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7]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②


▲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등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팽화상은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은 김용 소설의 무대를 성곽으로 만든 운남 대리의 '천룡팔부성'의 황제 출성식 장면. ⓒ 최종명


홍콩의 <명보(明报)> 잡지를 창간하고 낮에는 정치평론을 쓰고 밤에는 무협소설을 쓴 소설가 김용(金庸)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르는 애독자가 없을 정도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는 중국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중원의 6대문파인 소림사,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공동파, 화산파와 명교의 무공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무협 장편소설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에는 민란과 관련한 주목할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 주인공이자 명교의 교주가 되는 장무기를 비롯해 대부분 등장인물은 당연하게도 소설가의 창작이다. 무공이 상당한 수준인 다섯 명의 명교 교주 오산인(五散人)에는 스님 두 명이 포함돼 있는데 포대화상(布袋和尚)으로 등장하는 설부득(说不得)과 팽화상 팽영옥(彭莹玉)이다. 소설 주인공 중 완전 허구는 아닌 역사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팽영옥이다.


<의천도룡기>만큼 맹활약한 화상


팽영옥은 강서 원주(袁州, 현 의춘宜春) 출신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10세 때 인근에 있는 유명 사찰 자화사(慈化寺)에 들어가 스님이 됐다. 원나라의 잔혹한 통치가 계속돼 백성이 고통 받고 명절이 와도 쌀 한 톨 구경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행사에 겨우 의탁해 위안을 찾는 지경임을 느꼈던 팽영옥은 당시 백련교가 농민들 깊이 뿌리내리자 자신도 교도로 가입했다. 


시간이 흘러 지역 내 백련교의 수장에 오르고 비밀스레 반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의술에 뛰어났던 그는 명성을 듣고 사찰 부근으로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면서 법술도 뛰어나 '미륵이 강림하고 건곤(乾坤, 역경의 뒤 괘, 음양이나 천하를 뜻함)이 변화한다'는 교리를 선전하면서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신도가 수 천명에 이르게 됐고 일가를 이루거나 종파를 창립한 사람에게만 존칭하는 팽조사(彭祖师)로 불렸다.


팽영옥은 1338년 자신의 제자인 주자왕(周子旺)을 주왕(周王)으로 옹립하고 백련교도 5천 여 명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정교합일의 나라를 세웠다.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으나 곧 진압된 후 주자왕은 체포돼 살해됐다. 팽영옥은 제자 황천(况天)과 함께 교도들을 이끌고 회서(淮西, 안휘 서남부) 지방으로 도피해 포교를 지속했다. 신도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능력이 돋보이는 신도 중 리더로서 소질이 보일 경우 황천을 황보천(况普天)으로 개명한 것처럼 모두 가운데 이름에 '보(普)' 자를 넣어 '팽당(彭党)'을 결성했다.


<의천도룡기>에서도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우며 쉽게 살생을 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듯이 신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매우 조직적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신도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홍건군 민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많았으니 '사관학교'나 다름 없었다. 오죽하면 김용과 쌍벽을 이루는 무협작가 양우생(梁羽生)의 소설이자 드라마로도 유명한 <평종협영(萍踪侠影)> 속에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과 장사성이 모두 팽영옥의 제자로 등장할 정도다.


1348년 팽영옥은 황보천을 데리고 고향 원주로 잠입해 반원 활동을 재개하면서 인근 호남 유양(浏阳)과 강서 만재(万载)에서 적극적인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하지만 관군의 추적이 더욱더 극심해지자 부득이하게 도피해 멀리 호북 마성(麻城 )에 있던 제자 추보승(邹普胜)에게 의탁하게 됐다.


1351년 5월에 유복통이 홍건군 민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팽영옥은 8월에 추보승, 서수휘 등과 함께 호북 기주(蕲州, 현 기춘蕲春)에서 또다시 미륵 강림의 구호를 걸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곧바로 10월에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를 점령한 후 서수휘를 옹립해 국호를 천완(天完),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으며 관료사회에서 왕명 출납을 전담하는 중서성(中书省)의 기능을 두고 그 이름을 연대성(莲台省)이라 불렀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추밀원(枢密院) 및 6부 체제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홍건군 민란에 호응해 붉은 두건을 두르고 향군답게 향을 피우며 전투에 참여했으며 정보랑(丁普郎)처럼 '보' 자 이름의 추밀원 맹장을 여럿 임명하는 등 군사조직을 편재했다.


▲ 백련교 민란 주모자 팽영옥은 가슴과 등에 미륵이 보우한다는 기원을 담은 ‘불(佛)’ 자를 새긴 책을 품고 거병했다. 사진은 대웅전 앞에 '불'자가 또롯한 조벽을 세운 소주 태호의 석공사. ⓒ 최종명


남부 홍건군의 시조가 된 팽영옥은 호북과 강서 일대의 모든 현을 공략하며 지방 관료나 지주를 무참히 살해했는데 '성마다 불을 뿜으니 관리는 도처에 숨고 성에는 사람 하나 없고 홍군만이 윗자리에 앉았네'라는 민요가 유행할 정도였다. 1352년 팽영옥은 부하 장수인 이보승(李普胜)과 조보승(赵普胜)에게 안휘 무위(无为)와 함산含山)을 공략하도록 한 후 두 군대를 모아 장강을 건넜다. 이후 팽영옥이 안휘 일대를 지나 절강 항주를 점령하자 크게 놀란 원 조정이 토벌군을 보내자 항주에서 후퇴해 강소 일대를 공략하며 북상해 집경(集庆, 현 남경)에 이르렀다.


