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 너무 간략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6> 강서 휘주문화 우위엔 ④ 샤오치와 리컹


밤 새워 험난한 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를 천강포효()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 황소() 민란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왕만오(汪萬五) 일가는 휘주부에서 장장 400리를 피난 내려왔다.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풀과 꽃이 만발한 들판이자 비옥한 땅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짐을 풀었다. 9세기부터 정착했으니 그 어떤 천년고진 부럽지 않은 세월을 지녔다. ‘동이 트는 땅샤오치(), 양생하(養生河)가 흘러 샤오촨(曉川)이라고도 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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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만큼이나 4권 <중국인이야기>를 읽으면 중국 방방곡곡을 땀내 닦으며 걷던 기억들로 설렌다. 장쉐량张学良의 고향 션양沈阳의 장솨이푸张帅府와 ‘시안西安사변’의 총탄 자국, 그의 첫 연금 현장이자 장제스蒋介石의 고향 시커우溪口의 미륵보살 성지, 대장정의 종착지 옌안延安의 동굴 집 야오둥窑洞, 베이징 마올후퉁帽儿胡同에 있는 마지막 황후 완룽婉容의 고거,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창춘长春 위만황궁伪满皇宫 박물관, 동북항일연군의 만주벌판까지. 옴니버스로 엮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책 속에 담긴 ‘중국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넘어갈수록 그들이 밟고 있던 ‘역사’ 속으로 물밀 듯이 나가고 싶어진다. 나의 중국문화답사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장쉐량과 푸이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이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쑹메이링宋美龄과 장쉐량의 인연은 1부 ‘풀리지 않는 삼각관계’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들의 정분이 ‘만리장성’을 쌓을 정도로 깊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시안사변 이후 53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안사변 1937년 한 달 후 황푸군관학교 출신 국민당 특무 다이리戴笠의 호송을 따라 ‘제일유금지第一幽禁地’ 쉐더우산雪窦山에 온 장쉐량은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낙차 171m의 천장암千丈岩 폭포를 즐겨 찾았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장쉐량과 감정이입을 하노라면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권력핵심의 정치인이 토해냈을 사자후獅子吼가 들리는 듯도 하다.


쉐더우산에는 늠름한 청년 장군 장쉐량 조각상과 함께 연금생활 도중 단 3일도 곁을 떠난 일 없던 자오이디赵一荻 여사의 백옥 같은 조각상도 자리를 잡고 있다. 1960년대 쑹메이링은 해금을 도울 목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한다. 처와 첩을 둔 장쉐량은 일부일처 제도와 해금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미국에 있는 본처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본처 위펑즈于凤至는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순수한 사랑을 믿으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이혼에 동의한다. 장쉐량은 기독교에 귀의했지만, 장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아들이자 총통이 된 장징궈蒋经国에게 ‘절대 불가’를 유언하기도 했다. 72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았던 자오이디는 2000년, 장쉐량은 103세의 나이로 2001년 나란히 숨을 거두고 합장 됐다. 장쉐량을 평생 살펴준 쑹메이링도 2003년 천수를 누리고 그들 곁으로 떠났다.


그림1 쉐더우산 연금 장소에 있는 장쉐량과 자오이디 조각상


장쉐량만큼 삶의 우여곡절이 깊던 인물은 마지막 황제 푸이다. 3부 ‘무너지는 제국’에서 비록 수감 중이긴 했지만, 자신의 네 번째 부인 리위친李玉琴에 의해 이혼당하는 황제라는 오명을 얻는다. 진시황 이래 어느 황제도 이혼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여전히 황제 대우를 받던 시기에도 푸이는 이혼당한 전례가 있다. 황후와 황비를 동시에 얻어 결혼한 푸이는 퇴위 후 1931년 8월 ‘마지막 황비’ 원슈文绣로부터 이혼선언을 당한다. 이를 역사에서 ‘도비혁명刀妃革命’이라 부르는데 황제 푸이의 엄청난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혼에 이르게 된 까닭을 황후 완룽의 시기와 질투 때문으로 여긴 푸이는 크게 상심했다. 완룽은 허울뿐인 황후로 전락했고 우울증에 시달려 아편에 집착했으며 시위와의 불륜으로 임신까지 했으니 황실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푸이는 만주족 출신의 탄위링谭玉龄과 결혼해 그녀의 사진 뒷면에 ‘내가 가장 사랑한 위링’이라 손수 쓸 정도로 다정했지만 5년 만에 의문의 병사를 했다. 그리고 책에서 자세히 언급한 리위친과 결혼하게 되지만 1957년에 다시 이혼 소송으로 둘 사이의 관계도 끝나고 만다.


