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영상 1 - 태옥척

정말 명불허전...북경서역에서 기차로 안양동역 내려 빵차로 1시간 반 달려 림주대협곡 도착. 오후에 태옥척太行屋脊을 산행한다. 동한의 유수가 피난했다고 해서 평호平湖 호수를 유수호刘秀湖라고도 부른다. 처음엔 무덤덤했으나 점점 비경과 잔도에 감탄한다. 태산 산신령 황반장이 찾아낸 등산코스로 사람들 인기척이 하나 없다.



산 영상 2 - 옥척요지

옥척太行屋脊을 오르고 올라 성상암圣相岩과 잔도栈道를 따라 간다. 어느덧 신비한 연못인 요지瑶池에 이른다. 고대 도교신화 속 서왕모가 살았던 곤륜산의 연못 이름이랑 같다. 비경이라는 이야기다. 절벽은 반영을 일으키고 고요한 연못에 원을 그리며 퍼지는 소용돌이는 정말 신선이 머물던 곳처럼 느껴진다.



산 영상 3- 옥척 하산

옥척太行屋脊을 오르면 산골마을 하나가 나온다. 부뚜막에서 물을 끓여 국수를 삶는다. 두 그릇 먹고 옥척 정상 관망대에 오른다. 협곡 아래 평호는 코발트 빛깔로 푸르다. 이렇게 물빛이 새파랗게 그림을 그린 듯 펼쳐진 건 드물게 본다. 차량으로 이동해 협곡 사이로 난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처음에는 과연 내려갈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나름대로 안전하다. 봄이나 가을이 되면 협곡 사이로 꽃이 피거나 단풍이 드러나면 아주 절경일 듯 하다. 꼭 다시 걷고 싶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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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5] 녹림과 적미, 농민의 야망이 되다 ②


▲  적미군의 초기 근거지 태산 정상 부근의 석벽 조각. '노신판화상'을 수상한 유명 서예가 라이샤오지(赖少其)의 작품. 약간의 의역을 붙이면 "태양이 환하게 나타나니, 산들이 모두 동요하네. 검을 빼들고 미친 듯 노래하니, 뜻을 세워 크게 나아가리."는 의미이니 참으로 '민란' 정서와 맞다. ⓒ 최종명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신나라의 '법령은 괴로울 정도로 가혹했고, 백성들은 온갖 금지령에 손사래를 쳤으며, 생계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노역도 몹시도 고달픈 지경이었으며 논에는 메뚜기조차 가물었으니 부자나 빈자 모두 다를 바 없어 구분조차 힘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망이 통치하던 서기 14년, 낭야(琅琊) 군 해곡(海曲, 일조日照) 현성에서 허드렛일을 맡아 하던 청년 여육(呂育)은 강직한 성품으로 평소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못마땅했다. 어느 날 농민의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오라는 현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노발대발한 현령은 납세를 거부하고 폭동을 저지른 농민들과 공모했다는 죄를 물어 여육을 살해했다.


엄마(여모呂母라 부름)는 아들이 원통하게 죽자 고통에 못 이겨 함께 죽으려고도 했다. 비통한 마음을 가슴에 새긴 채 경솔하게 화풀이조차 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지역 유지였던 여모는 전 재산을 풀어 조용히 비밀 조직을 결사하는 한편, 빈궁한 농민을 위한 구제에도 힘을 쏟았다. 술집을 개업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외상 술도 서슴없이 베풀고 생활이 곤란한 사람에게는 옷이나 양식도 건네주며 인심을 얻었다. 수소문을 해 칼과 검을 수시로 구입해 보관했다. 


사람들이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면 그저 하천 토사를 마을 뒷산인 규산(奎山) 위로 날라달라고 했다. 쌓인 흙으로 축대를 건설했는데 여모는 민란을 일으키고 방어벽인 점장대(点将台)로 활용했다. 새로 생긴 얕은 산을 여모고(呂母崮)라 불렀다. 여모는 가산이 대부분 탕진되자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추석에 모두 모였다. 여모를 위해 옷이나 재물을 모아 보상하려 했으나 사양하며 슬피 울며 말했다.


