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라지바가 남긴 세 치 혀, 문성공주가 가져간 등신불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29> 산시 ① 시안 초당사와 광인사


실크로드를 거쳐 동서양 문물이 전해졌고 낙타는 상업을 주도했다. 군마는 피를 뿌리는 전쟁을 수행했다. 종교가 오고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가 동아시아에 기여한 최고 선물은 어쩌면 불경일지 모른다. 현벽장성 아래 실크로드 조각상에 장건을 비롯해 곽거병, 반초, 현장, 마르코폴로, 임칙서, 좌종당이 나란하다. ‘사기성농후한 마르코폴로를 빼면 대부분 살인적전쟁을 수행했다. 수많은 인물이 왕래했지만 쿠마리지바(Kumārajīva, 344~413)야말로 가장 위대한 공간 이동이라 말할 수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구자왕국(龟兹王国)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원고도 장안에 이르렀다. 그리고 초당사에서 평생 불경을 번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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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화청지에서 매일 밤 열리는 실경무대극 <장한가>는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시를 기반으로 4장 11막의 멋진 공연이다. 700여명의 출연진이 펼치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인상적이다. 806년 주지현위周至县尉이던 백거이는 마외역马嵬驿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운명을 듣고 840자 7언 120행의 "장한가'를 짓는다. 황제와 양귀비의 만남과 애정, 안녹산 반란과 양귀비 죽음에 애통해 하는 황제, 환도 후 양귀비를 잊지 못하는 황제, 도사의 환술로 다시 만난 사랑의 맹세와 한탄스런 단절을 노래하고 있다. 백거이의 시와 다소 다른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온천, 피파, 무사의 춤, 술취한 모습, 여지 과일, 죽음 그리고 꿈 속의 무지개까지 화려하고 감동적이다. 호수 위에서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날 마침 내리는 빗물이 더욱 애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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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 01 - 입궁하는 양귀비 만나 애뜻한 사랑을 시작하는 황제


 


장한가 02 - 에로틱한 춤으로 절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양귀비


 


장한가 03 - 화청지 온천에서 미인의 몸매를 마음껏 드러내는 양귀비


 


장한가 04 - 양귀비의 운명에 드리운 안녹산의 어두운 그림자


 


장한가 05 - 연회 후 술에 취한 양귀비의 모습조차 아름답다


 


장한가 06 - 화려한 가면 영상이 휘날리며 사랑은 깊어만 가고


 


장한가 07 - 안녹산의 반란으로 인한 당 현종과 양귀비는 불행의 시작


 


장한가 08 - 폭우 속에 도주하는 당 현종과 양귀비, 사랑의 이별


 


장한가 09 - 꿈 속에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 당 현종


 


장한가 10 - 오작교에서 다시 만난 당 현종과 양귀비의 허망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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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兵马俑은 진시황릉秦始皇陵 동쪽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날 따라 비가 내려 꽤 불편했는데 더운 것보다는 훨씬 구경하기에 부담이 없다. 1호갱 안으로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로 인해 숨 막히고 땀냄새 나는 것보다는 더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역사모임 회원에게 사전에 '병마용과 진시황은 무관하다'는 천징위안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서인지 관심이 남달라 보였다. 병마용이야 말로 서안은 물론 중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유물이 아니겠는가. 모두들 처음 보는 병마용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는 눈빛이다. 천징위안의 주장은 제 블로그나 기사, 그리고 <13억 인과의 대화>에서도 많이 다룬 주제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월전> 드라마를 통해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나라 선태후(진소왕의 어머니)을 인생이 알려지기도 했다. 진선태후의 아명 미월, 그 흔적이 병마용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1974년 에 발굴돼 2천년의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는 병마용은 정말 볼수록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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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 남부 취장曲江에 있는 대당부용원大唐芙蓉园을 5년만에 찾았다. 꽤 번성하고 좋은 관광지로 발전했을 것이란 기대를 저버려 아쉽다. 날씨까지 더워 전동차를 타고 움직였는데도 지친다. 마치 껍데기만 남아버린 듯 허망하다. 그나마 말 행진이라도 있어서 잠시 카메라를 연다. 자운루紫云楼에서 옛 장안성의 골격과 내용을 훑어볼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역사모임 20명을 인솔하고 시안에 도착하자마자 약간의 실망, 아마 밤에 가면 야경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대당부용원 서문에서 대안탑大雁塔 광장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약 30분 걸리는 거리다. 현지 가이드가 덥다고 극구 반대해서 차를 타고 이동. 대안탑大雁塔은 652년 당나라 시대 현장법사玄奘法师가 천축에서 불상과 사리,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 후 세운 5층 전탑이다. 탑을 품고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는 북위 시대에도 사원이었지만 당나라 때인 648년 태자가 그 생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현장은 탑을 세운 후 불경 번역을 통해 대승불교의 법상종法相宗을 창립하게 된다. 서북쪽 약 4km에 있는 천복사荐福寺 경내의 소안탑小雁塔(43.3m)에 비해 대안탑(64.7m)이라 불리는데 최초 현장이 세운 이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실크로드의 기점으로서 최근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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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의 주인

 

1978년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의 방문을 시작으로 1981 8월 카터, 1984 4월 레이건, 1985 9월 닉슨, 1998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달려갔다. 2004 10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 2007 1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2013년 한국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각국 정상이 늘 찾던 곳, 바로 시안의 병마용(马俑)이다.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병마용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1호 갱에 도열 된 군단의 웅장한 모습에 놀란다. ‘세계 8대 기적이라는 칭송에 손뼉까지 칠 정도다. 문화대혁명 막바지 1974 3, 우연히 세상에 출현한 병마용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거대한 중국에 딱 어울리는 유산이다.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은 공식 명칭이다.

 

이 박물관 이름에 감히 진시황을 떼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80세인데도 끊임없이 병마용을 연구하고 있는 천징위안(陈景元) 씨다. 베이징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2005 12월 무렵, ‘병마용과 진시황은 무관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 학술적이었고 게다가 집요했다. 병마용 모습이 궁금했던 나는 이듬해 5월 직접 시안을 찾았다.

 

그의 주장은 대체로 명쾌하다.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대략 2km가 넘는 거리에 위치하는 것부터 고대 건축방식에 어긋난다. 진시황은 3백 장() 이내에 황릉을 조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넓어도 700m를 넘지 않는다.

 

전국을 통일한 역량을 지닌 나라답게 진나라는 군복 색깔이 모두 흑색에 가까웠다. 병마용은 공기와 접촉한 후 40년이 지났어도 오색찬란하다. 도량형과 문자, 화폐 등을 표준화하고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도로도 그 길이가 일치했다. 당연히 도로에 맞게 마차를 운용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마차들은 크기도 서로 다르다.

 

병마용의 상투는 모두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는데 초나라 풍습이다. 더구나 병마용이 서 있는 방향은 모두 초나라를 향하고 있다. 천 씨는 이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닌 초나라와 관련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줄곧 진나라 소양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부장 묘라고 설파한다. 진시황의 고조모다.


▲ 시안의 병마용 1호 갱


 

2015 11 30. 베이징TV와 둥팡TV는 동시에 드라마 <미월전(芈月传)>을 처음 방영했다. 2016 1 9일 종영 때까지 두 TV는 시청률 1, 2위를 독점하고 서로 다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전국 50개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시청 점유율이 평균 7%를 넘겼는데 채널이 엄청나게 많은 중국에서 폭발적인 대기록이다.

 

초나라 공주 미월이 진나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태후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펼치는 내용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방송 채널도 수입해 방영했다. 역사드라마를 깔끔하게 잘 만드는 중국답게 구성과 품질이 꽤 기대 이상이다. 천 씨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해 진시황과 병마용이 무관하다는 글을 10년 전부터 써왔고 문화여행 때마다 강의하며 졸저에도 담았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다.

 

()는 초나라 왕족 특유의 성()이다. 미월이 곧 진선태후다. 사마천 <사기>에도 아들 대신 섭정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실존 인물이다. 진시황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출토된 병마용에는 독특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 모양과 비슷해 그 동안 모두 한 글자로 생각했지만 천 씨는 병마용의 주인의 이름인 미월, 두 글자로 나누어서 볼 것을 밝히고 있다. 얼핏 보면 비()와 미()가 비슷해 생긴 오해라는 것이다.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병마용 주인을 둘러싼 논쟁이 더욱 가열되고 있다. 제작진과 사전교감이 전혀 없던 천 씨는 진상을 밝힐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기뻐하고 있다. 병마용의 진상을 대중 앞에 드러내려는 평생의 업적이 평가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병마용이 발견된 시점은 문화대혁명 마지막 해였다. 정권을 농락하던 4인방은 중앙집권적 카리스마를 유지하고자 병마용은 곧 진시황이라는 선입견으로 고고학계와 언론계에 명령했다. 천 씨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지금껏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에게 역사 왜곡이라는 선물을 안겨주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높이 솟은 진시황 조각상을 미월의 늠름한 모습으로 대체될 날이 올 것인가?

 

역사에 대한 바른 평가를 공유할 것인가, 아니면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후세에게 가르칠 것인가? 병마용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중국의 역사가 세계에서 반듯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만큼 병마용은 중국을 상징한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다고 역사를 되돌려 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근시안일 뿐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문화와 이데올로기 부문 총 책임자이던 장칭()이 바로 왜곡 명령의 당사자였다. 그녀는 체포, 구금, 재판 후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최종명, 작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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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야기> 4편에는 신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김일성,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 협상 달인 강신태, 작곡가 정율성을 비롯 조선인과 동북왕 가오강 등 중국인들의 동북에서의 항전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동북을 놓고 벌인 내전에서 북한의 지원은 탁월했다. 혼란기에 펼치는 전략가들의 시야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타고날지도 모른다.


북한을 갈 수 없으니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만강과 압록강 강변에 있는 중국 도시들을 가노라면 중국과 북한의 어제와 오늘, 미래 관계가 끊임없이 안개 속에 갇힌 듯한데 이 책에는 숨겨진 많은 해답이 있는 듯하다.


2007년 연길에서 새벽에 떠나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무산 시를 내려다 보며 지났고 백두산에서는 천지 너머를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단동에서는 유람선 타고 북녘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집안에서는 강 너머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소리쳐 보기도 했고 60년대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담판으로 북한 영토가 된 강 중간의 조그마한 섬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저 다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한일 뿐이었기에 ‘갈 수 없는 나라’의 그리움이었으리라.


연길에서 동북 만주를 달리며 끝없이 펼쳐진 벌판은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 옛날 말 달리던 북방민족의 얼이 숨쉬고 있고 항일전쟁용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을 생각했던 곳이 아니던가? 발해 상경부 성터에서부터 신중국 이후 최초의 집단농장을 조선족이 일궜다는 화천에서는 민족향에서 만난 동포들과의 하룻밤도 너무 좋았던 시절이 그립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중국에서 바라본 무산


조중경계비 앞에서


백두산 입구


백두산 6월의 천지


만주벌판, 자무스 부근


압록강변 단둥


단둥 유람선 타고 바라본 북한 땅


여기서 중국인이야기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다.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투박하고 알아듣기 힘든 호남사투리로 신중국을 선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도를 수도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마오쩌둥이 일본 패망 후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를 때 승리를 확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면서 당연히 수도를 고민했을 것인데 그 최초의 구상은 북경이 수도가 아니었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하게 된 뒷배경 하나~


1948년 3월 당 중앙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동진해 산서 성을 해방한 후 건국 후 수도를 정하는 문제가 처음 거론됐으며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수도 예정지로 고도 북경, 남경, 서안도 아닌 당시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하얼빈이 선정됐다. 린뱌오가 세계지도를 보는 것을 취미처럼 즐겼다지만 마오쩌둥도 중국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중국지도 보는 거 좋아한다. 벽에 늘 걸어놓고 산다. 왜? 어딜 갈까 늘 발걸음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한 마리 수탉으로 비유하길 좋아했고 흑룡강 성은 한 마리 하늘을 선회하는 고니를 닮았으며 하얼빈은 새의 목구멍 위치에 해당한다고 자주 언급했다.


하얼빈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된 도시이기도 하고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안정적인 수도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 중앙은 ‘특별시’ 수도로 하얼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당사에 기록돼 있다. 신중국 성립 후 무주공산에 가까운 동북의 자원 활용과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뜻밖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이 미친 듯 동북으로 병력을 증파하고 교통로를 점령하자 상황이 급변했으며 다시는 당 중앙은 동북 거점 수도 구상을 논하지 않았다. 이후 낙양, 개봉 등을 포함해 수도를 고려하다가 최후에 북경(당시 북평)을 지목했다. 재미있는 것은 수도를 정하기 전 1949년 1월 동북국정치위원이던 왕자샹王稼祥과 나눈 이야기다.


