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주인공 개자추의 교훈, 굴원과 소동파도 몰라주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10> 역사문화 명산 ④ 면산


소동파가 지은 <한식첩(寒食帖)>의 제1수 첫 4행이다. 문자옥을 겪고 황주로 좌천된 40대 중반의 소동파는 우울한 심정으로 불평했다. 2수에서도 임금의 구중과 조상의 만리를 한탄하더니 싸늘하게 식은 재로 변한 자신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29자 한 폭 시첩은 처량한 마음을 절제된 행서로 담은 소동파의 대표작이다. 왕희지의 <난정서(亭序)>, 안진경의 <제질고(祭侄稿)>에 이은 천하제삼행서(天下第三行)’로 타이완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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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오대산도>와의 우연, 일본 역사학계의 말문을 닫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9> 역사문화 명산 ③ 오대산

 

중국 최고의 유물로 막고굴(莫高窟). 735개 석굴을 모두 개방하지 않아 겨우 10개 정도 봤다. 나머지는 대부분 책자로 봤다. 61호굴은 문수당(文殊堂)이라 부른다. 10세기 중엽, 오대 말기 둔황(敦煌) 통치자 조원충이 개축했다. 불단에 있던 문수상은 사라졌지만 사면의 벽화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동쪽 벽에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자리잡은 불교국가 우전() 왕국의 천공공주가 머리에 봉관()을 쓰고 있는데 아름답기 그지 없다. 서쪽 벽에는 문수보살의 성지 오대산도(五台山图)가 새겨져 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중국 고대 건축의 보물을 발견하는데 일등공신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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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옛 도시 뤄양(洛阳)과 허난성 수도 정저우(郑州) 사이에 있는 궁이(巩义). 북쪽으로 황하(黄河)가 흐르고 남쪽에는 소림사가 있다. 당나라 시인, 시성(诗圣) 두보(杜甫)의 고향이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20분이면 난야오완촌(瑶湾)에 도착한다. 712년생인 두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다. 입장료는 65위엔(11,000), 명성만큼 비싼 편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두보와 배시성문(诗圣)이 적힌 석서()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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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수도 장안(长安)은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古都). 기원전에는 중원의 변방이었지만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화 민족의 중심이 됐으니 중국을 이해하는 최고의 상징은 서안에서 찾아야 한다. 진시황과 병마용이 있고 4대 미녀 양귀비의 화청지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실크로드의 출발이자 종착이었기에 서역의 문화도 풍부하게 남아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온 독특한 먹거리도 많으니 서안 여행을 가면 여러모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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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는 옛 장안성의 모습을 유지한 성장城墙이 개방돼 있다. 장락문长乐门, 영녕문永宁门, 안정문安定门, 안원문安远门이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대문이 있고 모두 18개의 성문이 있다. 성곽 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성벽을 유람할 수 있다. 평균 12m 높이의 성벽 길은 탄탄대로로 만들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타거나 전동차로 이동해도 좋다. 물론 성 안과 밖을 두루 보며 천천히 산보를 해도 좋다. 수나라 문제 때 처음 건축된 장안성은 현재 서안의 품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성 안 곳곳을 하루 종일 걸어다녀도 좋다. 성벽 동문으로 들어가 남문으로 나오는데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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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의 봉선사奉先寺는 너비가 34m에 이르는 최대의 석굴이라 할 수 있다. 무측천이 사비를 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가운데 우뚝 선 로사나대불卢舍那大佛은 머리가 4m, 귀가 1.9m이고 전체 높이가 17.14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로사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신불 중 하나. 좌우에는 제자인 아난阿), 가섭迦叶 그리고 보살과 천왕이 보좌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임에도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과 미소와 철학까지 담은 듯한 빼어난 예술적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거대한 불상 사이 벽면에 자그마한 불상들도 그 존재가치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히 경이롭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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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화청지에서 매일 밤 열리는 실경무대극 <장한가>는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시를 기반으로 4장 11막의 멋진 공연이다. 700여명의 출연진이 펼치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인상적이다. 806년 주지현위周至县尉이던 백거이는 마외역马嵬驿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운명을 듣고 840자 7언 120행의 "장한가'를 짓는다. 황제와 양귀비의 만남과 애정, 안녹산 반란과 양귀비 죽음에 애통해 하는 황제, 환도 후 양귀비를 잊지 못하는 황제, 도사의 환술로 다시 만난 사랑의 맹세와 한탄스런 단절을 노래하고 있다. 백거이의 시와 다소 다른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온천, 피파, 무사의 춤, 술취한 모습, 여지 과일, 죽음 그리고 꿈 속의 무지개까지 화려하고 감동적이다. 호수 위에서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날 마침 내리는 빗물이 더욱 애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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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 01 - 입궁하는 양귀비 만나 애뜻한 사랑을 시작하는 황제


 


장한가 02 - 에로틱한 춤으로 절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양귀비


 


장한가 03 - 화청지 온천에서 미인의 몸매를 마음껏 드러내는 양귀비


 


장한가 04 - 양귀비의 운명에 드리운 안녹산의 어두운 그림자


 


장한가 05 - 연회 후 술에 취한 양귀비의 모습조차 아름답다


 


장한가 06 - 화려한 가면 영상이 휘날리며 사랑은 깊어만 가고


 


장한가 07 - 안녹산의 반란으로 인한 당 현종과 양귀비는 불행의 시작


 


장한가 08 - 폭우 속에 도주하는 당 현종과 양귀비, 사랑의 이별


 


장한가 09 - 꿈 속에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 당 현종


 


장한가 10 - 오작교에서 다시 만난 당 현종과 양귀비의 허망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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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세계 최강이던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명나라 영락제 주체가 통치하던 시대로 '르네상스'하고 싶은 것이 중국의 꿈입니다. 그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 건국까지의 시대 중원의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적어도 한족에게는 그렇습니다. 김용 작가의 무림세상은 혼돈의 시대, 북방민족의 중원 통치라는 '쓰라린' 배경을 담은 '한스런' 한족의 자서전입니다. 무협이라는 이름을 담아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소설적 구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제4장 '복수의 소용돌이'처럼 역사에서 복수를 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김용 작가의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는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과 신조협려神雕侠侣와 더불어 사조삼부곡射雕三部曲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세 소설이 시대적으로나 등장인물 면에서 연결구조를 지니고 있어서입니다. 소설 속 인물은 역사 속 인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정사의 기록을 뛰어넘는 화려한 캐릭터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12세기 초부터 14세기까지 중국 중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한족의 나라인 송나라의 멸망과 북방민족의 중원 장악, 명나라의 건국에 이르는 과정이 김용 작가의 삼부곡의 시대배경입니다. 1127년 '정강의 치욕'靖康之耻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거란족 금나라의 건국, 몽골족의 성장과 원나라의 건국, 1273년 양양襄阳의 함락 후 1279년 남송의 멸망, 원나라 말기의 민란과 1368년 명나라 건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은 시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일대일로의 르네상스,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모형


일대일로의 르네상스, 명나라 주원장의 능원인 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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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중국대장정(07) – 궁부장다 지나 민가 체험 그리고 라싸 도착

 

바야흐로 티베트 수도 라싸()가 코 앞이다. 400km, 이제 오체투지로 가도 금방일 것 같다. 다시 아침부터 달린다. 차창 밖 니양허(尼洋河)도 유유히 흐른다. 하늘이 좀 묘하다. 구름은 운무로 변해 산 아래를 휘감고 자리를 비운 하늘은 새파랗다. 8월 한여름 아침에도 긴 팔을 둘러야 하니 고도가 높긴 하다. 이제 티베트 차마고도를 달리는 일은 일상처럼 편안하다. 길도 더는 공사 중이 아니다.