"그 동안 여러 번 여러분을 도왔지만 이익을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은 내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보수설한(报仇雪恨)', 얼어버린 심장에 박힌 철전지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용사들이시여. '일비지력(一臂之力)',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원한을 얼음 같다고 표현했는데 폭정에 분노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기름을 붓는 하소연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과 아홉 구를 합친 '수(仇)'자의 원래 뜻은 백년해로하는 반려자였는데 중국어의 반어적인 훈(訓)으로 바뀌었다. <사기>의 '진세가(晋世家)'와 <설문>에 따르면 곧 원수를 말한다. '보수설한'은 서한 황족 회남왕이 쓴 통치총서 <회남자(淮南子)>에 기록돼 있으며 춘추 시대 월왕 구천(勾践)을 언급하면서 등장하는 말이다. 


범려(范蠡)의 계책에 따라 4대 미인 서시(西施)를 미인계로 오왕 부차(夫差)에게 보내 복수를 설계한다. 부차가 서시와 정신없이 즐기는 사이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을 겪으며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여모 역시 구천의 심정으로 농민들에게 가슴 속 '설한'을 풀어달라고 단 네 글자로 응축된 호소가 절절하게 전해지고 있다.


모두 힘껏 도와 여모 아들의 원수를 갚고자 이구동성으로 동조했다. 여모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재빨리 수백 명의 대오를 모아 여모고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출귀몰하게 공격 준비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납세거부 운동을 벌였다. 해마다 발생한 수해, 가뭄과 우박으로 세금 부담이 가중된 농민들의 삶은 파탄지경이었다. 갈 곳 잃은 농민들이 속속 여모가 일으킨 민란에 참가해 순식간에 수천 명에 이르렀다.


▲  서시(西施)와 부차(夫差)가 함께 물놀이하며 태호를 감상하던 산비탈. 여모의 '얼음처럼' 응어리진 원한이 부차에 대한 원한이 다르겠는가? ⓒ 최종명


드디어 서기 17년, 여모는 규산 기슭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리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한 후 용사 3천 명을 인솔하고 기세 등등하게 현성을 공격했다. 한바탕 전투를 벌인 후 단번에 성을 돌파하자마자 현령을 생포했다. 관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고 현령은 목숨을 구걸했다. 여모는 '살인자는 당연히 죽어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준엄한 심판과 함께 참수한 후 아들의 무덤 앞에 현령의 수급을 바치고 추모해 원한을 깔끔하게 씻었다. 


현령이 죽자 군 태수가 진압군을 동원했지만, 여모는 침착하게 부대를 둘로 나눠 유유히 사라진 후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은신처로 철수했다. 왕망의 개혁이 점차 실패로 돌아가자 근방의 가난한 농민들이 앞다투어 여모의 근거지로 투항하기 시작했으며 1년 만에 여모의 군사는 만여 명에 육박했다. 힘을 모아 함께 산 농사도 짓고 바다에서 어획하며 생활했다. 이렇듯 점차 자립적인 공동체 생활이 지속되자 토벌도 장기화될 수 밖에 없었다. 관군은 사자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고 술수를 부려 와해도 시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여모 민란은 중국 최초로 여성 지도자가 일으킨 특별한 농민 반란이었으며 신나라에 항거하는 반봉건 투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서기 18년, 울분의 횃불을 높이 들고 수만 명의 리더로 자리매김한지 1년 만에 여모는 안타깝게도 병사했다. 아들을 위해 '현명한' 복수를 이뤘으며 도탄에 빠진 농민의 아픔을 보듬었던 여성 지도자를 어여삐 여겼던 역사가가 있었기에 <후한서> '유현유분자열전(劉玄劉盆子列傳)' 편 한 자락에 그녀의 모정을 담아 고스란히 기록했다.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은 곧 이어 발발한 적미군(赤眉軍)에 참가해 명맥을 이어갔다. 