마오의 “우린 곧 승리할 것인데 우리 정부는 수도를 어디로 하면 좋겠소? 당신 의견은 어떠오?”에 대한 왕의 긴 대답은 당시 그들의 고민과 함께 중국지도를 펼쳐놓고 생각해보게 한다. (지도를 펼쳐 보시라)


(이하 왕자샹의 말)


아주 중요한 문제네요. (엄숙한 말투로) 현재 국민당 수도 남경은 범과 호랑이의 자태를 지닌 호거용반虎踞龙盘의 요충지이지만, 역사적으로 역대 금릉(지금 남경) 왕조와 국민당 정부 모두 단명했습니다. 이런 숙명론적 역사인식을 믿지 않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남경은 동남부 해안과 너무 가깝고 향후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아주 큰 단점입니다. 남경으로 정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닌 듯합니다.


서안의 단점은 너무 서쪽에 편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중국의 강역은 진한시대나 수당시대가 아닙니다. 그때의 만리장성은 변경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중심지에 가로로 퍼져있습니다. 서안은 지리적으로 중심지로서의 장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안도 부적합합니다.


황하 연안의 개봉이나 낙양 등도 고도였지만 중원지방의 경제가 낙후돼 있고 이런 문제가 단기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일 뿐 아니라 교통문제나 황하의 범람 등 문제로 인해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은 북평입니다. 북평은 해안지구에 위치하면서도 경제가 발달한 영역에 속하는데다 동북과 관내(산해관 안쪽)로 통하는 핵심적인 요로이기에 전략적으로 십분 중요하며 현재 중국의 혈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깝게는 소련과 몽골이 위치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비록 바다와 가깝지만 발해는 중국의 내해에 해당하고 요녕과 산동 두 반도가 둘러싸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봐도 비교적 안전합니다. 국제적으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수도에 충격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북평은 명청 제국의 수도이었기에 인민들도 마음 속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을 생각해볼 때 수도는 당연히 북평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은 거침 없는 양자샹의 의견을 듣고 난 후 몹시 기뻐하며 ‘일리 있어, 일리 있어. (有道理, 有道理)를 연발하며 한편으로 웃으며 한편으로 말했다.


“당신 분석이 내 생각과 딱 들어맞네, 우리 수도는 북평으로 정해야 할 것 같네. 장제스가 수도가 남경에 있는 까닭은 그의 기반이 절강의 자본가였기 때문이었다면 우리는 수도를 북평에 정하고 우리도 그 기반을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광범위한 노동인민대중일 될 것이다.”


1949년 3월 중순 마오쩌둥과 당 중앙은 북평으로 들어섰고 9월 21일부터 거행된 신중국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회 전체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평에 설치한다.’는 안건을 토의한 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일 정식으로 북평을 북경으로 개명했다.


<중국인이야기> 4편의 뒷부분 북한 이야기를 읽고 동북 지방을 다닐 때 기억을 하다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생각하다가 공연히 ‘수도’ 이야기만 잔뜩 푼 듯하다.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하얼빈의 성소피아 성당 광장의 야경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난징의 부자묘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카이펑의 청명상하원 모습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뤄양의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 앞


중국의 수도로 거론된 시안의 당장안성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마오쩌둥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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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13] '계림'과 '황소'로 인해 망한 당나라 ②


소금업자 황소는 왕선지 봉기에 호응해 조주(曹州, 산동 하택菏泽)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황소의 고향 원구(冤句)는 진나라가 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 기록마다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다.


염상(鹽商) 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났으며 필묵에도 도통했다. 송나라 역사가인 장단의(张端义)가 집필한 당송 시대 인물에 대한 기록인 <귀이집(贵耳集)>에 따르면 겨우 5세에 이미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거듭 낙방하고 수도 장안을 떠나며 시 한 편을 남겼다. <부제후부국(不第后赋菊)>이니 과거 낙방 후 자신의 마음을 국화에 빗댄 것이다. 이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처럼 노래했으니 사람의 명운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멋진 '장난'을 칠 수 있겠는가?


가을 오면 구월 파일 애써 기다리는데, 활짝 국화 피면 다른 꽃 모두 시드네.

눈 부시도록 장안에 꽃 향기 자욱하니, 도성 천지에 황금 갑옷으로 물드네.

待到秋来九月八,我花开后百花杀。

冲天香阵透长安,满城尽带黄金甲。


9월 9일 중양절은 가을 국화가 한창일 때이자 폭죽을 터뜨릴 만큼 성대한 축제 기간이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한탄을 국화만이 활짝 피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자괴감을 말하고 있다. 굳이 9일이 아닌 8일로 쓴 것은 살(杀)과 운을 맞춘 것으로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날의 고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당나라의 마지막 민란의 주인공 황소가 지은 시는 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황후화>를 연상시킨다. 사진은 영화가 상영되던 2008년 12월 베이징 시내의 홍보간판. ⓒ 최종명


수도 장안에 국화 향기만 만발하고 도성으로 들이닥치는 황금 갑옷의 물결, 영화 <황후화>의 원 제목이 바로 '만성진대황금갑'이다. 장예모 감독은 황소가 민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입성한 시에서 착안하고 영리한 머리로 교묘하게 뒤집은 후 반란을 일으키면 모두 몰살당한다는 메시지로 활용했다. 장예모가 비록 시 끝 구절을 따다가 '반혁명은 곧 몰락'이라는 통치자 편의 이데올로기를 스크린에 담았지만 황소의 역사기록까지 뒤집을 수야 없을 것이다. 민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빌려다가 영화 자본으로 덧칠한 '비겁한' 감독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다.


복수의 염원을 담아 시를 짓다


황소는 고향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조세를 강요하고 사역을 강제하며 퇴로조차 없는 억울한 백성을 대신해 관리에 항의하는 등 충돌이 잦았다. 심지어 사람들을 모아 관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는 등 평소에 불만이 많았지만, 정의감도 강했다. 왕선지가 민란을 일으켜 산둥 지방으로 이동하며 승전고를 울리자 형제와 조카 등 8명과 함께 앞장서서 웅변하니 수천 명이 동조했다. <신당서>에는 기아에 시달리던 각 지방 농민이 '수개월 만에 수만에 이르렀다.'고 했다.


신망이 두터웠으며 지혜롭던 황소는 왕선지와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탈하기도 했다. 왕선지가 사망하자 황소를 흠모하던 군사들이 합류해 명실상부한 대장군이 됐다. 878년 3월 황소는 변주(汴州, 하남 개봉)와 송주(宋州, 하남 상구商丘)를 직접 공략했으나 토벌군의 방어가 예상보다 강력하자 장강 일대를 거쳐 강남으로 남하하며 전선을 이동했다. 강남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당시 해상실크로드의 무역항 천주(泉州)에서 부르주아 부상(富商)을 대부분 도륙하고 12월에는 복주(福州)로 진입했다.


곧이어 서쪽으로 진군해 광주(广州)를 공략했으며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까지 손에 넣었다. 의군도통(义军都统)을 자칭하며 조정을 향해 간신과 중간상이 조공과 무역 기강을 망치고 있다는 신랄한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나라 최대의 무역항 광주에 거주하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은 조정의 쇠락을 틈타 공공연히 주민들을 핍박하고 살인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소는 20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반란군을 일거에 소탕하고 광주를 수복했다.


강남과 복건, 광동, 계주 일대를 종횡무진 진군했지만,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벌을 주창하는 부하 장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안을 향해 진격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계주에서 시작해 뗏목을 타고 상강(湘江)을 따라 강릉(호북 형주)을 거쳐 장안과 직선으로 불과 만 리 거리의 상양(襄阳)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정은 황소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상 왕탁(王铎)을 초토도통(招讨都统)으로 삼고 강릉에 둔병을 설치했다. 또한 이계(李系)를 부도통 겸 호남관찰사로 임명해 10만의 군사를 담주(潭州, 호남 장사长沙)에 주둔시켰다.


황소의 대군이 담주에 도달하자 이계는 질겁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란군은 하루 만에 성을 열고 들어가 토벌군을 섬멸하니 10만 명의 피가 상강에 흘러넘쳤다. 여세를 몰아 강릉을 돌파하자 도주하는 왕탁을 쫓아 상양을 지나 장강을 건넜다. 토벌군은 공세를 펴보기도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나 걸림돌이 사라지자 황소는 강서와 안휘 일대 15주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880년 토벌군의 저항과 전염병이 유행하자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8월에 이르러 회하(淮河)를 건넜고 11월에 낙양을 공격하자 한림학사 출신의 낙양유수 유윤장(刘允章)은 저항을 포기하고 백관을 인솔해 황소를 영접했다. 조정은 절도사 고변(高騈)이 이끄는 토벌군으로 하여금 민란군을 방어하거나 회유하려 했지만 수도 장안으로의 진격을 조금 늦추게 할 뿐 대책이 무용지물이었다. 더구나 고변은 토벌이 목적이 아니라 토벌 이후의 전공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민란군의 규모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황소의 진격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치원도 막지 못한 장안 점령


▲ 황소는 역대 왕조의 수도 중 하나인 장안 성을 함락시키고 쑥대밭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 장안 성을 꾸며놓은 시안의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 내 모습. ⓒ 최종명


고변의 추천을 받아 토벌군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치원이 당시에 <토황소격문>을 썼는데 워낙 명문이라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빠졌다고 하는데, 앞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허무맹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많고 그다지 역사적이지도 않다. 고변은 황소의 군대를 백만 대군이라 조정에 부풀려 보고하고 토벌의 전공을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최치원의 격문은 고변의 이름으로 황소가 장악한 지역마다 뿌리고 다녔으니 유명세를 탄 것만은 분명했을 것이다.


황소 민란군은 '격문'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눈 하나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12월에는 드디어 수도 장안의 코 앞인 동관(潼关)과 화주(华州, 섬서 화현华县)를 점령하니 당희종은 다급하게 사천 성도(成都)로 도주했다. 양귀비와 희희낙락하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으로 우국지위(忧国之危)를 맞아 성도까지 도피했던 전철을 똑같이 밟은 것이다.


881년 1월 황소는 과거에 낙방한 설움을 담은 시에서처럼, 운명처럼 '황금갑옷'을 입고 드디어 장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장 상양은 '황소 왕이 백성을 위해 봉기했으며 당나라 이씨 정권과 달리 너희를 사랑하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고 진무했다. 100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으며 등장한 황소는 점령군으로서의 자비를 베풀었으며 수도를 점령한 민란군답게 바로 국호를 대제(大齐), 연호를 금통(金统)이라 했다. 논공행상에 따라 장수들에게 벼슬을 책봉하는 등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


황제에 등극한 황소는 사천으로 도주한 당희종을 가볍게 보고 군사를 몰아 추격하지 않았다. 사병들이 강도로 변해 장안이 '살인의 추억'으로 변해가고 여인네 강탈과 백성 구타가 나타나며 도처가 혼란으로 변해가는데도 황소는 저지할 수 없었다. 당나라 조정은 숨 쉴 틈이 생겼으며 곧바로 절도사 정전(鄭畋)이 토벌군을 이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소의 나라 대제에서 태위의 지위에 오른 오른팔 상양은 사천으로 진격했으나 토벌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상양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성안 곳곳에 패전을 조롱하는 시가 나붙자 관원 및 유생 3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존심이라고 하기에는 유치했고 심리작전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보복이었다.


토벌군 선봉장 정종초(程宗楚)가 장안으로 진격하자 황소는 전군을 이끌고 돌연 동쪽으로 도주했다. 무혈 입성한 토벌군이 승리에 도취돼 별다른 방비 없이 음주에 취하자 황소는 전광석화처럼 토벌군을 전멸시켰으며 다시 한 번 장안을 점령했다. 이때 토벌군을 지원했거나 내통한 백성을 한꺼번에 참수해 장안은 그야말로 피로 씻어낸 듯 세성(洗城)과 다름없다고 <자치통감>은 피를 토하며 기록하고 있다.


1938년 모택동은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문건에서 황소 민란 실패를 빗대어 민란 지도자가 근거지에서 인민과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를 강조했다. 역사에 해박했던 모택동은 황소 외에도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민란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 신중국 건립의 교훈을 얻었다. 근거지란 세력도 중요하지만, 명분이야말로 생명줄이거늘 장안은 점령하고도 어찌 할바 모르고 불사진취(不思进取)했으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자 황소 민란은 점차 실패의 나락으로 치닫게 됐다.


882년이 되자 사천의 조정은 반격 조건을 다시 갖추고 격전에 대비했다. 이때 동주(同州, 섬서 대려大荔)에서 토벌군과 교전 중이던 황소의 맹장 주온(朱温)은 대세를 저울질하다가 돌연 당 조정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휘 당산(砀山) 출신의 유생 주온은 일찍이 황소 민란에 참여했으며 이윽고 배반의 화신이 됐다. 당 황제는 하늘이 내려준 복으로 기뻐하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토벌군 지휘를 맡겼다. 