 

Mp-07-01 니양허와 하늘, 구름

 

휴게소 표지를 슬쩍 보이더니 차가 멈춘다. 그런데 웅성웅성 시끄러운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궁부장다(工布江) 휴게소로 들어가는 길옆으로 10여 대의 차가 줄줄이 섰다. 경찰이 모두 세운 것이다. ‘통로 공사 중 진입금지 벌금 100위안인데 들어선 것이다. 팻말을 모든 차량이 통로로 들어선 후에 세운 것이 문제였다. 함정수사인지 모른다는 의심은 아무리 티베트이라도 그냥 넘어가긴 힘들다. 우리보다 경찰에게 고분고분한 중국사람들도 실랑이를 벌이니 도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Mp-07-02 공사 중인 휴게소 진입로에서 벌어진 사건

 

30분여 분만에 상황은 종결됐다. 모든 차량이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항복했으니 예상보다 빨랐다. CCTV, 블랙박스 다 동원해 증거 들이밀면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귀찮다. 벌금 100위안도 현지 경찰서에 가서 직접 내야 한다. 대부분 외지인이었는데, ‘억울을 빌어 항의한 이유는 시간때문이다. 아름다운 티베트 하늘을 달리고 있으니 정말 재수 옴 붙은 날’. 벌금 내고 오는데 다시 1시간, 라싸로 가는 길이 지체됐다.

 

Mp-07-03 라싸 가는 길에 본 태소고성 표지

 

도로 옆에 태소고성(太昭古城) 표지가 보인다. 청나라 말기 번성했던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티베트와 교역을 하기 위한 점포가 빽빽이 늘어서 차마고도를 따라온 푸얼차(洱茶)도 진열됐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거리도 생기고 등촉 타는 향기 가득한 사원도 세우게 된다. 벌금만 내지 않았더라면 다리를 건너 구경하자고 우기고 싶다. 구름이 사라지고 다시 하늘은 본디 모습으로 돌아온다. 구름 반, 하늘 반이 딱 좋다.

 

점심시간이다. 정확하게 1 30. 벌금이 날려버린 시간만큼 에누리 없다. 국도 옆 자그마한 동네 이름이 쑹둬일촌(松多一村)이다. 소나무와 아무 상관 없다. 티베트 말로 무슨 뜻인지도 궁금하지 않으니 식후경이나 해야겠다. 메뉴에 눈에 쏙 들어오는 게 나타난다. 바로 페이창펀(肠粉)이다. ‘페이창대단히강조나 비하할 때 쓰는 페이창(非常)’과 성조만 다르다. 보통 은 가루를 원료로 만든 국수다. 고구마 분말로 만든 국수에 돼지 내장으로 우려낸 육수가 합쳐져 맛이 페이창하오(非常好)’.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얼큰하고 시원하다.

 

Mp-07-04 ‘페이창하오인 페이창펀

 

1시간을 달려 미라산(米拉山) 고개에 이른다. 가파르게 오른다 싶더니 해발 5,013m. 여전히 숨이 가쁘다. 잊었던 심장도 박동을 시작하고 머리도 아프다. 블랙야크 조각상 옆에는 야크 뿔을 판다. 야크 목에 걸린 카딱()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때려도 마냥 즐거운 인증이다. 고원을 바라보며 앉은 개는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가? 벌판으로 뛰어내려 달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차마고도 마방처럼 숨 가쁘게 달리지 않고 고원을 바라보며 늘 파란 하늘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고 싶어진다.

 

Mp-07-05 미라산 고개의 블랙야크


Mp-07-06 미라산 고개에서 초원을 바라보는 개

 

해발 4,000m에 자리잡 은 르둬샹(日多) 마을에 온천지질공원이 있다. 일찍이 8세기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로 숭상되는 연화생대사(莲花生大师)가 르둬온천을 찾아 죄얼(罪孽)을 씻어내고 영혼(灵魂)을 정화해 자선과 관용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니 공덕을 쌓게 된다.’고 불경에 기록했다. ‘백병(百病)’을 치유한다고 예언처럼 노래하기도 했다. 1,300여 년 전 조사()의 말씀 덕분인지 보물로 여긴다.

 

산천초목이 온통 약초인 땅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어찌 보배가 아닐런가? 설산에서 흘러 깊게 가라앉았다가 끓어오른 물의 온도가 최고 83도나 된다. 겨울이면 더더욱 추운 고원에서 온천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천길 낭떠러지를 넘어온 마방에게도 신의 가호가 아니었을까? 수질도 청량하지만, 성분도 의료온천으로서 가치가 있다. 2002년 국토자원부에서 국제의료온천표준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정말 온천호텔에서 하루 푹 몸 담그고 싶다.

 

Mp-07-07 보물 같은 르둬온천

 

르둬샹을 조금 지나 국도 옆 티베트 민가로 들어간다. 사람 사는 일이 모두 비슷하겠지만 티베트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 이목구비가 반듯한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손님에게 우선 쑤여우차(酥油茶)를 따라준다. 청보리인 칭커 가루로 수분을 묻힌 참파(糌粑)와 함께 주식으로 마시는 음료다. 야크로부터 얻은 버터인 쑤여우는 지방질만 풍부해 비타민이 많은 푸얼차와 소금을 넣고 흔들어 섞어주면 맛있는 차가 되는 것이다. 대나무 통에 골고루 넣고 긴 작대기로 휘휘 젖는다. 고원지대에서 얻기 힘든 차를 짊어지고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렸던 보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5배 이상의 이문이 남는 장사이긴 했다.

 

Mp-07-08 티베트 민가에서 마신 쑤여우차


Mp-07-09 쑤여우차 마시는 티베트 민가의 어머니

 

티베트 사람에게는 차와 소금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쑤여우차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 온다. 옛날 옛적에 A촌락의 토사(土司) 아들 원둔바(顿巴)B촌락의 토사 딸 메이메이춰(美梅措)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두 마을은 오랫동안 원수 집안이었으니 문제였다. 결국, 딸의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원둔바를 살해했다. 원둔바의 장례가 화장으로 치러지는 때 메이메이춰는 불길로 뛰어들어 순정(殉情)하고 말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둘이 죽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중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사랑의 힘이 놀랍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결말이 좀 신비하다. 중국 4대 전설인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台)’는 결국 한 쌍의 나비로 승화한다. 티베트는 훨씬 강렬한 감동이 있다. 산화한 처녀는 차나무의 찻잎이 된다. 먼저 죽은 총각은 염호의 소금으로 환생한다. 티베트 사람들이 매일 쑤여우차를 만들 때마다 서로 다시 만나 하나가 된다. 나비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 아닌가? 천추에 길이 빛날 영수불후(永垂不朽)라 할만하다.

 

Mp-07-09 티베트 민가의 어머니와 아들의 목완


Mp-07-10 티베트 민가체험 중 만난 소녀의 미소

 

쑤여우차는 버터 향 짙은 미숫가루 같다. 하루에도 50잔 이상 마시는 게 보통이다. 티베트 사람은 집에서나 외출할 때나 틈만 나면 마시기에 잔도 늘 들고 다닌다. 두루마기에 모시고 다니며 한평생 사용하는데 대부분 목완(木碗)을 사용한다. 나무 사발은 신랑을 만나 종신계약에 사인하는 신부와도 같다. 그래서 재미난 민가도 있다.

 

연인과 함께 하니 부끄럽고             带着情人吧害羞,

연인과 헤어지려니 애타네              丢下情人吧心焦.

연인이 목완과도 같다면                  情人如若是木碗,

가슴에 품어야 더 좋으리라             藏在怀里该多好.

 

Mp-07-11 티베트 민가체험 중 찾아온 친척과 동네사람

 

어머니와 아들은 평생 친구인 목완을 꺼내 쑤여우차를 마신다. 손님이 오면 함께 마시는 게 예의이자 풍습이다. 바깥에는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찻잎이 된 처녀와 소금이 된 총각을 떠올리며 모두 차를 마신다. 수 천km를 달려온 푸얼차와 소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은 사람들이다. 전설로라도 오래 잊지 말자는 인지상정이다. 사람 냄새 나는 시간을 보내고 발걸음을 돌린다.