도탄에 빠진 붉은 눈썹


서기 17년 녹림산을 근거지로 반봉건 민란의 기치가 서서히 북상하자 고을마다 기다렸다는 듯 농민들의 의기 투합이 심상치 않았다. 산동 동남부 해안 지방에서 봉기한 여모에 이어 서기 18년, 번숭(樊崇)이 자신을 따르는 백여 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했다. 번숭은 낭야 군 변경 영문(靈門, 산동 거현莒縣 북쪽) 사람으로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농민으로 착실하고 용감한 성품을 지녔다. 키가 장대하고 늘 약자 편을 드는 성격이라 평판이 좋았기에 어떤 일이라도 함께 도모하는 것을 원하는 농민이 많았다. 


번숭이 살던 거주(莒州)는 춘추시대 거나라 영토로 춘추오패 시대를 연 제환공(齊桓公)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고대부터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역사문화 도시였는데 서한 말기부터 사회적 모순이 격화돼 농민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신나라에 이르러 토지겸병이 심해지니 농민들은 노역과 과세 부담이 겹친데다가 가혹한 통치로 이어져 도탄의 정도가 수심화열(水深火热)이었다.


서기 18년, 번숭은 여모가 일으킨 민란의 땅에서 다시 한번 혈기왕성한 농민들과 함께 핍박에 항의하며 세금 납부를 항거하는 선언을 했다. 번숭은 직감적으로 안전한 은신처가 필요했고 무리를 이끌고 산동의 명산인 태산으로 들어갔다. 청주(青州)와 서주(徐州) 지방에서 기아에 시달리다가 도적으로 변신한 농민들이 하나 둘 번숭의 용맹을 듣고 태산으로 몰려들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원이 만 여명으로 늘었으며 거주의 봉안(逄安), 동해(東海) 군의 서훤(徐宣), 세록(謝祿), 양음(杨音)이 이끄는 농민까지 합류하자 수만 명의 규모로 발전했다. 


사회 불만이 고조된 농민들은 주변 현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다시 근거지 태산으로 돌아오는 전술로 울분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창고를 털어서 운반해 온 양식이 태산에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고을의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구휼을 병행하자 주민들을 통제할 방안이 없는 현령들은 줄행랑을 놓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세력이 점점 확대되자 '사람을 죽인 자는 처형하고 해를 입힌 자는 갚는다.'는 무언의 약속을 정해 점점 조직화했다. 민란의 대의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내부 규율을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서도 없고 깃발이나 편재, 명령도 없지만 민란 지도자들을 삼로(三老), 종사(从事), 졸리(卒吏)와 같은 나라의 벼슬에 상응하는 이름으로 위계를 세웠다. 민란에 합류한 농민들은 '동지'라는 의미보다 훨씬 동지다운 '거인巨人'이라 서로 높이 부르며 용기를 북돋웠다. 


번숭은 최고 직위인 삼로라고 스스로 불렀는데 고대국가의 최고 관직인 태사, 태부, 태보처럼 삼 등분된 권력 구조를 이해했던 것이다. 모두 미천한 농민이자 일자무식이었지만 단순 폭동이 아니라 굳건하고 체계적인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가 토벌군을 보내자 번숭 등 지도부는 서로 뒤섞이면 구분이 힘들 것으로 판단해 모두 눈썹에 붉은 진흙으로 분장했다. 피아를 구분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정도로 지혜롭고 창의적이었으니 번숭의 민란은 '적미(赤眉)의 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됐다. 


▲  녹림군과 적미군은 차례로 수도 장안 성을 공략했다. 지금 서안의 성문인 동작문의 야경 ⓒ 최종명


21년에는 대장군 경상(景尚)이 이끄는 토벌군과 1년 이상 공방을 벌인 끝에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대장군이 목숨을 잃자 크게 분노한 황제는 다시 겸단(廉丹)과 왕광(王匡, 녹림군의 왕광과 동명이인)을 장군으로 10만 대군을 보내 토벌하려 했다. 일반 농민들의 적극적 지지까지 등에 업은 용감무쌍한 적미군은 태산 서쪽 성창(成昌, 산동 동평東平) 전투에서 승리했다. 왕광은 도주했고 체포된 겸단이 처형되자 관군은 궤멸됐으니 적미군의 위세는 날로 커져 10만 명이 넘는 무장 봉기군으로 성장했다. 