주전충은 당시만 해도 '하늘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데 황소 민란을 진압하면서 군대를 장악하고 선위를 받아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인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후량을 건국해 오대십국 시대를 연 주전충은 황소의 민란을 거치며 일약 시대의 풍운아가 된 주온이었다.


'황소'의 살인 공장 도마채


황소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가 발생했다. 서돌궐계로서 서북방면 준가르 분지에서 세력을 키운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를 구원하러 남하해 온 것이다. 거침없이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황소는 결국 장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주의 시간을 벌여야 했으며 황금 보화를 거리에 뿌리고 추격을 늦출 정도로 다급했다.


게다가 군량 공급이 문제가 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살생해 인육을 식량으로 만드는 작업공장인 도마채(捣磨寨)를 운영하기도 했다. 인간 방앗간이 따로 없었으며 참혹한 실상이 <구당서>, <신당서>는 물론이고 <자치통감>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장안에서의 도륙도 모자라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육을 담식(啖食)했으니 '살인마'라는 황소의 불명예를 도저히 지울 길이 없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 중에 인육을 먹은 최초의 인물은 수말당초의 '비정한' 반란군 수괴 주찬(朱粲)이었지만 황소 역시 '식인의 명부'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황소는 884년 봄, 이극용의 5만 군대에 연패하며 하남을 지나 산동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주온 토벌군과도 정주와 개봉 사이 왕만도(王满渡, 하남 중무中牟)에서 대패했는데 황소의 핵심 부하장군들이 대거 투항해 버려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6월에는 왕선지 민란에 참여했다가 황소에게 의탁한 최고의 오른팔 상양조차 무녕절도사가 이끄는 토벌군에 투항했다. 황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게 되자 산동 태산의 협곡 낭호곡(狼虎谷)으로 은신했다.


▲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태산 부근 낭호곡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사진은 태산의 가파른 계단. ⓒ 최종명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외조카이자 수행 장군인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헌납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며 최후의 순간을 준비했다. 임언이 감히 칼을 들지 못하자 황소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민란 주모자의 죽음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당연하지만,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역사의 정설 외에도 여러 가지 추측이 상존하고 있다. 중국당사협회의 한 역사학자는 황소가 자결했지만, 미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임언이 다시 수급을 베어 투항했지만 임언 역시 사타족 군인에 의해 살해돼 황소와 함께 수급이 당 조정에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황소의 죽음과 관련돼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1900년 돈황(敦煌)에서 도사 왕원록(王圆箓)이 우연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동굴을 발견했으니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돼 있던 동굴로 잘 알려진 막고굴에서 황소의 사인과 관련된 감숙 숙주 현 <숙주보고(肃州报告)>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황소는 그의 오른팔인 상양에 의해 살해돼 수급이 서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으로 상양이 투항할 때 이미 황소는 살해됐으며 태산으로 가지도 못했다는 주장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언제 어떻게 죽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 제각각 근거와 기록을 남긴 황소는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 민란'이었으니 '당은 황소에 의해 망했다.'는 기록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민란의 영웅이었기에 살인마가 됐거나 혹은 누명을 썼겠지만 황소의 인생은 비참한 인민을 일으켜 세웠지만 스스로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지금껏 살아있다.


당나라의 멸망 속에 오대십국이 숨 쉬다


▲ 황소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수급이 감숙 성 숙주로 옮겨졌다'는 <숙주보고> 문서가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 건립된 돈황 막고굴을 상징하는 9층루. ⓒ 최종명


당나라뿐 아니라 모든 왕조는 망했지만, 황소 민란만큼 전국을 휘젓고 수도까지 점령했던 역사는 많지 않다. 사천으로 도망간 황제가 황소의 대제 정권 토벌을 위해 재물을 바짝 수탈하자 농민의 부담이 가중됐다. 치아를 치료하는 관리인 천능(阡能)이 촉나라 땅에서 882년 농민주도의 민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본영 주위에서 9개월 동안이나 치열하게 울분을 토하는 민란으로 골치 아픈 당 조정에게 황소의 장군 주온의 투항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충성해 달라는 전충이란 이름까지 하사하며 배반의 오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주전충은 황소가 사망하자 23년 후 민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907년 국호를 양梁이라고 하고 건국했고 다시 주황(朱晃)이라 개명했다. 이에 격분한 황소 토벌의 또 다른 주축이던 이극용은 당나라 연호를 지키며 부흥을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908년 병사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주황이 개국하자 지방 절도사들이 번진을 기반으로 쿠데타와 하극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화북 지방의 오대와 화남 지방의 십국이 차례로 집권했는데 70여 년의 할거 시대는 조광윤의 송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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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리포트> 21회 산시(섬서)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


 

허난 성 산현(陝縣) 평원 서쪽을 예로부터 산시(陝西)라 한다.

 

<서경> 우공구주도(禹貢九州圖)에 의하면 옹주(雍州)에 속하며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염제와 황제의 탄생지라 전해지며 전국시대의 패자인 진 나라의 기반이기도 하다.

 

서주, , 서한과 당나라의 도읍으로 베이징, 난징, 뤄양과 더불어 중국 4대 고도인 시안이 산시 성의 수도이다.

 

시안은 원래 호경(鎬京)이라 불렸는데 한나라의 유방이 관중(關中)을 도모한 후 오랫동안 통치해 안정을 꾀한다(長治久安)는 뜻으로 장안이라 불렀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이며 최근 중국정부의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1)   린퉁 진시황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

 

새벽기차를 타고 아침 7시에 중원의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기차 역 앞은 사람들로 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빙마융)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2006년에 한번 왔던 곳이라 버스 타는 곳을 쉽게 찾았다. 1시간 가량 달린 버스는 종점에 도착. 진시황 동상이 있는 광장은 병마용으로 가는 입구이다.

 

세계적인 유물이라 자랑하는 병마용박물관으로 가려면 걸어가도 되지만 비가 조금씩 내려 공원 차량을 타고 올라갔다. 표를 사고 들어서니 비가 내리는데도 거대한 규모의 1호 갱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서체가 단정한 <진시황병마용박물관> 비석 뒤로 보이는 1호 갱 입구를 들어서니 멋지고 장엄한 모습의 병마용 갱이 등장한다. 사진으로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갱이다.

 

이 갱은 마차병과 보병이 함께 편성된 부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을 정면으로 갱 앞쪽의 3개 열은 선봉부대이고 서쪽은 후방부대로 뒤쪽 방향으로 서 있다. 좌우 양 끝의 1개 열은 좌우로, 즉 남쪽과 북쪽을 향해 있다. 가운데 부분에 있는 무사들과 마차가 주력부대이다.

 

1호 갱은 1974 3월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엄청난 보물이 2천 년의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문화대혁명 시기.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 주도로 언론을 동원, 이 병마용이 발견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진시황의 병마용'이라 선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시안이 고향인 평범한 건축기술사 천징위엔(陳景元)이다.

 

당시는 문화혁명 말기로 정국이 혼란한 시점이었다. 중앙집권 통치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느낀 천징위엔은 평생을 바쳐 연구하기 시작했다.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은 2005 12, 중국 관영언론인 신화사를 비롯한 중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보도해 큰 파문을 일으킨다.

 

1호갱(윗쪽), 진시황 조각상(아래쪽 왼), 입사용(아래쪽 중간), 머리 잘린 병마용(아래쪽 오른)


천징위엔은 진시황 시기 100여 년 전 진나라 소왕이 어머니인 진선태후(秦宣太后) 미씨(米氏)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진시황이 아닌 진소왕이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바로 현재의
'병마용'의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 <사기>를 근거로 진선태후는 진시황 이전 시대의 진소왕의 생모로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 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306, 진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선태후가 섭정했고 임종이 가까워지자 신하에게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용(殉俑)했던 것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자신의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고 한다.

개관 이래
4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곳이며 1호 갱에만도 6천여 건이나 되는 병마용 유물이 있으니 정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클로즈업으로 병마용의 이곳 저곳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기원전 시기에 이렇듯 아름다운 모양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감탄이 저절로 생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천장 곳곳에 비가 새고 있어서 놀랐다. 그토록 자랑하는 박물관을 비가 샐 정도로 관리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병마용의 모습은 그 생김새와 동작이 아주 다양한 편이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표정과 자세가 그대로 묻어있다. 대부분 군복을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자연스럽게 손을 차려 자세로 서 있기도 하지만 손을 살짝 들고 있는 것도 많다. 말들도 차이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 색깔이다. 천징위엔의 주장에 따르면 진시황은 통일 후 통치를 위해 옷을 모두 흑색으로 통일했다. 그런데, 병마용의 옷을 보면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나 빛이 다소 바래긴 했지만 녹색 빛이 남아있는 전투복 상의에 자주색 빛깔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바지 차림이다.

병마용이 2천년 이상의 세월을 땅 속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그 고유의 자기 색채를 유지한 것이 놀랍다. 당시에는 순장이 많았다고 하는데 진소왕이 굳이 흙으로 병마용을 구웠으니 이렇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흙 속에 영혼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 부대의 행렬이지만 간혹 보면 그 배치가 군대라고 보기에는 다소 느슨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병마용이 몇 개 보인다. 갑옷 속을 뚫고 총알이라도 뚫고 지나간 듯하다.

갱 속에는 좌우 사방에 감시원들이 서 있다. 그렇지만 마음껏 사진과 영상을 찍어도 된다. 감시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병마용을 다 담아도 된다. 최대한 줌으로 클로즈업해서 병마용 속의 마음까지 담아보려고 애를 써본다.

진시황은 군대뿐 아니라 문자를 비롯 복장, 도량형 등 모든 정치 및 사회문화적 제도를 일률적으로 통일했다. 하나로 통일된 느낌이 아닌 제각각 서로 다른 병마용에 푹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병마용은 1호 갱 외에도 2호 및 3호가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다. 4호 갱을 비롯해 많은 병마용은 아직 발굴 중이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이 묻혀 있을 까. 어떤 면에서는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100여 년 전 소왕이 아무리 통일의 밑거름을 쌓았다고는 해도 이토록 방대한 병마용을 만들었다는 것도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물론 아직 중국역사학계는 진시황의 병마용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결코 수정하고 싶지 않은 입장이기도 하다

병마용 3호 갱으로 갔다. 오목할 요()자 형 모양의 무덤 속은 네 필의 말, 한 대의 마차와 68개의 도용만 발굴된 520평방미터의 자그마한 갱이다. 약간 어두워서 무덤 곳곳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목이 잘리고 형체가 부서진 채로 그대로 있어서 오히려 보기 좋다. 정리하고 정돈한 것보다 더 드라마틱해 보인다.

말 뒤에 몇 미터 떨어져서 양 팔을 앞으로 벌리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말이 네 필이니 병마용도 네 명인데 그 동작이 다 다르다. 두 개는 양 손을 주먹 쥐고 뻗어있고 두 개는 왼손은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뻗어있다. 뻗는 각도도 다 각각 다르고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세 개는 머리가 온전하지만 한 개는 목이 달아나 있으니 안타깝다

3호 갱에서 2호 갱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멍회이친차오(夢回秦朝)라는 이름의 사진촬영소가 있다. 병마용과 함께 진나라 시대로의 꿈결같은 회상을 해보라는 의미이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병마용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2호 갱은 6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중국 최대규모로 1300여건의 병마용, 마차 80량을 비롯 수많은 청동병기가 출토된 곳이다. 규모도 굉장히 크고 넓지만 무덤 속 병마용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떨어진 목이 그대로 나뒹굴기도 하고 부스러기들도 그냥 방치한 듯 쌓여있다.

무릎 쏴 자세의 궤사용(跪射俑)과 서서 쏴 자세의 입사용(立射俑)과 말을 끌고 있는 안마기병용(鞍馬騎兵俑), 중무장한 군리용(軍吏俑)을 비롯 군사용(軍士俑), 장군용(將軍俑), 포용(袍俑), 개갑용(鎧甲俑), 어수용(御手俑) 등 다양한 형태의 병사용이 발굴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을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 자세나 동작들이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사람의 자세와 동작을 본 떠 만든 감각이 아주 놀랍다.

2호 갱 옆 복도에는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 그 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병마용을 찾은 사람들이 꽤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입사용의 자세는 마치 무술을 하는 자세와 비슷해 흥미롭다. 태권도 기마자세와 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3곳의 병마용 갱을 두루 돌아보는데 참 오래 걸렸다. 기원전에 이토록 방대한 규모의 무덤이 중국 학계의 주장처럼 진시황의 그것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는데 아주 능수능란하기에 더욱 이 병마용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천징위엔의 말처럼 2천년 만에 병마용이 우리에게 되살아왔듯이 역사의 진실이란 꼭 밝혀지리라 본다. 2번 병마용을 방문하고 나니 천징위엔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정말 사실이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이렇게도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품 '병마용'에 담긴 효성스런 진소왕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2)   시안 西安 엄숙한 후이족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

 

시안 시내에는 후이족 사원인 청진사(清真)가 있다. 후이족은 서기 7세기 중엽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남부 해안을 거쳐 시안이나 카이펑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기 13세기에는 몽골족의 서쪽 침공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무슬림들이 대거 중원으로 이주해 정착한 후 지금의 후이족이 됐다.