 

이제 행정구역으로 라싸 시에 속한 모주궁카(墨竹工卡)를 지난다. ‘먹으로 그린 대나무용왕 거주지라는 복합적인 뜻인데 연상도 어렵고 이해도 불가! 국도에서 5km 남쪽에 자마샹(玛乡)이 있다. 서기 617년 티베트 왕 쑹첸캄포(赞干布)가 태어난 곳으로 자그마한 왕궁(王宫)도 있다.

 

Mp-07-12 라싸로 가는 길의 모주궁카 부근 들판

 

외아들인 쑹첸캄포는 부유한 환경에서 후계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재다능을 드러냈으며 도덕적으로도 완벽했다. 12세에 아버지 남리쑹첸(朗日松赞)이 살해당하고 귀족과 결탁한 주변 왕국의 협공으로 위기를 맞지만 왕위에 오른 후 타고난 지혜와 통솔력으로 사태를 진정시킨다. 곧바로 군사력을 결집해 인근 왕국을 평정하고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다. 알룽창포(鲁藏布) 강을 건너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고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춘 라싸로 천도한다.

 

Mp-07-13 라싸로 가는 길의 라싸허

 

티베트 고원의 왕국 숨파(苏毗)와 샹숭(象雄)을 복속해 청장고원(青藏高原)을 통일한다. 네팔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고 당나라와도 화친 결혼을 통한 외교정책을 펼친다. 청해성과 감숙성 일대의 선비족 토욕혼(吐谷)과 강족 일파인 탕구트()까지 복속해 굳건한 제국을 건설하지만 안타깝게도 서기 650, 33대 티베트 왕이자 최초의 제왕은 34살로 요절한다.

 

Mp-07-14 라싸로 가는 길의 다체 부근


Mp-07-15 라싸로 가는 길의 다체2호터널

 

이제 봉건시대 티베트 최고의 제왕을 따라 라싸로 들어간다. 미라산을 넘어서부터 라싸까지는 라싸허(拉萨河)가 계속 따라온다. 하늘은 강물에 투영돼 밝게 빛나고 있다. 라싸의 동대문인 다체(达孜)를 지나니 터널 3개가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산 너머 강렬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구름도 숨을 곳을 찾는다 싶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온다. 조금 지나니 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햇볕이 보기에도 따갑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풍광이 새롭다. 여전히 터널 속인가 싶을 정도로 하늘이 까맣게 변한다. 하늘의 조화인가 환영 인사인가?

 

Mp-07-16 라싸로 가는 길의 변화무쌍한 하늘

 

마지막 터널을 나오니 햇살도 보이고 먹구름도 보인다. 멀리서 봐도 비다. 라싸대교(萨大桥)를 건널 때는 날도 갠 상태다. 도무지 한눈을 팔기 어려운 변화무쌍이다. 갑자기 창밖에 펼쳐진 엄청난 환영(幻影)’에 차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무지개다! 쌍무지개!!”

 

누군가 외쳤다. 이 화려한 환영(欢迎)’을 위해 그다지도 오랫동안 오락가락 천변만화(千变万化)했단 말인가? 대기 중의 자연현상 무지개, ‘물이 펼쳐진 문이어서 무지개라 하던가? 중국어로 차이훙(彩虹)이라 한다. 쌍무지개는 그냥 솽훙(双虹). ‘주노초파남보, 빨주노초파남보떠올리다가 다채롭고 찬란한 색채빈분(色彩缤纷)을 연상한다. ‘빈분손님과의 연분(宾分)’()’로 묶여있는 꼴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는 손님과의 인연, 어찌 오색찬란하지 않을 소냐? 드디어 도착한 티베트 수도 라싸다. 쑤여우차에 들어온 찻잎과 소금이 된 듯 흥분된다.

 

Mp-07-17 라싸대교에서 만난 쌍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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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2)

 

11 12, 100만 명에 이르는 주권자 인파가 직접 청와대를 향해 시선을 직시했다. 대통령은 성난 민란의 함성을 듣고도 나 몰라로 일관하면 여파는 해일이 돼 다시금 전국을 민주의 깃발로 뒤덮을 것이다.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에 모인 국민의 날카로운 주인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현장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치고 무언의 눈빛으로 공감한 국민의 마음은 모두 하나였다.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당도 민중총궐기의 대의명분을 그냥 마냥 눈 돌리기 어려웠나 보다. 지역구까지 적은 깃발에는 왠지 기회주의자의 냄새가 나고 곧 엄중한 결단의 시기에 이르면 그 펄럭임은 파도의 포말로 부서져 버리고 말 듯 처량해 보였다. 과연 이명박근혜정부의 대역죄를 칼날처럼 잘라낼 시기에 이르면 어떤 처세로 타협할 지 의심이 들었다. 민란의 역사에도 지도자의 기회주의 때문에 죽 쒀 개 준경우가 많다. <시경(詩經)>타산지석(他山之石)’해야 옥을 고른다(공옥攻玉)고 조언했다.

 

 

()은 황소(黄巢)로 인해 망()하고 그 화()는 계림(桂林)에 있다.” <신당서(新唐)>는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말기 최대 농민전쟁인 황소 민란이 일어나기 전 계림에서 봉기한 방훈(庞勋) 민란이 있었다. 당나라를 침몰시킨 진정한 화근이자 최초의 항거였다. 당나라 말기 혼란, 피 끓는 전쟁의 서막이다.

 

805년에 서주(徐州)를 포함해 4개 주를 지배했던 번진 무녕군(武宁)이 설치됐다. 819년 고구려 유민 집단이자 산동지방 절도사로 재직하던 이사도(李師道)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유명해졌다. 신라인 장보고(寳高)가 무녕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종군하기도 했다.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는 번진으로 절도사의 횡포에 맞서 장병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862 7월 서주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신임 절도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돌연 절도사를 축출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 해도 하극상치고는 돌발적이었다. 왕식() 신임절도사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하극상을 벌린 장병 수천 명을 학살하고 무녕군을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목숨을 건진 장병들은 모두 도망쳐 산으로 들어갔으며 비적으로 평생 살 운명이었다.

 

당시 운남 지방에는 백족 등이 중심이 된 남조(南詔) 정권이 세력을 키워 북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주의 하극상 사건 2년 후 864, 조정에서는 서주와 사주 일대의 비적화한장병을 끌어들여 남조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약 800여명이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로 내려가 주둔하게 됐다. 이국 땅에서 용병의 시간을 견디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는 비적과 조정의 거래였다. 거래는 약속에 기반하는 것인데, 애초에 약속한 주둔기간 3년이 지났건만 조정은 귀향 명령 대신에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해버렸다. 불신이 팽배해지자 불만의 고름이 터져 나왔으며 게다가 관찰사의 가혹한 훈련과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등점을 넘고 있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수병(戍兵) 복무를 감당하라는 것은 잔혹한 고통이었다.