시기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적미군과 녹림군은 민란의 발발과 지향하는 바가 비슷했지만 아쉽게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서기 23년에 이르러 경시제를 옹립한 녹림군이 곤양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완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 적미군 지도자들은 직접 낙양으로 찾아가 경시제 정권과 함께 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경시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적미군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번숭 등 지도부 20여 명을 권한이나 녹봉도 없이 이름뿐인 열후(列侯)에 봉하자 번숭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근거지로 돌아갔다. 녹림군과 적미군이 연합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래서 역사는 가정법을 쓰면 재미가 없어진다고 하는가 보다. 


이듬해 겨울 적미군은 30만 명을 두 갈래로 나누어 수도 장안을 향해 진격했는데 경시제 정권을 대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장안과 가까운 화양(華陽)에 이른 후 적미군 지도부는 경시제를 대신할 황족을 내세워 백성의 신뢰와 명분이 필요했다. 당시 포로로 잡혀 전투를 진무하는 일을 맡았던 한고조 유방의 10대손 유분자(劉盆子)를 내세워 상장군으로 옹립했다. 상장군으로 명명한 번숭은 옛날에 황제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설 때 스스로 부르던 호칭을 황제로 착각했다. 나중에 유분자는 정식으로 황제가 돼 역사에서는 건세제(建世帝)라 부른다.


농민 출신 번숭은 난세에 민란을 도모해 적미군 지도자라는 명성을 역사에 남겼다. 황제를 옹립하고 농민이 잘 사는 나라, 주인으로 행세하려는 꿈을 꾸었다.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용감했으며 농민들로부터 추앙 받게 되자 위세가 드높은 민란의 우두머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민란의 영웅이 됐던 것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유수


적미군이 유분자를 옹립하던 시기, 이미 유현을 경시제로 옹립한 녹림군 역시 함곡관을 넘어 일사천리로 장안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왕망은 진나라가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토벌하기 위해 포로들을 동원한 것을 모방했지만 이미 민심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장안 외곽에 주둔하던 포로들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다. 


25년 9월 녹림군이 장안 성을 공격하자 대부분의 관리들은 도망치고 성난 백성들은 황궁인 미앙궁(未央宮)에 방화를 했다. 왕망은 왕읍, 왕순 등이 인솔하는 천여 명의 관리들과 궁전 연못 창지(沧池)을 방패 삼아 배수진을 쳤다. 녹림군은 궁전을 겹겹이 포위하고 격전을 벌였는데, 장안 상인 두오(杜吳)가 이끄는 부대도 전투에 참가했다. 왕읍과 왕순이 죽자 왕망은 황급히 실내로 숨은 후 황궁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뒤따라 온 두오의 칼날에 허망한 죽음을 당했으며 성난 사람들에 의해 시체는 도륙돼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약했던 경시제는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실패하고 왕광 등 녹림군의 지도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민란 초기 의지했던 장군을 살해하기도 했다. 적미군이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다가 살해 당했다. 


적미군도 황제를 옹립했지만 오랜 전쟁과 흉년으로 장안에는 양식이 바닥난 상태였다. 26년에 이르러 돌파구를 찾으려고 서쪽으로 진출했지만 평양(平襄, 천수天水)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상장군 외효(隗嚣)에게 가로막혔다. 그 사이 수도 장안을 점령한 유수의 대장군 등우(鄧禹)와 치열한 전투를 치러 겨우 '폐허의 땅' 장안을 수복했지만 성곽은 걸레처럼 쓸모 없고 백골만이 들판에 깔렸다.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부득이 동쪽으로 철수했다. 


