고름이 터져 나왔으며 게다가 관찰사의 가혹한 훈련과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등점을 넘고 있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수병(戍兵) 복무를 감당하라는 것은 잔혹한 고통이었다.


868년 7월 전직 무녕군 장교 허길(许佶)은 마침 계주 관찰사가 전근 간 틈을 노려 계주도장(桂州都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식량창고를 약탈한 후 군량과 사료를 관리하는 양료관(粮料官)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해 서주로의 귀향을 도모했다.


반란군이 된 방훈 군대는 병기 창고를 열어 무장한 후 계림을 출발해 호남, 호북, 안휘, 절강을 거쳐 서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 당시 지방 번진의 횡포에 고통 받던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군대병력도 점점 늘어나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못하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일부 장병의 단순 반란이 서서히 농민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훈은 '조정이 우리를 모두 주살하려 하니 어차피 싸우다 죽는 것이 백번 낫다.'고 외치며 서주의 본거지 팽성(彭城, 강소 서주)을 공격했다. 애초에 계림으로 보냈을 뿐 아니라 복무 연장을 주도한 서주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을 체포해 원한을 갚았으며 부하장수들은 물론이고 그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서주를 장악하고 장강 일대를 차단하자 수도 장안까지 위협에 빠지게 됐는데 이때 농민들의 참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됐다. 조정이나 민란군 지도자 모두 서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규모로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방훈에게 서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20만 명의 토벌군을 모집해 절도사 강승훈(康承训)에게 지휘하게 했다. 선봉장 대가사(戴可师)가 3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방훈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쳐 방심하도록 유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토벌군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방훈은 토벌군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만하고 향후 공격방향이나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방심했다. 게다가 음주와 오락에 점점 빠졌는데 마음 속으로는 반란군 두목으로 최후를 맞기 보다는 조정이 자신을 절도사로 인정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인 계림의 방훈 민란.사진은 '산수갑천하'의 계림의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과 소수민족 이미지가 혼합된 세외도원. ⓒ 최종명


"예로부터 교만에 빠져 사치로 나태하면, 얻었으나 다시 잃게 되며 이겼으나 다시 패하는 것인데, 하물며 얻은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사 주중(周重)은 직언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방훈은 듣지 않았다. 지도자가 그러니 덩달아 계림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수병들도 거만하고 난폭해지더니 무고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란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방훈도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지 않자 서서히 군율이 떨어지고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군 복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군인들은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명분과 규모를 키웠으나 본래 군인의 최고 로망인 절도사에 편재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절도사를 얻을지 말지'에 대한 동요까지 아이들이 시장 곳곳에 널리 유행할 정도였다. 절도사를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전투를 하다가도 또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된 것으로 봐서 방훈의 지략과 풍모는 한 나라를 세울만한 됨됨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웃음거리가 된 지도자를 비웃는 노래는 곧 고난을 살아가는 인민의 애환이자 바람이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난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는 속성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조정은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 절도사의 녹봉을 줄 것처럼 심리전을 펼쳐 안심시키면서 대대적인 토벌을 준비한 후 공격해왔다. 민란 지도자로서의 신임이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군대를 이탈해 투항하는 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전투가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다. 숙주와 서주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팽성이 함락당한 후에 계림 출신 핵심 장병의 일가친척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자 급속도로 사기가 꺾였다. 


방훈은 869년 9월에 이르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서북에서 출전한 돌궐계 용병 사타족(沙陀族) 기병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게다가 패잔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이미 투항한 옛 동지가 토벌군 선봉대로 나타나 앞길을 막자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한때 장안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침 없었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한계에 다다르면 어떻게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군인이 주도하고 농민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백성들이 호응해 1년 이상 전국을 휩쓸던 기세는 이후 황소의 난을 촉발했으며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导火线)이 됐다.


소금으로 망한 나라


황소를 등장시키려면 먼저 왕선지(王仙芝)를 앞세워야 한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민란을 일으켰으며 왕선지가 전사한 후 황소가 그 이념과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다.


왕선지도 구보처럼 당시 횡행하던 소금 밀매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균전제가 파탄 나고 번진의 겸병이 겹쳐 재정이 극도로 결핍해지자 조정은 차, 소금, 술의 전매를 강화했으며 그에 따른 세금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조정은 관염을 통해 거듭 폭리를 취하는 한편 밀매로 운영되던 사염을 가혹하게 단속하니 필수품인 소금이 사회모순의 핵심으로 적나라하게 부상했다. 당나라가 소금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민란의 주인공은 대부분 소금밀매 조직을 기반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왕선지는 874년 말 가혹한 폭정과 잔혹한 세금 징수는 물론이고 가뭄으로 인해 기아가 극도로 치닫자 장원(长垣, 하남 신향新乡)에서 기아 선상에서 헐떡거리던 3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민란 봉기를 주도했다. '천보평균대장군(天补平均大将军)'이라 자칭한 왕선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뜻으로 천하를 '평균'으로 수선(补)하고 싶었다. '평균'은 진승 오광의 난이나 태평도의 민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 구호로서 만인 평등을 처음으로 제창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균'에 대한 인민의 염원이 왕선지에 의해 처음 등장한 이후 '평등'에 대한 갈망은 이후 북송 초기 민란을 일으킨 왕소파(王小波)의 '균빈부(均贫富)' 구호에서 다시 등장한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 이를 균등하게 바로 잡으려는 사상이었고 인민의 호응을 얻어 나라를 세웠으니 이상적인 공산주의적 국가가 이미 중국 역사에 '원시적'이나마 출현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 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하남 일대에서 봉기한 왕선지는 875년 5월 연이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와 복주(濮州, 산동 견성鄄城)를 공략하니 인근 지방마다 봉기에 호응해 민란의 깃발을 드는 세력이 출몰했다. 왕선지는 이때 원구(冤句, 산동 하택 부근 추정)에서 봉기한 황소와 회합을 해 의기투합했다.


왕선지는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던 중 876년 7월 절도사 송위(宋威)가 이끄는 군대와 싸워 패배하자 도주했다. 토벌군이 승리한 후 조정에 왕선지가 이미 죽었다는 '이해하기 힘든' 보고가 올라갔는데 9월에 이르러 왕선지가 다시 나타나자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왕선지가 동도(东都) 낙양(洛阳)을 공격하자 도성 내 군관민이 모두 가족을 데리고 성을 탈출했다고 <자치통감>이 기록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희종(唐僖宗)은 수도 장안에서 중양절(음력9월9일) 행사도 취소하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토벌 대신에 회유를 모색할 정도로 다급했다.


왕선지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남, 호북, 안휘 일대를 공략하니 반년 만에 30만 군대로 확산됐다. 기주(蕲州)자사는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성을 열어 환대했으며 회유 책략의 일환으로 하사한 감찰어사 책봉에 왕선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왕선지는 투항할 생각도 있었지만 황소가 크게 책망하고 수하들이 강력히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생각을 포기했다. 황소는 왕선지로부터 떨어져 따로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왕선지 민란군은 약화된 세력으로 악주(鄂州, 호북 무창武昌)를 공략했지만 형남(荆南, 호북 강릉江陵)에서 포위를 당하는 등 토벌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다가 878년 2월 황매(黄梅)에서 토벌군 수장 증원유(曾元裕)에게 패해 참수당하고 말았다. 왕선지가 이끌던 반란군 중 1만여 명은 상양(尚让)의 인솔로 안휘 박주(亳州)에서 황소와 합류했다.


