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토사 왕국에 남은 건축물, 한옥이라 할 수 있을까?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28> 구이저우 ④ 북부 쭌이, 펑강, 츠수이


구이저우에 하나뿐인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해룡둔()이다. 구이양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2시간 거리에 쭌이(遵义)가 있다. 중국공산당 본격적인 장정이 이뤄진 쭌이회의가 열린 도시다. 마오쩌둥 노선이 지지를 받아 치열한 도피를 시작한 기점이다. 지금도 쭌이는 혁명 역사를 배우는 홍색 여행으로 중요하게 치부된다. 다시 30km를 더 북쪽으로 달리면 용암산에 위치한 해룡둔이 나타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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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 너무 간략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6>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④ 샤오치와 리컹


밤 새워 험난한 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를 천강포효()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 황소() 민란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왕만오(汪萬五) 일가는 휘주부에서 장장 400리를 피난 내려왔다.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풀과 꽃이 만발한 들판이자 비옥한 땅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짐을 풀었다. 9세기부터 정착했으니 그 어떤 천년고진 부럽지 않은 세월을 지녔다. ‘동이 트는 땅샤오치(), 양생하(養生河)가 흘러 샤오촨(曉川)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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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성 우위엔婺源의 휘주문화가 살아 숨쉬는 마을 샤오치晓起를 찾았다. 무려 8세기에 처음 조성된 마을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답게 진사택进士第, 대부택大夫第, 영록택荣禄第 등 옛 건축가옥이 많다. 고풍스런 마을을 거닐며 마음에 드는 가옥을 찾아 다니던 중 문화대혁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모습을 발견했다. 벽에는 모주석어록이 적혀 있고 모택동의 초상화나 조각상도 보인다. 골목에 있는 우물 속에는 빨간 붕어 두 마리가 예쁘게 헤엄치고 있다. 우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붕어를 넣어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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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주고성徽州古城은 지금도 서민들의 주거공간이다. 특히 두산가斗山街는 휘주상인의 마인드가 남아있는 옛 건축양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기 흔적도 군데군데 보인다. '천년우물' 앞에서 약간 장난기도 발동한다. 해가 지자 인적이 점점 줄어들고 은은한 조명 속에서 오손도손 저녁을 함께 하는 가족을 창문 너머 살짝 들여다본다. 오늘도 하루일과를 서로 이야기하는 단란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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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6)

 

12 9, ‘대통령 탄핵이 가결됐다. 역사적인 성과로 기록돼 길이 남을 일이다. 매주 토요일 광화문과 청와대 일대를 가득 장악한 촛불이 이룬 승리이다. 우리 현대사는 ‘4.19’‘5.18’, 87 6월 항쟁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2016민중총궐기함성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다. 민란의 역사는 기존 질서의 모순을 대체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되는 것은 민란의 주체가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했는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작은 성공은 있었지만 주체로서의 성공은 아니었던 셈이다.

 

19세기 청나라 말기, 격변의 시대를 풍미한 태평천국 민란은 결국 실패했다. 봉건왕조의 악행과 외세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근본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민중의 쾌거였지만 홍수전을 비롯한 지도부는 대안 이념의 실천을 철저히 구현하지 못하고 분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민란의 역사는 새로운 대안을 잉태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이념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쑨원 중심의 공화주의는 황제 시대의 종말을 끌어냈다. ‘성공한 홍수전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근거지와 지도이념을 자세히 연구한 끝에 홍군 대장정을 거쳐 신중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청나라 말기 1814년 광둥에서 태어난 홍인곤(洪仁坤)은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는데 연이어 과거에 실패했다. 3번째 낙방 후 병을 얻어 와병 중에 꿈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노인으로부터 하늘의 계시를 얻었다. 홍수전이라 개명했으며 중국 최초의 중문 기독교 서적인 <권세양언(劝世良言)>을 탐독한 후 집안의 위패를 공자에서 하느님, 곧 상제(上帝)로 바꿨다.