 

중국에는 도시마다 청진이라는 말이 붙은 사원이나 식당이 많다. 청진이란 말은 후이족을 상징하는 말인데 아라비아말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에 처음 등장하며 명나라 주원장이 쓴 글에서 이슬람을 지칭했는데 이후 후이족의 고유한 대명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청진이란 곧 중국의 이슬람이나 후이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중국에는 도교사원이나 불교사원, 그리고 유교의 사당과는 다소 다른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진사가 또 하나의 종교 사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후이족은 중국소수민족 중 하나이지만, 인구가 900만 명에 육박하니 소수민족 중에서는 꽤 다수민족이라 하겠다.

 

실크로드가 세계무역의 중심통로가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후이족들이 광범위하게 중국으로 넘어온다. 중국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닝샤에는 자치구도 있다. 현재 시안에는 약 5~6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청진사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청진사는 얼핏 보면 여느 중국의 사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물 지붕이나 벽면의 모양이 늘 보던 것이다. 아마도 이슬람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교류해 결합된 형태,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현지화된 형태라고 보여진다. 이질적인 모습을 가급적 감추고 한족문화와 소통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했던 후이족의 종교생활과 그 문화를 잘 보여준다.

 

청진사에 만난 아이(왼쪽), 외국인 관광객(중간), 청진사 입구(오른쪽)

 

청진사는 당나라 때인 서기 742년에 건축됐다. 이후 송, , , 청나라를 거치면서 몇 차례 중건돼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체 외양은 중국 한족문화형식을 기반으로 했으나 사찰 내부의 모습은 엄격하게 이슬람교의 제도에 따라 조성됐다. 겉과 속이 서로 다른 것이다.

 

맨 입구에는 푸른 기와로 만든 벽이 하나 서 있다. 그 벽을 지나 가운데 길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누각과 정자가 색감도 그렇지만 구도도 안정적이고 주변 나무들과 어울려 자연친화적이어서 그런지 아주 포근하고 조용한 사원이다. 금연인데다가 이렇게 나무가 많으니 정말 공기가 맑고 상쾌하다. 더구나, 그 흔한 향 예불도 없으니 금상첨화이다.

 

중앙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청진사 현판이 걸린 누각이 보인다. 누각을 지나면 용 문양이 있고 천감재자(天監在茲)라고 새겨진 돌 패방이 나타난다. 패방을 지나니 한 아이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어 시선을 따라가니 셩신러우(省心樓)이다.

 

누각을 지나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다. 가운데 길에 있는 건물이 다 뻥 뚫려 있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다 보인다. 젊은 남녀는 문고리를 만지고 두드리며 둘러보고 있다.

 

그리고 패루와 정자가 일체화된 독특한 구조의 이전()이 나타난다. 가운데 정자는 6각형이고 양쪽의 정자는 3각형으로 3개의 정자가 나란히 이어진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다. 봉황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라 펑황팅(鳳凰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정자를 지나면 바로 종교의식을 치르는 건물이어서 서둘러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새 우짖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쪽 하늘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새들이 철사 줄 위에 앉아 계속 지저귀는 새들이 참 많다.

 

한참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두고 새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왠 꼬마 아이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한다. 아빠가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왔고 자기를 도와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저 다 보고 나서 함께 나가자고 했다.

 

넓은 광장이 나오고 가운데 넓은 건물인 다뎬(大殿)입니다. 무슬림들은 예배장소를 '모스크'라 부른다니 여기가 일종의 '모스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본당의 크기는 600평방미터에 약 500여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안을 보니 맨바닥에 앉아서 종교예배를 하도록 돼 있다.

 

하여간 이 귀여운 아이들이랑 본당을 두루 살펴보다가 돌아 나왔다. 왼편으로 관리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을 지날 때 아이가 손을 꼭 잡더니 보폭에 맞춰 몸을 숨기며 지나간다. 그리고 인사를 하더니 사라진다. 하여간 뭔 사연이 있겠지만 노는 짓이 귀여운 꼬마아이들입니다.

 

다시 청진사 입구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손에 물을 묻혀 다른 아이 얼굴에 대고 장난 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청진사는 후이족 무슬림의 종교사원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들의 후예이자 중국 현지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후이족이 자신들의 종교활동을 위해 만들었다.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도 후이족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비록 자신의 문자를 가지지 못한 민족이지만 천년 넘게 중국에서 살아가는 후이족의 사원을 만났다.

 

3)   시안 西安 한국드라마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저녁을 먹다

 

시안은 동서남북으로 성곽이 조성돼 있고 성 안이 번화가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면 매번 성문을 드나들어야 한다. 서부대개발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시안의 활기찬 거리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호텔이나 건물도 고풍스런 분위기로 꾸며져 있어 시안에 가면 왠지 번성했던 당나라의 현대판 거리를 보는 착각에 빠진다.

 

시내 중심가에 구러우와 중러우가 있다. 마침 중러우 앞에 일본 NHK가 촬영을 하고 있다. 중러우에서 구러우 쪽 하늘을 바라보니 흐린 하늘에 햇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홍등이 잔뜩 걸린 건물은 밤이면 더욱 환하게 조명이 빛나는 식당들이다.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다.

 

구러우 북쪽으로 넘어가면 청진사 시장이 있다. 그야말로 종합시장으로 갖가지 특산품과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곳이 있어서 이곳 저곳 둘러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다. 매실로 만든 음료인 쏸메이탕(酸梅湯)을 시원하게 해서 팔기도 한다.

 

포도(葡萄), 콩소(豆沙), 살구씨(杏仁), 참깨(芝麻), 호두(核桃), 대추소(棗泥) 등을 재료로 만든 팔대괴나 십대괴를 보면서 과일 이름을 배우기도 한다. 하얀 실처럼 늘어나 은사탕(銀絲糖)이라고도 부르는 룽쉬쑤(龍須酥)도 있다. 생 과일도 많지만 말린 과일도 곳곳에 보인다.

 

시장에서 청진사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는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꽉 들어차 있다. 갑자기 어디서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가만 보니 자그마한 나무통 속에 밀가루를 넣어 찐 빵을 만들어 파는데 겉에 개구리 무늬가 있다. 개구리 소리는 가게 옆에 매달아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 대나무 줄기로 동물을 만들어 팔고 있다. , , 사마귀 같은 것인데 대나무로 만들기 좋은 동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파는 가게 앞에서 인상적인 소녀 얼굴이 한참 시선을 끈다. 비단 위에 그린 그림도 있는데 대가 집 규수가 피리를 부는 모습이다. 그 옆에 만도린도 오랜만에 본다.

 

좁다란 길 양편으로 갖가지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양을 판다. 그렇지만,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따지고 보면, 능력껏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게 장사라면 중국상인들만큼 그 타고난 판매 테크닉이 뛰어난 민족도 없을 것이다.

 

중국친구들(왼쪽 위), 거리의 후이족(오른쪽 위), 시안 시내(왼쪽 아래), 후이족(오른쪽 아래)

 

마침 중국친구가 전화가 왔다. 중러루 옆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달 전 칭다오 라오산 여행 길에 만나 자오저(趙哲)가 시안에 왔으니 꼭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시간이 나서 거리를 걸었다. 신화서점 부근이다. 거리에 서서 길거리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오징어꼬치를 먹는 곳에는 정말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 만두도 팔고 중국식 햄버거도 있다. 사람들 사이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이기도 한다.

 

싱바커(星巴克), 즉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기다렸다. 스타벅스 커피 잔 옆에 제가 쓰던 모퉈뤄라(摩托羅拉), 모토롤라 핸드폰을 두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전 세계의 브랜드가 이미 중국에서 생활 속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안 시내 쇼핑거리에 가면 정말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없는 게 없을 정도이다.

 

자오저는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았다. 한국 친구가 왔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는 불렀다고 한다. 마침 주말이라 모두 모이기도 좋았다. 유명 샤브샤브, 훠궈 체인점에서 맥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한국드라마와 연예인들을 좋아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친구도 있다. 베이징에서 경극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은 배우지망생이며 권상우와 <내 이름은 김삼순>을 좋아한다. 베이징에 오면 경극 취재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언제가 꼭 다시 만나자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너도 나도 시안에 오면 꼭 다시 만나자고 연락처를 적어준다.

 

중국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드라마와 연예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애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정말 푸짐한 저녁을 함께 한 이 젊은 친구들을 만나러 다시 시안에 가고 싶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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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2회] 고도 서안에 정착한 후이족 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안 후이족 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안 후이족 거리

 

고도 시안(西安)은 중국 패키지여행 코스 중 제법 인기가 높은 편이다. 실크로드나 티베트로 가려는 배낭여행자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중원 고도 시안은 진시황이나 병마용이 대표하지만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소수민족 거리인 후이민제(回民街)도 관광코스 중 하나이다, 기껏해야 한 두 시간, 야시장만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골목길이나 서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쉽다.

 

이슬람 문화를 간직한 채 중국에서 정착하면서 만들어먹던 요리들이 아주 많다. 그냥 중국요리라는 큰 범주에 넣어서 짬뽕처럼 섞어버리지 않는다면 중국 서북방면에서 살아온 이슬람교도들의 독특한 먹거리문화와 만날 수 있다.

 

시안 중심가인 중러우(钟楼)에서 구러우(鼓楼)를 지나면 바로 후이족(回族) 거리가 나온다.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清真寺)가 몇 군데 있고 주변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시장이고 외국인을 위한 관광코스이다.

 

청진이란 말은 이슬람교를 숭상하는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를 상징한다. 온통 홍색이나 황금색으로 뒤덮인 중국에서 초록색 이 두 글자가 있으면 무슬림이다.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는 15억이 넘는다. 중국은 6개 정도의 소수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데 자치주가 있는 후이족과 위구르족(维吾尔)이 가장 인구가 많다.

 

두 민족은 혈통이나 역사적 배경이 아주 다르다. 게다가 위구르족이 민족국가에 대한 애착이 강렬한데 비해 후이족이 자주 독립의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나 아라비아 출신 상인들은 자신의 민족 영토나 왕조를 세운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이슬람교를 숭상하면서 현지화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 서북방면에 정착한 후이족들은 종교적 신념이 유사하고 지역적 특성에 맞는 재료나 기후에 적합한 위구르족 먹거리와 아주 닮아있다. 후이족 서민들이 사는 시장 곳곳에서 파는 먹거리를 보면 대체로 후이족 전통먹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 눈요기 삼아 이색적이면서도 재미난 먹거리를 하나씩 맛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건포도가 드러간 양고기볶음밥 양러우좌판


사용자 삽입 이미지호도과자 허타오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누라과자 라오포빙


사용자 삽입 이미지말린 과일들

 

면을 주식으로 먹는 서북지방 사람들이지만 양고기가 듬뿍 들어간 양러우좌판(羊肉抓饭)도 시도 때도 없이 먹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양고기는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양고기뿐 아니라 채소까지 넣어서 기름과 함께 볶는데 양고기볶음밥이라 할 만하다. 중국에도 많은 볶음밥인 차오판(炒饭)과 달리 건포도를 넣는다. 신장(新疆) 투르판(鲁番)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 생산지이니 자연스레 말린 포도가 감초처럼 들어간다. 큰 그릇에 담아주는데 10위엔이다.

 

전해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한 의원이 말년에 병이 들었는데 어떤 처방으로도 낫지 않자 스스로 매일 먹는 밥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먹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도대체 무얼 먹었는지 묻자 이 밥을 만드는 처방을 알려줬다고 한다. 전설치고는 아주 단순하지만 양고기와 야채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공감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거리마다 이 양러우좌판을 파는 곳이 많다. 건포도 맛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포도 맛과 어울린 볶음밥이라니 두세 명이 한 그릇 함께 맛 봐도 좋을 듯싶다.

 

아침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이 양러우좌판을 먹다 보니 시장에는 건포도인 푸타오간(葡萄干)을 파는 곳이 많다. 검은색도 있지만 붉은색, 연두색도 있다. 다양한 종류의 포도가 생산된다는 뜻일 것이다. 품질에 따라 1(500그램) 12위엔에서 15위엔까지 한다.

 

말린 포도만 있는 것은 아니라 파인애플(보뤄, ), 망고(망궈, 芒果), 키위(, 미허우타오), 사과(핑궈, 苹果), 바나나(샹자오, 香蕉), 여지(리즈, 茘枝), (진쥐, 金橘) 등 다양하다. 우리는 술 안주나 심심풀이로 먹지만 밥 볶는데 함께 들어가기도 하니 사뭇 식습관이 다르다.