한편, 유수는 친척 형이자 동지인 유인을 살해 당한 후 반란을 도모할 지 모른다는 경시제의 의심을 피해 하북에 머무르고 있었다. 녹림군과 적미군이 서로 분열한 후 격전을 치르느라 차례로 힘을 빼고 있을 때 온화한 품성과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포로를 석방하고 악법을 폐지하며 농민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하북 성에서 발발한 농민봉기군인 동마군(銅馬軍)과 청독군(青犢軍)을 포섭했으며 산동, 하남, 하북 삼성을 포괄하는 백만 대군을 주름잡고 있었다. 적미군이 장안으로 진격할 때 후방에서 이미 황제를 칭할 정도로 유수는 철저한 세력화를 달성하고 있었다. 강력한 위력을 지닌 유수가 서쪽으로 진출하자 적미군과의 일대 격전이 불가피했다. 


장안과 낙양 사이 효산(崤山) 골짜기에서 정면으로 맞붙었으나 참패한 적미군은 군사의 반 이상을 잃고 하남 의양(宜 陽)으로 물러났으며 유수의 군대가 포위했다. 승부가 거의 결판난 상황에서 유수는 자비를 베풀며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자 적미군은 모두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수는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았지만 위험한 인물은 반드시 죽였다. 우두머리 번숭이 예외가 될 리가 만무하니 역모를 꾀한다는 죄를 물어 끝내 살해했다. 기록에는 번숭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거나 척결을 위한 명분을 적었을 것이다. 경시제를 옹립했다가 실패한 녹림군의 왕광도 적미군에게 투항했다가 다시 유수에게 백기투항 후 연명하다가 유수의 부하 장수에게 참수 당했다. 


난세의 영웅 유수 광무제는 한나라를 다시 세웠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틈탄 유방처럼 녹림과 적미의 민란을 기회로 잡은 유수. 두 건국 황제는 유씨의 한나라 400년 정권을 양분했다. 유방이 참사축록(斬蛇逐鹿)의 초망영웅(草莽英雄)이라면 유수는 게간이기(揭竿而起)의 녹림호한(綠林好漢)이라 할 수 있다. 뱀을 참하고 사슴을 쫓아 황제가 된 재야 영웅, 죽창을 높이 들고 일어난 비적 호걸? 그것도 다 성공한 자의 달콤한 수사일 것이다. 유방이 신비스러운 치장을 했다는 의심이 드는 반면 유수는 온화한 성품답게 별로 영웅담 한두 가지를 빼면 억지로 화장하지는 않았다. 


유방이 '준엄했다'고 인정하면 유수는 한마디로 '이유견장(以柔見長)'이라는 표현이 적절한데 바로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유방은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하여 도주하던 중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아들과 딸을 버린 '대의멸친(大義滅亲)'을 마치 개국황제의 미담인 양 선전했으며 항우의 부하 장수 정공의 측은지심을 이용해 목숨을 애걸했는데, 한나라를 개국한 후 뜻밖에도 은혜를 베풀지 않고 죽여버린 '정공비륙(丁公被戮)'의 비정함이 있다. 자신을 살려준 정공의 행동이 불충이었으니 본받지 말고 모름지기 신하들은 냉정하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니 <사기> '계포전(季布傳)' 기록이 사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유수는 개국 후 공신과의 만찬에서 '자신과 함께 나라를 건국하지 않았으면 지금 무얼 하고 있었을까?' 물어본 후 등우, 마무 등 공신들의 덕담을 듣고 나서 '오늘날 여러분이 나를 의지해 여기까지 왔으니 나에 대해 두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고 점잖게 말하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어느 날 은둔지사 한 명이 명망이 있다 하여 인재로 쓰려고 친견했는데 도무지 하사 받은 복록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만하고 방자했다. 신하들이 불경죄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는데도 죄를 묻는 대신 오히려 40필의 비단을 하사했다. 유방이었다면 아마 당장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녹림산과 태산에서 불 타오른 농민의 원한이 산천초목을 태우고 이마뿐 아니라 온몸에 붉은 피를 뿌리며 번득이는 눈빛으로 달려가는 진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한서>는 왕망의 망(莽)자를 가운데 글자 대(大)가 아닌 견(犬)으로 써놓았는데 한 세대조차 이어가지 못한 정권은 역사의 '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수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세우며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민란의 역사다. 억울하게 죽느니 죽음도 불사하며 떨쳐 일어나, 민란의 깃발을 들어올렸고 비록 짧았지만 한바탕 영웅으로 살다간 이름없는 전사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민란의 주인공이었다.