1353년 원나라 토벌군이 다시 추격하자 팽영옥은 군대를 이끌고 강서에 있던 황보천과 합세한 후 고향 근처 강서 서주(瑞州, 현 고안高安)를 점령했는데 성을 함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벌군에게 겹겹이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게 됐다. 팽영옥은 황보천과 함께 전력으로 방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돼 모두 학살당하니 남녀노소 모두 살아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의천도룡기>의 명교 교주이면서 무공 보유자이거나 양우생의 소설에서 '천하제일고수'이자 주원장과 장사성의 사부로 등장하는 팽화상은 실제로는 평생 민란을 꿈꾼 종교지도자였다. 당시 백련교 중심의 홍건군에게 백성들이 주목한 점은 배불리 먹고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염원을 실현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고 토벌군에 맞서 싸우고 승리하는 것만큼 백성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사교이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곧바로 자신의 정치적 자양분이던 명교를 배반하고 '사교'로 규정했던 것을 보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황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승화된 민란 주인공


▲ 백련교 민란으로 명옥진이 세운 대하의 수도는 중경이다.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 중경은 가릉강과 장강이 흐른다. 사진은 중경 도심과 장강 남단을 잇는 장강케이블카. ⓒ 최종명


남송 시대 공주(恭州)를 관장하던 효종(孝宗)의 셋째 아들 조돈(赵惇)은 1189년 1월 황태자로 지명돼 공왕(恭王)이 되자마자 2월에 선위를 받아 황제로 등극했으니 광종(光宗)이다. 연이어 이중 경사를 축하한다는 뜻의 쌍중희경(双重喜庆)으로 자랑할만한 일이라 했고 중경부(重庆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의 5대 직할시이자 서부대개발의 중심 도시 중경이다. 일부 기자조차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이 떠오른다는 무지한 농담을 하는 중경은 경사가 겹치듯 두 개의 강이 남북으로 나란히 흐르고 있다. 북쪽에는 가릉강(嘉陵江)이 흐르는데 옛날부터 유수(渝水)라 불렀기에 지금도 중경의 약칭을 '유(渝)'라 한다. 남쪽에는 중국의 젖줄 장강(长江)이 거쳐간다.


가릉강과 장강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대불사(大佛寺)에는 대웅보전, 관음전 등 흔히 볼 수 있는 전각 외에도 중국 어느 사원에서도 보기 힘든 오불전(五佛殿)이 있다. 높이 7미터, 너비 12미터 가량에 깊이 1미터의 불감에는 모두 다섯 분의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毗卢遮那佛), 왼편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불(释迦牟尼佛), 오른편에 보신(報身) 노사나불(卢舍那佛)이 봉공돼 있다. 만물을 자비할 듯한 손 모양인 비로자나불의 설법인(說法印)도 눈길을 끌지만 삼신불을 향해 봉공하듯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萨)과 보현보살(普贤菩萨)의 예사롭지 않은 모양을 자꾸 살펴보게 된다. 두 보살의 형상은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을 일으킨 서수휘와 명옥진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서수휘는 호북 라전(罗田) 출신으로 포목을 팔던 상인으로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비범했으며 정직한 성품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기에 평소에 사람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지니고 있던 백련교도였다. 1351년 8월 기주에서 팽영옥과 추보승이 중심이 된 홍건군 민란이 일어난 후 황제로 옹립됐다. 국호 천완(天完)은 대원(大元)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대(大)에 일(一)을 더했으며 원(元)에 갓머리 면(宀)으로 누른 것이다. 서수휘의 홍건군은 건국 후 '부자를 무너뜨리고 빈농에게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최부익빈(摧富益贫)을 구호로 했기에 수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삽시간에 수 십만 명의 군대로 발전했다.


서수휘는 초기에 호북 황강(黄冈)에 근거지를 두고 군대를 나누어 강서와 호남으로 진출했다. 홍건군은 기율이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는데 전쟁을 통해 성을 함락시켜도 함부로 살인하지 않았고 귀순하는 사람은 용서해주고 나머지도 괴롭히지 않았으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따르는 이가 백만 명에 육박했다. 1353년 원 조정의 토벌이 시작된 후 홍건군 근거지를 포위해오고 천완 정권의 핵심 지도자인 팽영옥이 전사하고 수도 방어 중 핵심 장수 4백여 명이 희생되자 호북 황매(黄梅)의 험준한 요새 나보원(挪步园)으로 후퇴한 후 군 조직을 정비했다.


이듬해 다시 반격에 나선 홍건군은 강서와 호남 일대를 진압했으며 사천과 섬서 일대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한양(汉阳)에 새로운 수도를 마련했다. 서수휘는 자신의 4대금강(四大金刚)이라 불리는 추보승, 예문준(倪文俊), 조보승, 부우덕(傅友德)과 초기부터 민란 동지이자 피를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1356년에 이르러 승상이던 예문준의 견제를 받아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게 됐다.


예문준은 어부 출신으로 민란에 참가해 대장군을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정치제도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주 서수휘의 지휘를 듣지 않고 사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은 원나라 왕자의 처를 자신의 첩으로 삼기도 해 인심도 잃고 명예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원나라 토벌군이 공격해오자 수치스럽게도 서수휘를 살해하고 투항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서수휘 살해 기도가 사전에 발각돼 도주했다가 자신의 부장 진우량(陈友谅)에 의해 피살됐다.


진우량은 호북 면양(沔阳, 현 홍호洪湖)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서수휘의 천완 정권이 탄생할 때 같은 어부 출신의 예문준 휘하로 참여했다가 역시 주군을 배신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1359년 서수휘는 강주로 천도했을 때 정권욕에 미혹돼 한왕(汉王)을 자칭한 진우량에 의해 서수휘의 심복 부장들이 차례로 살해 당하고 말았다. 1360년 서수휘는 유인작전을 펼친 진우량의 매복에 걸려 안휘 태평(太平, 현 당도当涂) 부근에서 머리에 철퇴를 맞고 즉사했다. 남방 지역 홍건군을 이끌며 기층농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서수휘의 운명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주검을 확인하자 부근 작은 사찰에서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汉), 연호를 대의(大义)라 선포한 후 환궁했다. 하늘도 대의라는 연호가 못마땅했던지 즉위 당일 폭풍우가 쏟아져 행사 진행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진우량의 배신과 악행에 분노한 명옥진(明玉珍)은 관계를 단절하고 중경 남쪽에 서수휘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사철 제사를 지냈으며 신위를 추존하고 묘호(庙号)를 세종(世宗)이라 썼다. 서수휘를 따르던 신하들 대부분 진우량의 등극을 치하하며 민란의 뜻을 망각하고 이전투구의 영토 싸움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명옥진만이 의리를 지키며 서수휘가 추구한 민란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명옥진은 호북 매구(梅丘, 현 수현随县)의 농민 출신으로 원말 민란이 광풍처럼 불어오자 고향 농민 천 여명을 이끌고 산채를 짓고 근거지 마련을 하던 중 1351년 서수휘의 민란이 일어나자 홍건군에 참여했다. 명옥진은 주로 서쪽으로 진군해 사천과 섬서 지역을 공략했는데 1357년에 이르러 중경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원나라 장수 하마투(哈麻秃)와의 전투 중에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아 애꾸눈 장군으로 통했다.