 

한 후이족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포장하고 있어서 보니 바삭바삭 구운 과자인 쑤빙()이다. 호두로 구운 과자인 허타오쑤(核桃酥)를 담고 있는데 누런 종이에 제품 이름이 적힌 빨간 종이를 덮고 포장하니 꽤나 값어치 있는 모양새가 난다. 밀가루에 설탕 넣고 기름에 구울 때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즈마쑤(芝麻酥, 깨과자), 화셩쑤(땅콩과자, 花生酥)와 용의 수염처럼 생겼으며 황실에서 먹었다는 룽쉬쑤(龙须酥)도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감 튀김 스쯔빙


사용자 삽입 이미지위구르의 오랜 음식 카오낭


사용자 삽입 이미지'낭' 진짜 어렵다!

 

거리 좌판에 재미난 이름의 과자가 하나 보인다. 바로 마누라과자라고 해야 할 라오포빙(老婆饼)이다. 밀가루 빵에 호박 속과 깨를 묻혀 만든 것이다. 총각이 매일 이 과자를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배필을 만나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일 것이다. 다만, 마누라고자라고 이름이 붙은 까닭은 옛날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고 집안어른이 병이 나자 마누라가 몸을 팔아 병간호를 했으며 남편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오랜 연구 끝에 이 과자를 만들어 팔아 다시 마누라를 데려왔다고 한다.

 

사실 라오포빙은 소수민족 먹거리인지 알 수 없고 원나라 말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부인이 휴대하기 편하고 영양가 있는 간편요리로 고안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후이족 거리에서 전통 먹거리는 민족 불문하고 다양하다.

 

가을철 별미인 감을 기름에 튀긴 스쯔빙(柿子饼)은 정말 독특하다. 명나라 말기 반란군인 이자성()부대가 시안에 진군하자 농민들이 대접해 알려졌다고 하는데 감을 열을 가해 요리를 만들다니 정말 발상이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 떫은 감에 술을 살짝 바른 후 밀봉해 며칠 말린 후 꺼내 즉석에서 튀겨 만든다고 하니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다. 하기야 곶감 만드는 시간에 비하면야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다소 한적한 거리를 걸어 들어가니 전형적인 위구르 사람이 무언가를 열심히 펼쳐놓고 있다. 간판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글자가 써 있다. 어떻게 읽는지 물어보고 나서야 낭()인줄 알게 됐다. 획순이 무려 31획이고 간략하게 줄인 중국 간체로도 25획이나 된다. 위구르족 등이 즐겨 먹는 밀가루 빵으로 화덕에 붙인 채 오래 구웠다고 해 카오낭(烤馕)이라 부른다. 마치 피자처럼 커다란 크기인데 반죽할 때 소금, 양파, 달걀 등을 함께 넣고 굽는 것이다.

 

이 빵은 고고학자들이 위구르족 고분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 정도로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바깥에 이 빵을 넓게 펼쳐놓았는데 안쪽으로 2명의 젊은 위구르족이 빵 화덕인 낭컹(馕坑)에 불을 계속 지피면서 반죽을 넣었다가 다시 빼내고 있다. 이 큰 빵 하나에 5위엔이다. 서너 사람이 나눠 먹어도 될 정도로 큰데, 사실 여러 명이 나눠 먹어야 겨우 다 먹을 수 있으니 우리 입맛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실음료수 재료 쏸메이펀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실음료수 쏸메이탕을 마시는 후이족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고기와 양고기 파는 라뉴양러우 가게


사용자 삽입 이미지거리에서 고기를 썰어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빵에 고기를 넣은 퉈퉈모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라촬 파는 후이족 아주머니...실제 파는 것은 마라탕!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라촬 굽는 장비

 

시안부터 실크로드 도시마다 손 쉽게 볼 수 있는 음료수가 쏸메이탕(酸梅汤)이다. 한여름 갈증을 풀어내는 훌륭한 맛이자 1잔에 1위엔 정도하는 서민적인 음료인데 사실 알고 보면 매실을 감초, 계피, 설탕 등을 함께 넣고 가루 낸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곳곳에 음료수의 원료 가루인 쏸메이펀(酸梅粉)을 파는 곳이 많다.

 

후이족 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것 중에 라러우(腊肉)가 있다. 이슬람교도 무슬림들은 돼지고기, 개고기, 당나귀고기, 말고기를 먹지 않지만 소고기나 양고기는 먹는다. 이 고기를 훈제한 것이 라러우이다. 라뉴양러우(腊牛羊肉)라고 쓴 고깃집이 많고 거리 좌판에도 흔하다.

 

그리고 고깃집에서는 정육점처럼 고기를 근 무게로 썰어 팔기도 하지만 밀가루 빵()에 훈제된 라러우를 사이에 넣고() 햄버거처럼 만든 라뉴러우자모(腊牛肉夹馍)를 팔기도 한다. 이 모()는 일반적으로 만터우(馒头)라고 하는데 발음으로 만두는 중국에서는 맨 빵을 말한다. 이 러우자모에 양고기를 넣기도 하는데 시안을 비롯해 중국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만하다.

 

러우자모와 비슷한 것으로 퉈퉈모(饦饦馍)라는 것도 있다. 이곳 시안 후이족들이 즐겨 먹던 것으로 러우자모와 만드는 방법은 대동소이하지만 이름만 다르다. 아라비아 말로 음식이란 말의 투얼무(尔木, Turml)에서 유래된 퉈(tuo)를 중복해서 쓴 것이다. 러우자모가 점차 퍼져 중국 여러 지역에서 팔리지만 퉈퉈모는 시안에서 처음 봤을 정도로 이름에서 풍기는 정서가 사뭇 종교적, 민족적이다.

 

이렇게 고기를 훈제해 햄버거처럼 먹기도 하지만 빵을 으깨고 거기에 고기가 들어간 국물을 넣어 먹기도 한다. 물기가 있다고 해서 파오모()라 부른다. 이 파오모 역시 이곳 시안의 전통요리이다.

 

고기라면 양고기꼬치인 마라촬(麻辣串儿)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전 중국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이제 많이 볼 수 있는 이 양고기꼬치 양뤄촬(羊肉串儿)은 사실 서북지역의 고유한 먹거리라 할 수 있다. 마라(麻辣)라는 말은 아주 심하게 맵다는 말인데 우리나라 고추처럼 매운 느낌과는 다소 다르고 산초라고 하는 라자오(辣椒)가 들어가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데,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렵다.

 

숯이나 연탄을 넣고 긴 판 위에서 자전거 살인 촬(串儿)로 고기를 꽂아 구울 때 이 라자오를 뿌려서 불에 굽는 것이다. 거리마다 마라촬을 굽는 장치가 많이 보이는데 밤이 되면 연기가 진동하고 고기 굽는 냄새가 사방을 뒤덮는다.

 

맥주와 함께 길거리에서 술 안주로 수십 개씩 먹기도 하는데 고치 하나에 1위엔 정도하니 그다지 비싸지도 않다. 전 중국이 이 양고기꼬치로 매일 밤 얼마나 많은 양들이 죽어나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양고기 꼬치의 진면목은 시안을 시작으로 우루무치(乌鲁木齐)에 이르는 서북지역이 최고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카이자이(라마단) 표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 음식가게의 불꽃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 마시는 후이족 청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청소부 아주머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거리의 연탄가게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거리에서 본 개인수도꼭지...자물쇠가 있어야~~


후이족 거리 주변은 관광지이지만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라마단이 끝나 육식을 하기 시작하는 카이자이(开斋)라는 말이 걸려 있는 것도 다른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주 마시는 팔보차(八宝茶)를 마시는 청년도 있고 길거리 청소부 아주머니도 보인다. 이들은 모두 후이후이마오(回回帽)라 부르는 단색의 모자를 쓰고 있다. 남자들은 평상시에는 흰색을 쓰고 겨울철이면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만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는 붉은색이나 파란색, 녹색 모자를 쓰기도 한다.

 

여자들은 머리를 다 가리는 두건 같은 것을 두른다. 보통 흰색이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검은색, 아이들은 녹색을 쓰고 무늬를 수 놓아 예쁘게 만들기도 한다.

 

생활공간 곳곳에는 마작하는 사람들도 많고 옷 가게나 잡화점도 일반 중국서민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탄 파는 가게도 보이고 식당마다 불꽃이 거리까지 내뿜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공동 수도가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야채를 씻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자물쇠로 잠긴 개인수도꼭지를 열었는데 수도꼭지마다 다 하나씩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민족이나 종교가 같더라도 서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생계문제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이 수도는 공동수도가 아니라 개인수도인 것이다. 열쇠가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다는 것이고 어디선가 사용량을 검침하고 있다는 것이니 정말 중국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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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69] 병마용과 청진사


8월 31일, 아침 7시에 중원의 '장안'으로 불리던 옛 도읍지, 씨안(西安)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 중 두 번째다. 우루무치(乌鲁木齐)에서 캠코더가 고장 나서 취재를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칭다오(青岛)에서 만난 중국친구도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에 어렵게 다시 온 것이다.

이번 6개월 취재 여행 중 씨안과 상하이에 두 번씩, 베이징은 세 번 들렀다. 그것은 곧 어느 다른 곳을 가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예정된 일정을 하나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상처로 남는다. 씨안에서 가까운 스촨(四川) 북부의 중국 최고의 말 트레킹의 고장 쑹판(松潘)을 가지 못한 것. 그리고, 상하이에서 갑자기 약속이 생겨셔 이우(义乌) 부근의 아름다운 자연 동굴 솽룽(双龙)을 지나친 것과 베이징 부근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청더(承德)를 포기한 것도 아쉽다.

기차 역 앞은 사람들이 참 바쁘게 움직인다. 아마 이른 아침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병마용(兵马俑)은 2006년에 갔던 곳이라 버스 타는 곳을 쉽게 찾았다. 1시간 가량 달린 버스는 종점이기도 한 진시황 동상 광장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유물이라 자랑하는 병마용. 2006년도 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가 온다. 박물관 입구까지 차를 탔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들어서니 비가 내리는데도 거대한 규모의 1호 갱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서체가 단정한 <진시황병마용박물관> 비석 뒤로 보이는 1호 갱 입구를 들어서니 멋지고 장엄한 모습의 병마용 갱이 등장한다. 사진으로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갱이다.

이 갱은 마차병과 보병이 연합 편성된 부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을 향해 있는 갱 앞쪽의 3개 열은 선봉부대이고 뒤쪽(서쪽)은 후방부대로 후방을 향해 서있다. 좌우 양 끝의 1개 열은 좌우로, 즉 남과 북으로 향해 있다. 가운데 부분에 있는 무사들과 마차가 주력부대이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 모습
ⓒ 최종명
병마용

병마용, 누가 만들었나?

이 1호 갱은 1974년 3월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 문화혁명을 주도하던 강청 등이 언론을 동원해 1주일 만에 중앙집권 통치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진시황을 위한 병마용'이라 선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는 문화혁명 말기로 정국이 혼란한 시점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낀 천징위엔(陈景元)은 평생을 바쳐 모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그의 주장을 2005년 12월, 중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보도했고 '큰 파문'(轩然大波)을 일으켰다. 천징위엔은 진시황 시기 100여 년 전 진나라 소왕이 어머니인 진선태후(秦宣太后)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1호갱에 있는 병마용
ⓒ 최종명
병마용

개관 이래 4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곳. 1호 갱에는 6천여 건이나 되는 병마용 유물이 있으니 정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천장 곳곳에 비가 새고 있어서 놀랐다. 그토록 자랑하는 박물관을 비가 샐 정도로 관리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으로 병마용의 이곳 저곳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기원전 시기에 이렇듯 아름다운 모양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감탄이 절로 생긴다.

천징위엔의 주장처럼 진시황이 아닌 진소왕이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기적의 예술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병마용의 모습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다른 표정, 동작, 자세가 그대로 묻어있다. 대부분 군복을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자연스럽게 손을 차려 자세로 서 있기도 하지만 손을 살짝 들고 있는 것도 많다. 말들도 몸집에 차이가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 색깔이다. 천징위엔의 주장을 보면 진시황은 통일 후 통치를 위해 옷을 모두 흑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병마용의 옷을 보면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나 빛이 다소 바래긴 했지만 녹색 빛이 남아있는 전투복 상의에 자세히 보면 자주색 빛깔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바지 차림이다.

2천년 이상 땅 속에서 숨쉬면서도 고유 색채 유지

병마용이 2천년 이상의 세월을 땅 속에서 숨쉬고 있으면서도 그 고유의 자기 색채를 유지한 것이 놀라울 정도다. 흙이 변하겠는가. 진소왕 이전 순장도 많았던 시대에 굳이 흙으로 병마용을 구웠기에 이렇듯 오랜 세월에도 빛나는 혼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전투 부대이구나 느낄 편대의 행렬이지만 간혹 그 배치가 군대라고 보기에는 느슨하게 서 있는 모습도 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병마용이 몇 개 보인다. 갑옷 속을 뚫고 지나간 자리처럼 허하게, 멀리서 보면 어둠의 빛깔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을 보는 마음 역시 허망해진다. 같은 세월을 견뎌왔으면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서러운데 구멍까지 났을까. 사람이 다 서로 그 본성이 다르듯이 병마용도 다 다름인가.

