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기고/한국일보발품기행 116

'와호장룡' 속 아름다운 추락…장쯔이는 선녀였을까

'와호장룡' 보고 창암산에 서면 선녀가 보인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역사문화 명산 ② 창암산 창암산(苍岩山)은 허베이성 징싱(井陉) 현에 위치한다. 고속철을 타면 베이징에서 스자좡역까지 1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현지에서 차량을 빌리면 2시간 만에 갈 수 있다. 이름도 낯선 창암산을 찾아간 이유는 리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무당산으로 가거라' 대사 후 등장하는 장쯔이의 아름다운 자살 또는 투신은 무당산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촬영 장소는 창암산이었다. 1월 한겨울이라 해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봉우리마다 궁전 하나…꼭대기엔 반란 황제의 미니 자금성

반란의 황제를 위한 미니어처 황궁, 무당산을 위한 변명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역사문화 명산 ① 무당산 무당산(武當山)은 후베이성 서북쪽 도시 스옌(十堰)에 있다. 직항이 있는 도시 네 곳의 딱 가운데 위치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도 시안에서 4시간 반, 우한에서 5시간, 정저우에서 6시간 반, 충칭에서 9시간 반이 걸린다. 베이징에서는 빠른 기차로도 16시간이 걸린다. 무당산 하나 보자고 찾아가기 쉽지 않다. 등산이나 무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 하다. 등산도 좋아하지 않고 태권도조차 배우지 않았지만, 무당산을 찾은 이유는 도교와 명나라 황제 때문이다. 3월 중순 여전히 쌀쌀한 날씨, 무당산은 비도 오고 그래서 안개가 많았다. {계속}

개울에 비친 홍등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리라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 너무 간략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④ 샤오치와 리컹 밤 새워 험난한 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를 천강포효(天剛破曉)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 황소(黄巢) 민란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왕만오(汪萬五) 일가는 휘주부에서 장장 400리를 피난 내려왔다.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풀과 꽃이 만발한 들판이자 비옥한 땅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짐을 풀었다. 9세기부터 정착했으니 그 어떤 천년고진 부럽지 않은 세월을 지녔다. '동이 트는 땅' 샤오치(曉起), 양생하(養生河)가 흘러 샤오촨(曉川)이라고도 불렀다. {계속}

주석이 와도 밥그릇 들고 환호할…골목이 식당이자 사랑방

장쩌민 전 주석이 왔어도 밥그릇 들고 환호했을 사람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③ 왕커우와 장완 우위엔에서 휘주부로 가는 길에 왕커우(汪口)가 있다. 마을 앞으로 융촨허(永川河) 수로가 이어진다. 1110년 송나라 때 처음 마을이 형성됐다. 주위가 높고 움푹 들어간 지형이라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고였다가 강으로 퍼져나가는 형세다. 넓은 웅덩이라는 뜻으로 왕커우라 했다. 중국 성씨 중 1, 2등을 다투는 왕씨, 그러나 왕커우는 유(俞)씨 집성촌이다. {계속}

이대로 늙어가면 또 어떠리…지혜와 인심 갖춘 휘주의 고택

유교와 상인이 만나 지혜와 인심이 풍부한 휘주마을[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② 리컹에서 옌촌까지 이학명촌(理學名村)으로 알려진 리컹(理坑)은 1206년 여경양(餘景陽)이 처음 이주했다. 여씨 집성촌이다. 진사 16명, 7품 이상 관원 36명, 문인 학사 92명이나 배출했다. 산골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으니 예부터 자칭 '서향(書鄕)'이었다. 시조인 여도잠(餘道潜)은 1118년에 주희(朱熹) 아버지 주송(朱松)과 함께 진사에 등과한다. 두 사람은 모두 우위엔이 고향이다. 푸젠성 여우시(尤溪) 현위로 재직할 때 태어난 주희는 사당이 있는 우위엔(婺源)을 자주 찾았으며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계속}

“돈이 곧 복(福)이다” 하얀 지붕 담장과 물구멍의 비밀

풍수 사상으로 물길 막고 지붕 위 담장으로 귀신 막고[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① 훙관촌과 리컹 황산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을 달리면 저링(浙岭)이다. 동남쪽의 저장성으로 흐르는 신안강(新安江) 수원 중 하나다. 고개를 넘으면 장시성 상라오시(上饒市)에 속한 우위엔현(婺源縣)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초나라를 동서로 가르는 분수령이었고 지금은 두 성의 경계다. 오초분원(吳楚分源) 비석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 귀퉁이에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은 아주 오래돼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

“창밖에 배가 100척, 낙타 1000마리” 황하와 번성한 강변마을

'하루 두 끼' 먹는 습성, 황하 따라 상업으로 성장한 마을[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산시 뤼량 치커우고진 ② 시완촌과 헤이룽먀오 리자산촌(李家山村)에서 만난 가오보(高波) 선생 부부 자가용을 타고 고진으로 내려왔다. 굽이굽이 흐르는 황하, 구곡황하제일진(九曲黄河第一鎭)이라 자랑할 만큼 치커우고진(磧口古鎭)은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마을이다. 황토가 가라앉은 모래톱 '치(磧)', 황하를 따라 오가는 배들이 부두에 닿을 때마다 왁자지껄했으리라. 동북쪽에서 흘러온 초수(湫水)가 황하와 만나는 강변마을은 상업이 번성했다. {계속}

도인의 일상… 황토고원 600년 ‘동굴빌딩’ 사람들

최고의 화가가 칭송한 황토 동굴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1 산시 뤼량 치커우고진 ① 리자산촌 아주 오래된 마을을 고진(古鎭)이라 부른다. 중국에 넓은 영토만큼 셀 수 없이 많다. 산촌이기도 하고 수향이기도 하다. 천년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흔적,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오지일수록 고달픈 발품이지만, 여행의 맛은 깊다. 아름다운 풍광과 어울리는 가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동네다. 도시생활을 벗어나 여유를 느끼기에 좋은 '고진 여행'을 선호하면서 점점 관광지로 변하기도 한다. 여전히 때 묻지 않은 마을도 대륙 곳곳에 살아있다. 깊이 숨었기에 더 멋진 마을, 치커우고진(磧口古鎭)을 찾는 길도 평탄하지는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