▲  녹림과 적미의 민란 혼란기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나라를 세운 광무제 유수는 폐허가 된 장안을 버리고 낙양에 도읍을 정한다. 유수 사후 10년만에 세워진 낙양의 백마사. 이 사원은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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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4] 녹림과 적미, 농민의 야망이 되다 ①


▲  왕망의 고향 한단의 황량몽 사원. 한단지몽 주제의 벽화.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주공의 나라를 흠모해 개혁을 도모했으나 '하룻밤의 꿈'처럼 허무한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 ⓒ 최종명


왕망, 주공을 꿈 꾸다


중국 역사에서 칼부림 없이 황제를 찬탈 또는 선위로 역성혁명을 이룬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왕망(王莽)과 무조(武曌)다. 무조는 당나라 시대 7세기경 주周(역사에서 무주武周)를 국호로 통치한 여성 황제 무측천(武則天)이고 왕망은 1세기경 한나라를 앞뒤로 나누며 신(新)나라를 세워 좌지우지했다. 


무측천이 수렴청정의 지위를 이용해 양위를 강제해 나라를 세웠고 권력을 잃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후에도 황후로서 장례를 치렀다. 이렇듯 여성이었지만 황족의 범위 내에서 벌어진 역성이었다. 왕망은 황제로 군림한 세월만 엇비슷한 15년을 빼면 전혀 다른 맥락이다. 건국과 통치, 죽음조차 완전 색다른 돌출 행동이었기에 한나라를 다룬 역사서마다 객관적인 평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를 봐도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司馬懿)도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상국이나 제후, 태사 및 태부 등 유아독존으로 통치했던 인물은 많다. 조조나 사마의 후손은 후광을 얻어 결국 창업 군주로서 자리를 잡아 새로운 나라를 구축하기도 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 독이 됐던 것인가? 왕망은 외척 출신이라는 배경과 급진적 이상주의적 개혁가라는 평가와 함께 실패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아마도 후대 역사에서 자기 편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망은 전국시대 위나라 제후국의 식읍이던 원성(元城, 하북 한단邯郸 동쪽 대명大名 현) 사람으로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가난했다. 한원제의 황후가 된 고모 효원황후(孝元皇后)의 도움으로 황궁에서 살았는데 공손한 태도와 총명한 기품을 지녀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는 태황후의 섭정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숙부들의 지위를 이어받아 38살의 나이로 대사마가 됐다. 왕망은 점차 정치의 중심에서 정점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딸을 왕후로 삼고 황제 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다는 부명(符命)을 드러냈고 드디어 선양을 통해 황제에 등극했다. 


한무제가 통치하던 100여 년 전 북방민족 흉노 등과 영토 전쟁을 벌이기 위해 소금과 철을 전매하고 농지뿐 아니라 상업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 나라의 창고를 과도하게 축적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으며 개혁에 대한 요구가 심각하게 도래하고 있었다. 한나라 초기의 통치철학이던 도교적 기풍은 점차 유교적 학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왕망의 개혁, 그것도 유교 통치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  20세기 중국 최고 문학가 노신의 고향 소흥(紹興), 마을 입구 조각 초상화가 대문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녹림서옥'이라 쓰며 '인민'의 고통을 함께 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최종명