 

868 7월 전직 무녕군 장교 허길(许佶)은 마침 관찰사가 전근간 틈을 노려 계주도장(桂州都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식량창고를 약탈한 후 군량과 사료를 관리하는 양료관(粮料官)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해 서주로의 귀향을 도모했다. 방훈 군대는 병기 창고를 열어 무장한 후 계림을 출발해 호남, 호북, 안휘, 절강을 거쳐 서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 당시 지방 번진의 횡포에 고통 받던 농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병력도 점점 늘어나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못하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일부 장병의 단순 반란이 서서히 농민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훈은 조정이 우리를 모두 주살하려 하니 어차피 싸우다 죽는 것이 백 번 낫다.’고 외치며 서주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공격했다. 계림으로 보냈고 복무 연장을 주도한 서주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을 체포해 원한을 갚았으며 부하장수들은 물론이고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서주를 장악하고 장강 일대를 차단하자 수도 장안까지 위협했다. 이때 농민들의 참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됐다. 조정이나 민란 지도자 모두 서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규모로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방훈에게 서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20만 명의 토벌군을 모집해 절도사 강승훈(康承)에게 지휘하게 했다. 선봉장 대가사(戴可) 3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방훈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쳐 방심하도록 유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토벌군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방훈은 토벌군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만하고 향후 공격방향이나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방심했다. 게다가 음주와 오락에 점점 빠졌는데 마음 속으로는 반란군 두목으로 최후를 맞기 보다는 조정이 자신을 절도사로 인정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교만에 빠져 사치로 나태하면, 얻었으나 다시 잃게 되며 이겼으나 다시 패하는 것인데, 하물며 얻은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사 주중(周重)은 직언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방훈은 듣지 않았다. 지도자가 기회주의적 속성을 들어내니 덩달아 계림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수병들도 거만하고 난폭해졌다. 무고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란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방훈도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지 않자 서서히 군율이 떨어지고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명분과 규모를 키웠으나 군인의 최고 로망인 절도사에 편재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절도사를 얻을 지 말 지고민하는 방훈을 비판하는 동요까지 아이들이 부르고 유행할 정도였다. 절도사를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전투를 하다가도 또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돼 있다. 방훈의 지략과 풍모는 한 나라를 세울만한 됨됨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웃음거리가 된 지도자를 비웃는 노래는 곧 고난을 살아가는 민중의 애환이자 바람이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난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는 속성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조정은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 절도사의 녹봉을 줄 것처럼 심리전을 펼쳐 안심시키면서 대대적인 토벌을 준비한 후 공격해왔다. 민란 지도자로서의 신임이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민란 군대를 이탈해 투항하는 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전투가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다. 숙주와 서주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팽성이 함락 당한 후에 계림 출신 핵심 장병의 일가친척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자 급속도로 사기가 꺾였다. 방훈은 869 9월에 이르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서북에서 출전한 돌궐계 용병 사타족(沙陀族) 기병에게 철저하게 유린 당했다. 게다가 패잔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이미 투항한 옛 동지가 토벌군 선봉대로 나타나 앞길을 막자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한때 장안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침 없었지만 목표의식이 불투명하고 한계에 다다르면 허망하게 쉽사리 무너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군인이 주도하고 농민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백성들이 호응해 1년 이상 전국을 휩쓸던 기세는 이후 황소의 난을 촉발했으며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线)이 됐다.

 

11 12일 민중총궐기에 동참해 거리를 누비며 문재인은? 안철수는? 박원순은? 안희정은? 이재명은? 생각하며 물음표를 계속 던졌다. 그들의 이 민란처럼 솟는 민중의 투쟁과 희망을 담는 그릇인가에 대한 끝없는 회의였다. 더불어 당나라의 방훈을 비롯해 민란의 리더가 실패의 촉매제가 된 수많은 역사를 되새겼다. 이상하게도 민란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실패의 상징이 된 민란지도자와 현 야권 대선후보가 오버랩되는 것은 왜 일까? 민란 반역의 지도자와 캐릭터가 겹치지 않는 자는 있는가?

 

참다운 민란의 승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는 진정한 지도자는 지금 TV 앞에 어슬렁거리는 대선후보가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 속에서 나올 일이다. 11.12 민중총궐기는 그 시작이다



  • 민란에 관한 대 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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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3]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②


소금업자 황소는 왕선지 봉기에 호응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황소의 고향 원구(冤句)는 진나라가 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 기록마다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에 대한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겨우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으니 사람의 명운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멋진 '장난'을 칠 수 있겠는가?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 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八,我花开后百花杀。

冲天香阵透长安,满城尽带黄金甲。


9월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일 때이자 폭죽을 터뜨릴 만큼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괴감을 말하고 있다. 굳이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살(杀)과 운을 맞춘 것으로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당나라의 마지막 민란의 주인공 황소가 지은 시는 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황후화>를 연상시킨다. 사진은 영화가 상영되던 2008년 12월 베이징 시내의 홍보간판. ⓒ 최종명


수도 장안에 국화 향기만 만발하고 도성으로 들이닥치는 황금 갑옷의 물결, 영화 <황후화>의 원 제목이 바로 '만성진대황금갑'이다. 장예모 감독은 황소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시에서 착안하고 영리한 머리로 교묘하게 뒤집은 후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로 활용했다. 장예모가 비록 시 끝 구절을 따다가 '반혁명은 곧 몰락'이라는 통치자 편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지만 황소의 역사기록까지 뒤집을 수야 없을 것이다. 민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빌려다가 영화 자본으로 덧칠한 '비겁한' 감독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복수의 염원을 담아 시를 짓다


황소는 고향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조세를 강요하고 사역을 강제하며 퇴로조차 없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충돌이 잦았다. 심지어 사람들을 모아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지만,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산둥 지방으로 이동하며 승전고를 울리자 형제와 조카 등 8명과 함께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에는 기아에 시달리던 각 지방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으며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탈하기도 했다. 왕선지가 사망하자 황소를 흠모하던 군사들이 합류해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년 3월 황소는 변주(汴州, 하남 개봉)와 송주(宋州, 하남 상구商丘)를 직접 공략했으나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남하하며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당시 해상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12월에는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곧이어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都统)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수복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했지만,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부하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계주에서 시작해 뗏목을 타고 상강(湘江)을 따라 강릉(호북 형주)을 거쳐 장안과 직선으로 불과 만 리 거리의 상양(襄阳)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상 왕탁(王铎)을 초토도통(招讨都统)으로 삼고 강릉에 둔병을 설치했다. 또한 이계(李系)를 부도통 겸 호남관찰사로 임명해 10만의 군사를 담주(潭州, 호남 장사长沙)에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담주에 도달하자 이계는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란군은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가 상강에 흘러넘쳤다. 여세를 몰아 강릉을 돌파하자 도주하는 왕탁을 쫓아 상양을 지나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은 공세를 펴보기도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나 걸림돌이 사라지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년 토벌군의 저항과 전염병이 유행하자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8월에 이르러 회하(淮河)를 건넜고 11월에 낙양을 공격하자 한림학사 출신의 낙양유수 유윤장(刘允章)은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조정은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으로 하여금 민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대책이 무용지물이었다. 더구나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민란군의 규모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황소의 진격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치원도 막지 못한 장안 점령


▲ 황소는 역대 왕조의 수도 중 하나인 장안 성을 함락시키고 쑥대밭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 장안 성을 꾸며놓은 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내 모습. ⓒ 최종명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치원이 당시에 <토황소격문>을 썼는데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데,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많고 그다지 역사적이지도 않다. 고변은 황소의 군대를 백만 대군이라 조정에 부풀려 보고하고 토벌의 전공을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최치원의 격문은 고변의 이름으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뿌리고 다녔으니 유명세를 탄 것만은 분명했을 것이다.


황소 민란군은 '격문'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눈 하나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12월에는 드디어 수도 장안의 코 앞인 동관(潼关)과 화주(华州, 섬서 화현华县)를 점령하니 당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우국지위(忧国之危)를 맞아 성도까지 도피했던 전철을 똑같이 밟은 것이다.


881년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에서처럼,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드디어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 상양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으며 수도를 점령한 민란군답게 바로 국호를 대제(大齐), 연호를 금통(金统)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


황제에 등극한 황소는 사천으로 도주한 당희종을 가볍게 보고 군사를 몰아 추격하지 않았다. 사병들이 강도로 변해 장안이 '살인의 추억'으로 변해가고 여인네 강탈과 백성 구타가 나타나며 도처가 혼란으로 변해가는데도 황소는 저지할 수 없었다. 당나라 조정은 숨 쉴 틈이 생겼으며 곧바로 절도사 정전(鄭畋)이 토벌군을 이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소의 나라 대제에서 태위의 지위에 오른 오른팔 상양은 사천으로 진격했으나 토벌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상양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성안 곳곳에 패전을 조롱하는 시가 나붙자 관원 및 유생 3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존심이라고 하기에는 유치했고 심리작전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보복이었다.