1361년에는 만승(万胜)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해 운남으로 진출, 원나라와 대리국 연합군과 전투를 벌리기도 했다. 부하장수들의 옹립을 받아들여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하(大夏)라 했으며 수도를 근거지 중경에 설치했다. 명옥진은 서수휘의 천완 정권을 본받아 중서성과 추밀원, 6부를 두는 관리제도를 도입했으며 한림원을 설치해 과거제도를 실시했으며 명교의 이념에 따라 선정을 베풀어 사회 안정을 이루고 생산 발전을 이루니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통치했다.


1363년 명옥진은 사신을 주원장에게 보내 친교를 맺자고 하니 주원장은 기뻐하며 '삼국시대 유비와 손권의 연맹처럼 서로 이해를 같이하는 순치(唇齿) 관계가 됐다'는 서신을 보내왔다고 <명사(明史)> '명옥진전'은 기록하고 있다. 선정을 베풀던 명옥진은 1366년 여름 신하들에게 '사천의 촉 땅을 고수하고 중원을 도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6세에 불과한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0세의 아들 명승(明升)이 뒤를 잇고 태후가 섭정을 했다.


1368년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후 친교의 약속을 배신하고 이듬해 사신을 보내 투항을 권고했지만 무조건 항복할 수는 없었다. 주원장이 대군을 보내 중경을 공략하니 중과부적으로 긴급히 성도(成都)로 도망갔는데 명옥진의 부인인 팽태후(彭太后)는 '촉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고 만약 출전하면 반드시 사상자가 속출할 것인데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항복해, 생명이 있는 자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는 것만 못하다'고 선언하며 투항했다. 


팽태후와 명승을 비롯 관속들은 모두 남경으로 끌려갔는데 주원장은 명승이 유약한 성품임을 알고 작위를 내려 관리했다. 1372년 주원장의 명령에 따라 팽태후와 명승 일행 수십 명은 수만 리 떨어진 고려(공민왕 시절) 황해도의 연안(延安)으로 유배나 다름 없는 이주를 하면서 중원 땅을 떠나게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 연안 명씨의 조상은 바로 명옥진이다.


중경 대불사 오불전에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사람 얼굴을 조각한 진용조상(真容雕像)이다. 사자 위에 앉아서 매부리코 형상을 한 문수보살은 천완 황제 서수휘이며 코끼리 위에 앉아서 외눈박이 형상을 한 보현보살은 대하 황제 명옥진이다. 대불사 전각은 명나라 영락(永乐)제 재위 때인 1421년 처음 건축된 것인데 고증에 따르면 홍건군의 후손인 이름 모를 장인(匠人)이 비밀리에 조각한 것으로 추측되며 2011년에 명옥진의 부하장수이자 개국원훈인 만승의 후예가 발견했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인물에 대한 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비록 돌 조각에 새겼어도 그냥 돌이 아닌 것이 역사이자 민란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 백년교 민란 주인공 명옥진은 요절했으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애초의 상호불가침 약속을 배신하고 항복한 명씨 일가를 체포 후 고려로 추방한다. 사진은 주원장의 묘원이 있는 남경의 효릉 입구. ⓒ 최종명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는 백련교를 동경했다?


백련교도이자 홍건군의 중심인물을 보면 농민이거나 소작농, 어부나 뱃사공, 의술이나 법술로 먹고 살았거나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치 <수호지>의 108 영웅들이 흉내 내고 있는 듯 모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며 기층인민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사형 사제로 묶어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나 지혜를 짜내어 전투를 하는 장면은 어쩐지 <삼국지>를 닮았으며 현장 법사를 중심으로 구법 여행을 다녀오는 <서유기>는 백련교나 명교의 지향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읽힌다.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대중들에게 널리 읽혔고 모두 오늘날 인기 절정의 고대소설은 대부분 백련교의 홍건군 민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위 촉 오로 나누어 의리와 술수가 난무하는 소설, 협객들의 반정부 투쟁을 그린 소설, 악마와 사악한 신에 맞서 미륵을 찾아 떠나는 소설 모두 어쩌면 권력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울분을 토하고 싶은 마음을 긁어주며 용기까지 주었던 소설임에 틀림없다. 세심하게 원나라 말기 민란을 살펴보면 왜 소설이 현실처럼 보이고 또 현실이 소설보다 더 지독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3대 소설을 만든 작가의 상상력은 작가만의 몫이 아닌 당시 백성들의 치열한 투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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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6] 원나라 말기 홍건군 백련교의 민란 ①


중국민란 역사에서 원, 명, 청 시대를 아우르는 코드는 피지배계급의 질곡을 줄기차게 담아낸 민간 종교결사 백련교(白莲教)를 주시해야 한다. 서기 4세기 동진 시대 강서 여산(庐山)의 동림사(东林寺)에서 발원한 대승불교 정토종(净土宗)의 한 계파로 남송 시대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백련종(白莲宗)이 민란의 염원을 담아내며 백련교로 발전했다.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아미타불을 숭상하고 '살생, 절도, 음란, 망언, 음주'를 행하지 않는 지계(持戒)를 염불해 서방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결사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모자원은 1069년 강소 곤산(昆山)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9세에 출가했다. 동림사에서 정토종을 창건한 혜원(慧远) 스님이 연못을 파고 백련을 심은 것에 유래한 종교집회인 백련사(白莲社)의 유풍을 흠모해 <백련신조참의(白莲晨朝忏仪)>를 편찬했으며 1131년 상해 서쪽 전산호(淀山湖)에 백련참당(白莲忏堂)을 세우고 혜원 스님이 제창한 백련사의 계승을 자임했다.


▲ 중국 대승불교 정토종은 강서 여산 동림사에서 발원했다. 여산은 남송 시대 백련종을 창립한 모자원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사진은 동림사가 있는 여산의 풍광 모습. ⓒ 최종명


그러나 백련종은 지계를 지키면서도 스님이 출가하지 않고 처자식을 두는 등 불교의 교리를 왜곡하고 세속적인 외도로 사교로 알려지면서 포교 금지령을 당했으며 모자원은 체포돼 강주(江州, 현 구강 九江)에 유배됐다. 모자원은 이후 비밀리에 포교하기 시작했으며 30년이 흐른 1166년에는 황제의 초청을 받아 정토법문을 강연하기도 했다. 명예를 회복하자마자 곧바로 원적(圆寂)했다.