간신이나 아첨하는 집단에 의해 황제에 올랐는지 모르나 적어도 왕망은 유교 경전이 향하는 이상적인 나라, 공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인물 주공을 닮고 싶었다. '주공재세(周公再世)'는 주나라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왕망이 스스로 황제까지 되면서라도 개혁하고자 했던 꿈이었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철학적 체계나 국가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하거나 보장했던 한나라 왕조가 아니었기에 개혁을 원했던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고 싶어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명예혁명'으로 황제가 된 왕망은 주나라의 정전법을 참고해 토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한나라 초기부터 시행된 군국제(郡國制) 기반의 지방 제후와 호족의 정치적, 물적 토대를 제한하면서 농민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을 타파하려는 제도였다. 유교경전 <주례>에 기반해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화폐 개혁, 상공업 부흥, 노비 매매 금지 등은 의욕적인 건국 정책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쌓였던 사회적 모순은 유교이념을 현실화할 노하우가 부족했고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로 강제하자 기층 민중의 고충은 개선되지 않고 더욱 피폐화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지방 호족들은 호시탐탐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서역의 흉노 및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을 낳아 나라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녹림, 천자의 문을 열어라


▲  녹림군을 통해 한나라의 부흥을 이끌어낸 광무제 유수를 기념해 친필어제를 내린 건륭제. 승덕(옛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서 ⓒ 최종명


서한 말년에 왕광(王匡), 왕봉(王鳳)은 녹림산(綠林山)에서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녹림' 또는 '녹림호한'은 산속에 은거하며 관청에 항거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됐다. 1925년 북양(군벌)정부의 교육부 관리 유백소(劉百昭)와 일부 관변 평론가들은 여자사범대학생들의 정치투쟁을 지지하던 교원들을 '토비(土匪)', '학비(學匪)'라고 매도했는데, 이에 작자는 자신의 서재를 비꼬는 투로 '녹림서옥'이라 기재했다.


20세기 문학가 노신(魯迅)의 <화개집(華蓋集)> '화개집속편' 머리말인 제기(題記) 중 '1925년 12월 31일 밤, 녹림서옥 동쪽 벽 밑에서 쓰다'라는 말에 나오는 '녹림서옥'에 대한 주석이다. 녹림산에서의 민란이 서기 17년이니 거의 1900년이나 지나 '토비'보다 다소 그럴 듯한 '학비'까지 들먹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민란을 대표하는 말로 녹림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멋진 말이 아닌가? 


호북 형문(荊門)에 있는 대홍산(大洪山)이 1988년 장가계와 구채구와 함께 국가급 풍경구로 비준됐다. 계곡, 표류, 온천, 동굴, 불교성지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갈대로 휩싸인 해발 1,488m 고원에 위치한 녹림채가 있어 그 어떤 명승지보다 유명하다. 도대체 녹림산의 산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왕망의 신나라가 이상정치를 열심히 시술하고 있었지만 농민이건 평민이건 먹고 사는 일이 날로 힘들어 갔다. 흉노와의 변방 전쟁으로 국력 낭비가 심해 전반적으로 GDP 수준은 극악해졌으니 왕망은 왕창 망하기 일촉즉발이었다. 더구나 남방 지역은 자연재해와 흉년의 연속이었고 안타깝게도 인육까지 입에 대는 인상식(人相食) 사례도 빈번했다고 <후한서(後漢書)>가 기록한 걸 보면 참혹했던 실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놀랍게도 중국 역사에서 식인에 관한 근거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장자(莊子)>에 당당히 등장해 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고대 최고의 민란 두목이자 도적인 도척(盗跖)은 사람의 내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한서>를 시작으로 중국 24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노신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 나오는 홀인(吃人)은 식인의 뜻이기도 하다. 


서기 17년 강하(江夏) 군 신시(新市, 지금의 경산京山) 일대에 흉년이 들어 황량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산과 들에 나가 냉이를 캐먹었지만 풀조차 말라버리자 사람들은 서로 먹자고 싸우고 무법천지가 되기 일쑤였다. 이때 늘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근심을 해소해주며 명망이 두터웠던 왕광은 아수라장에서도 사태를 잘 해결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왕광은 인자한 왕봉과 함께 점점 폭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나서게 됐다. 기근은 흉흉한 인심을 낳고 대책 없이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깊게 하는데 왕광과 왕봉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모두 다 살아남을 방안을 강구했다. 유일한 솔루션은 곧 지방 관청에 대한 공격, 그리고 약탈의 시작이었다. 