창춘의 위만황궁박물관에는 <황제에서 평민까지>라는 푸이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있다. 그의 일생을 화려했지만 불우했고, 처량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말년을 보낸다. 체포 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지만 15년의 수감 생활 후 수많은 반성과 신중국 지지 선언을 거쳐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후 마지막 부인 리수센李淑贤과 결혼한다. 


둘 사이는 아주 금슬이 좋았지만, 푸이는 문화혁명 초기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1967년에 결국 신장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사망 후 유해는 베이징 인근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다가 1995년 청나라 서쪽 황릉 부근 사설 묘원인 화룽华龙능원에 이장된다. 3살에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난 황제라는 숙명 때문이었으니 청나라 황실 능원인 동릉과 서릉 어디에도 안치되지 못했다. 


그림2 위만황궁박물관에서 본 황제 즉위 시절과 수감 후 재판 장면


마지막 황릉은 선통제 푸이가 아닌 광서제의 몫이다. 청나라는 재정문제로 갈수록 황릉의 규모가 축소됐는데도 광서제의 숭릉은 화려하고 거대하다. 숭릉에 서면 푸이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숭릉 뒤쪽 200m 지점에 잠들어 있는 푸이야말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20세기 <중국인이야기>의 한 장면이니 말이다.


김명호 저자의 <중국인이야기>를 4편까지 읽으면서 늘 ‘중국문화여행’의 발품을 떠나고 싶었다. 중국판 ‘아라비안나이트’는 밤을 새워 읽어야 하듯 우리는 ‘중국’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살피듯 정치와 경제도 제대로 파악하는 길만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나라와 선의의 경쟁과 우호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신드바드’가 모험을 떠났음직한 항구 과다르Gwadar는 중국이 40년 운영권을 보유했다. 국제정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일대일로一帶一路, 신실크로드로 질주하는 중국을 이해하는 코드로 <중국인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중국’ 붐을 일으켜서 바르게 ‘중국인’을 읽어야 한다. 천일야화보다 더 기나긴 ‘차이니즈 나이트’가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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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병마용>을 탐구한 한 중국인의 발길을 따라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렘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가 2005년 11월 중국 언론에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기사는 진경원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진경원씨의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세계적인 뉴스가 되겠지만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며 중국 학계 역시 진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다.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에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이 발견된 후 그 장소가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점에 진씨는 최초의 의문을 품었다.

서안역에서 동쪽으로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가면 임동현에 도착한다. 여기서 진시황릉을 지나자마자 곧 '병마용' 박물관이 나타난다. 진시황 동상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시황의 동상은 3년 전 산동성 영성시에 있는, 신하 2명과 함께 서 있는 동상 모습과 유사하다. 영성시의 동상은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자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가장 동쪽 땅인 영성에 이르러 세운 것으로 후대에 이를 관광상품화했을 터이다. 하여간, 진씨의 주장에 따르면 '병마용'은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 방향에 있다.

▲ 진시황의 병마용임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동상
ⓒ 최종명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답게 주변 조경은 아주 청결하고 푸르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90위엔(약 1만2천원)이어서 놀랐다. 나중에 한 중국인에게 입장료가 비싸다고 투덜거렸으나 '병마용'의 역사적 의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핀잔을 먹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영웅'에 대한 자부심만 기억하면서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법치주의 아래 희생된 수많은 민중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는 중국 친구에게 인터넷으로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보여줬더니 좀 조용해지긴 했다.