모자원이 창건한 백련종은 미륵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이단으로 중국으로 들어온 명교까지 흡수하는 등 점차 정토종의 범주에서 벗어나 신흥종교인 백련교로 발전해갔다.


몽골족이 1234년 여진족 금을 멸망시켰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1271년 중원 지방에 원을 세운 후 남하해 송나라까지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강남 땅 임안을 수도로 했던 남송은 복건으로 도주 후 마지막 황제가 바다에 투신해 자살한 1279년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송의 멸망을 전후한 3년간 강서 북부 판양호(鄱阳湖)를 끼고 있는 도창(都昌)에서 역사상 최초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된 민란이 발생했다. 1277년부터 도창에서는 원나라의 침공에 항거한다는 명분으로 백련교도가 주동이 돼 '온 세상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민란을 일으켰다. <원사>에 따르면 그들을 따르는 농민이 수만에 달했으나 원 조정의 정토(征讨) 명령에 따라 주동자를 체포해 능지처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1780년 4월에는 백련교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두가용(杜可用)이 만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반원의 기치를 내걸고 천왕(天王)을 자칭했으며 만승(万乘)이란 연호까지 선포했다. 송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원에 이어 강남을 장악하고 통치하자 혼란기를 틈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분출구였던 것이다. 3년여 동안 민란 봉기를 일으키고 주모자가 살해되는 과정이 반복됐지만 백련종이 추구한 미래의 구세주 도래를 믿었던 도창의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힘을 결집했다.


두가용은 농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와 웅변으로 농민들을 결집시켰으나 대도(大都, 북경)에 수도를 정하고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한 원 세조 쿠빌라이는 크게 놀라 강력한 토벌을 진행했다. 9일간의 격전을 치렀으나 군사력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결국 두가용 등 핵심 주동자들이 체포돼 강서 용흥(龙兴, 현 남창南昌)으로 압송돼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혹형인 책사(磔死)를 당했다. <신원사(新元史)>는 '두가용이 만승 원년이라 허위로 사칭하니 복주(伏诛, 사형 집행)했다.'고 짤막하고 무미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 년을 이어 피지배계급 인민의 염원을 담아내고자 했거나 이용하고자 했던 백련교 최초의 민란이라는 평가는 굳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민란의 이상, 미륵의 구원


▲ 원나라 민란은 백련교도가 주도했다. 백련교나 명교 등은 백성의 염원과 미륵불의 구원 사상을 연결하는 지혜를 담았다. 사진은 중국 미륵불의 성지인 절강 설두사의 미륵대불. ⓒ 최종명


원나라가 중원을 통치한 후 이민족으로부터 학정을 당하고 있던 농민들은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자연스럽게 현실 세상을 뒤바꾸는 '구원'의 손길과 연결됐다. 1308년 원 무종(武宗)이 '처자식도 두고 이미 청정하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멸시와 함께 백련교를 금지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지만 석가모니의 후임이자 미래불인 미륵보살의 출현을 선포하면서 민란을 주모하는 백련교 결사조직의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에 기록된 불교 통사적 기록인 <석문정통(释门正统)>에서도 재가제자를 두거나 가내 불당을 두는 등 승속(僧俗)이 결합된 백련교를 우려해 '백의를 입고 포교를 오락가락하는 건 착오가 없을 수 없다.'고 기록했는데 산속이 아닌 속세에 있는 백련교가 점차 사교로 낙인 찍히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1312년 정토종의 본산인 동림사 보도(普度) 스님은 백련교의 복교를 도모하며 '미륵불이 태어났다.'거나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왔다.'며 공개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종교결사 모임인 백련교도가 하남, 강남, 장강 일대에 빠르게 퍼져나가자 1322년 원 영종(英宗)은 또다시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백련교를 전파하는 스님들은 민간에서 비밀리에 전해오던 미륵신앙인 미륵교, 화엄경을 경전으로 유, 불, 선 삼교귀일을 신봉하던 백운교, 중국에 들어온 마니교인 명교와 혼합되면서 점차 비밀종교조직으로 변모해갔다.


1315년 강서 간주(赣州)에서 채오구(蔡五九)는 논밭에 부과하는 세금 증세를 위한 조사에 맞서 봉기했으며 1321년 섬서 주지(周至)의 스님 원명(圆明)은 궐기해 황제를 칭했으며 산서 합양(郃阳)의 도사 유지선(刘志先)은 종교결사를 이끌고 봉기했다. 


1325년 하남의 식주(息州, 현 신양信阳)에서 '미륵불이 세상에 왔다.(弥勒佛当有天下)'는 구호를 내걸고 조추시(赵丑厮)와 곽보살(郭菩萨)이 민란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건이 발발했는데 그 기반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미래로의 기원으로 치환하려는 농민들의 바람이 깔려있었다.


1333년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즉위했는데 중앙의 통치질서는 무너지고 재정은 심각한 수준인 데다가 과중한 세금 부과에 따라 물가는 치솟고 하북, 하남 일대와 장강 하류에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이 1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흉년까지 겹쳤는데도 권신들의 독단과 조정의 무능은 곧 패망의 징조였다. 


1337년 1월 광동 귀선(归善, 현 혜주)의 주광경은 민란을 일으킨 후 석가모니에게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 정광불(定光佛)을 갑옷에 붙이고 무기를 들고 증성(增城)을 점령한 후 연호를 적부(赤符)라 하고 대금(大金)을 세우고 7개월 동안 토벌군과 맞서 싸웠다.


2월에는 하남 진주(陈州, 현 회양淮阳)에서 어릴 때부터 노자의 태자라고 믿으며 예닐곱 자나 되는 봉을 신출귀몰, 자유자재로 휘둘러 봉호(棒胡)라는 별명을 지닌 호윤아(胡闰儿)가 등장해 미륵불 강생을 주장하며 백련교도를 규합했다. 결사조직을 군대조직으로 개편한 후 녹읍(鹿邑)을 돌파해 진주성을 불바다로 만든 다음 둔병 근거지를 설치해 장기전에 돌입하니 주변 지역의 농민들도 호응했는데 이듬해 4월 토벌군에 참패 후 포로가 됐으며 대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천성이 총명해 깨달음이 뛰어났으며 의술과 점복에 탁월했던 한유(韓蕤)는 한법사(韓法師)라는 별칭으로 1325년 하남 정주(郑州) 일대에서 백련교를 창건, 원말 백련교의 비조로 손꼽힌다. 한법사는 1336년 사천 대족(大足)에서 교도들을 결집한 후 원나라 반대를 천명하고 여러 곳을 섭렵하다가 마침내 중경(重庆)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자 1337년 4월 조왕(赵王)을 자칭하며 송나라를 회복했다. 민란을 일으킨 한법사는 중경 주변 7개 현을 장악해 원 조정을 충격에 빠트렸지만,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체포된 후 살해됐다.