 

홍수전의 행위는 세계관 자체를 바꾸는 엄청난 관념의 변화이자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였다. 배상제교(拜上帝)를 설립하고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 자칭했다. ()을 숫자로 풀어헤친 삼팔이십일(三八二十一)배상제교의 암호였다. 수전(秀全)은 아()와 발음이 비슷한 화(), ‘~이다라는 뜻의 내(), ()과 왕()으로 풀면 아내인왕(我乃人王)의 뜻으로 하느님이 보낸 구세주였다.

 

지방정부의 모순이 점차 가중되자 반청()을 기치로 내걸고 주변의 무장세력을 흡수해 금전촌(金田村)에서 민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금전 민란이 일어난 1851년은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계급의 모순 강도가 첨예화된 시기이자 명나라 이후 끊임없이 이어온 농민 주도의 대규모 민란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탐관오리의 치부와 토지겸병, 고리대금업 성행은 물론이고 서방 열강의 침략으로 사상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일찍이 도래한 적 없는 강렬한 반항 정서가 펼쳐진 것이다.

 

홍수전의 금전 민란은 청 왕조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태평천국의 국호를 내걸었다. 홍수전은 구약성서의 모세 십계명처럼 십관천조(十款天) 제정하고 신성하고도 엄격하게 조직을 관리했다. 하느님 상제를 숭배하고 7일의 예배를 지키는 기독교와 효도할 것과 함께 살인, 불의, 음란, 약탈, 거짓, 욕심을 경계하라는 윤리까지 포함돼 있다. 엄격한 규율로 관리되는 태평 민란군은 곧바로 서남부 광시 일대를 점령한 후 대대적으로 군대와 행정조직의 편제를 단행했다.

 

천왕을 중심으로 책략에 뛰어난 양수청(杨秀清)을 동왕, 대규모로 합류한 장족을 이끄는 소조귀(萧朝贵)를 서왕, 홍수전과 동문수학한 풍운산(冯云山)을 남왕, 태평군의 용맹한 장수 석달개(石达开)를 익왕翼王으로 봉하였다. 청 왕조의 기년을 철폐하고 천력을 시행했으며 통치 제도이자 이념이 담긴 3가지 조령인 삼유()를 반포했다. 모든 전리품은 성고(圣库)에 공동 보관하고 재화를 사적으로 은닉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청나라 문화를 거부하고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허용했으며 관방 문서의 간행과 정보기구를 두는 등 초기 태평천국의 이념과 통치 방식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중국 남방을 기반으로 이념과 조직으로 무장한 태평군은 계림과 장사를 공략했으며 악양을 점령한 후 광범위하게 몰려드는 빈민 및 유민을 결집했다. 당시 강남 일대를 휘몰아치던 천리교(天理教) 민란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장강 유역에서 발발한 염군(捻军)의 민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853 3월 남경에 이르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홍수전과 지도자 그룹의 기독교 사상과 대동 이념은 대규모 농민의 요구를 수렴했다. 원대한 통치 기반을 확대하고자 태평천국은 자급적인 소농 기반의 균빈부(贫富) 사상과 토지의 균등 분배의 토지개혁이자천하의 논밭은 모두 함께 경작한다는 정신인 천조전무제도(天朝田亩制度) 시행을 선포했다.

 

 

북경 천안문광장에 가면 광장 한가운데에 높이 37.94m의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앞면에는 마오쩌둥의 서체로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8글자가 도금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1949 9 30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 명의로 마오쩌둥이 초안을 잡고 저우언라이가 쓴 150자가 새겨있다. 건국할 때까지 3년여의 장제스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 30년여의 인민해방혁명, 지난 세기 1840년 이후 민족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대내외의 적과의 투쟁 속에서 희생된 인민영웅에 대해 천추에 길이 빛나라는 헌사가 담겼다.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발생한 1840년을 신중국 성립을 위한 영웅적인 인민 투쟁의 역사, ‘20세기적 민란의 출발로 인식한 것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해 중국공산혁명가에게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 역사의 기폭제는 태평천국 민란이라는 인식이 아주 강했다.