토벌군 선봉장 정종초(程宗楚)가 장안으로 진격하자 황소는 전군을 이끌고 돌연 동쪽으로 도주했다. 무혈 입성한 토벌군이 승리에 도취돼 별다른 방비 없이 음주에 취하자 황소는 전광석화처럼 토벌군을 전멸시켰으며 다시 한 번 장안을 점령했다. 이때 토벌군을 지원했거나 내통한 백성을 한꺼번에 참수해 장안은 그야말로 피로 씻어낸 듯 세성(洗城)과 다름없다고 <자치통감>은 피를 토하며 기록하고 있다.


1938년 모택동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지도자가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를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모택동은 황소 외에도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민란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 신중국 건립의 교훈을 얻었다. 근거지란 세력도 중요하지만, 명분이야말로 생명줄이거늘 장안은 점령하고도 어찌 할바 모르고 불사진취(不思进取)했으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자 황소 민란은 점차 실패의 나락으로 치닫게 됐다.


882년이 되자 사천의 조정은 반격 조건을 다시 갖추고 격전에 대비했다. 이때 동주(同州, 섬서 대려大荔)에서 토벌군과 교전 중이던 황소의 맹장 주온(朱温)은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돌연 당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휘 당산(砀山) 출신의 유생 주온은 일찍이 황소 민란에 참여했으며 이윽고 배반의 화신이 됐다. 당 황제는 하늘이 내려준 복으로 기뻐하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토벌군 지휘를 맡겼다. 


주전충은 당시만 해도 '하늘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데 황소 민란을 진압하면서 군대를 장악하고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인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후량을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연 주전충은 황소의 민란을 거치며 일약 시대의 풍운아가 된 주온이었다.


'황소'의 살인 공장 도마채


황소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가 발생했다. 서돌궐계로서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온 것이다. 거침없이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황소는 결국 장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주의 시간을 벌여야 했으며 황금 보화를 거리에 뿌리고 추격을 늦출 정도로 다급했다.


게다가 군량 공급이 문제가 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살생해 인육을 식량으로 만드는 작업공장인 도마채(捣磨寨)를 운영하기도 했다. 인간 방앗간이 따로 없었으며 참혹한 실상이 <구당서>, <신당서>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장안에서의 도륙도 모자라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육을 담식(啖食)했으니 '살인마'라는 황소의 불명예를 도저히 지울 길이 없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 중에 인육을 먹은 최초의 인물은 수말당초의 '비정한' 반란군 수괴 주찬(朱粲)이었지만 황소 역시 '식인의 명부'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황소는 884년 봄, 이극용의 5만 군대에 연패하며 하남을 지나 산동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주온 토벌군과도 정주와 개봉 사이 왕만도(王满渡, 하남 중무中牟)에서 대패했는데 황소의 핵심 부하장군들이 대거 투항해 버려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6월에는 왕선지 민란에 참여했다가 황소에게 의탁한 최고의 오른팔 상양조차 무녕절도사가 이끄는 토벌군에 투항했다. 황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게 되자 산동 태산의 협곡 낭호곡(狼虎谷)으로 은신했다.


▲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태산 부근 낭호곡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사진은 태산의 가파른 계단. ⓒ 최종명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외조카이자 수행 장군인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헌납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며 최후의 순간을 준비했다. 임언이 감히 칼을 들지 못하자 황소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민란 주모자의 죽음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당연하지만,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역사의 정설 외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상존하고 있다. 중국당사협회의 한 역사학자는 황소가 자결했지만, 미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임언이 다시 수급을 베어 투항했지만 임언 역시 사타족 군인에 의해 살해돼 황소와 함께 수급이 당 조정에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황소의 죽음과 관련돼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1900년 돈황(敦煌)에서 도사 왕원록(王圆箓)이 우연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동굴을 발견했으니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돼 있던 동굴로 잘 알려진 막고굴에서 황소의 사인과 관련된 감숙 숙주 현 <숙주보고(肃州报告)>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황소는 그의 오른팔인 상양에 의해 살해돼 수급이 서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으로 상양이 투항할 때 이미 황소는 살해됐으며 태산으로 가지도 못했다는 주장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언제 어떻게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 제각각 근거와 기록을 남긴 황소는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 민란'이었으니 '당은 황소에 의해 망했다.'는 기록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민란의 영웅이었기에 살인마가 됐거나 혹은 누명을 썼겠지만 황소의 인생은 비참한 인민을 일으켜 세웠지만 스스로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지금껏 살아있다.


당나라의 멸망 속에 오대십국이 숨 쉬다


▲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수급이 감숙 성 숙주로 옮겨졌다'는 <숙주보고> 문서가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 건립된 돈황 막고굴을 상징하는 9층루. ⓒ 최종명


당나라뿐 아니라 모든 왕조는 망했지만, 황소 민란만큼 전국을 휘젓고 수도까지 점령했던 역사는 많지 않다. 사천으로 도망간 황제가 황소의 대제 정권 토벌을 위해 재물을 바짝 수탈하자 농민의 부담이 가중됐다. 치아를 치료하는 관리인 천능(阡能)이 촉나라 땅에서 882년 농민주도의 민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본영 주위에서 9개월 동안이나 치열하게 울분을 토하는 민란으로 골치 아픈 당 조정에게 황소의 장군 주온의 투항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충성해 달라는 전충이란 이름까지 하사하며 배반의 오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주전충은 황소가 사망하자 23년 후 민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907년 국호를 양梁이라고 하고 건국했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했다. 이에 격분한 황소 토벌의 또 다른 주축이던 이극용은 당나라 연호를 지키며 부흥을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908년 병사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주황이 개국하자 지방 절도사들이 번진을 기반으로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화북 지방의 오대와 화남 지방의 십국이 차례로 집권했는데 70여 년의 할거 시대는 조광윤의 송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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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2]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①


당나라 말기 절강 섬현에서 사염 밀매로 생계를 유지하던 구보는 상산에서 살신의 정신으로 민란을 일으켰다. 사진은 구보의 고향과 아주 가깝고 20세기 국민당의 장제스의 고향이기도 한 절강성 계구 마을의 시장. ⓒ 최종명


"당(唐)은 황소(黄巢)로 인해 망(亡)하고 그 화(祸)는 계림(桂林)에 있다." - <신당서(新唐书)>


당나라 말기 최대 농민전쟁인 황소 민란이 일어나기 전 그 화근이 된 사건을 계림에서 봉기한 방훈(庞勋) 민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방훈보다 10년 앞서 절강 일대에 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구보(裘甫)가 있었으니 당나라를 침몰시킨 진정한 화근이자 최초의 항거였다. 당나라 말기 혼란, 피 끓는 전쟁의 서막이다.


당나라 말기 황제는 우매하고 무능해 주색과 오락에 빠져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고 가혹한 가연잡세(苛捐杂税)로 억지를 부리고 정치는 부패해 중앙은 환관(宦官)의 전권, 지방은 번진(藩镇)이 할거하니 나라 꼴이 엉망진창인 천창백공(千疮百孔)이었다. 진흙탕에 빠지고 숯불에 타버린다는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 이후 주현(州县)에 파견되는 절도사는 점점 중앙의 통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자 세력으로 변모했으며 세습화를 통해 고착화하는 경향이었다. 토지를 대규모로 장악하는 토지겸병으로 이어져 농민들은 의지할 곳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구보는 동시대 역사학자 배정유(裴庭裕)가 집필한 <동관진기(东观秦记)>에 따르면 월인(越人)이라 기록했고 <신당서>에 섬현(剡县, 절강 승주嵊州 시) 사람이라고 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구보는 사염(私盐) 밀매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강남 일대의 소금 산업은 풍부한 생산성으로 조정의 재정을 상당 부분 담당하던 명줄이었다. 지세(地税)는 물론이고 염차주(盐茶酒)에 대한 세금이 갈수록 가중됐고 잔혹한 착취로 이중삼중으로 수탈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거리마다 원성이 터져 나오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구보는 상산(象山, 절강 영파宁波)에서 859년 12월 살신의 정신으로 반항의 깃발을 높이 드니 기다렸다는 듯 수백 명이 순식간에 동조했다.