'병마용' 관람은 주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방식이다. 무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웅장한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거 같다. 피사체는 높이 있어야 위대해 보이는 것 아닌가. '병마용'의 병사나 군마가 외소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피사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각양의 표정을 세밀하게 다 읽기는 조금 어렵다.

▲ 병마용 1호 갱에 당당히 서 있는 병사들과 군마들
ⓒ 최종명

병사들은 무겁게 눈을 내리감고 있으나 제각각의 표정은 살아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당시 병사들의 머리 형태는 하나 같지 않은가. 표정이야 제각각이나 그 외양은 당시의 생활 또는 군사문화를 담고 있다.

1호 갱 왼쪽으로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발판 위에 서서 정면을 향해 있지만, 일사분란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다. 목이 없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 떨어져 나간 목은 누구의 몫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병사들 뒤에 날씬한 군마가 질주를 멈춘 듯 서 있다. 군마들이 끌던 마차는 2호 갱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갱 속에서는 보지 못했다. 갱 옆의 한 박물관에 모형 형태로 비치되어 있다.

다시 진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궁금증을 품고 있던 진씨는 1976년 서안을 찾았다. 진씨는 서안의 박물관 담당자에게서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10여년 지난 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병마용을 자세히 관찰한 진씨는 병사들의 복장 양식과 마차 바퀴가 진시황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옷 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모든 병사들의 옷 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다 자주빛 남색의 바지 차림이라는 것.

▲ 표정은 다 다르지만 머리스타일은 모두 동일한 병마용의 병사들
ⓒ 최종명

이는 진시황의 엄명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진씨는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 세월은 흘렀어도 붉은 빛을 그대로 간직한 병마용의 병사들
ⓒ 최종명

진씨는 또 마차 바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 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진씨는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일 후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한 진시황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씨의 의문이다.

▲ 전시관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마차
ⓒ 최종명

그건 그렇고, 병사들의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정말 살아있는 듯하다. 사방을 한 바퀴 돌면서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역사의 실체와 만나니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거대한 1호 갱 외에도 2, 3호 갱이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도 많다고 한다. 이 엄청난 상상력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왜 나온 것일까.

3호 갱에서는 출토된 '병마용' 유물을 가깝게 볼 수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것 중 유리로 감싸놓은 것은 예술전시품처럼 아름답다. 진정 고대 중국인들은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피정복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전리품인 것처럼, 주인이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병마용은 '눈물의 예술'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 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의 병사
ⓒ 최종명

그런데 1, 2, 3호 갱을 다 보고 나오니 허전한 느낌도 든다. 수없이 많은 병사와 군마만큼이나 많은 감동을 기대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마용' 박물관 내에는 상설전시관이 별도로 있다. 마침 당삼채(唐三彩) 전시가 있었지만 진시황과 무관한 8세기 유물이어서인지 필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한 전시공간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사진이 잔뜩 있어서 짜증까지 난다. 사진 속에 있는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와 함께 '병마용' 무덤에 같이 묻히려나 보다.

▲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과 중국지도자가 병마용에서 찍은 사진
ⓒ 최종명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을 무덤에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씨의 문제의식은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으로 확정되는 과정에 중국 지도자이 관여돼 있다는 것.

진씨는 1974년 3월 24일 이 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한 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결정을 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진씨는 도한 그해 5월께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한 <신화사>도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씨에 따르면,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하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을 조사한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단정해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진씨는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고 '병마용'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조사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며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씨는 당시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였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을 중앙집권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모택동의 부인)이라고 믿고 있다.

진씨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진씨는 자료를 수집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시황 이전 시대에 재위한 진나라 소왕의 생모인 진 선태후(秦 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진씨는 진 선태후가 '병마용'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역사 자료에 기록돼 있으며 <사기>에 따르면 진 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 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06년 진 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했던 선태후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총(殉俑)했다는 주장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는 것.