 

1945 6월 마오쩌둥은 연안에서 진행된 중국혁명 순국열사 추도대회에서 아편전쟁 당시 무장조직인 평영단(平英)의 반영투쟁과 함께 태평천국 운동을 영웅적인 투쟁이라 밝혔다. 태평천국 운동에 대해 최후에 남경에서 청군에게 패할 때 단 한 명도 투항하지 않고 모두 불타 죽었는데 태평천국이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이도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홍수전을 평가하며 19세기 말 외세와의 충돌을 겪던 시기에 처음으로 서방 진리를 기반으로 투쟁한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공화주의자이자 삼민주의자인 쑨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쑨원 역시 홍수전의 사유제 철폐 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삼민주의 중 민생에 대한 입장은 곧 태평천국의 토지제도 속에 담긴 평균(平均)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홍수전의 평균은 토지문제뿐 아니라 건국사상으로 제시됐는데 어린 시절부터 태평천국 운동을 보고 듣고 자란 쑨원에게는 천하위공(天下为公), 즉 철저한 공화주의자로의 앞길을 열어준 기틀이기도 했다. 마오쩌둥 역시 공산혁명의 와중에 태평천국의 비타협, 불굴의 정신과 평균정책을 착안해 농촌에서의 사유제 철폐를 위한 인민공사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1964 11월 마오쩌둥은 태평천국과 관련해 지도자 문제를 거론했다. 지도자가 너무 많으면 그 혁명은 실패했다고 전제하며 태평천국의 경우, 홍수전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양수청과 함께 양권수립(两权对立)으로 인해 실패의 전철을 밟았다고 언급했다. 이때는 국가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에게 넘겨준 후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자본주의 사상을 청산해야 한다는 사청() 운동을 제시하며 문화대혁명의 전조가 서서히 무르익는 시점이다. 반대파 숙청을 위한 명분이긴 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오쩌둥은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과 공산주의 사상을 접목해 신중국을 건국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청나라 말기 봉건적 통치국가와 외세와의 항전, 전국을 뒤덮은 새로운 사상과 실천인 태평천국 민란은 당시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성공한 홍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마오쩌둥도 태평천국 운동의 역사는 훌륭한 지침이었다.

 

우리도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처절한 투쟁을 시작으로 국내외 항일운동과 임시정부의 투쟁,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시대의 종말을 위한 항쟁과 87년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민란의 역사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민중의 몸부림이다. 이번 총궐기에 전봉준 투쟁단이 등장한 것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눈부신 경험이었다. 지금 우리의 민중총궐기역시 새로운 시민혁명의 깃발이자 전 민중의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란으로부터 배운 지도부의 출현과 민중의 요구를 철저하게 관철하는 대안 세력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 필요하다.

 

탄핵 가결 이후 광화문에 모인 열기와 청와대로의 진군 함성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더 커다란 희망으로 달려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자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전 민중이 함께 춤추는 나라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 이순신과 세종대왕 사이에 민중총궐기 영웅기념비석을 새기면 좋겠다. 매일같이 민중의 춤사위 한마당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의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



  • 민란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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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3)

 

경찰이 청와대를 차 벽으로 꽁꽁 에워싸고 있다. 백만 인파가 청와대로 가는 길을 향해 주말마다 진군나팔을 올리고 있지만 난공불락이다.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단체 등 제각각 퇴진의 깃발을 향해 촛불이 환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대통령이 사는 곳은 황제가 거주하는 성처럼 철옹성이다. 민란의 역사는 물리력으로 성곽을 열어젖히기도 하고 민중의 힘에 놀라 황제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한다. 민란의 성공은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의 권위를 대신해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는 일이다. 황제를 스스로 호칭하고 개국했지만 튼튼한 민심과 함께 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도 전에 멸망에 이르기도 한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함락했던 민란 영웅 황소(黄巢) 기억하자. 중원 땅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백만 대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기는 쉽지 않다. 황소가 대군을 형성한 것은 드넓은 중국 땅을 주유하며 민란의 명분을 행동으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산동에서 발흥해 강남을 섭렵하고 복건과 광동 등 남방을 평정한 후 계림을 거쳐 북상해 중원을 초토화시켰고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황소는 어떻게 민란의 영웅이 됐을까?