당나라 말기 왕선지 민란군과 토벌군이 일대 격전을 벌인 강릉은 삼국지 관우가 지키던 형주 땅이기도 하다. 사진은 형주고성으로 들어가는 대로.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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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1] 수나라 민란 장백산과 와강채 ②



▲  하북 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두건덕의 고향은 고성으로 서커스로 유명한 오교 부근이다. 사진은 오교의 시장 모습. ⓒ 최종명


두건덕(窦建德)은 장남(漳南, 하북 고성故城)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약속을 천금처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곤한 동네에 살며 사람들이 부모 상을 당하면 밭을 갈다가도 즉시 달려가 장례를 도왔으며 필요한 물품을 내주기도 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이런 성품 덕분에 마을 이장을 하기도 했는데 두건덕의 부모 장례식에 천여 명이나 찾아와 예물을 주려고 했으나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 모두 사절했다고 <구당서(旧唐书)>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인품이다.


고구려 침공에 대한 전국적 반발이 거세지고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도망치고 난민이 많아질 즈음, 마을 주민 손안조(孙安祖)의 집이 떠내려가고 부인과 아이가 굶어 죽는 일이 생겼다. 홀로 남은 손안조에게 군대에 들어가라는 현령의 조언을 거부하자 잔인하게 곤장 치도곤을 당했다. 손안조는 현령을 죽이고 도망쳐 두건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고구려에 대패한 올해 홍수가 발생해 백성은 빈곤하건만 황제는 백성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체혈민정(体恤民情)' 하나 없이 또 다시 요동으로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전 서방을 정벌할 때 입은 손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백성의 피로가 극심한데 연이어 전쟁이니 일년 내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출병한다면 세상은 동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사내대장부가 죽지 않고 공을 세워 업적을 세워야지 어찌 도망치다가 포로의 운명으로 세상을 마칠 것입니까? 


내가 잘 아는 지인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숨어서 의적으로 생활하다가 기회를 틈타 사람과 말을 얻어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반드시 일어나 한바탕 경천동지할 대업을 벌여보시오."


두건덕이 손안조에게 한 말인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두건덕은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거나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를 대장으로 황하 인근의 험난한 근거지로 도피시켰다.


도적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지만 두건덕이 사는 고향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이런 내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관청이 손안조를 비롯한 도적들과 결탁했다는 밀고와 의심으로 두건덕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두건덕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해 당한 후였다. 


두건덕은 전 가족이 몰살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수하에 있던 장수 이백 명을 이끌고 당시 수현(蓨县, 하북 경현景县)에서 봉기한 고사달(高士达) 군대에 합류했다. 이때 손안조가 사망하자 함께 하던 수천 명의 군사들도 두건덕을 찾아와 투항했으며 동고동락의 동지가 돼 함께 군세를 확대해 나갔다.


616년 탁군(涿郡) 유수(留守) 곽현(郭绚)이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고사달은 지혜와 책략이 두건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군사마(军司马) 직책을 양도하고 군권을 전부 일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과 짜고 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고 선전하고 포로 중 한 명을 두건덕의 부인으로 위장해 공개적으로 살해해 기정사실로 믿게 했다. 두건덕은 거짓 항복 후 기습공격으로 토벌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도주하는 곽현을 참수해 수급을 고사달에게 바치니 두건덕의 권위가 날로 높아졌다.


수나라 조정은 고관인 태복경(太仆卿) 왕의신(杨义臣)이 또다시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맞서 싸우면 불리하니 도주했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급습하자는 두건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공격에 나선 고사달은 5일만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왕의신이 공격해오자 군사들은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두건덕은 수백 명의 군사만 이끌고 도주한 후 요양(饶阳, 하북 형수衡水)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의 시신을 수습해 따뜻한 곳에 안장한 후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전군에 흰색 상복을 입게 했다. 제각각 도망했던 군사들이 다시 모이니 수천 명의 군대로 복귀했다. 사기가 다시 충천해지자 복수를 위해 수나라의 관리와 지방 유지를 모두 처형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두건덕은 흥분을 누르며 반드시 '마땅한 예의로 상대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요양 현 장관(长官, 중앙에서 파견한 현령)이 투항해 두건덕을 귀빈으로 여기고 수나라를 토벌할 대계를 상의했다. 이후 수나라 군현의 장관들이 점점 현을 내주고 투항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군대의 기세가 날로 번창했으며 수많은 인재와 병사가 모여 십만 군대의 명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수양제가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되자 618년 두건덕은 그 옛날 천명을 받은 하우(夏禹)를 따른다는 취지로 국호를 하(夏)라고 선포하고 왕이 됐다고 <구당서>는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호랑이의 위세와 용의 위엄을 지닌 호거용반(虎踞龙蟠)의 명성을 얻으며 하북 일대를 장악했다.


문경지우가 원수가 되다니


수나라 말기 민란을 주동한 두복위와 보공석은 모두 제남 사람으로 문경지우의 관계였다. 민란이 발전하면서 서로 앙숙이 됐으며 원수 사이로 변했다. 사진은 제남 시내의 골동품 상가. ⓒ 최종명  


제주(齐州, 산동 제남济南) 사람 두복위(杜伏威)와 보공석(辅公祏)은 어릴 때부터 둘 다 가난했지만 서로 친분이 깊었다. 보공석은 목양업을 하는 고모네의 양을 훔쳐 나이가 더 많은 두복위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부자 집 담을 넘어 물건을 강탈해 배를 채우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는데 새싹은 날 때부터 알아볼만한 것인가 보다.


613년 산동과 하북 일대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 전시상황이었다. 두복위와 보공석은 자신들이 저지른 절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관청에 체포될 위기에 이르자 도적이 되기로 했다. 왕박이 민란 근거지로 삼았던 장백산으로 들어갔지만 도적 공동체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자 자기를 따르던 부대를 이끌고 나와 회북(淮北, 안휘 북부)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보공석이 하비(下邳, 강소 비현邳县)에서 봉기한 묘해조(苗海潮)와 담판을 벌여 그가 인솔하고 있던 민란군을 포섭했으며 강회(江淮, 강소와 안휘) 일대로 조직을 확대하자 보공석의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보공석이 농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자 두복위는 평소에 대장군이 아닌 형이라 부르는 것에 살짝 질투의 마음이 쌓이기 시작했다. 양자로 삼은 장군들을 중용하고 보공석에게는 화살부대를 관장하는 복사(仆射) 업무에 임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문경지교(刎颈之交)라는 명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대업을 도모할만한 절친인지는 잘 가려봐야 하겠다. 토벌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점점 남하해 강회 일대를 장악하자 농민혁명정권을 선포하고 두복위는 대총관(大总管)에 올랐으며 보공석은 그저 한 부서를 담당하는 장사(长史)에 임명됐다.


수양제가 죽고 중원은 난세에 접어들어 이연이 아들 이세민과 함께 당나라를 건국한 상태였다. 619년 두복위는 당나라에 투항 의사를 밝히며 보공석에게는 병권이 없는 벼슬을 주라는 당부를 했다. 


처음부터 투항할 의사가 없던 보공석은 마침 두복위가 군사 천명을 주고 10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한 농민반란군인 이자통(李子通)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공석은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전투를 이끌어 의외로 이자통 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고 쉽게 단양(丹阳, 남경)을 점령했다.


두복위는 단신으로 수도 장안으로 가기 전에 보공석과 부하 장수에게 '장안에 도착해 관직을 받게 되면 너희도 함께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를 내려놓지 마라'고 했다. 또한, 30여 명의 양자 중 가장 신임했던 왕웅탄(王雄诞)에게 병권을 주면서 보공석이 필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항상 감시하라고 거듭 주문했다. 