  
씨안 병마용박물관 3호갱의 모습
ⓒ 최종명
병마용

갱 속에는 좌우 사방에 감시원들이 서 있다. 그렇지만 마음껏 사진과 영상을 찍어도 된다. 자유롭게 감시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병마용을 담아도 된다. 최대한 줌으로 클로즈업해서 병마용 속의 마음까지 담아보려고 애를 써본다. 병마용에 푹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병마용은 1호 갱 외에도 2호 및 3호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4호 갱을 비롯해 많은 병마용은 아직 발굴 중이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이 묻혀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 100여 년 전 아무리 소왕이 통일의 밑거름을 쌓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방대하다니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병마용 3호 갱으로 갔다. 오목할 요(凹)자 형 모양의 무덤 속은 네 필의 말, 한 대의 마차와 예순여덟 개의 도용만 발굴된 520평방미터의 자그마한 갱이다. 약간 어두워서 무덤 곳곳을 세심하게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목이 잘리고 그 형체가 부서진 채로 그대로 있어서 오히려 보기 좋다. 억지로 정리하고 정돈했다면 불편해 보였을 것이다.

말 뒤에 몇 미터 떨어져서 말을 끄는 듯 양 팔을 앞으로 벌린 모습이 재미있다. 말이 네 필이니 병마용도 네 명이다. 그 동작이 다 다르다. 몸체도 다 다르고 두 개는 양 손을 주먹 쥐고 뻗어있고 두 개는 왼손은 펴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뻗어있다. 뻗는 각도도 다 각각 다르고 자연스럽다. 아쉽게도 세 개는 머리는 온전하지만 한 개는 목 위가 달아나서 썰렁하다. 이렇게 부서지고 떨어져 나간 유물들은 따로 보관하고 전시하지는 않는다.

3호 갱에서 2호 갱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멍회이친차오(梦回秦朝)라는 이름의 사진촬영소가 있다. 병마용과 함께 진나라 시대의 분위기를 느껴보라는 의미이다.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병마용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의 사진촬영소
ⓒ 최종명
병마용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

2호 갱은 6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중국 최대규모로 1300여건의 병마용, 마차 80량을 비롯 수많은 청동병기가 출토된 곳이다. 그 규모도 굉장히 크고 넓지만 무덤 속 병마용도 자연스레 전시하고 있다. 떨어진 목이 그대로 나뒹굴기도 하고 부스러기들도 그냥 방치한 듯 쌓여있기도 하다.

  
씨안 병마용박물관 2호갱 전시실에 있는 입사용
ⓒ 최종명
병마용

무릎 쏴 자세의 궤사용(跪射俑)과 서서 쏴 자세의 입사용(立射俑)과 말을 끌고 있는 안마기병용(鞍马骑兵俑), 중무장한 군리용(军吏俑)을 비롯 군사용(軍士俑), 장군용(將軍俑), 포용(袍俑), 개갑용(鎧甲俑), 어수용(御手俑) 등 다양한 형태의 병사용이 발굴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다양한 모습을 예술적 감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 자세나 동작들이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정말 사람의 자세와 동작을 본 떠 만들었다니 그 감각의 수준이 놀랍다.

2호 갱 옆 복도에는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 그 상태가 완전한 것을 따로 전시하고 있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전체 모습을 다 감상할 수 있다. 병마용을 찾은 사람들이 꽤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입사용의 자세는 마치 태권도나 태극권을 하는 자세와 비슷해서 흥미롭다.

3곳의 갱 속 수많은 병마용을 보고 나와서 병마용 박물관을 찾았다. 병마용의 발굴과 역사적 의의를 전시하고 있어서 처음 가는 사람들은 한번 볼 만하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참관한 기록사진조차도 흥미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것이 싫다면 굳이 볼 이유는 없다.

클린턴 전 대통령 가족이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1호 갱 속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기도 하다. 아마도 미국 대통령을 예우한 듯 보이지만 괜히 볼썽사납게 보이기도 한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에 있는 전시실에 클린턴과 힐러리가 1호갱 안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 최종명
병마용

중국 민간예술의 보배 '인상쟈오즈타오'

박물관 한쪽 옆 다른 방에는 상설전시장이 있다. 매번 전시 내용이 바뀌는 것 같다. 이번에 갔을 때는 대만의 유명한 채색도자기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관람했다. 무료이기에 봤는데 의외로 흥미를 끄는 것이 많았다.

바로 <인상쟈오즈타오(印象交趾陶)>라는 전시회이다. '쟈오즈'는 채색이란 뜻의 차이여우(彩釉)와 거의 비슷하니 채색도자기(彩釉陶)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쟈오즈타오는 명나라 말기부터 그 싹이 텄으나 청나라 도광제 시대인 약 200여 년 전 광둥 지방에서 발원했다고 한다.

이후 대만에서 그 예술적 기품이 더욱 꽃 폈으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독특하리만치 진한 색감이 도자기 속에 묻어 있기도 하거니와 마치 당삼채를 보는 듯 착각도 든다. 중국 민간예술의 보배라 일컫기도 한다.

대만출신의 린광이(林洸沂) 선생이 전시한 다양한 도자기를 보는 즐거움이 병마용 못지 않다. 그렇다. 역사공부하기 좋은 소재들이 넘친다. 관우, 관평, 주창 등 삼국지 인물들이 반갑고 노자(老子)와 토지공(土地公)도 있고 일반민중들이 하늘과 땅의 신이라 믿은 천후(天后)인 마조(妈祖)와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顺风耳)도 있다.

관세음(观世音), 보현(普贤), 문수(文殊) 보살도 있으며 자항(慈航)과 강태공(姜子牙)도 등장한다. 비의 신 우사(雨师)와 바람의 신 풍사(风师)도 있다. 8대 용왕 중 마나사용왕(摩那斯龙王), 그리고 진시황과 병마용도 있다.

  
씨안 병마용박물관에서 본 채색도자기 전시실의 12간지 중 개 도자기
ⓒ 최종명
병마용

부귀를 상징하는 쌍사자 놀이개라는 부귀사진(富贵狮镇), 토끼가 약을 찧는 그림접시 월궁오서도반(月宫五瑞图盘), 호랑이가 가져다 주는 '복'이라는 오복임문반(五福临门盘), 행운과 경사를 뜻하는 길상길경(吉祥吉庆), 전설 속에 등장하는 행운의 상징 마고헌수(麻姑献寿) 등등 역사 속의 인물이나 전설을 담은 것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렵기 그지 없다.

무수히 등장하는 동물들처럼 직관적인 것도 있다. 역사, 종교, 신화 속 인물들과 함께 등장해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동물의 역할인 것이다. 토끼와 호랑이가 출몰하고 관세음과 우사는 용을 타고, 노자는 소를 타고 풍사는 호랑이를 타고 보현은 코끼리를 타고 등장한다. 12간지 동물들이 형상화된 작품들이다.

이슬람을 종교로 하는 독특한 민족 '회족'

여전히 비가 내린다. 다시 주차장으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16시간 밤 기차를 타고 내리자마자 병마용을 보러 왔으니 피로가 몰려올 만도 하다. 씨안에 가면 늘 묵는 민박 집에 짐을 놓고 몇 시간 잠을 잤다. 저녁에 중국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에 그때까지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다. 무엇을 할까 생각 끝에 청진사 회교사원을 가기로 했다.

중원의 중심, 역사적 전통, 고도로서의 자부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내의 종루와 고루를 지나 재래시장과 공예품 거리가 어울려 있는 청진사 골목길을 걸었다. 청진사 부근은 무슬림(穆斯林) 거주 지역이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재래시장이 형성돼 있어 관광객들의 좋은 쇼핑 코스이기도 하다.

청진사는 고루 북편 변두리에 바로 근접거리에 있는 회족 사원이다. 회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이지만, 인구가 900만 명에 육박한다. 회족 자치주가 닝샤를 도읍으로 있지만 이곳 씨안에도 꽤 많은 회족이 산다. 회족은 이슬람을 종교로 하는 독특한 민족으로 아쉽게 자기 언어와 전통문화를 보유하지 못한 참 이상한 민족이기도 하다.

  
씨안 시내에 있는 회교사원인 청진사 모습
ⓒ 최종명
씨안

중국에는 회교족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도시마다 이슬람사원이 꼭 있는 편이다. 이 씨안 청진사는 당나라 때인 서기 742년에 처음 건조됐다고 한다. 이후 중건이 수없이 이뤄졌겠지만 나름대로 옛 정취를 마음껏 담고 있는 아주 인상적인 사원이다.

중앙통로를 통해 길게 좌우로 길이 열려 있는 형태라 신비롭기도 하다. 건축조형물을 빼고는 온통 싱그러운 나무로 덮여 있어서 공기도 맑다. 마침 해질 무렵이라 사원 단청 사이에 새들이 짹짹거리며 바쁘게 날아다니며 멋진 조화와 낭만적인 평화를 연출하고 있다.

청진사 감상에 한참 빠져 있는데 꼬마 여자아이 둘이서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알고 봤더니 이곳에서 노는 것을 자기 아빠가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놀러 왔다가 다시 나가기 위해 보호자처럼, 또는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싶다.

하여간 귀여운 두 아이랑 본당 앞에서 두루 살펴보다가 아이들과 같이 돌아 나왔다. 왼편으로 관리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을 지날 때 아이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내 보폭에 맞춰 지나간다. 하여간 뭔 사연이 있겠지만 노는 짓이 귀여운 꼬마아이들. 아, 회족 아이들이다.

  
씨안 청진사에서 만난 아이들
ⓒ 최종명
씨안

마침 중국친구가 전화가 왔다. 청진사를 나와 종루 옆 커피샵에서 기다렸다. 자오저(赵哲)는 친구들을 잔뜩 불러모았다. 한국 친구가 왔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마침 주말이라 모두 모이기도 좋았다. 둥라이순(东来顺)이라는 유명 훠궈 체인점에서 맥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 역시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한국드라마와 연예인들을 좋아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친구도 있다. 베이징에서 경극을 전공하며 배우를 꿈꾸며 권상우와 <내 이름은 김삼순>을 좋아하는 친구는 경극 취재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아쉽게 아직 못하고 있다.

다음날, 시내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 다음 행선지인 우한(武汉)으로 떠났다. 얼마 전 라싸에서 만난 리아씨가 아는 말레이시아 화교인 아이링(爱琳)가 쓴 책을 소개해줬다. 난징(南京)에서 공부했으며 한국어도 곧잘 하고 한국여행을 포함해 전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6~7개 국어를 한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결국 씨안에 와서야 겨우 그 책을 사게 된 것이다. <再穷也要去旅行>. 번역하면 '다시 가난해져도 여행을 할래' 정도일 것이다. 중국어도 공부하면서 여행기도 읽으면서 우한까지 다시 16시간 동안 친한 벗처럼 옆에 끼고 갈 수 있게 됐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중국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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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50] 씨안 시내와 따옌타 분수 쇼

7월 6일, 우루무치(乌鲁木齐) 공항으로 가는 길에 중국 친구에게 단문메시지를 보냈다. 4월 칭다오(青岛)에서 만난 씨안(西安)이 고향인 짜오저(赵哲)를 7월 10일경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조금 일찍이긴 해도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곧 답신이 왔다. 아니 벌써 오는 거냐. 일자를 맞추느라 일정을 당겨 출장으로 우한(武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의 여자친구도 메시지가 왔다. 자기는 하얼빈(哈尔滨)에 있는데, 남자친구가 너무 안타까워한다는 것.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다려줬는데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따지고 보면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여행길이 아닌가.

씨안 씨엔양(咸阳) 공항에 도착했다. 빠른 기차인 터콰이(特快)로도 30시간이 걸리는 길을 비행기를 타니 3시간 만에 확 날라왔다. 2006년에 처음 씨안에 왔을 때 정말 황홀했던 씨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지창따바(机场大巴), 공항버스를 탔다. 시내로 들어서자 정말 예전 그대로, 옛 중원의 수도답게 고풍스러운 도시미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당시 묵었던 씨샤오먼(西梢门) 근처 민박집으로 다시 갔다. 1년 만에 다시 갔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이사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6개월 일정으로 여행 중이라니 놀라워한다. 짐을 풀고 다시 시내 야경 구경을 나섰다.

  
▲ 씨안의 야경 시내 중심에 있는 중러우 부근 광장
ⓒ 최종명
씨안

쭝러우(钟楼)와 구러우(鼓楼)가 나란히 있는 시내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아이들이 야광팽이를 돌리며 놀고 있고 한쪽에서는 한밤중인데도 하늘을 향해 연을 날리고 있다.