곧바로 현성을 공격해 주변 일대를 장악하고 군대의 준동을 무력화시켰다. <자치통감>에는 현을 장악한 후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장사를 모집하니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관찰사가 토벌군을 소집해 공격해오자 구보는 유인작전을 펴 삼계(三溪, 절강 신창新昌)에 있는 강 상류의 저수지를 뚫어 강을 건너던 토벌군을 섬멸했다.


'막힌 곳을 뚫어 물이 흘러넘치게 하자!'는 구보의 삼계대첩은 꽉 막힌 조정의 약한 고리를 뚫어 행복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자는 해방의 메시지와도 같았다. 산과 바다 근처의 크고 작은 유랑 집단이 일시에 합류하자 3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번지자 고향 섬현에 농민 정권의 토대를 구축했다.


구보 민란군이 차례로 절강 일대를 장악하자 관찰사로 임명된 왕식(王式)은 대군을 소집하는 한편 강남 지방을 유랑하는 회홀(回鹘, 위구르족)과 토번(吐蕃, 티베트족) 사람을 기병으로 동원하고 각 지역의 지주까지 무장을 시켜 토벌에 나섰다. 구보는 토벌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전을 거듭하자 섬현을 수성하며 만여 명의 민란 군대와 백성이 일치단결해 3일 밤낮 83차례에 걸친 공방전을 벌였다. 끝내 과불적중(寡不敌众)으로 구보는 생포돼 참수당했으며 500여 명은 포위를 뚫고 탈출했으나 곧 전멸했다.


불과 반년 만에 끝난 민란이었지만 당나라 말기 사회모순과 계급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8년 후 또다시 강남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방훈 민란의 예고편이었다. 그런데 <신당서>는 왜 수도 장안과 4만리나 떨어진 광서 계림을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당나라 멸망의 '화', 그 뿌리라고 한 것일까?


계림의 탈출, 장안을 위협했지만


805년에 서주(徐州), 사주(泗州, 강소 사홍泗洪), 숙주(宿州), 호주(濠州, 안휘 봉양凤阳) 4주를 지배했던 번진 무녕군(武宁军)이 설치됐다. 신라인 장보고(張寳高)가 무녕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819년 고구려 유민 집단이자 산동지방 절도사로 재직하던 이사도(李師道)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데 종군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녕군은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는 번진으로 절도사의 횡포에 맞서 장병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당나라 멸망의 '화'가 되는 계림 방훈의 민란 원인은 무녕군과 관련된다. 당시 무녕군 군인이던 장보고,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산동 영성(榮城)의 적산법화원 ⓒ 최종명


862년 7월 서주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신임 절도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돌연 절도사를 축출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 해도 하극상치고는 돌발적이었다. 구보 민란을 진압해 명성을 얻고 있던 왕식이 다시 절도사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하극상을 벌린 장병 수천 명을 학살하고 무녕군을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목숨을 건진 장병들은 모두 도망쳐 산으로 들어갔으며 비적으로 평생 살 운명이었다.


당시 운남 지방에는 백족 등이 중심이 된 남조(南詔) 정권이 세력을 키워 북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주의 하극상 사건 2년 후 864년, 조정에서는 서주와 사주 일대의 '비적화한' 장병을 끌어들여 남조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약 800여명이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로 내려가 주둔하게 됐다.


멀리 이국땅에서 용병의 시간을 견디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으니 비적과 조정은 애당초 서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던 셈이다. 거래는 약속에 기반하는 것인데, 애초에 약속한 주둔 기간 3년이 지났건만 조정은 귀향 명령 대신에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해버렸다. 불신이 팽배해지자 불만의 고름이 터져 나왔으며 게다가 관찰사의 가혹한 훈련과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등점을 넘고 있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수병(戍兵) 복무를 감당하라는 것은 잔혹한 고통이었다.


868년 7월 전직 무녕군 장교 허길(许佶)은 마침 계주 관찰사가 전근 간 틈을 노려 계주도장(桂州都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식량창고를 약탈한 후 군량과 사료를 관리하는 양료관(粮料官)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해 서주로의 귀향을 도모했다.


반란군이 된 방훈 군대는 병기 창고를 열어 무장한 후 계림을 출발해 호남, 호북, 안휘, 절강을 거쳐 서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 당시 지방 번진의 횡포에 고통 받던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군대병력도 점점 늘어나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못하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일부 장병의 단순 반란이 서서히 농민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훈은 '조정이 우리를 모두 주살하려 하니 어차피 싸우다 죽는 것이 백번 낫다.'고 외치며 서주의 본거지 팽성(彭城, 강소 서주)을 공격했다. 애초에 계림으로 보냈을 뿐 아니라 복무 연장을 주도한 서주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을 체포해 원한을 갚았으며 부하장수들은 물론이고 그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서주를 장악하고 장강 일대를 차단하자 수도 장안까지 위협에 빠지게 됐는데 이때 농민들의 참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됐다. 조정이나 민란군 지도자 모두 서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규모로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방훈에게 서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20만 명의 토벌군을 모집해 절도사 강승훈(康承训)에게 지휘하게 했다. 선봉장 대가사(戴可师)가 3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방훈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쳐 방심하도록 유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토벌군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방훈은 토벌군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만하고 향후 공격방향이나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방심했다. 게다가 음주와 오락에 점점 빠졌는데 마음 속으로는 반란군 두목으로 최후를 맞기 보다는 조정이 자신을 절도사로 인정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인 계림의 방훈 민란.사진은 '산수갑천하'의 계림의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과 소수민족 이미지가 혼합된 세외도원. ⓒ 최종명


"예로부터 교만에 빠져 사치로 나태하면, 얻었으나 다시 잃게 되며 이겼으나 다시 패하는 것인데, 하물며 얻은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사 주중(周重)은 직언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방훈은 듣지 않았다. 지도자가 그러니 덩달아 계림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수병들도 거만하고 난폭해지더니 무고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란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방훈도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지 않자 서서히 군율이 떨어지고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군 복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군인들은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명분과 규모를 키웠으나 본래 군인의 최고 로망인 절도사에 편재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절도사를 얻을지 말지'에 대한 동요까지 아이들이 시장 곳곳에 널리 유행할 정도였다. 절도사를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전투를 하다가도 또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된 것으로 봐서 방훈의 지략과 풍모는 한 나라를 세울만한 됨됨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웃음거리가 된 지도자를 비웃는 노래는 곧 고난을 살아가는 인민의 애환이자 바람이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난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는 속성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조정은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 절도사의 녹봉을 줄 것처럼 심리전을 펼쳐 안심시키면서 대대적인 토벌을 준비한 후 공격해왔다. 민란 지도자로서의 신임이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군대를 이탈해 투항하는 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전투가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다. 숙주와 서주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팽성이 함락당한 후에 계림 출신 핵심 장병의 일가친척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자 급속도로 사기가 꺾였다. 


방훈은 869년 9월에 이르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서북에서 출전한 돌궐계 용병 사타족(沙陀族) 기병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게다가 패잔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이미 투항한 옛 동지가 토벌군 선봉대로 나타나 앞길을 막자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한때 장안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침 없었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한계에 다다르면 어떻게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군인이 주도하고 농민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백성들이 호응해 1년 이상 전국을 휩쓸던 기세는 이후 황소의 난을 촉발했으며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导火线)이 됐다.