두복위가 장안으로 떠난 후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보공석은 왕웅탄이 병으로 누운 사이 병권을 탈취했다. 623년 9월 보공석은 장안으로 제 살길 찾아 떠난 두복위와 절연하고 단양에서 10만 군대를 통솔하며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했다. 수나라에 항거해 일어났던 민란군은 이제 당나라와 대항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수나라 3대 민란과 당의 건국


황하 북쪽으로 천리 길에 밥 짓는 연기 없고, 강소와 안휘 지방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수서(隋書)>에 나오는 말인데 수나라의 3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으로 황폐하게 변한 중원과 강남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온전히 굶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두건덕은 민심이 우리 편이고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사내대장부라면 대업을 추구하라고 했다. 왕박이 일으킨 장백산 민란을 시작으로 누구나 뜻과 인품만 있으면 농민들이나 병역 기피자의 호응을 얻어 혼란의 현장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양제(煬帝)는 자신의 시호(谥号)처럼 온 나라를 불태워버리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제 민란이 촉발한 군웅할거(群雄割据)는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하남 일대 이밀의 와강군, 하북 일대 두건덕의 하북의군, 강남 일대 보공석의 강회의군은 새로운 정권의 창출, 오로지 하나만이 살아남자는 피 말리는 세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나라 말기 태원유수 이연은 민란 토벌이냐 반란이냐 갈림길에서 아들 이세민의 권유에 따라 반란의 길로 접어든다. 사진은 태원 시내의 영택공원 입구. ⓒ 최종명


우문화급에 의해 수양제가 살해되기 1년 전인 617년, 민란 토벌의 명령을 받은 태원유수 이연(李淵)은 도저히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권력의 누수, 레임덕이 오면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지 선택이 쉽지 않은데 아들 이세민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반란의 깃발을 드는 것을 따랐다. 


수나라 군사 대부분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수도 장안을 점령한 후 수양제가 죽자 618년 당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됐다. 이후 3대 의군과의 경쟁과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수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적양을 살해하고 신임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와강군을 이끌고 있던 이밀은 낙양 공략에 치중하고 있었다. 수양제를 살해한 경도병변(江都兵变)을 일으킨 우문화급이 공격해오자 그를 물리쳐 북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민란 토벌로 세력을 크게 키운 왕세충(王世充)에게 대패한 후 장안으로 도주해 당나라에 투항했다.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이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산동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견을 가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619년 1월 당나라 장군 성언사(盛彦师)의 매복작전에 걸려 산동 남부 웅이산(熊耳山)에서 37살의 나이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북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두건덕은 619년 북쪽으로 도주한 우문화급을 공격해 살해했다. 이듬해 낙양을 점령하고 있던 왕세충이 이세민의 공격을 받아 전세가 불리하자 두건덕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621년 낙양을 구원하러 남하했다. 춘추전국시대 및 초한쟁패의 격전지였던 호뢰관(虎牢关, 하남 형양荥阳 서북부)에서 이세민에게 체포돼 장안으로 압송된 후 49살의 나이로 참수됐다.


두복위가 당나라에 투항하자 강회의군을 이끌고 있던 보공석은 점차 강력해지는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내느라 힘에 부쳤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공격해오자 보공석은 안휘 당도(当涂) 현에 위치한 박망산(博望山)과 청림산(青林山)에 병사를 배치하고 철벽으로 산성을 쌓고 저항했으나 보급로가 끊겨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결국 절강으로 도주했는데 불과 수십 명만 남아 항전하다가 무강(武康, 절강 덕청德清)에서 체포된 후 단양(丹阳, 남경)으로 압송돼 참수당했다.


왕박의 장백산 봉기와 보공석의 죽음까지 약 14년 동안 중원은 하루도 피로 물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농민들은 민란에 의연히 일어섰다가 피로 얼룩진 벌판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지만 역사 속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피의 흔적을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 침공이라는 야망으로 폭발하는 농민들의 울부짖음과 격렬한 기세에 밀려 수나라는 건국한 지 35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 수나라는 양제의 무리한 침략전쟁이 불러온 민란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고 결국 민란과 내란의 와중에 우문화급에게 살해 당했다. 수양제의 장녀 남양공주는 우문화급의 동생을 남편으로 둔 애절한 주인공이다. 사진은 남양공주가 수행하고 설법하던 창암산 절벽.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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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0] 수나라 민란 장백산과 와강채 ①


▲ 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산동의 장백산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계획으로 인해 발발한 민란의 근거지이다. ⓒ 최종명


백두산, 중국은 장백산(长白山)이라 부른다. 장백산이라 불린 것은 12세기경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북위 때에는 도태산(徒太山)이었고 당나라는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서안 남쪽 진령산맥(秦岭山脉)의 주봉을 태백산이라 한다. 우리나라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과 이름이 같다. 


당나라 시대에는 지금의 백두산이 태백산이기도 했다. 산 이름만 놓고 보면 역사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왜 산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일까? 산세가 바뀔 만큼 기나긴 시간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산동지방에도 장백산이 있으며 적어도 수나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렸고 지금은 장백산맥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사실 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장백산 도적

보라 내 모습! 붉은 옷 비단 바지 입었다네!

긴 창 공중을 반으로 가르듯 휘두르니

눈 부신 햇살 머금어 칼날이 번쩍이네!

산에서 토비처럼 노루와 사슴을 먹고 살며

산을 내려가 도적으로 지주의 소와 양을 먹고 사네.

관군이 침범하면 앞서 나가 칼을 들고 맞설 거야.

어차피 요동으로 가면, 헛되이 죽느니만 못해

설령 내 머리 잘린다 해도 뭐 어떠리! 


'세상을 꿰뚫어 보는 강도' 지세랑(知世郎)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왕박(王薄)이 쓴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라는 시로 청나라 가경제 때 관리였던 두문란(杜文澜)이 편찬한 고대 민요와 속담 수록집 <고요언(古谣谚)>에 기재돼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당시 돌궐을 진압해 서북 방면을 안정시킨 후 고구려 침공을 준비했는데 오랜 전쟁과 대규모 운하 건설, 자연재해, 농민수탈에 이은 계급 모순이 겹쳐 인민의 삶은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간에는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전쟁에 이겨 장군들은 상을 받을지 몰라도 나만 들풀처럼 죽는다.'는 노래가 유행하며 요동병역(辽东兵役)을 거부하는 추세였다. 


610년에 이르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며 탁군(涿郡, 북경 인근)에 백만의 군사를 집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농민을 동원해 양식과 무기를 이동시켰다. 한번 차출된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으니 경작할 인원이 부족해 전답은 황폐해졌다. 안문(雁门, 산서 대현代县)과 동도(东都) 낙양에서는 흥분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전운이 감도는 조정 분위기와는 달리 백성의 고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자치통감>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고구려 토벌 계획을 위해 산동에 부서를 설치하고 말을 기르고 군역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부(民夫)를 동원해 쌀을 운반해 쌓게 하고 소달구지가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망한 병졸이 과반이 넘었다. 경작할 때를 놓쳐 전답은 황폐해지고 기근이 겹쳐 물가는 오를 대로 올랐다. 탐관오리가 설치고 백성은 가난이 극심해 재물은커녕 추위와 굶주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고 약탈이 자행되었는데 군도(群盗)가 모이기 시작했다.


수의 고구려 침공 1년 전인 611년, 수해로 산동과 하남 일대 30여 군이 수몰되자 대지가 엉망진창으로 변했는데도 고구려 침공 계획에 따라 세금 징수와 병역 징발은 멈추지 않았다. 산동 추평(邹平) 사람인 왕박은 참다못해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산동은 수군의 집결지로 군함 건조로 인한 고통이 가중돼 있었기에 장백산을 근거지로 삼고 시를 지어 '민심을 추동'하니 각 지방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던 농민들이 분연히 일어났으니 수나라 말기 거대한 농민봉기의 서막이었다. 