백련교 형성과 함께 훗날 홍건군 민란의 좌표가 된 한법사는 당시 불교사원에서 군중이 모일 수 있는 합법적인 영역을 이용했으며 명교에 상당히 경도돼 있었다. 백련교와 명교의 교리는 미륵을 숭상한다는 측면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당시 통치계급에게 '마교'로 알려진 명교의 교주였기에 백련교의 엄호를 받아 은폐했던 것이며 반원복송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도 연합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월(日月)을 숭상하고 광명의 신을 존경하는 마니교와도 일맥상통하게 되는데 모든 교도가 백색을 입고 채식을 하며 음주를 끊고 매장하는 교리나 화목하게 한 가족처럼 서로 돕는 생활 풍습을 지니게 된 것도 당시 기층 농민의 염원과 잇닿아 있었으며 광명의 세력이 힘을 합쳐 암흑세계를 반드시 물리친다는 실천적인 마인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원나라 말기 홍건군 민란의 중심에서 힘을 기른 주원장 역시 명교의 교도로서 국호를 '명'이라 한 것도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민중적' 사상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기층 농민의 결사체로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던 주원장은 백련교 등을 금지시킨 것도 당시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들불처럼 홍건군 민란을 시작하다


외눈박이 석인이 나타나면, 황하가 요동치고 천하가 뒤집힌다. (石人一只眼,挑动黄河天下反)


1351년 원 순제의 조정은 15만 명에 이르는 백성에게 황하의 제방을 쌓는 일에 동원령을 내렸다. 조정의 기강은 부패했고 세금 가중은 극심했으며 게다가 끊임없이 재해가 발생하는 마당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도처에 원성이 자자해지자 기층 농민들의 기원을 한몸에 받고 있는 백련교 지도자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미륵의 강림과 명왕의 출현'을 선전하며 민란을 준비하며 황하와 가까운 지역인 안휘 영주(颍州, 현 부양阜阳)에 살던 유복통(刘福通)은 한산동(韩山童), 두존도(杜遵道) 등과 거사를 도모했다. 한법사의 민란을 눈여겨 봤던 유복통은 '불만'과 '염원' 외에도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다. 유복통은 동지들과 함께 '외눈박이' 민요를 만들어 널리 퍼트렸으며 석인 등에 '천하가 뒤집힌다.'는 가사를 새긴 후 황하의 요도인 황릉강(黄陵冈, 현 조현曹县) 강변에 매장했는데 곧 사람들이 캐내자 민심이 급속도로 동요했다. 유복통 등은 백련교도의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며 광범위하게 농민들의 참여를 도모했던 것이다.


유복통은 집안이 부유했으며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했으며 어릴 때 백련교에 가입해 영주의 교주 중 한 명이었으며 잠시 지방 관리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1351년 4월 유복통은 하북 영년(永年)에서 난성(栾城) 현 출신의 농민이자 백련교도인 한산동을 송 휘종의 8대손으로 추대하고 민란을 결의했다. 뜻밖에 비밀리에 집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누설돼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천국에서 강림한 명왕이자 송 황실의 후예를 자임했던 한산동이 체포돼 곧바로 살해됐다.


유복통은 고향 영주로 돌아가서 5월에 드디어 안휘 영상(颍上, 현 대관代管)에서 봉기하고 신속하게 영주 성을 점령했다. <명사>에 따르면 '백마와 흑우를 죽여 천지에 경고하고 군사를 모아 도모해 홍건(红巾)의 깃발을 들었다.'고 기록했으니 홍건군 민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머리에 홍건을 두르고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새로운 왕조를 지향하고 있었다.


유복통의 홍건군은 영주를 점령한 후 하남 남부 지방으로 진격해 수많은 현을 돌파했으며 9월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여녕부(汝宁府)와 광주(光州, 현 황천潢川), 식주(息州, 현 식현息县)를 장악하니 10만 명의 군사력으로 확충됐다. 가는 곳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며 빈농을 구휼했으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사기가 충천한 홍건군은 1352년 원나라 30만 명의 토벌군을 물리치는 등 연승했다. 원나라 군사와 결탁한 지주 이사제(李思齐)가 배후에서 기습을 해오자 안휘 박주(亳州)로 후퇴하기도 했다. 유복통은 안휘 성으로 진입한 후 관군을 연달아 돌파한 후 려주(庐州, 현 합비合肥)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1355년에 이르러 박주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韩林儿)를 영접해 '소명왕'으로 옹립했으며 국호를 대송(大宋), 연호를 용봉(龙凤)이라 했으니 역사에서는 한송(韩宋)이라 부르고 있다. 홍건군의 건국은 전국을 동요하기에 충분했고 각 지역에서 호응했는데 호북 기수(蕲水, 현 희수浠水)의 서수휘(徐寿辉), 안휘 소현(萧县)의 이이(李二), 하남 남양(南阳)의 포왕삼(布王三), 호북 형번(荆樊, 현 양번襄樊)의 맹해마(孟海马), 안휘 호주(濠州, 현 봉양凤阳)의 곽자흥(郭子兴) 등이 민란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다.


▲ 백련교도 유복통은 민란을 일으키고 수도를 개봉으로 하는 대송을 건국했다. 사진은 개봉부. ⓒ 최종명


1357년 유복통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군했는데 동로군은 모귀(毛贵)가 이끌고 산동과 하북을 거쳐 수도 대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후 제남으로 후퇴했다. 중로군은 관탁(关铎)과 반성(潘诚)이 이끌고 산서와 하북 일대, 대동을 경유해 원의 상도(上都, 현 내몽고 다윤多伦) 황궁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였고 1359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고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서로군은 백불신(白不信), 이희희(李喜喜)가 이끌고 관중(关中)을 공략했으며 사천, 감숙, 영하 지역을 공격했다.