 

 

황소는 왕선지(王仙芝)가 일으킨 민란을 틈타 깃발을 들었다. 당나라 시대인 874, 왕선지는 가혹한 폭정과 잔혹한 세금 징수, 가뭄으로 인해 기아가 극도로 치닫자 3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봉기를 주도했다. ‘천보평균대장군(天补平均大将军)’을 자칭한 왕선지는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천하를 평균하려는 사상은 진승과 오광의 난이나 태평도의 민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구호로서 만인 평등을 처음으로 제창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왕선지는 곧 전사하지만, 황소가 그 이념과 세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규모 민란을 이어갔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비통한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다.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가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我花开后百花杀冲天香尽带黄金甲

 

음력 9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이며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가는 존재라고 읊고 있다.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태풍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 운을 맞춘 것이다.

 

국화 향기 만발한 도성으로 진군하는 황금 갑옷의 물결이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후화>로 소개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다. 원래 제목이 바로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라는 만성진대황금갑이다. 감독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황소의 시에서 착안해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중국영화계의 배신자로 알려진 장 감독은 영리한 머리로 속에 담긴 메시지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가 피범벅처럼 화면에 난무한다. ‘혁명은 곧 죽음이자 몰락이라는 통치자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황소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의협심이 남달랐다.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고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고향으로 오자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新唐)>는 기아에 시달리던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고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가 사망하자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 3월 황소는 중원의 변주(汴州)와 송주(宋州)를 공략했다.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하며 가렴주구 관리와 악질 지주를 공격해 민중의 고통을 풀어주었다. 해상 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복건의 중심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도 발휘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해방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한 황소는 남방에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북방에서 함께 남진한 장수들과 민란 대오는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둔병을 설치해 10만 군사를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도달하자 토벌군 대장은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로 강물이 넘쳤다. 여세를 몰아 도주하는 토벌군을 쫓아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이 혼비백산 달아나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개 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 11, 낙양유수는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은 민란 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무용지물이었다.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황소의 진격을 막기에 한계가 있었다.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을 기억나는 대목이다.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거짓 보고로 전공을 독차지하려던 고변의 지시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최치원의 격문을 뿌리고 다니며 헛소문을 퍼뜨렸을 뿐이다.

 

황소의 대군은 격문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눈 깜짝할 시간도 없었다. 12월에 드디어 수도 장안 근처 동관()과 화주()를 점령하니 당나라 황제 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도피했던 전철을 밟은 것이다.

 

881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의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다. 수도를 점령한 후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했다.

 

황소는 성공적인 민란을 이루지 못했다. 수도 점령과 동시에 도주한 황제를 일망타진할 시간을 놓치고 황권이 재기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조정의 반격과 함께 황소 군대의 맹장 주온()이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회주의자 주온은 황제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받고 토벌의 선봉장이 됐다. 게다가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왔다. 대패 후 군량미 부족에 휩싸이며 후퇴한 황소는 살인마의 악명을 쓰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배신자 주온은 23년 후 충성을 버리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하고 양()나라를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열었다.

 

 

이명박근혜정권은 서민의 피를 빠는 빨대와 같다. 복지는 간데없고 차별은 갈수록 극심하고 가난과 한탄은 점차 일반명사로 변해가고 있다. 당나라 때보다 더 악랄한 가렴주구가 판치고 있고 1% 재벌권력은 국가까지 농단하고 있다. 쌀 수매가와 최저임금은 농민과 노동자에게 상처 위 상처로 도지고 있다. 청년학생은 비전은커녕 매시간 아르바이트에 쫓기는 중이다. 썩은 하수구에 빠져서 악취만 풍기고 있는 국가권력은 세월호메르스로 점입가경이었으며 지진으로 하늘도 경고하고 있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8년 마오쩌둥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주력이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마오쩌둥은 황소에게 일침을 가하는 교훈을 바탕으로 신중국을 건국했다. 근거지란 세력이자 명분이라는 점을 역사로부터 배운 민란 지도자 마오쩌둥은 성공했다.

 

우리가 마오쩌둥보다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황소의 민란을 통해 배우자. 마음속에 황금갑옷을 입고 진군나팔을 따라 청와대의 주인은 민중임을 분명하게 밝히자!