왕박의 민란군이 수차례 관군을 격퇴하며 1년 만에 수만 명으로 늘어나자 노군(鲁郡, 산동 연주兖州)을 빼앗아 근거지를 확대할 계획으로 남쪽으로 진격했으나 수나라 장군 장수타(张须陀)가 이끄는 군대와 태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장수타의 기습작전에 말려 잔여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임읍(临邑, 산동 덕주德州)에서 다시 패전했다. 왕박은 두자강(豆子冈, 산동 혜민惠民)에서 봉기한 손선아(孙宣雅)와 평원(平原)에서 봉기한 학효덕(郝孝德)과 연합해 십만의 병력으로 정비한 후 다시 남하해 장구(章丘)를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타의 정규군 2만 명과 싸워 승리하지 못하자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지역 민란군을 지원하고 연합전투에 참가할 뿐 산동 북쪽 일대를 근거지로 관망했다. 


619년에 이르러 왕박은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투항했으며 우문화급이 당시 민란군 두건덕(窦建德)에 의해 포위당하자 기회를 틈타 민란에 합세했다. 얼마 후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에게 항복해 종군했다. <신당서(新唐书)>에 따르면 622년 왕박은 군량 창고인 담주(潭州)와 수창(须昌, 산동 동평东平)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사 이의만(李义满)의 옥사를 방조했다가 그의 조카 이무의(李武意)의 복수 때문에 살해당했다. 


왕박은 수나라 말기 스스로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지도자로 나섰으며 전국적 민란의 포문을 연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수당영웅(隋唐英雄)이 판치던 시대에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강도'에서 지세왕(知世王)으로 불리며 장군으로서의 면모도 남긴 민란 주동자였다. 


와강채로 집결하라


수양제의 장녀 남양공주는 나라가 망한 후 하북성 창암산에 사당을 짓고 불교에 귀의했다. 청말 광서제에 의해 자우보살로 명예회복이 될 정도로 그녀는 설법을 통해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의 동생 우문사급의 부인이기도 했다. 창암산 사당 옆에 '가친'이란 사당이 애틋해보인다. ⓒ 최종명



호북 녹림채(绿林寨), 산동 양산채(梁山寨)와 함께 고대 3대 민란 근거지에 속하는 와강채(瓦岗寨)는 하남 동북부 안양(安阳)시 활현(滑县)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뛰어난 상인이자 정치가, 사상가인 여불위(吕不韦)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활현 남부에 위치한 인구 5만여 명의 조그만 향(乡)에 3억 위안(약 550억 원)을 투자해 와강채 관광지가 조성돼 있다. 수당 교체기에 농민 반란을 통해 성장한 와강군의 기세가 전국을 휩쓸었고 그 여운이 지금도 전해지니 역사의 복원력은 정말 탁월하다.


여불위에 이어 고향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한 인물은 적양(翟让)이다. 낙양의 법률 담당 하급관리로 재직하던 중 죄를 범해 사형당할 처지였는데 한눈에 영웅임을 알아본 옥리(狱吏)가 비밀리에 풀어줘 살아남았다. 감옥을 탈출한 적양은 고향 부근 와강채로 달아난 후 가난한 농민을 규합해 민란의 대오를 조직했다. 


와강채는 멀지 않은 곳에 황하가 흐르고 있으며 범람의 흔적으로 사구(沙丘)가 솟아있으며 초목이 무성하고 갈대가 도처에 쌓여 인가가 드물다. 민란군이 은폐하기에도 좋고 출격하기에도 유리한 산채였다. 북쪽의 황하와 남쪽의 변하(汴河)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진퇴와 공수에 유리한 군사요충지로 적합했기에 민란군은 사방 20km에 이르는 토담을 정비해 보루로 삼았다. 


▲ 중국민란사의 3대 민란근거지 중 하나인 와강채의 창업자 적양의 고향은 안양시 활현이다. 안양시는 기원전 상나라의 중요도읍이었고 갑골문자 등이 출토됐다. 사진은 안양의 은허박물관 입구. ⓒ 최종명


수나라 말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상황에서 삶의 출구를 찾던 청년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와강채로 찾아온 인물 중에는 당대 최고의 지략가이자 무장으로 유명한 17살의 서세적(徐世绩)도 있었다. 그는 당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고 3대에 걸쳐 중용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 이연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 받았고 이세민(李世民)이 황제가 되자 그의 이름 세(世)를 휘(讳)해 이적(李勣)으로 개명했으며 수호장군인 능연각(淩煙閣) 24공신 중 한 명이 됐다. 


와강군의 군사(军师) 서세적은 적양에게 '이곳 인근 지역은 빈곤한 마을이므로 주민들을 괴롭히면 안 되니 풍요로운 땅 형양(荥阳, 정주郑州 서부)일대의 관청과 부호를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관청의 식량 창고와 금고를 털어 재원이 늘어나자 화강군을 찾아오는 농민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때 당나라의 마지막 반란 수장이 되는 이밀(李密)도 합류했다. 이밀은 장안(서안)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으로 수양제가 그의 용모가 범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시켜 이름을 물어본 것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은거했다. 포부가 컸던 이밀은 반란에 가담해 체포와 탈출을 겪는 우여곡절 끝에 활 솜씨가 신의 경지라는 왕백당(王伯当)의 소개로 와강군에 투신했다. 


이밀:유방과 항우는 원래 평범한 백성이었는데 진나라를 전복시켰지요. 현 황제는 우매하고 포학하고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며 관군은 대부분 멀리 요동에 가 있지요. 수하의 군대가 전투력이 강하니 동도와 대흥을 공격해 폭군을 타도하는 것은 아주 수월한 일이 아닌가요?

적양:장군 의견 아주 좋아요. 난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군요

이밀:우선 형양을 도모한 후 곧바로 진격하는 게?

적양:그렇게 합시다.


사실 적양은 수양제를 전복할만한 지략이나 포부가 없었기에 대흥(장안의 수나라 지명) 출신인 데다가 동도(낙양)를 공략했던 이밀을 신뢰했다. 616년 10월 형양을 향해 와강군이 진격하자 태수는 다급하게 조정에 보고하니 왕박의 민란을 토벌한 장수타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했다. 이밀은 적양을 앞세워 토벌군과 정면으로 맞서게 하는 한편 자신은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잠복해 유인전술을 펼쳤다. 


장수타는 적양이 이끄는 본대와의 전투에 승세를 보이자 일부러 도망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거침없이 추격해 왔다. 이밀은 매복하고 있던 밀림으로 토벌군이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전멸시켰다. 명성이 높던 정규군 장군 장수타를 살해하는 전과를 올리자 이밀의 인기가 치솟았다. 귀족 출신의 이밀은 군령을 바르게 세우고 소박한 생활 자세를 유지했으며 노획물을 장병들에게 공평하게 나누니 신망이 더욱 두터워졌다. 


617년 봄 와강군은 수나라 최대의 군량 창고를 공격해 탈취한 후 곧바로 창고를 열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자 백발노인부터 어린아이를 짊어진 아낙네까지 곡식을 받아 들고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화강군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온 사방에 메아리처럼 퍼지게 됐다. 이때 와강군의 지휘권은 점점 이밀에게로 향했으며 적양은 자신의 능력이 이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민란의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도 수령의 지위를 공개적으로 양도했다. 


이밀은 위공(魏公)으로 추앙됐으며 자연스레 건국과 왕조 전복 운동으로 발전해 갔으며 농민의 합류와 하급 관리의 투항이 이어졌다. 지속적으로 낙양을 공략하는 한편 수양제의 만행을 알리고 토벌의 정당성을 알리는 격문을 뿌리니 중원은 완전 경천동지했다. 


그렇지만 민란의 와중에 지도자의 권력 양도는 예상하지 않은 불운도 함께 가져왔다. 와강군이 나라의 위용을 드러내며 수나라 멸망을 위해 분투할 적기에 내부 분열이란 곧 불행일 수 밖에 없다. 이밀에게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선뜻 내준 적양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적양이 권력을 다시 탈취하자는 의도를 눈치챘다며 고자질을 했다. 