대군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군시킨 후 유복통도 1358년 5월 북송의 수도 변량(汴梁, 현 개봉)을 향해 진격해 한송의 도성으로 삼았다. 이때의 홍건군을 일러 정인지(郑麟趾)는 <고려사> '공민왕세가'에서 '동쪽으로 제나라와 노나라, 서쪽으로 함곡관 넘어 진나라, 남쪽으로 복건과 광동, 북쪽으로 유주와 연주에 다다랐다.'고 했으니 세력이 가장 절정일 때였다.


원 조정은 마치 화로 속에 떨어진 개미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파견한 군대가 연이어 패배해 군수물자가 거의 남아나지 않았음에도 지주들의 사병까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승부수를 던지는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건군은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작전을 벌인 것에 더해 탄탄한 근거지 구축을 하지 않았으며 세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점령했던 지역을 잃곤 했다. 북벌을 나선 삼로군도 서로 고립돼 개별 작전을 수행하면서 차츰 패전이 잇따르자 형세가 역전될 조짐이 보였다.


1359년 8월에 차칸테무르와 폴로테무르가 통솔하는 원나라 대군이 변량을 공격해 성곽이 무너질 조짐이 보이자 유복통은 한림아를 호위해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안휘 안풍(安丰, 현 수현寿县)까지 달아난 후 후일을 도모했다.


4년이 지나자 각 지역에서 발발한 민란군의 판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강소 고우(高邮)에서 대주(大周)를 건국한 사염업자 장사성(张士诚)이 안풍을 공격해왔다. 1363년 2월 장사성의 선봉장 여진(吕珍)이 기습하자 전투 중에 유복통은 전사하고 한림아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주원장(朱元璋)의 도움을 받아 남경 서북부 저주(滁州)에 은거했다가 익사로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이 둘의 죽음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데 전투 중에 둘 다 전사했다고도 하고 둘 모두 주원장에 의해 보호 받다가 살해됐다고도 한다.


붉은 두건을 두르고 전쟁터를 주름잡던 유복통의 홍건군은 피비린내보다 더 진한 분향(焚香)을 뿜어 향군(香军)이라 불리며 원나라 말기 무려 13년 동안 전국을 섭렵했다. 비록 백련교의 이념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원나라의 숨통을 죄며 관료사회와 지주계급에 경종을 울리며 기층 농민의 마음 속에 커다란 희망이던 세월이었다.


▲ 유복통의 백련교 홍건군은 진한 분향을 뿜어 향군이라 불렸다. 사진은 1주일이나 향기를 내며 타는 향으로 북경 외곽 담자사.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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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5] 양산박 송강과 방랍 민란의 송나라 ②


▲ 신중국 초대 문화 부총리 곽말약, 송나라 민란 방랍을 기념해 그가 사망한 동굴에 기념 친필을 썼다. 사진은 곽말약의 친필인 자금성 후문 '고궁박물원' ⓒ 최종명


북경 십찰해(什刹海) 부근 후통 골목에 곽말약기념관을 가면 문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엄청난 저작을 남기고 간 그의 공적에 감탄한다. <시경>, <서경>, <역경>에 두루 능통하고 시, 소설과 희곡 작품은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탁월해 번역서도 많다. 중국 최초의 유물사관에 따라 집필한 <중국고대사회연구>나 <갑골문자연구>, <중국사고> 등은 그의 천재적 지식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자인 곽말약(郭沫若)은 1949년 신중국 정부에서 중화전국문확예술회 주석으로 선임됐으며 중국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를 역임해 '중국은행(中国银行)', 자금성 후문 신무문에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을 비롯해 수많은 필적을 남기기도 했다. 곽말약은 1964년 항주와 황산 사이 순안(淳安) 현에 있는 동굴을 위해 친필 3글자를 썼으니 바로 '방랍동(方腊洞)'이다.


방랍은 청계(青溪, 현 절강 순안淳安) 사람으로 원래 옻을 재배하는 칠원(漆园) 집안 출신이지만 소작 머슴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호탕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며 생활이 매우 어려운 농민을 잘 돌봐주던 성품이었다. 송 휘종 시대 '육적'의 횡포와 강남 지방의 공예품이나 기암괴석은 물론이고 특산물을 대량으로 운송하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고 동원하고 있었다.


1120년 10월 방랍은 민란을 일으키며 선포한 결의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오늘날 가렴주구가 심각하고 가무나 즐기며 개나 말, 토목까지 동원해 사당 짓기에 여념이 없고 병사들은 화석을 운송하는데 낭비하고 뇌물에 여념이 없으니 곧 우리 동남 지방의 순박한 백성의 고혈이구나.'라고 하며 하늘의 부첩(符牒)을 받아 일어섰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는 북송 시대 관리이자 의사였다고 전해지는 방작(方勺)이 고향 이름을 따 편찬한 <박택편(泊宅编)>에 고스란히 기록된 말로 이어지는 말은 현장 중계를 하듯 생생하면서도 명쾌한 웅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농민은 오로지 늙어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해도 처자식은 늘 춥고 굶주리니 단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찌해야 하는가? 独吾民终岁勤动,妻子冻馁,求一日饱食不可得,诸君以为何如?


청계의 농민은 소문을 듣고 순식간에 만여 명이 호응했으며 방랍을 '성공(圣公)'이라 추대했다. 송 휘종은 강남 자원을 중원으로 운송하는 화석강(花石纲)을 일시 중지하고 '육적' 권신인 동관(童贯)을 강절선무사(江浙宣抚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선 방랍 민란군은 11월에 이르러 청계 현 서쪽 지역에 상주하고 있던 관군 5천 명을 섬멸한 후 청계 현을 공략했으며 현위 등 관리들을 생포했다. 이어 목주(睦州, 현 항주 서남부)를 공략하고 섭주(歙州, 현 안휘 황산 일대)로 남하했다가 곧바로 당시 화석강 지휘를 총괄하던 항주로 공격 목표를 정하고 진격했다.