  • 민란에 관한 대 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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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시가 '나를 위로하는 인문학'이란 주제로 특강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문화를 주제로 모두 4번 강의를 합니다. 그 두번째로 지난 2016년 10월 4일 '미인으로 본 중국역사문화'란 주제로 여수 트립티 북까페에서 진행했습니다. 


제1강 : 숨겨진 중국문화의 비밀

제2강 : 민란으로 본 중국역사문화

제3강 : 상인과 상방

제4강 : 미인으로 본 중국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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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시가 '나를 위로하는 인문학'이란 주제로 특강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문화를 주제로 모두 4번 강의를 합니다. 그 두번째로 지난 2016년 9월 20일 '민란으로 본 중국역사문화'란 주제로 여수 트립티 북까페에서 진행했습니다.

 

제1강 : 숨겨진 중국문화의 비밀

제2강 : 민란으로 본 중국역사문화

제3강 : 상인과 상방

제4강 : 미인으로 본 중국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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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은 쑨원(孙文)이 열었으며 장제스(蒋介石)와 마오쩌둥(毛泽东)의 한판 승부가 대륙을 휘몰아친 무대였다. 절강 닝보(宁波)에서 서남쪽으로 1시간 정도 달리면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溪口)가 있다. 내전에서 패배한 후 대만으로 도주한 장제스의 고향 마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보존상태가 좋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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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수원 대학생이 주축이 된 와이즈아카데미 강좌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중국 근현대에 대한 관심을 가져준데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 공부를 할 기회가 아주 적은 우리나라에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가까운 이웃 중국의 현재를 제대로 알게 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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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야기> 4편에는 신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김일성,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 협상 달인 강신태, 작곡가 정율성을 비롯 조선인과 동북왕 가오강 등 중국인들의 동북에서의 항전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동북을 놓고 벌인 내전에서 북한의 지원은 탁월했다. 혼란기에 펼치는 전략가들의 시야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타고날지도 모른다.


북한을 갈 수 없으니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만강과 압록강 강변에 있는 중국 도시들을 가노라면 중국과 북한의 어제와 오늘, 미래 관계가 끊임없이 안개 속에 갇힌 듯한데 이 책에는 숨겨진 많은 해답이 있는 듯하다.


2007년 연길에서 새벽에 떠나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무산 시를 내려다 보며 지났고 백두산에서는 천지 너머를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단동에서는 유람선 타고 북녘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집안에서는 강 너머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소리쳐 보기도 했고 60년대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담판으로 북한 영토가 된 강 중간의 조그마한 섬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저 다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한일 뿐이었기에 ‘갈 수 없는 나라’의 그리움이었으리라.


연길에서 동북 만주를 달리며 끝없이 펼쳐진 벌판은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 옛날 말 달리던 북방민족의 얼이 숨쉬고 있고 항일전쟁용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을 생각했던 곳이 아니던가? 발해 상경부 성터에서부터 신중국 이후 최초의 집단농장을 조선족이 일궜다는 화천에서는 민족향에서 만난 동포들과의 하룻밤도 너무 좋았던 시절이 그립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중국에서 바라본 무산


조중경계비 앞에서


백두산 입구


백두산 6월의 천지


만주벌판, 자무스 부근


압록강변 단둥


단둥 유람선 타고 바라본 북한 땅


여기서 중국인이야기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다.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투박하고 알아듣기 힘든 호남사투리로 신중국을 선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도를 수도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마오쩌둥이 일본 패망 후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를 때 승리를 확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면서 당연히 수도를 고민했을 것인데 그 최초의 구상은 북경이 수도가 아니었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하게 된 뒷배경 하나~


1948년 3월 당 중앙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동진해 산서 성을 해방한 후 건국 후 수도를 정하는 문제가 처음 거론됐으며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수도 예정지로 고도 북경, 남경, 서안도 아닌 당시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하얼빈이 선정됐다. 린뱌오가 세계지도를 보는 것을 취미처럼 즐겼다지만 마오쩌둥도 중국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중국지도 보는 거 좋아한다. 벽에 늘 걸어놓고 산다. 왜? 어딜 갈까 늘 발걸음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한 마리 수탉으로 비유하길 좋아했고 흑룡강 성은 한 마리 하늘을 선회하는 고니를 닮았으며 하얼빈은 새의 목구멍 위치에 해당한다고 자주 언급했다.