이밀은 적양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만찬에 초대해 활 시위를 당기게 유도한 후 배반의 누명을 씌워 살해해버렸다. 이때 서세적은 칼에 베이고 다른 장군들도 다치거나 머리를 조아려 겨우 살아남게 됐다. 이후 이밀은 도량이 좁고 배은망덕한 자로 알려져 신임을 잃게 됐으며 점점 전투력도 쇠락해져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적양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농민의 울분과 함께 하고자 와강채를 기반으로 수많은 인재를 불러모아 대세의 흐름을 바꾼 민란의 영웅이었다. 자신보다 리더십이 뛰어나 동지와 조직의 비전에 더 적합한 사람이 나타나면 흔쾌히 자리를 비울 수 있겠는가? 지장보다 덕장이 인재 관리에 소질이 있기만 하면 충분히 리더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역사는 보여주고 있어 적양의 선택은 아쉬운 점이 있다. 적양이 와강군을 끝까지 이끌었다면 민란의 역사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와강채 민란의 군사 서세적은 이후 이적으로 개명해 당나라 이세민의 '능연각 24공신'이 됐다. 당나라 대명궁 서북쪽에 있는 도관인 삼청전 옆 누각 능연각에 공신 초상화를 걸었다. 능연각은 전쟁 중에 훼손됐으며 사진은 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본당이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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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9] 양진남북조 시대의 민란 ②


촉나라 땅의 농민과 노비의 울분


▲  조광의 민란은 농민과 노비가 힘을 합치고 파족 민족이 호응해 일으켰다. 사진은 호북 성 이창의 장강유역에서 파족 문화를 시현하고 있는 모습. ⓒ 최종명



중국 역사에서 벌어진 전투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았겠지만 고대 3대 대전을 꼽으라면 전국시대 장평대전(长平之战),삼국시대 적벽대전(赤壁之战), 남북조 시대 비수대전(淝水之战)을 손꼽는다. 장평대전은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전쟁이었으며 적벽대전은 삼국이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됐으며 비수대전은 남북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383년 오호십육국 시대의 저족 정권 전진의 황제 부견이 강남 진출을 도모하며 동진(东晋)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비수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해 가까스로 영토를 보존한 동진은 남조 시대를 열게 돼 그 동안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강남의 영토를 확장하고 경영하게 됐다. 동진의 장군은 승상 사안(谢安)이었으나 약관의 나이였던 유유(刘裕)도 하급병사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후 강남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혜로운 장군 중 한 명인 유유(刘裕)는 진공제(晋恭帝) 사마덕문(司马德文)을 폐위하고 420년 송(宋)을 건국했다. <송서(宋书)>에 의하면 '옛날 춘추시대 제후국 송나라 영토이던 수여(绥舆, 강소 동산铜山) 사람'으로 남조 첫 번째 황제로 등극했다. 송나라 초기에는 명나라 대학자 이지(李贽)가 '혼란을 멈추고 부흥을 이끈 군주'로 칭찬할 정도로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와 북방의 청주, 연주, 사주(司州, 낙양 동부)를 수복해 황하까지 진출했으며 강남은 물론 광동, 복건, 촉한 땅까지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유유 사후 장남에 이어 삼남 문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인 432년 익주자사(益州刺史) 유도제(刘道济)는 관권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앞세우며 양민을 상해하고 수탈하는 악덕관리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7월에 패망한 동진의 종실 출신 사마비용(司马飞龙)이라고 주장하며 허목지(许穆之)는 관리의 횡포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구지(仇池, 감숙 성 남부)를 다스리던 저족 왕 양난당(杨难当)의 후원을 얻어 천 여명의 군사를 모집한 후 남하해 양평군(阴平郡, 사천 광한广汉)으로 진격해 태수를 몰아냈다. 그러나 유도제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참패해 허목지는 전사했다. 


허목지의 실패 이후 사천 오성(五城, 중강中江) 출신의 조광(赵广)은 여전히 농민들과 저족 노비들의 항전 의지가 높자 또다시 사마비용의 이름을 빌어 양평 일대의 수천 명을 결집한 후 광한(广汉)을 공격했다. 사천 서쪽의 파족(巴族) 민족도 호응해 농민들과 소수민족이 연합해 사천 익주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9월에 조광이 이끄는 민란군은 성도(成都)로 진격해 갔으며 유도제는 성을 수비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민란군 규모가 점점 커지자 사람들은 사마비용이 생존하는지에 대해 의심도 커졌지만 조광은 도사 정도양(程道养)을 내세워 촉왕(蜀王)으로 삼고 문무백관을 설치해 조직을 정비했다. 10만여 명의 군대로 편재한 후 장군들을 사방으로 나누어 성도를 공격했으며 유도제는 배방명(裴方明)을 출전시켜 응전했다. 조광 민란군은 몇 차례 배방명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결국 대패해 정도양은 7천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광한으로, 조광은 5천명의 병력으로 부성(涪城, 면양绵阳)으로 물러났다. 유도제의 관군은 군량미가 바닥이 났음에도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추격해 왔지만 패전하고 되돌아가게 되니 민란의 깃발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다시 힘을 결집할 수 있었다. 


이듬해 2월 유도제가 사망했으나 배방명은 민심을 우려해 알리지 않았다. 이때 정도양이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광한으로 퇴보했다. 3월에 형주자사가 지원병을 이끌고 배방명과 합세한 토벌군이 공격해오자 민란군은 부성과 오성까지 후퇴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에는 조광의 부대가 참패했으며 9월에는 정도양의 부대가 광한의 계곡에서 패전하자 조광의 민란은 1년 2개월 만에 끝났다.


호적을 박탈 당한 백적


▲  호적이 박탈된 백적이 뭉친 당우지 민란은 남조 시대 절강 항주 주변을 무대로 일어났다. 항주 서호의 모습. ⓒ 최종명


송나라가 멸망한 후 제나라를 건국한 소도성(萧道成)은 한나라 재상 소하(萧何)의 24대손으로 아버지 소승지(萧承之)는 유유의 우장군을 역임했다. 소도성은 하급 병사를 시작으로 출세해 권력을 손에 쥐자 선양의 형식으로 479년 남조의 대권을 획득했다. 북송학자 사마광은 <계고록(稽古录)>에서 소도성을 평가하기를 '명성이 번창해 난세와 폭정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순리를 지킨 훌륭한 군주'라고 했다. 


제나라는 개국공신 우완지(虞玩之)의 건의에 따라 세금 수입의 확대와 부역 체계를 강화할 목적으로 송나라 때의 호적제도로 본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제도인 검적(检籍) 정책을 시행했다. 호적을 조작하고 신분을 세탁한 사례를 적발해 호적을 기준으로 국가재원을 회복하려는 정책이었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가짜 호적을 지닌 자를 찾아내 벌을 주고 멀리 변경으로 부역을 보내는 강력한 정책을 지주와 관리가 오히려 작폐(作弊)의 수단으로 악용하자 파산하고 도피하는 농민이 수 없이 늘어났다. 탐관들의 장난이 심해져 바로잡아야 할 사람는 피해가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각적(却籍)'으로 낙인 찍혀 끌려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부당하게 호적을 박탈 당한 사람들을 백적(白籍)이라 불렀는데 원래 호적의 색깔이 황색인 것에 빗댄 것이다. 