▲ 송나라 시대에는 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을 중원으로 이동하는 화석강이 모순의 결정체이었다. 사진은 지금도 물류수단으로 활용 중인 강소 성 상주의 경항운하. ⓒ 최종명


방랍의 민란 소식을 듣자 남쪽 처주(处州, 현 절강 여수丽水)의 농민을 비롯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항배상망(项背相望)하듯 전투에 참여했으며 구주(衢州)의 마니교(摩尼教) 조직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에 의해 탄생했으며 비교적 체계적인 우주론에 입각해 인간의 운명을 조율하는 종교적 구원으로 3세기에서 7세기에 융성했으며 경전의 세계적 번역에 따라 위구르어와 중국어로 번역돼 전해졌고 위구르민족의 국교로 성장하기도 했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혼란하던 당 대종(代宗) 시기 중국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16대 무종(武宗)에 이르러 종교 활동이 금지됐다. 이후 비밀리에 전파되던 마니교 조직은 14세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받던 농민의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보통 명교(明教)라고도 부르는데 김용 무협소설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조직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명교 조직이 처음으로 민란에 참여한 것은 오대의 후량 시대 920년 진주(陈州, 현 하남 회양淮阳)에서 봉기한 모을(母乙) 민란으로 알려져 있다.


방랍을 주모자로 한 민란군은 바야흐로 강소, 절강, 안휘, 강서 일대의 6주, 52현을 일시에 평정해 권력을 틀어쥐니 송나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도 남았다. 드디어 승승장구하며 항주를 점령해 고위 관리들의 수급을 거두는 한편 당시 전국적인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채경(蔡京)의 조상 무덤을 도굴해 해골을 부관참시하고 백성의 원성을 어루만지니 민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때 한 태학생(太学生)이 천하를 군림할 자리에 오를 계책이라며 먼저 강녕부(江宁府, 현 남경)로 진공해 장강의 요새를 점령한 후 관군의 도강을 저지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다. 방랍은 '천하가 부패해 백성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나선 것이지 천하를 주무를 수 없다'며 어쩌면 '천자'를 위한 전략적 방향이었을지 모를 건의를 듣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언제 어디로 군사를 움직일지에 대한 전략의 선택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순간의 선택이란 늘 어려운 것인가 보다.


방랍이 항주 서남부 무주(婺州)와 구주로 군사를 이동하자 토벌군도 동관(童贯)과 담진(谭稹)을 대장으로 15만의 수륙 양군을 동서로 나누어 항주와 섭주로 진격해 왔다. 1121년 1월에 방랍은 북상을 결정하고 오른팔 대장군인 방칠불(方七佛)을 파견해 숭덕(崇德) 현을 함락시키고 항주 동북부에 위치한 수주(秀州, 현 가흥嘉兴)를 지나 후주(湖州)로 진격해 왕품(王禀)이 이끄는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참패해 항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식량 보급이 단절되자 항주를 버리고 후퇴했다가 3월에 이르러 다시 항주를 공격해 성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왕품 군대에게 참패했다.


항주를 잃은 후 국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유진(刘镇)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섭주를 점령 당하는 등 차곡차곡 주변 현들을 내줬으며 4월에는 구주의 마니교 교주 정마왕(郑魔王)이 생포됐다. 거듭 승리하던 민란군은 점점 거듭 패배하고 말았으며 방랍은 후퇴를 거듭해 결국 최초의 근거지 청계 현으로 돌아왔다. 이때에도 방랍의 군사는 20만 명에 육박했으나 전투력은 크게 떨어져 관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후에는 방원동(帮源洞)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1121년 4월 토벌군이 방원동을 포위했으나 방랍의 군사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혜의 동굴 속에 숨어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을 엄호하는 비장(裨将)에 불과하던 한세충(韩世忠)이 동굴의 침투경로를 찾아내 방랍이 숨은 곳을 찾아내 수천 명을 격살하고 민란 주모자들을 생포했으며 동굴 속에서 반항하던 7만 명의 군사를 살해했다고 하니 그 참혹을 연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방랍 등 주모자급 52명은 수도 변경(汴京, 현 개봉开封)으로 압송돼 8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민란의 주모자이자 영수가 사망했으나 도주했거나 남았던 이들은 절강성 곳곳에서 1년여를 더 항쟁을 벌였다. 비록 장기적인 민란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남 일대를 섭렵했으니 <송사>에서도 방랍 열전을 따로 둘 만했다.


천 년이 지나도 씻기지 않을 22m 깊이의 방원동은 방랍동이라 개명됐으며 피비린내를 안타까워 한 것인지 방랍이 품었던 민란의 뜻에 공감한 것인지는 몰라도 흔쾌히 써 내린 곽말약의 '방랍동'은 아담한 비석이 되어 동굴을 지키고 서 있다.


여진족 금나라는 북송을 남쪽으로 쫓아내다


방랍과 양산박 민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송나라는 여진족 금과의 동맹을 맺어 거란족 요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강력한 여진족을 중원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여진족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요를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아내더니 1126년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해 화의가 성립됐다. 송 조정은 어설프게 내부교란을 획책하다가 나라를 잃었고 태상황 휘종과 흠종을 비롯 3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당하고 말았다.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赵构)가 응천부(应天府) 상구(商丘)에서 왕조를 복원했다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자 장강을 넘어 임안(临安, 현 항주)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 불렀다.


여진족이 남하해 중원을 점령하자 송 조정의 탐관부패 정권의 수탈 못지 않게 농민들의 고충은 커져갔다. 민란의 성격에 민족항쟁의 기치를 올린 항금 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1127년 장령이던 왕언(王彦)은 태행산 太行山에서 농민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하남과 섬서, 사천 지방으로 이동하며 항금 민란을 주도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금나라 도적 살해를 맹세한다(赤心报国,誓杀金贼)'는 8글자를 새겼기에 팔자군(八字军)의 항금 민란이라고 불렸다. 소흥(邵兴, 현 산서 운청运城)에서도 농민들은 군영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침공으로부터 스스로 운명을 보호하고 나서는 등 중원 곳곳은 민중 항거와 민족 항쟁이 결합된 민란이 발생했다.


항금 민란은 당시 사회 저변에 광범위하게 조직돼 있던 명교, 미륵교, 백련교 등 종교집단의 항거를 촉발하기도 했다. 1127년 그들은 산서와 하북 일대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붉은 두건을 쓰고 등장해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렸는데 이후 13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조직적인 항거로 발전했다.