진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지난해말부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진시황에겐 또 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인 '만리장성'이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진짜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13억 중국인 중 한 사람일 뿐인 진씨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것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사실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진시황의 망령(?)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서안의 '병마용'을 보고 흥분한 것은 기원전의 역사도 현대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 이슬비 내리는 병마용의 외부전경이 산뜻하다
ⓒ 최종명


Posted by 최종명작가 중국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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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도읍 '장안' 땅, 서안(西安)에 도착하자 '진시황병마용'을 본다는 설레임이 일었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유물이기도 했지만 사실, 서안에 온 진짜 이유는

작년(2005년) 12월 중국언론에 (한국언론도) 보도된 기사 때문이다.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기사 내용에 야릇한 흥미를 느꼈고

'홀로여행'을 기획하면서 '서안을 반드시'의 이유이기도 하다.


기사 내용과 '병마용'에서 보고 느낀 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인 진경원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관련해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의 발견 지점을 듣고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것에 최초의 의문을 가졌다.



서안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버스로 약 1시간30분 가면 임동현에 도착한다.

보잘 것 없다는 진시황릉을 지나자마자 곧 '병마용' 박물관이 나타난다.


역시, 엄연히 진시황 동상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시황의 동상은 예전 산동성 영성시에서 본 것과 동작과 모습이 참 유사하다.

영성시에 있는 동상은 신하 2명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병마용'의 진시황 모습과 너무 똑같다.

영성시의 동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자신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가장 동쪽 땅인 영성에 이르렀고 이를 관광상품화했을 터이다.


하여간, '병마용'은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 방향에 있다.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어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명성답게 주변 조경은 아주 청결하고 푸르렀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90위엔(약1만2천원)이어서 놀랐다.

나중에 한 중국인에게 비싼 입장료에 대해 투덜거렸더니

'병마용'의 역사적 의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오히려 핀잔을 먹었다.


더구나, 중국 최초의 전국통일의 '영웅'으로서 그 자부심만 기억하면서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법치주의 아래 희생된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 보여줬더니 좀 조용해지긴 했다.


'병마용'은 1,2,3호 갱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장 큰 1호 갱 입구이다.



'병마용' 관람은 주로 아래를 내려다 봐야 한다.

무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규모의 전체를 웅장하게 보려주기 위해서인 거 같다.

다만, 피사체는 높이 있어야 위대해 보이는 것 아닌가.

얼핏 보면 '병마용'의 병사나 군마가 왜소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피사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각양의 표정을 세밀하게 다 읽기에는 조금 어렵다.

그래서인지 길게 막아놓은 빨간 줄을 가위로 삭뚝 잘라버리고 싶었다.



정말 병사들의 얼굴은 무겁게 눈을 내려감고 있으나 제각각의 표정으로 살아있음이다.

그래도 당시 병사들의 머리 형태는 마치 하나 같지 않은가.


사람의 표정이야 제각각이나 그 외양은 당시의 생활 또는 군사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들의 모습이나 옷차림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1호갱 정면 맨 앞에서 역사의 무덤으로부터 되살아난 병사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1호갱 왼쪽으로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모두가 발판 위에 서서 정면을 향해 있지만, 반드시 일사분란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다.

목이 없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니, 떨어져 나간 목은 누구의 몫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병사들 뒤에 날씬한 군마가 질주를 멈춘 듯 서있다.

군마들이 끌던 마차는 2호 갱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져 있는데, 갱 속에서는 보질 못했다.

다만, 갱 옆의 한 박물관에 모형 형태로 비치되어 있다.


진경원씨는 몇가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1976년 서안을 찾아갔다.

서안의 박물관 담당자로부터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십몇년 지난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 했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한 바, 병사들의 복장 양식과 마차의 바퀴가

진시황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복색(服色), 즉 옷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모든 병사들의 옷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 자주빛 남색의 바지 차림이었다.


진경원씨 생각에, 이는 진시황의 준엄한 명령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기에

아마도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역사가 흘렀어도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왼편으로 돌아 다시 오른편으로 오니, 맨 뒷편에 다섯마리 군마와 병사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다섯마리 군마는 명령을 기다리는 태세이고, 병사는 마차를 진군할 자세가 아닌가.


또, 진경원씨가 의문을 가진 점은 바로 마차의 바퀴에 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로서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는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다.


당연히 통일 후에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진시황은 도대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경원씨는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마치 역사의 진실을 기다리는 듯 정연하게 서있는 '병마용'의 병사들을 뒤로 하였다.