부춘(富春, 항주 부양富阳 구) 사람인 당우지(唐寓之)는 대대로 풍수지리에 능해 택묘(择墓)의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혀 담대했으며 주변의 가난을 구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485년 당우지는 신성(新城, 절강 신등新登)에서 '검적에 항거하라(抗检籍), 소도성의 제나라에 반대(反萧齐)'하는 구호를 내걸고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했다. 이듬해 1월 회계태수가 수도 건강(남경)으로 황제를 조배(朝拜)하러 가자 당우지는 거병을 해 부양(富阳, 항주 서남)을 공략했다. 그러자 삼오(三吴, 절강 동부) 일대의 농민이자 백적이 분연히 합류했는데 모두 3만 명에 이르렀다. 


당우지의 민란군은 곧바로 동려(桐庐)와 전당(钱塘, 항주 서남), 염관(盐官, 해녕海宁 남부), 제기(诸暨), 여항(余杭)을 공격했다. 당우지는 절강 지역을 장악하자 황제를 칭하고 전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오(吴)라 했으며 문무백관을 앞세워 통치를 시행했다. 동양(东阳, 금화金华)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살해했으며 산양(山阴, 소흥)으로 진격해 전선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무분별한 강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서만(舒湾, 항주 서남부)에 기나긴 성곽을 쌓았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의  <동려현지(桐庐县志)>에는 당우지성(唐寓之城)이라 기재돼 있다. 지금도 부양 현 부춘강을 바라보고 있는 서만촌(舒湾村)에는 옛 발자취가 남아있다. 


제나라 조정은 민란군을 백적(白贼)이라 부르고 금군 수 천명과 전마 수백 필을 동원해 토벌을 시작했다. 민란군은 호적 비리에 불만을 품고 임시방편으로 모인 군대였기에 정규군에게 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우지는 피살됐으며 점령했던 군현은 대항하지 못했으며 민란에 참여했던 수 많은 농민들은 북쪽 회하(淮河) 변경으로 끌려가 10년이나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비록 민란은 쉽게 끝났지만 제나라의 검적 정책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 490년에 이르러 폐지됐으며 불합리한 호적 정책에 항거해 민란에 참여했다가 변경에서 고통 받던 이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서북 지방의 민족연합 민란


▲  북위 정권에 맞서 싸운 개오 민란은 감숙, 섬서, 산서 일대와 황하를 무대로 발생했다. 감숙 난주의 황하 강변. ⓒ 최종명



개오(盖吴)는 갈족, 저족, 강족과 혼혈을 이루며 공동산(崆峒山, 감숙 평량平凉) 일대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반농반목 흉노족 계열의 노수호(卢水胡) 후예이다. 445년 9월 관중 땅 행성(杏城, 섬서 황릉黄陵 서남부)에서 궐기했는데 이 일대의 민족과 농민들이 호응해 순식간에 10만여 명의 병력을 결집했다. 북위 초기 서북지방에 진(镇)을 설치하면서 선비족과 각 민족사이의 갈등이 내재돼 있었는데 드디어 민족연합의 대규모 민란으로 발전했다. 


개오 민란군은 북위의 장군 척발흘(拓跋纥)이 이끌고 온 군대를 단번에 패퇴시키자 조정은 병주(并州, 산서 태원), 진주(秦州, 감숙 천수), 옹주(雍州, 섬서 풍상凤翔)의 기마병을 총동원했다. 민란군은 대규모 토벌군과 맞서지 않고 군대를 나누어 섬서와 감숙 일대를 기민하게 동서로 움직였다. 동쪽 임진(临晋, 섬서 대려大荔)에서 북위 군대를 섬멸시켜 황하에 3만 명을 수장시켰으며 서쪽 위북(渭北, 섬서 보계宝鸡)에서도 대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촉나라 출신 설영종(薛永宗)이 행성(杏城, 섬서 황릉黄陵)에서 봉기를 일으켜 개오 민란에 호응했다. 북위 조정은 두 부대의 연합을 막고자 토벌군을 분산해 공격했으나 민란 연합군의 합류를 막을 수 없었다. 규모가 배가된 민란연합군은 11월에 행성에서 개오를 천태왕(天台王)으로 옹립하고 문무백관을 갖췄다


446년 1월 북위 태무제 척발도(拓跋焘)가 직접 출군해 토벌에 나서자 설영종 부대는 동옹주(东雍州, 산서 임분临汾)에서 맞서 싸웠지만 때마침 불어온 엄청난 북풍으로 인해 참패했다. 설영종은 가족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안(서안) 북쪽에 머물고 있던 개오의 민란군을 향해 척발도가 직접 황하를 넘어 공격해오자 인근 산으로 은거했다. 대군이 지속적으로 압박해오자 산을 내려온 민란군은 행성에서 대패한 후 개오는 긴급히 남조의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개오는 송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행성에서 다시 봉기해 진지왕(秦地王)으로 개명한 후 북위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8월에 이르러 참패한 후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부하에 의해 살해 당했다. 중원 밖 서역에 사는 여러 민족을 이끌고 북위 정권에 항거하고 남북조 시대의 힘의 균형을 활용했던 독특한 민란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 민란의 역사는 분단된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 시대로 흘러간다. 두도, 손은과 노순, 조광, 당우지, 개오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민란 주인공들을 만났던 시대였다. '어떤 규모의 어떠한 민란인가'가 중요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처지와 아픔을 공감하고 '시대정신'에 입각해 인민의 절규를 대변한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공부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거나 기록에 있더라도 너무도 많은 민란을 다 가슴에 끌어안고 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어느 시대라도 지배계급의 통치 모순으로 인해 핍박 받는 사람과 함께 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언제나 '민란의 역사'는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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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8] 양진남북조 시대의 민란 ①


▲  삼국 이후 중국은 남과 북으로 통치기반이 분리됐으며 중원 북부에는 선비족의 나라 북위가 오랫동안 장악했다. 불교를 숭상한 북위의 초기 수도 대동 운강석굴. ⓒ 최종명



도교의 이상이 접목된 태평도 농민 민란의 여파로 지방 호족은 삼국시대의 영웅담을 만들었고 최후의 승자 조조의 위나라는 권신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습 작위인 진왕(晉王)에 안주하지 않고 265년 양위를 통해 진나라를 건국하자 역사는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여전히 강남지방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오나라를 평정해 통일제국을 형성했지만 지방 호족을 견제할 목적으로 친족 왕을 내세워 분봉한 정책이 오히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8왕의 난'을 촉발했다.


16년 동안 친족 정권의 암투가 한창이던 때 8왕 중 성도왕(成都王)의 용병부대이던 흉노족 지도자 유연(劉淵)은 독자적인 나라를 건국했다. 중원으로 진출,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켜 수도 낙양을 함락하고 황제를 처형했다. 이로써 건국한 지 불과 50년 만인 316년 진나라(서진)는 멸망했다. 선비족과 함께 저(氐)족, 갈(羯)족, 강(羌)족도 기다렸다는 듯 중원으로 진출해 연쇄적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민족에 의한 최초의 중국지배, 즉 오호가 135년 동안 16개 나라를 세우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선비족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위나라(북위)에 의해 중원이 통일될 때까지 약육강식의 혼란이 지속됐다.


중원을 내준 한족 사마씨 왕족은 장강 이남으로 도피해 오나라 호족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건업(建業, 남경南京)에 도읍을 세우고 진나라(동진)를 복원했다. 사마씨의 강남 정권 진나라는 100여 년 동안 통치하며 중국 영토의 남방 확장을 이뤘으며 유유(刘裕)의 송나라(조광윤의 송나라와 구분해 유송刘宋이라 함)에게 멸망하고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시대를 맞았다. 장강 이북의 위, 제, 주로 이어지는 북조 시대와 묶어 남북조 시대가 지속됐는데 수나라에 의해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의 320여 년의 혼란을 양진오호남북조라 부른다.