불 난 틈에 도적질 하다니... 평등의 나라를 만들자


▲ 송나라 시대 동정호에서 민란을 일으킨 종상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사진은 상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상구고성. ⓒ 최종명


동정호(洞庭湖) 서쪽 정주(鼎州, 현 호남 상덕常德)의 소상인인 종상(钟相)은 마니교의 종교이념을 신봉했으며 왕소파의 '균빈부' 사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다. 송나라가 정강지변으로 멸망하자 종상과 장자 종자앙(钟子昂)은 보국 충심의 마음으로 300여 명의 민병을 조직해 응천부应天府(현 하남 상구)로 달려갔다. 종상 부자는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 종상 부자는 금에 대항하기 위한 물자보급을 위해 농민수탈, 세금 과중으로 이중의 재난에 직면하자 천하가 이미 대란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오를 결성하고 기치를 내걸고 갑옷을 중시하는 것은 곧 민란의 뜻이 있다.'고 민병대원들에게 설파했다.


금나라 군사에 대패한 후 후퇴한 장군 공언주(孔彦舟)가 불 난 틈을 노려 도적질 하는 진화타겁(趁火打劫)하듯 최량핍조(催粮逼租)하니 동정호 주변 농민은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1130년 초 현물을 독촉하고 세금을 강요하는 현실이 예사롭지 않게 흐르자 종상은 '법이 귀천과 빈부를 나누면 그것은 좋은 법이 아니며, 내가 행하는 법은 귀천을 평등하게 하고 빈부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다.'는 생각을 웅변한 후 농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고 공언주 군대에 대항해 소요를 이끌었다. 종교적 메시지와 강력한 지도력을 함축한 천대성(天大圣)이란 존칭을 자칭한 종상은 자신이 제창한 '법(法)'을 따르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나자 성곽을 점령하고 관청을 불태웠으며 부호를 습격했다. 불과 1개월 만에 종상의 민란은 동정호 주변 19개 현을 점령할 정도로 파급이 컸다. 종상은 '평등한 법'을 기치로 내걸고 초나라 정권을 세웠으며 왕의 자리에 올랐다.


송 조정은 기겁을 해 공언주에게 민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공언주가 정면공격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빈민으로 위장한 간첩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호응하라고 지시한 후 급습해 오자 민란 군대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종상과 가족은 체포돼 목숨을 잃었으며 종자앙은 도주했다.


그렇게 끝날 것 같던 민란은 다시 양요(杨么)가 수령이 된 후 계속해서 관군과 격전을 이어갔다. 양요는 원래 이름이 양태(杨太)인데 젊고 혈기가 넘쳤기에 초나라 지방 사투리로 '유소(幼小)'라는 뜻으로 '요(么)'라고 불렸다. 양요는 동정호 부근에 병영을 설치하는 한편 동정호 곳곳의 물길이 이어지는 요지마다 벌목을 해 선박을 구축한 후 평시에는 농사나 어획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기전에 돌입하니 민란의 대오는 갈수록 늘어났다.


6월이 되자 송 조정이 다시 정창우(程昌寓)를 대장으로 토벌군을 보냈다. 정주에 도착한 토벌군도 천 여명을 실을 수 있으며 선원이 발을 굴려 이동하는 대형 선박을 건조해 민란의 병영으로 진격해 토벌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병영은 수심이 얕았기에 모래사장에 빠져 오고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민란 군대가 재빨리 공격해 오자 토벌군은 선박을 버리고 도주했다. 양요는 확실하게 동정호에 민란 근거지를 확보했으며 민란에 참여한 농민이 20만 명에 육박했으며 점령지도 점점 늘어나는 형세였다. 1133년 양요는 종상의 아들 종자의(钟子仪)를 태자로 삼고 자신은 대승천왕(大圣天王)이라 호칭했으며 모든 노역과 세금을 면제할 것을 선포하니 백성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11월에 이르러 송 왕조의 요충지에서 거듭 확대일로에 있는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왕섭(王躞)을 대장으로 한 6만 명의 토벌군이 진격해 왔다. 민란 함선에서는 단단한 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마치 까마귀 입처럼 생긴 목노아(木老鸦)라 불리는 무기를 만들어 토벌군의 선박을 공격해 반파시켰다. 또한 선박에 깃발을 내리고 탈취한 인장을 찍은 항복 문서를 달고 흰 옷을 입은 채 피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섭이 지휘하는 본선으로 다가가 거짓 항복하는 담대한 계략을 쓰자 토벌군은 대패하고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동정호 호반의 지형을 이용한 전술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때 송나라를 배반하고 금나라 괴뢰 정권인 제나라를 세운 유예(刘豫)가 관원을 파견해 합공으로 송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양요는 거절했다. 얼마 후 다시 공식 녹봉 문서와 함께 금대(金带)와 금포(锦袍)를 들고 투항을 권고하러 찾아왔으나 만찬을 베풀어 술을 먹인 후 모두 살해해 버렸다. 송이나 금의 포위와 토벌, 투항 권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종상이 민란을 일으킨 지 6년째가 되는 1135년 2월 송 조정은 당시 4대 명장으로 꼽히는 두 장군을 모두 투입할 정도로 다급했는데 항금 전쟁의 와중에 병마도독(兵马都督) 장준(张俊)과 치제사(置制使) 악비(岳飞)를 대장으로 20만 명의 병력이나 동원했다. 동정호를 포위 당하니 민란 병영도 긴장이 고조됐으며 5월에는 호수 전체와 요소요소의 나루터를 모두 통제한 후 맹장으로 잘 알려진 악비가 선봉에 선 토벌군 대부대가 병영을 향해 진격하며 투항을 권유하니 양흠(杨钦)을 비롯한 장수들이 잇달아 항복하기 시작했으며 양요는 동정호 호반의 병영을 고수하며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정호의 수심과 지형에 어두웠던 악비는 투항한 양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수문을 열어 호수의 물을 배출하고 커다란 뗏목으로 곳곳의 물길을 막은 후 호반에 광범위하게 청초(青草)를 뿌렸다. 그런 다음 양흠의 인솔로 양요의 병영을 향해 진격했다. 동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양요는 수군을 직접 인솔해 출전했는데 갑자기 수심이 얕아진데다 함선의 동력장치인 바퀴에 풀들이 엉켜 붙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양요는 희생돼 허망하게 농민정권은 무너졌지만 부하장수들에 의해 유지된 병영들은 1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 종상과 양요의 민란으로 6년 이상 동정호 일대는 긴장이 고조됐다. 송나라 조정은 악비를 비롯한 정규군 장군을 총동원했다. 사진은 동정호를 끼고 있는 악양에서 맛본 지역특산물. ⓒ 최종명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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