주변 건물들은 모두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있다. 시내 중심거리를 모두 휘황찬란한 불야성으로 꾸민 것은 씨안이 중국 서부대개발의 거점도시로 육성하면서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흥 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은 시내에 수많은 세계적 명품 브랜드들이 다 이곳에 진출해 있는 것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중국의 발전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명품을 구매할 정도로 소비 수준이 높아진 것은 그만큼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것이다.

  
씨안 베이위엔먼 거리의 풍경
ⓒ 최종명
씨안

구러우(鼓樓) 북쪽으로 베이위엔먼(北院门) 거리에는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찰인 청진사(淸眞寺)가 있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회족(回族) 시장골목이 있다.

이곳은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곳으로 패키지로 여행을 오는 한국 관광객들이 한 번쯤을 왔을 먹자 골목이다.

온갖 공예품이나 생활용품들을 팔기도 하고 산씨(陕西)성 특산품들을 팔기도 한다. 마라탕(麻辣烫)이나 쟈오즈(饺子)는 물론이고 양뤄촬(羊肉串) 등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많다.

머리에 흰 모자를 쓴 회족들이 서툰 영어로 서양 사람들과 어울려 장사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두루 오랜만에 씨안 골목을 돌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같은 방을 쓰게 된 한국 학생도 돌아와 있다.

라싸로 가려고 이곳 민박집에 묵고 있는데 기차표를 아직 예매하지 못해 걱정하더니 이내 잠이 든다. 배탈이 나서 이틀 동안 꽤 고생을 한 모양인지 핼쑥해 보인다.

인사동 거리보다 훨씬 한가롭고 조용

7월 7일 아침 눈을 떴다. 간밤에 늦게 돌아온 주인아저씨랑 반갑게 해후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조선족 동포다. 예전에 왔을 때 밤마다 둘이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친해졌는데 다시 찾았으니 서로 얼마나 반가웠으랴.

아침을 먹을 때서야 한국 학생의 정체를 파악했다. 현수는 배를 타고 톈진(天津)으로 들어와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라싸로 가는 길이다. 게다가 네팔, 인도를 거쳐 6개월 이상 여행할 계획이라니 혼자서 참 대단하다. 그래서, 오늘 일정을 물으니 특별한 것이 없다고 하고 배탈도 좀 나은 듯하니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우선, 캠코더 수리점으로 갔다. 우루무치 보다 더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 그래서 예약했다가 이미 베이징 가는 티켓을 구한지라 그냥 나왔다.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씨안 슈위엔먼 거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
ⓒ 최종명
씨안

서안 시내 중심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슈위엔먼(书院门) 거리에 갔다. 비석들의 박물관인 베이린(碑林)과 잇닿아 있는 풍물거리로 말 그대로 '문물천지'다. 이모저모, 구석구석 살피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길 좌우로 건물마다 상가가 있고, 길 한가운데는 노점상들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서울 종로의 인사동 거리를 걷는 기분이 들어 한결 마음이 들뜬다.

인사동에 비해서는 훨씬 한가롭고 조용하다. 여느 중국의 풍물거리라면 흥정소리에 시끄럽기 일쑤나 이곳은 아주 차분하다. 호객 행위도 별로 없고 관광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한가로이 구경하도록 해주니 마음이 편하다.

길거리에서 붓글씨를 쓰거나 불화(佛画)를 그려 팔기도 한다. 피잉(皮影) 등 갖가지 종류의 공예품과 민속품들도 값싸게 살 수 있다.

고풍스러운 거리를 배경으로 귀엽게 생긴 모델의 사진을 촬영 중이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고 옆에서는 조명 반사판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니 자연스럽게 웃는다. 그것은 아마도 외국인 여행객이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관심에 대한 미소였을 것이다.

나름대로 예쁘게 얼굴 화장도 한 것을 보니 전문모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학생인데 실습사진을 찍는 것일 수도 있겠다. 워낙 진지하게 촬영 중이라 말을 붙이진 못했다.

  
씨안 슈위엔먼 거리에서 사진 촬영중인 사람들
ⓒ 최종명
슈위엔먼
 
씨안은 진나라 이래 당나라에 이르는 12개 왕조의 수도로 무려 1100년을 지속해 온 도시다. 장안(长安)으로 유명한데 명나라 홍무(洪武) 2년인 서기 1369년에 서안부(西安府)를 설치한 이래 이름이 변경됐다.
 
가장 번성했다는 고대 도읍 당나라 때는 분명히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면 홍등과 어울린 조명이 환상적이고 낮에는 풍물거리를 돌아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아주 강력한 도시정화 작업 중인 씨안 슈위엔먼
 
  
▲ 지엔쯔 씨안 슈위엔먼 거리의 종이오리기인 지엔쯔를 파는 공예품 가게
ⓒ 최종명
씨안
 
시 정부가 아주 강력한 도시정화 작업 중이라고 한다. 환다오(环岛) 가운데 있는 중러우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큰 길이 뚫려 있고 각각 동서남북 따제(大街)로 도로 이름이 붙여졌다. 각 따제의 끝을 따라 방형(方形)으로 성곽이 있다. 성곽 안은 번화가로 조성된 것이다.
 
적어도 시 중심은 환상적인 도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택시 운전사에게 정말 도시가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아주 다르다고 한다.

슈위엔먼에서 난따제(南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점심시간이다. 현수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었다. 물론 혼자 다니면 먹기 힘든 그런 요리를 말이다. 슬쩍 물었더니 하는 말이 참 돌발적이다. 여행 중 원칙이 "돈을 빌리지 않는다, 남에게 얻어 먹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기특하다 싶다.

결국 나눠내야 하는 것이라면 비싼 음식을 먹기 어렵다. 하루에 정해진 비용으로 어렵게 여행하는 친구라 부담을 주기 싫었다. 가까운 만두가게에 가서 쟈오즈(饺子) 두 판을 시켜서 점심을 해결했다.

  
따옌타를 배경으로 동행인 현수
ⓒ 최종명
씨안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씩 하며 오후 내내 시간을 보냈다. 아르바이트해서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삶의 변환을 모색하러 여행을 다닌다는 야무진 친구다. 생각도 참 건전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정직한 삶의 태도가 느껴져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여행하는 목적도 설명해주고 인생 선배로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현수는 나중에 라싸에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리고 티베트의 ‘싸미에의 7인’이라는 작은 모임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현수와 버스를 타고 따엔타(大雁塔)로 갔다. 시내 성곽인 구청(古城) 남쪽 츠언쓰(慈恩寺)에 우뚝 솟아 있는 탑으로 삼장법사(三藏法师)로 알려진 현장(玄奘)이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이곳에는 아주 거대한 분수 쇼가 밤마다 벌어지는데 이것을 보러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후 6시 즈음 따엔타에 도착하니 바닥에 물기가 잔뜩 있다. 낮에도 분수 쇼가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광장이다. 분수 쇼가 시작되기 전에 사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 쉰 중국 고대부터 이어온 취주악기인 쉰
ⓒ 최종명

마침 쉰(埙)이라 부르는 악기를 파는 가게가 있다. 현수에게 악기에 대해 설명해주니 재미있어 한다. 쉰은 찰흙으로 도자기처럼 구워 만든 일종의 취주(吹奏) 악기로 타오쉰(陶埙)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만 있는 독특한 악기로 고대 중국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되던 때부터 알려졌다 하니 꽤나 오래된 악기이다.

동그랗게 생긴 도자기 속에 구멍이 다섯 개나 여섯 개가 있어 그걸 불면 청아한 소리가 난다. 음계도 있고 악보도 있어서 지금도 공예품 파는 곳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선물로 사주면 좋을 듯하다.

삼장법사의 석상이 있는 남쪽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이곳에도 장사꾼들이 많은 것이다.

따엔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는 거리에는 당나라 시대의 풍물을 보여주는 10여 개의 동상들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리에 그냥 노출되어서인지 동상의 손이나 머리 등이 반질반질할 정도로 반짝거린다.

당나라 시대 걸출한 무용가이던 공손대랑(公孙大娘)이 멋진 모양으로 칼춤을 추는 모습도 있고, 민간오락인 피잉(皮影)을 연기하는 악사, 부채를 들고 앉은 제갈량(诸葛亮)도 있다. 또한, 의술로 세상을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현호제세(悬壶济世), 몸싸움을 하는 각력쟁웅(角力争雄),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가두호락(街头胡乐) 등 재미있는 한자어로 제목을 붙인 조각 소조상들이다.

  
씨안 따옌타 광장에 조성된 조각상들, 그중 공손대랑이라는 무용수
ⓒ 최종명
씨안

광장에는 또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물로 붓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들 틈에서 한 꼬마가 예쁘게 ‘家’를 쓰고 있다. 수서(水书)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런 서예는 중국 공원마다 흔히 볼 수 있다. 어린 아이의 붓 놀림이 꽤 정갈하다. 보통 솜씨는 아니다.

엄청난 양의 물이 하늘로 치솟는 분수 쇼
  
물을 묻혀 바닥에 붓글씨를 쓰고 있는 아이
ⓒ 최종명
물붓

저녁 8시가 넘었다. 어둠도 내리고 사람들도 하나 둘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분수 쇼가 벌어진다. 시간을 맞춰 민박집의 다른 한국학생들 4명도 합류했다. 모두 6명이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저녁 8시 30분이 되니 드디어 엄청난 양의 물이 하늘로 치솟으며 분수 쇼가 시작됐다. 따옌타에도 조명이 들어왔다. 60미터에 이르는 탑이 조명 속에서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분수가 뒤덮은 하늘은 온통 물의 나라를 만들어버렸다. 바닥의 작은 구멍을 통해 솟아오른 물의 양이 엄청나다.

장장 1시간가량 진행되는 분수 쇼를 찍느라 온몸이 다 젖었다. 어디서 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다.

카메라가 젖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고 분수 속에서 한참을 놀다가 갑자기 카메라가 걱정됐다. 밖으로 나와서 보니 다행히 고장 나지는 않았다. 캠코더 고장으로 마음이 영 우울한데 카메라까지 그럴 수는 없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따옌타 분수쇼
ⓒ 최종명
따옌타

이 분수 쇼를 이곳에서는 샘이 솟는다는 뜻이겠지만 펀취엔(喷泉)이라 부른다. 이곳은 아시아 최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규모라고 하는데 정말 장관이다. 이곳을 음악과 함께 물이 솟는다 하여 음악분수(音乐喷泉)라고도 한다.

쇼가 끝나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빠져나가기 시작이다. 우리 일행도 택시를 잡기 위해 한참을 걸어 나왔다. 겨우 두 대에 나눠 탔다. 숙소 앞 길거리 양고기 꼬치 집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현수와는 주로 여행 이야기를 했고 다른 학생들과는 텐진(天津)에서의 어학연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 자리 바로 옆에 민박집에 숙박 중인 다른 한국 학생 2명이 또 있었다. 샤오씽(绍兴)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 대학생은 아니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중국어를 배우러 온 친구들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니 주인아저씨가 맥주를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 톈진에서 중국 친구에게 선물 받아 계속 보관해오던 명주인 펀쥬(汾酒)를 꺼냈다. 모두 한 잔씩 건네니 역시 명주라며 좋아한다. 새벽까지 얼큰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잤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중국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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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을 '기러기가 내려온 곳'이라 해서 '낙안'(落雁)이라 부른다 했다.


중국사람들은 <화산>의 서봉을 '연화(蓮花)라 부른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꽃에 비유하는 걸까.


동봉은 '해뜨는 아침'을 비유해 '조양'(朝陽)이라 하며

북봉은 '구름'을 비유해 '오운'(五云)이라 하며

중봉은 '여자'를 비유해 '옥녀'(玉女)라 한다.


모두 산봉우리에 어울릴 만하지 않은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상의 형세나 자태를 연상하고 또 비유하길 좋아하나 보다.

동서남북 방향보다는 문학적 비유법이 훨씬 사람들의 심정을 울릴 수 있으리라.

위치에 대한 구체성보다는 이런 추상법이 반드시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화산>의 봉우리를 이름짓던 사람들의 멋진 기교가 떠올라 기분이 좋긴 하다.



남봉에서 바라본 서봉인데, 온통 바위로 형성된 봉우리인데다가

서봉 오르는 길은 무협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험한 '난맥'처럼 보인다.



남봉 하산 길은 곧바로 이곳으로 연결된다.

달려내려가다가 곧추 오르면 서봉의 등산로가 반갑게 맞이 한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낮게 머물던 구름이 서봉을 타고 오른다.

이 구름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해 거의 5~10분 간격으로

서봉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맑고 푸른 하늘은 구름의 변덕을 벗삼아 변함없이 사람들을 맞이 한다.



산에서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면 모두가 아주 당연하다듯 찍어준다.

등산객은 서로 벗이던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친구처럼 말이다.