소금으로 망한 나라


황소를 등장시키려면 먼저 왕선지(王仙芝)를 앞세워야 한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민란을 일으켰으며 왕선지가 전사한 후 황소가 그 이념과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다.


왕선지도 구보처럼 당시 횡행하던 소금 밀매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균전제가 파탄 나고 번진의 겸병이 겹쳐 재정이 극도로 결핍해지자 조정은 차, 소금, 술의 전매를 강화했으며 그에 따른 세금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조정은 관염을 통해 거듭 폭리를 취하는 한편 밀매로 운영되던 사염을 가혹하게 단속하니 필수품인 소금이 사회모순의 핵심으로 적나라하게 부상했다. 당나라가 소금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민란의 주인공은 대부분 소금밀매 조직을 기반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왕선지는 874년 말 가혹한 폭정과 잔혹한 세금 징수는 물론이고 가뭄으로 인해 기아가 극도로 치닫자 장원(长垣, 하남 신향新乡)에서 기아 선상에서 헐떡거리던 3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민란 봉기를 주도했다. '천보평균대장군(天补平均大将军)'이라 자칭한 왕선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뜻으로 천하를 '평균'으로 수선(补)하고 싶었다. '평균'은 진승 오광의 난이나 태평도의 민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 구호로서 만인 평등을 처음으로 제창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균'에 대한 인민의 염원이 왕선지에 의해 처음 등장한 이후 '평등'에 대한 갈망은 이후 북송 초기 민란을 일으킨 왕소파(王小波)의 '균빈부(均贫富)' 구호에서 다시 등장한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 이를 균등하게 바로 잡으려는 사상이었고 인민의 호응을 얻어 나라를 세웠으니 이상적인 공산주의적 국가가 이미 중국 역사에 '원시적'이나마 출현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 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하남 일대에서 봉기한 왕선지는 875년 5월 연이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와 복주(濮州, 산동 견성鄄城)를 공략하니 인근 지방마다 봉기에 호응해 민란의 깃발을 드는 세력이 출몰했다. 왕선지는 이때 원구(冤句, 산동 하택 부근 추정)에서 봉기한 황소와 회합을 해 의기투합했다.


왕선지는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던 중 876년 7월 절도사 송위(宋威)가 이끄는 군대와 싸워 패배하자 도주했다. 토벌군이 승리한 후 조정에 왕선지가 이미 죽었다는 '이해하기 힘든' 보고가 올라갔는데 9월에 이르러 왕선지가 다시 나타나자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왕선지가 동도(东都) 낙양(洛阳)을 공격하자 도성 내 군관민이 모두 가족을 데리고 성을 탈출했다고 <자치통감>이 기록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희종(唐僖宗)은 수도 장안에서 중양절(음력9월9일) 행사도 취소하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토벌 대신에 회유를 모색할 정도로 다급했다.


왕선지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남, 호북, 안휘 일대를 공략하니 반년 만에 30만 군대로 확산됐다. 기주(蕲州)자사는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성을 열어 환대했으며 회유 책략의 일환으로 하사한 감찰어사 책봉에 왕선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왕선지는 투항할 생각도 있었지만 황소가 크게 책망하고 수하들이 강력히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생각을 포기했다. 황소는 왕선지로부터 떨어져 따로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왕선지 민란군은 약화된 세력으로 악주(鄂州, 호북 무창武昌)를 공략했지만 형남(荆南, 호북 강릉江陵)에서 포위를 당하는 등 토벌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다가 878년 2월 황매(黄梅)에서 토벌군 수장 증원유(曾元裕)에게 패해 참수당하고 말았다. 왕선지가 이끌던 반란군 중 1만여 명은 상양(尚让)의 인솔로 안휘 박주(亳州)에서 황소와 합류했다.


당나라 말기 왕선지 민란군과 토벌군이 일대 격전을 벌인 강릉은 삼국지 관우가 지키던 형주 땅이기도 하다. 사진은 형주고성으로 들어가는 대로. ⓒ 최종명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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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1] 수나라 민란 장백산과 와강채 ②



▲  하북 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두건덕의 고향은 고성으로 서커스로 유명한 오교 부근이다. 사진은 오교의 시장 모습. ⓒ 최종명


두건덕(窦建德)은 장남(漳南, 하북 고성故城)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약속을 천금처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곤한 동네에 살며 사람들이 부모 상을 당하면 밭을 갈다가도 즉시 달려가 장례를 도왔으며 필요한 물품을 내주기도 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이런 성품 덕분에 마을 이장을 하기도 했는데 두건덕의 부모 장례식에 천여 명이나 찾아와 예물을 주려고 했으나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 모두 사절했다고 <구당서(旧唐书)>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인품이다.


고구려 침공에 대한 전국적 반발이 거세지고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도망치고 난민이 많아질 즈음, 마을 주민 손안조(孙安祖)의 집이 떠내려가고 부인과 아이가 굶어 죽는 일이 생겼다. 홀로 남은 손안조에게 군대에 들어가라는 현령의 조언을 거부하자 잔인하게 곤장 치도곤을 당했다. 손안조는 현령을 죽이고 도망쳐 두건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고구려에 대패한 올해 홍수가 발생해 백성은 빈곤하건만 황제는 백성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체혈민정(体恤民情)' 하나 없이 또 다시 요동으로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전 서방을 정벌할 때 입은 손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백성의 피로가 극심한데 연이어 전쟁이니 일년 내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출병한다면 세상은 동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사내대장부가 죽지 않고 공을 세워 업적을 세워야지 어찌 도망치다가 포로의 운명으로 세상을 마칠 것입니까? 


내가 잘 아는 지인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숨어서 의적으로 생활하다가 기회를 틈타 사람과 말을 얻어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반드시 일어나 한바탕 경천동지할 대업을 벌여보시오."


두건덕이 손안조에게 한 말인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두건덕은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거나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를 대장으로 황하 인근의 험난한 근거지로 도피시켰다.


도적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지만 두건덕이 사는 고향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이런 내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관청이 손안조를 비롯한 도적들과 결탁했다는 밀고와 의심으로 두건덕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두건덕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해 당한 후였다. 


두건덕은 전 가족이 몰살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수하에 있던 장수 이백 명을 이끌고 당시 수현(蓨县, 하북 경현景县)에서 봉기한 고사달(高士达) 군대에 합류했다. 이때 손안조가 사망하자 함께 하던 수천 명의 군사들도 두건덕을 찾아와 투항했으며 동고동락의 동지가 돼 함께 군세를 확대해 나갔다.


616년 탁군(涿郡) 유수(留守) 곽현(郭绚)이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고사달은 지혜와 책략이 두건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군사마(军司马) 직책을 양도하고 군권을 전부 일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과 짜고 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고 선전하고 포로 중 한 명을 두건덕의 부인으로 위장해 공개적으로 살해해 기정사실로 믿게 했다. 두건덕은 거짓 항복 후 기습공격으로 토벌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도주하는 곽현을 참수해 수급을 고사달에게 바치니 두건덕의 권위가 날로 높아졌다.


수나라 조정은 고관인 태복경(太仆卿) 왕의신(杨义臣)이 또다시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맞서 싸우면 불리하니 도주했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급습하자는 두건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공격에 나선 고사달은 5일만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왕의신이 공격해오자 군사들은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두건덕은 수백 명의 군사만 이끌고 도주한 후 요양(饶阳, 하북 형수衡水)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의 시신을 수습해 따뜻한 곳에 안장한 후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전군에 흰색 상복을 입게 했다. 제각각 도망했던 군사들이 다시 모이니 수천 명의 군대로 복귀했다. 사기가 다시 충천해지자 복수를 위해 수나라의 관리와 지방 유지를 모두 처형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두건덕은 흥분을 누르며 반드시 '마땅한 예의로 상대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요양 현 장관(长官, 중앙에서 파견한 현령)이 투항해 두건덕을 귀빈으로 여기고 수나라를 토벌할 대계를 상의했다. 이후 수나라 군현의 장관들이 점점 현을 내주고 투항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군대의 기세가 날로 번창했으며 수많은 인재와 병사가 모여 십만 군대의 명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수양제가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되자 618년 두건덕은 그 옛날 천명을 받은 하우(夏禹)를 따른다는 취지로 국호를 하(夏)라고 선포하고 왕이 됐다고 <구당서>는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호랑이의 위세와 용의 위엄을 지닌 호거용반(虎踞龙蟠)의 명성을 얻으며 하북 일대를 장악했다.