혼란의 와중이라고 농민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서진과 동진, 남조 시대에 일어난 민란이 역사의 비중이 비록 약할지 모르나 시대의 아픔을 내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농토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유민으로, 비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농민들은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반국가 투쟁의 일선에서 피와 땀을 흘렸다.


동진이 부견(苻堅)의 전진(前秦)과의 역사적인 전투인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승리해 강남 지역을 방어하고 송, 제, 량,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시대를 열어가고 있을 때 오호십육국의 5개 민족은 중원과 북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흉노에 이어 몽골 지역을 평정한 유목민족 선비족의 탁발규(拓跋珪)였다. 그는 386년 16세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위魏(북위)라 하고 지속적으로 중원 땅을 공략해 398년 평성(平城, 산서 대동大同)으로 천도 후 황제를 칭했으니 북조 시대의 토대를 쌓았다.


북위는 오호십육국 말기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중원으로 전파된 불교를 적극 수용했으며 선비족 문화를 한족과 융화하면서 균전법과 봉록제를 실시하고 <주례>에 근거한 호적제도인 삼장제(三長制)를 실시했다. 북위는 국력이 안정되면서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한족과의 융합을 더욱 가속화하자 오히려 지역 차별과 계급 분화가 급속히 진행돼 변경의 육진 반란과 함께 국론 분열에 휩싸이게 됐다. 권력 투쟁의 결과 권신 고환(高欢)은 업성(邺城, 안양安阳)에 동위로 독립했으며 우문태(宇文泰)도 서쪽 장안에 서위를 세웠다. 갈라선 두 나라는 각각 북제와 북주로 발전했으나 채 30년을 넘지 못했으며 북주의 승상이던 양견(楊堅)은 통일국가 수나라를 건국했다.


북조 시대는 사실상 선비족 북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융합을 도모한 시대였다. 이를 통해 중원의 문화는 다양해지고 발달했지만 농민이 합세한 민족 갈등과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은 계급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결국 북위 말기에 육진 지역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자 나라가 동강 나고 호한 결합에 의한 선진문화를 잉태했던 북위가 멸망하자 오랫동안 분열됐던 중국은 통일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유민들의 사정을 아파하다


▲  호남 최초의 유민 폭동을 거쳐 촉발된 두도 민란의 거점인 상주(湘州)는 지금의 장사. 장사에 위치한 성곽 모습을 한 대규모 음식점 서호루(西湖樓). ⓒ 최종명



서진 정권이 영가의 난 이후 몰락의 길로 접어들자 남방 지역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됐으며 삼국시대 파촉(巴蜀) 지역에 거주하던 농민들은 유랑하고 있었다. 마침 청해와 감숙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이 광범위하게 촉나라 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저족 지도자 이특(李特)은 10만 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301년에 면죽(绵竹, 사천 서북부)에서 민란을 일으켜 광한(广汉)을 점령했다. 진나라 군대의 기습으로 이특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아들 이웅(李雄)은 다시 성도를 점령한 후 익주 전체를 장악하고 성(成)나라를 건국했다.


<진서(晋书)>에는 기아와 재해는 물론 정권의 가혹한 박해를 피해 남방으로 이주하는 농민의 수가 백만이 넘는다고 기록될 정도로 심각했다. 살 곳을 잃고 사방으로 유랑하던 농민들이 303년 안륙(安陆, 호북 효감孝感) 지방의 장창(张昌)이나 관중(关中) 지방의 유민 왕여(王如) 폭동에 가세하는 등 혼란의 조짐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호남의 장사(長沙)에서 이전과는 훨씬 강력한 유민 폭동이 발발했으니 호남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유명한 두도(杜弢)의 민란이다.


사천 성도 출신 두도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으며 수재로 천거되기도 했지만 이특 봉기가 발발하자 동쪽으로 이주해 호남의 상주(湘州)에서 살았다. 두도는 능력을 인정 받아 장사 군의 현령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익주 출신 여반(汝班)과 양주(梁州) 출신 찰무(察抚)가 이끄는 10만 여명의 유민이 형주와 상주 지역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의지할 곳도 없고 지방 호족들의 텃세와 횡포로 인해 참혹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상주 참군(参军, 참모)은 여반과 불화가 생기자 유민을 무고하게 반란죄로 밀고하니 자사(刺史, 군현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관)가 이를 그대로 믿고 주살하려고 하자 강력히 반항했다. 311년 여반과 찰무의 유민 4~5만 가구가 일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평소에 유민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두도는 공개적으로 민란의 기치를 천명하고 수령으로 추천, 옹립됐다.


두도가 이끄는 유민 민란군은 즉시 군현을 공격하고 상주로 진격해 도주하는 자사를 체포했다. 소식을 듣고 토벌군을 이끌고 온 안성(安成, 강서 안복安福) 태수 곽찰(郭察)도 참살하고 일거에 상주를 점령했다. 진나라 정권이 각 지방 태수를 동원해 토벌하려 했지만 두도가 이끄는 민란군은 호남 대부분을 장악해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듬해 진나라 조정은 도독(都督) 왕돈(王敦)을 사령관으로 장군 도간(陶侃), 주방(周访), 감탁(甘卓) 등이 참여한 수군 및 육군 10만 명을 동원했으나 민란군은 두려워하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며 수십 차례나 공방을 벌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과부족으로 민란군이 점점 전사하자 두도는 어렵게 투항을 선택했다. 일찍이 투항을 권고했던 태수 왕운(王运)과 협상해 민란에 참가한 유민의 죄를 사면 받았으며 두도 역시 감군(监军)의 벼슬을 받아냈다.


사태가 일단락 되자 민란군은 대부분 원래 거주지 상주로 돌아갔는데 논공행상에 눈이 먼 토벌군 장령들이 여전히 유민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배반감과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두도는 315년 3월 왕운을 살해하고 다시 봉기했다. 두도는 두홍(杜弘)와 장언(张彦)을 파견해 예장(豫章, 강서 남창南昌)을 공략했으며 왕진(王真)에게는 무창(武昌, 호북 무한) 방향으로 진격했으나 모두 진나라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8월에 도간과 주방이 이끄는 토벌군 주력이 장사를 공격해오자 사서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지니 항복하려는 생각이 많아졌다'고 기록될 정도로 민란군은 기강이 해이해졌다. 토벌군 도간이 항복을 권유하며 유혹하자 민란군 왕진은 출전하자마자 부대를 이끌고 투항했다. 두도는 포위망을 뚫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투신 자살했다.


두도 민란은 호남 최초의 대규모 '반봉건투쟁'으로 5년에 걸쳐 유민과 농민이 일치단결한 투쟁이었으며 호남, 호북, 강서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악한 지주계급의 만행을 폭로했으며 진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민란이 끝난 후 불과 1년 만에 진나라는 운명을 다 했으며 전국은 다시 분열과 혼전에 빠지게 됐다.


최초의 해적, 원하던 바 아니야


▲  남조 시대 강남 일대를 도모했던 손은과 노순 민란. '중원'과 '해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바다와 내륙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항쟁을 지속했다. 강남의 전형적인 마을인 소흥 일대. ⓒ 최종명



손은(孙恩)과 노순(卢循)이 주도한 민란은 반진 농민투쟁으로 당시 최대규모로 12년 동안 장강 이남을 휘몰아쳤다. 치열했던 민란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문벌귀족에게 강력한 타격을 날렸으며 '최초의 중원 해적'이라는 명예까지 덤으로 얻었다.


서진 시대는 도교 오두미도가 백성뿐 아니라 귀족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조카손자 손수(孙秀)는 서진 '8왕의 난' 당시 조왕(赵王) 사마륜(司马伦)의 책사였는데 오두미도 신봉자인 그는 조왕의 즉위를 위해 신도들의 힘을 활용하기도 했다. 오두미도를 신봉한 손씨 가문은 결국 손태(孙泰)에 이르러 '반역'이라는 대역죄를 저지르게 된다.