한국 항공사의 중국 황산 편 광고의 맛갈스런 카피는 그저 '니하오'(안녕하세요)가 아니던가.


<화산>에서 마주 대한 중국사람들에게 '니하오'라고 반갑게 인사하면

대부분 '니하오! 니하오!' 빠르게 꼭 두번 이상씩 답한다.

등산이 일상적인 취미가 아니거나, 이런 인사가 중국의 명산에서는 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봉에 오르면서 입고 갔던 옷이 완전히 땀에 젖어 옷을 갈아입었다.

목에 걸은 것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산 아래에서 샀던 것인데,

흰 옷으로 갈아입으니 선명하게 드러나 버렸다.



서봉 가는 길 한쪽에 고양이가 길을 막아 앉아 있다.

이런 높은 곳에 왠 고양이!

주인은 어디가고 혼자 여기 이렇게 노려보고 있는 것인가.

혹시 산고양이는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여간 알 길 없는 고양이 한마리가 잘 다듬어진 등산길에 편하게 앉아 사람들을 관람하고 있다.



<화산> 서봉, 해발 2086.6 미터에 올랐다.

서봉에 오면서 혼자 여행하는 점잖은 중국사람 한명을 사귀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조금씩 섞어 대화를 했는데, 서봉 내내 같이 다니니 사진 찍기는 훨씬 편했다.

중국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하는 경우를 못 봤기도 하거니와

나이도 50대이고 사람에 대한 배려나 말투, 차림새까지 아주 인텔리였다.



그 중국친구가 조금 모험심이 많았다.

철망을 넘어 저 자리에 서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 찍어줬더니

이렇게 포즈를 취하란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몸 중심을 철망 쪽으로 두면서 제발 빨리 좀 찍으라고 좀 호들갑을 떨었다.

중국친구는 이 동물 머리처럼 생긴 바위에서 나보다 한발 더 나가 용맹을 떨쳤다.

산에 가서 모험하지 맙시다.



서봉을 내려오면서 보니 구름이 많이 사라졌다.

서봉 내려오는 길도 좌우로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보통 등산을 하면 오르는 길이 늘 신났고 내려오는 길은 보통의 느낌인데

<화산>에서는 내려가는 길도 볼만한 장면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등산로가 이 거대한 암석 하나에 의지해 만들어졌으니 정말 거대한 악산이다.

등산로가 끝나는 지점 오른쪽이 케이블카 길(索道)이 있고

왼쪽으로 다시 올라가면 바로 북봉이 있다.


일일투어 여행단과의 약속시간이 1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북봉이 높지 않으니 빨리 다녀올 수 있겠다 싶어 빠르게 북봉으로 향했다.



북봉으로 오르는 길에 물고기 모양의 바위가 인상적이다.

물고기 턱 밑에 그늘진 돌의자가 여섯개 옹기종기 있다.

산꼭대기에 그늘이 많지 않으니 이 물고기가 등산객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음이다.



멋드러진 나무가 참 많은 <화산>이다.

역사의 기운을 머금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무들을 만나는 게 즐겁긴 한데

뭔가 기원의 대상만 있으면 잔뜩 붉은 염원을 묶어버리니

중국에서 이런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될 날이 있을까 모르겠다.



북봉 정상에 오르니 정말 반가운 사람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중국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이다.


김용은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소호강호'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녹정기' 등

우리에게도 낯익은 무협영화들의 원작자로 중국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이고 드라마나 영화화 되어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천룡팔부'는 중국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1924년 절강성에서 태어났고 소수민족인 망족(望族) 출신이다.

그는 이미 여든 살이 넘었음에도 지금도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최근에는 영국의 한 대학으로 다시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무협에 나오는 '화산파'가 이곳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소림사는 '숭산'에 있고 화산파는 '화산'에 있는 것인가.



다른 봉우리에는 없는데 북봉에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즉석 사진도 찍어주는데, 요즘 누가 자기 카메라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중국사람들도 <화산>에 관광 올 정도면 당연히 카메라와 함께 오는데 말이다.

그래도 즉석 사진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니 장사를 하겠지.



북봉에서 내려가다가 반대편, 그러니까 남서편으로 긴 길이 보인다.

저 길로 나도 올랐다가 내려왔다고 생각하니 위험천만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었으니 오르는 이보다는 내려오는 이가 대부분이다.



내려오는 케이블카에서 산 아래를 보니 섬뜩하다.

줄 하나에 의지해 몸무게가 6~80킬로그램의 어른을 여섯명이나 태우고

일년 내내 올랐다 내렸다 한다고 생각해봐라.

아직 한번도 사고가 없었다는 이야길 들었어도 겁나는 건 마찬가지다.



다시 쳐다봐도 과연 저걸 타고 해발 2000미터에 올랐다고 생각하니 조금 무섭다.

하여간, 땅에 내려오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다시 산입구에 있는 일일투어 관광버스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화산>에서 운행하는 이동차량을 다시 타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섬서 '십대괴'가 있어서 눈여겨 봤더니

섬서성의 열가지 독특한 풍물을 소개한 것이었다.

이 지방에 고추가 많이 생산되는 가 보다.

'비록 후난성과 사천성 요리가 맵다고 하나 옛 섬서성 요리의 매운 맛에 비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만화가 좀 촌스럽긴 했으나, 이런 순박함이 오히려 그리웠던가 보다.



중국 종업원들은 왜 이렇게 자주 조는 지 모르겠다.

관광상품이란 게 다 심천이나 광주 등 대량생산지에서 올라온 거라 지나치려고 해도

꼭 이렇게 눈에 띄는 모습이 있어 한번쯤 쳐다보게 된다.



산 아래까지 이런 길을 2~30분이나 더 내려가야 한다.

마침 맞은 편에서 올라오는 버스가 지나친다.



<화산>은 우리나라의 여느 산과 사뭇 다른 듯 하다.

일단, 위로만 줄기차게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그렇고

맨땅이 거의 없을 정도로 험악한 암석으로만 대부분 산세를 형서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서안에 와서 <화산>을 놓치면 후회한다고 한 사람 말이 참 고마웠다.


산을 오르면 사람이 커진다 하던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배운다 하던가.


홀로 <화산>을 등정하면서 가슴 속에 남겨진 많은 편린들도 끌어올렸다.

<화산>에서 삶의 지친 흔적을 다 지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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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는 중국 5대 명산 중 하나라는 <화산>이 있다.

중국사람들은 5대 명(名)산이라고도 하고 5악(岳)이라고 부르는데,

5대 명산으로 딱 규정된 말은 찾아보기 힘든 거 같다.


다만, 5대 악산이라고는 분명히 기록에도 많이 있다.

동악,서악,남악,북악,중악으로 부르면서 대접해 주는 것이다.

이중 서악이 바로 섬서성 화음시의 <화산(華山)>이다.


동악은 산동성 태안시에 있는 <태산(泰山)>

남악은 호남성 장사시에 있는 <형산(衡山)>

북악은 산서성 혼연현에 있는 <항산(恒山)>

중악은 허남성 등봉시에 있는 <숭산(嵩山)>


시내에서 약 2시간 30분 차로 달려야 하니, 꽤 먼 편이어서

300위엔을 내고 일일투어를 따라갔다.

300위엔에는 교통비, 입장료, 케이블카 사용료가 다 포함된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산 입구에서 이른 점심을 먹으라 하더니

20여분 이동차량을 다시 타고 케이블카 입구까지 바래다 주더니

오후 4시 30분까지 알아서 등산하고 내려오라면서, 자유시간이란다.



케이블카는 가파르게 오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케이블카 입구이다.

중국어로 케이블카로 연결된 길을 '쑤어다오'(索道)라 한다.


거의 10분 가까이 안절부절, 이거 중국제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가이드 말로는 싱가포르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니, 더 걱정이었다.

싱가포르에 이렇게 높은 산이 있던가.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니 아래에 등산로가 있다.

아무도 저 길을 이용하지 않지만, 케이블카가 도입되기 전에는 저 길을 따라 등반했을 것이다.


더운 날, 저 길을 따라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에 오른다 생각하니 심란하다.

물론 등산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실례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해발이 높으니 등산로도 대체로 가파르다.

악산의 특징이 돌이 많으니 돌을 넘어가긴 해야겠지만,

이렇게 자연석을 깨서 길을 만들었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연미 넘치는 거석에는 여지 없이 글을 새겨넣는 중국사람들인지라 영 아쉽다.

다만, <화산>에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는 눈에 띄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기괴한 암석이다.

쓰러질 듯 넘어지지 않고 수만년을 버텨온 형상이 장하다.


자연에다 인공으로 써넣은 글씨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 암석의 자태를 탐낸 누군가가 써넣었음직한 글씨 네 글자가 또렷하다.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한줄기 빛(雲飛孤光)' 뭐 이 정도의 뜻인가.



<화산>에는 5봉(峰)이 있다.

지도를 펴놓고 보니, 도저히 시간에 맞춰 다 오르긴 힘들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높은 남봉을 먼저 오르고 서봉을 거쳐, 시간이 되면 북봉을 다녀올 요량이다.


남봉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니 생각보다 멀지는 않다.

산 아래부터라면 아마 5~6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리라.


<화산>은 남면과 서면을 비롯해 삼면이 모두 험준한 절벽이라 한다.

그래서 자고로 <화산> 오르는 길은 케이블카 입구가 있는 동면에서 오르는 길 뿐이란다.



등산로 중간에 짐을 지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민요를 불러제끼는 게, 등산의 피로를 가시게 해주는 듯

중국사람들은 흥을 내며 따라부르기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신나서 돈도 주고 하니 일종의 등반도우미(?)인데

알고보면 쓰레기 청소부들이다.



'잔도'를 한참 오르니 사람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직 정상이 아니건만 저 멀리 악산의 자태가 드러나고 케이블카에서 내렸던 곳도 보인다.



남봉과 서봉으로 향하는 길에 금쇄관(金鎖關)이 딱 버티고 있다.

이곳에는 자물쇠가 잔뜩 잠겨 있다.


자신의 소원을 담아 이곳에 묶어 두면 성취한다는 이야기이다.

빨간천을 묶어두는 것은 산동성 제남의 천불산에서도 보긴 했지만

자물쇠는 처음이라 재미있다는 생각이다.


한 아가씨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려니

갑자기 수줍게 돌아서서는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게

마치 비밀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행세하는 걸 봐서는

자물쇠를 잠글 때 아무도 모르게 소원을 담아야 하는 가 보다.


중봉과 동봉은 다녀오려면 힘들기도 하거니와,

사람들 말로 서봉과 남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곧장 올라가야 할 성 싶다.



'바오지에'(保潔)란 말은 '청결을 유지'하는 말이어서

'보결상(箱)'이라 하면 쓰레기통이라고 부르는데, '보결지(池)'라고 하니

쓰레기를 담는 연못이라는 말이 된다.


아마도 산이니 그렇게 부르는 게 훨씬 낭만적이게 느껴진다.

등산로 곳곳에 수없이 많은 '연못'이 있고 관리인들이 오가며 치우고 있다.


<화산> 전체가 당연히 금연으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은 지키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핀다.

제발, 이 '연못'에라도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사람들이 낮은 봉우리에서 <화산> 다녀온 티만 내고 내려간다.

특히, 최고봉 남봉은 다가갈수록 인적이 드물다. 힘들긴 하다.


하늘과 잇닿은 듯한 한적한 계단길에서 남봉에 대한 기대가 사뭇 크다.



<화산>의 절경은 뭐니뭐니 해도 산 곳곳에 당당하게 서 있는 고목들이다.

고산지대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들이야말로

거칠 것 없이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내니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만하다.


하늘과 구름, 돌과 나무의 상생의 산수화가 <화산>에는 절묘하다.



남봉 바로 코밑에 비스듬히 하늘을 향하고 산맥을 아우르고 있는 나무.

비와 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잘 자라고 있음이다.



남봉 정상에 가장 높이 굳건하게 뿌리 박고 있는 나무이다. 정말 장하지 않은가.

서악 <화산>이 중국 서북 방면에서 가장 높다 하니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화산극정(極頂)'인 남봉이다.

해발 2160미터의 정상은 매우 좁고 위험하다.

겨우 10명 정도 들어차면 불안하기조차 하다.


힘겹게 정상에 올라보니, 또 내려갈 길이 걱정이다.

산이 인생에 비유되니, 산 정상에 오르면 그 비유는 여지없이 떠오른다.


중국사람들은 아름다운 남봉을 '낙안'(落雁)이라 부른다.

'기러기가 내려와 노는 곳'이야말로 바로 여기란 말인가.


남봉에도 자물쇠와 빨간천으로 된 소원이 많이 달려 있다.

비록 자물쇠와 천은 사들고 올라오지 않았지만

인생을 비유해 <화산> 최정상 남봉에서 가벼운 소원 하나를 심고,

<화산>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곳이라는 서봉 가는 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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