마침 일본 사진작가인 듯한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안정감 있게 좋은 사진을 만들어주었다.


병사들의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정말 살아있는 듯하다.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진시황과 '병마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역사의 실체와 만나니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거대한 1호 갱 외에도 2,3호 갱이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게 많다고 하니

이 엄청난 상상력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왜 나온 거란 말인가.



2호갱은 좀 작다. 하지만 그 깊이는 훨씬 깊고 또 대부분 목이 달아나서 야릇했다.

3호갱은 넓기는 한데, 대체로 '병마용'이라기 보다는 그냥 무덤에 가까웠다.



3호갱에는 출토된 '병마용'의 유물을 가깝게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보존상태가 좋은 것 중에서 유리로 감싸놓으니 정말 예술전시품처럼 아릅답다.


이때 갑자기, 한국에서 만난 적 있는 한 조각가가 조각의 개념을 바꿔

작품을 땅으로부터 출토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을 추구했던 게 생각났다.


'병마용'의 유물들이 이렇게 우리에게 미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진정 고대 중국인들은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피정복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전리품인 것처럼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눈물의 예술'일 거라 짐작하게 한다.



마침 비가 오고 있다. 이슬비처럼 가늘지만 주위를 맑게 해주는 반가운 벗과도 같았다.

단정한 '병마용'의 아웃테리어에 한껏 운치를 북돋우는 해갈이었다.


그런데, 1,2,3호 갱을 다 보고 나오니 좀 허전한 감이 없지 않다.

따지고 보면, 수 없이 많은 병사와 군마만큼이나 많은 감동을 기대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은은해 검은 색의 퇴색으로 착각해 착시가 아닌가

눈 비비고 보고 또 봤던 것도 좀 영향이 있는 것 같다.  


'병마용' 박물관 내에는 상설전시관이 별도로 있는데

마침 당삼채(唐三彩) 전시가 있었는데,

당나라는 진시황과는 무관한 8세기 일이어서인지 영 흥분이 없었다.


더구나, 한 전시공간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사진이 잔뜩 있어서 짜증까지 난데다가

어라~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 지도자와 함께 '병마용' 무덤에 같이 묻힐려나 보다.



중국 지도자들이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을 무덤에 데려간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진경원씨의 문제의식은 중국 지도자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1974년 3월 24일 이 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병마용'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빠른 결정을 내렸고

이를 취재한 중국 신화사는 5월 경 그 어떤 상세한 설명도 없이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의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화재 담당부서(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시를 했다.

그러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 조사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으로 단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진경원씨는 도대체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었고

또는 '병마용'의 시대, 성질 등 과학적인 조사도 없이 결론을 내린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해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병마용' 발굴이라는 세계사적 경사를

중앙집권적 통치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바로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모택동의 부인으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의 지시로 이뤄졌다고 믿고 있다.


진경원씨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일생을 바쳐 노력해왔다.

그는 자료 수집을 통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를 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선태후(秦宣太后)인 미씨(米氏)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바로 현재의 '병마용'의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기록돼 있으며

중국 <사기>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진시황 이전 시대의 진소왕의 생모로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소수민족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306년, 진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선태후가 섭정했고

선태후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신하에게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용(殉俑)했던 것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자신의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고 한다.


진경원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그는 퇴직 후 더욱 적극적으로 당시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최근에 이르러 점점 주변의 동의와 관심을 받고 있고

그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2005년 12월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진시황은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영화화되고 묘사되고 있다.

'분서갱유'와 '아방궁'도 있고 또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 '만리장성'도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과연, 13억 중국인 중 한사람일 뿐인 진경원씨가 평생을 바쳐 온 노력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병마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제 주인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사실, 나 역시 진시황의 망령(?)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서안으로 가면서 흥분된 것은

기원전의 역사도 현대의 역사와 잇닿아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비를 맞고 되돌아오는 버스에서

훌륭한 조각품 '병마용'에 담긴 효성스런 진소왕의 마음이 한없이 고마웠다.


글|사진^여우위에 newonoff@한메일

Posted by 최종명작가 중국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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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ao rong 2008.10.31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