하얼빈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된 도시이기도 하고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안정적인 수도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 중앙은 ‘특별시’ 수도로 하얼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당사에 기록돼 있다. 신중국 성립 후 무주공산에 가까운 동북의 자원 활용과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뜻밖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이 미친 듯 동북으로 병력을 증파하고 교통로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으며 다시는 당 중앙은 동북 거점 수도 구상을 논하지 않았다. 이후 낙양, 개봉 등을 포함해 수도를 고려하다가 최후에 북경(당시 북평)을 지목했다. 재미있는 것은 수도를 정하기 전 1949년 1월 동북국정치위원이던 왕자샹王稼祥과 나눈 이야기다.


마오의 “우린 곧 승리할 것인데 우리 정부는 수도를 어디로 하면 좋겠소? 당신 의견은 어떠오?”에 대한 왕의 긴 대답은 당시 그들의 고민과 함께 중국지도를 펼쳐놓고 생각해보게 한다. (지도를 펼쳐 보시라)


(이하 왕자샹의 말)


아주 중요한 문제네요. (엄숙한 말투로) 현재 국민당 수도 남경은 범과 호랑이의 자태를 지닌 호거용반虎踞龙盘의 요충지이지만, 역사적으로 역대 금릉(지금 남경) 왕조와 국민당 정부 모두 단명했습니다. 이런 숙명론적 역사인식을 믿지 않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남경은 동남부 해안과 너무 가깝고 향후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아주 큰 단점입니다. 남경으로 정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닌 듯합니다.


서안의 단점은 너무 서쪽에 편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중국의 강역은 진한시대나 수당시대가 아닙니다. 그때의 만리장성은 변경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중심지에 가로로 퍼져있습니다. 서안은 지리적으로 중심지로서의 장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안도 부적합합니다.


황하 연안의 개봉이나 낙양 등도 고도였지만 중원지방의 경제가 낙후돼 있고 이런 문제가 단기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일 뿐 아니라 교통문제나 황하의 범람 등 문제로 인해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은 북평입니다. 북평은 해안지구에 위치하면서도 경제가 발달한 영역에 속하는데다 동북과 관내(산해관 안쪽)로 통하는 핵심적인 요로이기에 전략적으로 십분 중요하며 현재 중국의 혈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깝게는 소련과 몽골이 위치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비록 바다와 가깝지만 발해는 중국의 내해에 해당하고 요녕과 산동 두 반도가 둘러싸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봐도 비교적 안전합니다. 국제적으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수도에 충격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북평은 명청 제국의 수도이었기에 인민들도 마음 속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을 생각해볼 때 수도는 당연히 북평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은 거침 없는 양자샹의 의견을 듣고 난 후 몹시 기뻐하며 ‘일리 있어, 일리 있어. (有道理, 有道理)를 연발하며 한편으로 웃으며 한편으로 말했다.


“당신 분석이 내 생각과 딱 들어맞네, 우리 수도는 북평으로 정해야 할 것 같네. 장제스가 수도가 남경에 있는 까닭은 그의 기반이 절강의 자본가였기 때문이었다면 우리는 수도를 북평에 정하고 우리도 그 기반을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광범위한 노동인민대중일 될 것이다.”


1949년 3월 중순 마오쩌둥과 당 중앙은 북평으로 들어섰고 9월 21일부터 거행된 신중국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회 전체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평에 설치한다.’는 안건을 토의한 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일 정식으로 북평을 북경으로 개명했다.


<중국인이야기> 4편의 뒷부분 북한 이야기를 읽고 동북 지방을 다닐 때 기억을 하다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생각하다가 공연히 ‘수도’ 이야기만 잔뜩 푼 듯하다.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하얼빈의 성소피아 성당 광장의 야경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난징의 부자묘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카이펑의 청명상하원 모습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뤄양의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시안의 당장안성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마오쩌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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