서예가 왕휘지(王羲之)를 치료했다고 전해지는 도사 두경(杜炅)의 수제자인 교주 손태를 따르던 신도가 남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신도들은 부패 정권의 억압에 시달리던 농민이 대부분이었으며 명문세가 출신 교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손태는 398년 동진의 대신 왕공(王恭)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이용해 신도 수천 명을 규합해 봉기를 도모했지만 사전에 누설돼 권신 회계왕(会稽王, 절강 소흥绍兴의 통치자) 사마도자(司马道子)에 의해 온 가족이 멸족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조카 손은(孙恩)은 손태를 따르던 신도 백여 명의 지지에 힘 입어 주산군도(舟山群岛)로 도피해 숙부의 복수를 도모한다. 풍랑이 세찬 바다에서의 생활은 고난이기도 했지만 손은에게는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이듬해 399년 사마도자의 장남 사마원현(司马元显)이 정권을 이어받고 노비들을 면천하지 않으면 군대 병력을 충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손은은 육지로 상륙했다. 상우(上虞, 소흥 동부)를 공격해 현령을 살해했으며 회계(会稽, 소흥)를 공격해 행정장관인 왕휘지의 아들 왕응지(王凝之)도 살해해 분연히 일어나자 손은을 따르는 자가 수만 명으로 늘었다. 오군(吴郡), 오흥군(吴兴郡), 회계군(会稽郡)의 삼오(三吴) 지역 8개 군 농민들이 일시에 손은이 주도하는 항거에 참여하자 수십 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관원은 모두 피살되거나 도주했으니 손은은 회계에 본거지를 두고 정동장군(征东将军)을 칭한 후 본격적인 민란군 조직으로 편재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은을 '장생인(长生人)'이라 추앙했다.


손은은 부대를 이끌고 수도 건강(建康, 남경南京)을 향해 진격하자 계엄을 선포한 동진 정권은 비수지전(淝水之战)의 영웅 사안(谢安)의 아들 사염(谢琰)과 유뢰지(刘牢之) 장군을 출전시켰다. 손은은 전당강(钱塘江, 항주杭州를 흐르는 강)전선에서 대치하며 장기전 태세를 갖췄으나 유뢰지 부대가 강을 건너오자 근거지인 섬으로 철군했다. 다급하게 도피하는 과정에서 손은은 노획한 금은보화를 고의적으로 길거리에 뿌리니 추격하는 토벌군이 서로 쟁탈하는 사이 철수 시간을 벌기도 했다.


1년 후 400년 5월 손은은 협구(浃口, 영파宁波 해안)를 따라 상륙해 여요(余姚)를 거쳐 상우를 돌파한 후 공방전을 이어갔다. 이때 사염이 전사했는데 조정은 크게 놀라 다시 토벌군을 보냈는데 치열한 공방 끝에 유뢰지 부대에게 패하자 다시 근거지로 들어가 버렸다.


3번째로 육지에 상륙한 402년 2월에는 곧 되돌아 갔으며 3월에 4번째로 육지에 올라와 해염(海盐, 가흥嘉兴 남쪽 해안)으로 진격했다. 남조의 송나라 개국황제가 되는 유유(刘裕)와 전투를 벌인 후 호독(沪渎, 상해 황포강 하류)을 공략해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수도를 향해 북상했다. 단주(丹徒, 진강镇江)에 이르러 유유가 급히 추격해 오자 곧바로 배를 타고 도주했다. 전열을 정비한 손은이 다시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사마원현이 토벌군을 이끌고 왔으며 예주자사 사마상지(司马尚之)까지 수도방어를 위해 집결하는 등 응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손은은 어쩔 수 없어 신주(新洲, 무한)를 거쳐 해안가 욱주(郁州, 연운항连云港)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유유의 부대가 진격해오자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고 계속 추격해오자 근거지 섬까지 철수했다.


402년 3월에는 장강 중류의 실력자이자 권신 환현(桓玄)이 사마도자와 사마원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조정을 장악하는 정변이 일어났을 때 손은은 수차례의 상륙작전과 수도 공략으로 힘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다. 유유와의 공방전에서 받은 타격이 컸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항전하려는 의지가 컸던 손은의 민란군은 다시 바다를 건너 절강 남부 해안도시 임해(临海)를 공략해 군량을 비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손은은 대세를 절감하고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당하기보다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어 자진하는 길을 택했다. 거사를 함께 도모하던 수백 명의 민란군과 신도들도 함께 따라 죽었고 이에 사람들은 손은을 '수선(水仙)'이라 불렀다.


손은이 장렬히 전사하자 매부 노순(卢循)이 민란을 계승했다. 노순은 범양(范阳) 노씨 가문으로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서예와 바둑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동진의 고승 혜원(慧远)은 노순을 보고 '비록 재능이 있으나 법도를 지키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손은이 민란을 도모하자 즉시 동참했으며 성품이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는 손은에게 자주 충고를 하자 노순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403년 1월 노순은 동양(东阳, 금화金华)으로 침입해 절강 일대에서 유유가 이끄는 정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하해 복건을 거쳐 광동 번우(番禺, 광주)을 점령해 평남장군(平南将军)을 자청하고 실질적인 지배력을 확보했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광주자사로 봉하고 타협했으며 매형 서도부(徐道覆)를 파견해 함께 광동 지역을 다스리도록 했다. 노순과 서도부는 비록 관직을 받고 사신도 보내 조공했지만 강서와 광동 경계에 있는 대유령(大庾岭) 산맥 일대를 벌목해 비밀리에 북벌을 위한 선박을 건조했다.


410년 2월 노순과 서도부는 동진의 유유가 남연(南燕) 공략을 위해 장강 이북으로 움직이자 곧바로 북벌을 시작했다. 노순은 호남 장사를 거쳐 호북 강릉(江陵, 형주荆州)에 이르렀으며 서도부는 강서 예장(豫章, 남창南昌)을 돌파해 5월에 이르러 두 부대가 합류한 후 진나라 대장 유의(刘毅)가 이끄는 군대를 대패시킨 후 수도로 돌진했다.


이 무렵 노순이 이끄는 부대는 10만 명에 이르렀고 천 척이 넘는 함선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유가 급히 돌아와 응전을 했는데 서도부는 즉각 결전을 치르자 했으나 의심이 들었던 노순은 결정을 미루게 돼 전투의 유리한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 유유는 병력을 집중해 주도 면밀한 준비를 마치고 진격해오자 노순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가 시작되자 다시 쫓기게 된 노순은 곳곳에서 결전을 벌렸으나 손실이 극심했고 번우까지 철수했다. 하지만 7년 동안 근거지이던 번우는 이미 관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이듬해 411년 2월 서도부는 전사했으며 4월 노순 역시 참패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손은과 노순의 민란은 강남 일대를 10년 이상 큰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민란 초기에는 일부 지주계급의 참여도 있었지만 기본 성격은 종교적 색채가 깔린 농민 주도의 민란이었다.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은 강남의 빈곤한 농민과 노예들이었으며 동진 대부분의 지역을 초토화시켜 신흥 사대부 호족의 기반을 잘라버렸다. 오랜 전쟁으로 동진 정권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며 민란을 잠재운 유유는 지명도와 세력을 넓혀 송나라를 건국하는 기반이 됐다. 유유는 송나라를 세운 후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는 조치를 통해 강남 경제의 번영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  주산반도, 소흥, 항주, 가흥, 영파, 상해 등 강남 해안도시를 드나들며 항쟁을 지속한 손은과 노순 민란. 해안 도시를 포괄하고 있는 항주만 바다는 현재 약 36킬로미터에 이르는 대교가 건설돼 있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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