문경지우가 원수가 되다니


수나라 말기 민란을 주동한 두복위와 보공석은 모두 제남 사람으로 문경지우의 관계였다. 민란이 발전하면서 서로 앙숙이 됐으며 원수 사이로 변했다. 사진은 제남 시내의 골동품 상가. ⓒ 최종명  


제주(齐州, 산동 제남济南) 사람 두복위(杜伏威)와 보공석(辅公祏)은 어릴 때부터 둘 다 가난했지만 서로 친분이 깊었다. 보공석은 목양업을 하는 고모네의 양을 훔쳐 나이가 더 많은 두복위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부자 집 담을 넘어 물건을 강탈해 배를 채우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는데 새싹은 날 때부터 알아볼만한 것인가 보다.


613년 산동과 하북 일대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 전시상황이었다. 두복위와 보공석은 자신들이 저지른 절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관청에 체포될 위기에 이르자 도적이 되기로 했다. 왕박이 민란 근거지로 삼았던 장백산으로 들어갔지만 도적 공동체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자 자기를 따르던 부대를 이끌고 나와 회북(淮北, 안휘 북부)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보공석이 하비(下邳, 강소 비현邳县)에서 봉기한 묘해조(苗海潮)와 담판을 벌여 그가 인솔하고 있던 민란군을 포섭했으며 강회(江淮, 강소와 안휘) 일대로 조직을 확대하자 보공석의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보공석이 농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자 두복위는 평소에 대장군이 아닌 형이라 부르는 것에 살짝 질투의 마음이 쌓이기 시작했다. 양자로 삼은 장군들을 중용하고 보공석에게는 화살부대를 관장하는 복사(仆射) 업무에 임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문경지교(刎颈之交)라는 명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대업을 도모할만한 절친인지는 잘 가려봐야 하겠다. 토벌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점점 남하해 강회 일대를 장악하자 농민혁명정권을 선포하고 두복위는 대총관(大总管)에 올랐으며 보공석은 그저 한 부서를 담당하는 장사(长史)에 임명됐다.


수양제가 죽고 중원은 난세에 접어들어 이연이 아들 이세민과 함께 당나라를 건국한 상태였다. 619년 두복위는 당나라에 투항 의사를 밝히며 보공석에게는 병권이 없는 벼슬을 주라는 당부를 했다. 


처음부터 투항할 의사가 없던 보공석은 마침 두복위가 군사 천명을 주고 10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한 농민반란군인 이자통(李子通)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공석은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전투를 이끌어 의외로 이자통 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고 쉽게 단양(丹阳, 남경)을 점령했다.


두복위는 단신으로 수도 장안으로 가기 전에 보공석과 부하 장수에게 '장안에 도착해 관직을 받게 되면 너희도 함께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를 내려놓지 마라'고 했다. 또한, 30여 명의 양자 중 가장 신임했던 왕웅탄(王雄诞)에게 병권을 주면서 보공석이 필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항상 감시하라고 거듭 주문했다. 


두복위가 장안으로 떠난 후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보공석은 왕웅탄이 병으로 누운 사이 병권을 탈취했다. 623년 9월 보공석은 장안으로 제 살길 찾아 떠난 두복위와 절연하고 단양에서 10만 군대를 통솔하며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했다. 수나라에 항거해 일어났던 민란군은 이제 당나라와 대항하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수나라 3대 민란과 당의 건국


황하 북쪽으로 천리 길에 밥 짓는 연기 없고, 강소와 안휘 지방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수서(隋書)>에 나오는 말인데 수나라의 3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으로 황폐하게 변한 중원과 강남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온전히 굶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두건덕은 민심이 우리 편이고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사내대장부라면 대업을 추구하라고 했다. 왕박이 일으킨 장백산 민란을 시작으로 누구나 뜻과 인품만 있으면 농민들이나 병역 기피자의 호응을 얻어 혼란의 현장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양제(煬帝)는 자신의 시호(谥号)처럼 온 나라를 불태워버리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제 민란이 촉발한 군웅할거(群雄割据)는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하남 일대 이밀의 와강군, 하북 일대 두건덕의 하북의군, 강남 일대 보공석의 강회의군은 새로운 정권의 창출, 오로지 하나만이 살아남자는 피 말리는 세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나라 말기 태원유수 이연은 민란 토벌이냐 반란이냐 갈림길에서 아들 이세민의 권유에 따라 반란의 길로 접어든다. 사진은 태원 시내의 영택공원 입구. ⓒ 최종명


우문화급에 의해 수양제가 살해되기 1년 전인 617년, 민란 토벌의 명령을 받은 태원유수 이연(李淵)은 도저히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권력의 누수, 레임덕이 오면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지 선택이 쉽지 않은데 아들 이세민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반란의 깃발을 드는 것을 따랐다. 


수나라 군사 대부분이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수도 장안을 점령한 후 수양제가 죽자 618년 당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됐다. 이후 3대 의군과의 경쟁과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수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적양을 살해하고 신임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와강군을 이끌고 있던 이밀은 낙양 공략에 치중하고 있었다. 수양제를 살해한 경도병변(江都兵变)을 일으킨 우문화급이 공격해오자 그를 물리쳐 북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민란 토벌로 세력을 크게 키운 왕세충(王世充)에게 대패한 후 장안으로 도주해 당나라에 투항했다.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이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산동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견을 가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619년 1월 당나라 장군 성언사(盛彦师)의 매복작전에 걸려 산동 남부 웅이산(熊耳山)에서 37살의 나이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북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두건덕은 619년 북쪽으로 도주한 우문화급을 공격해 살해했다. 이듬해 낙양을 점령하고 있던 왕세충이 이세민의 공격을 받아 전세가 불리하자 두건덕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621년 낙양을 구원하러 남하했다. 춘추전국시대 및 초한쟁패의 격전지였던 호뢰관(虎牢关, 하남 형양荥阳 서북부)에서 이세민에게 체포돼 장안으로 압송된 후 49살의 나이로 참수됐다.


두복위가 당나라에 투항하자 강회의군을 이끌고 있던 보공석은 점차 강력해지는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내느라 힘에 부쳤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공격해오자 보공석은 안휘 당도(当涂) 현에 위치한 박망산(博望山)과 청림산(青林山)에 병사를 배치하고 철벽으로 산성을 쌓고 저항했으나 보급로가 끊겨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결국 절강으로 도주했는데 불과 수십 명만 남아 항전하다가 무강(武康, 절강 덕청德清)에서 체포된 후 단양(丹阳, 남경)으로 압송돼 참수당했다.


왕박의 장백산 봉기와 보공석의 죽음까지 약 14년 동안 중원은 하루도 피로 물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농민들은 민란에 의연히 일어섰다가 피로 얼룩진 벌판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지만 역사 속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피의 흔적을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 침공이라는 야망으로 폭발하는 농민들의 울부짖음과 격렬한 기세에 밀려 수나라는 건국한 지 35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 수나라는 양제의 무리한 침략전쟁이 불러온 민란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고 결국 민란과 내란의 와중에 우문화급에게 살해 당했다. 수양제의 장녀 남양공주는 우문화급의 동생을 남편으로 둔 애절한 주인공이다. 사진은 남양공주가 수행하고 설법하던 창암산 절벽. ⓒ 최종명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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