<후한서> '유현전(劉玄傳)'에 따르면 처음에 수백 명으로 시작한 약탈은 왕광이 농민들을 이끌고 녹림산으로 들어가 요새를 쌓고 비적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몇 달 만에 7~8천 여명이 따라 들어와 곧 무장 군대로 발전했다. 이렇게 신시 지방에서 모인 군대는 녹림군으로 불리며 역사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녹림군의 위세가 날로 커져가자 4년 후인 21년 2월에 왕망의 명령을 받은 형주목(荆州牧)은 2만 명의 진압군을 동원했다. 토벌군의 이동을 간파한 왕광과 왕봉 등 지휘부는 잠복해 있다가 토벌군이 경내로 들어오자마자 습격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군수물자를 모두 빼앗았다. 녹림군 장군 마무(馬武)가 후퇴하는 군대 앞에 갑자기 나타나자 형주목은 혼비백산 마치를 몰고 달아났다. 마차를 쫓아간 마무의 긴 창이 문짝을 내리치자 마차와 함께 형주목이 나뒹구는 사이 단칼에 말부터 베버리는 동안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허겁지겁 도망쳤다. 대승을 거두자 마무의 영웅담은 하늘을 찔렀다. 


녹림군은 2만 명의 정부군을 격퇴한 여세를 몰아 경릉(竟陵, 호북 천문天門 시)과 현성이 있는 운사(雲杜, 경산京山 현)를 공격했는데 위세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녹림군이 약탈을 마치고 산채로 돌아올 때 수만 명이 뒤를 따랐다. 


17년 9월, 토벌군과 일전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이나 함께 거주하는 산채에 돌연 전염병이 돌아 병사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왕광 등 지도부는 산에서 돌림병으로 모두 죽느니 하산해 출정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왕상(王常)과 성단(成丹)이 통솔하는 하강병(下江兵, 강릉江陵 지역에서 활동) 부대는 서남쪽 남부(南郡, 강릉)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왕광, 왕봉, 마무가 통솔하는 신시병은 북쪽 남양(南陽)으로 출병했다. 녹림군이 산에서 내려와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져 들었으며 전국으로 퍼진 소문은 일파만파로 또 다른 민란으로 이어졌다.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가던 21년 7월, 신시병 부대가 평림촌(平林村, 수주随州 시)까지 진군하자 진목(陳牧)과 료심(廖諶)이 통솔하는 수천 명의 평림병이 반란에 호응해 합류했다. 이때 한나라의 황실의 파락호이자 귀족 출신으로 2년 후 녹림군에 의해 경시제(更始帝)로 추인되는 유현이 단신으로 평림병에 투신했다. 북상하던 10월, 용릉(舂陵, 조양棗陽 시)에 이르러 지방호족 유인(劉縯)과 유수(劉秀)도 녹림군에 합류했다. 용릉병을 통솔하는 유연은 왕망의 신나라에 반대해 거병했다. 한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거병 후 세력이 미미했던 유인 부대는 녹림군의 확산을 눈 여겨 보고 합류를 요청했다. 유인의 인척 동생인 유수는 신나라의 종말 후 동한을 세운 광무제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말조차 타 본 적 없고 유약했던 유수가 녹림군 민란의 와중에 천자가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민란 양상이 확산되자 각 지역 농민들은 물론 지방호족도 분기탱천(憤氣撐天) 일어나 전국적 민란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신시병, 평림병, 용릉병을 통합 부대는 북상을 서둘러 신야(新野)를 점령했으며 12월 마지막 날에는 하강병까지 합류해 군수물자 주둔지인 남향(藍鄉, 신야 현)을 야습, 주둔군 장군을 포함해 2만여 명을 섬멸했다. 22년 새해가 되자 남향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격해오는 수만 명의 토벌군을 육양(淯陽, 하남 남양南陽 부근)에서 조우해 단번에 참패시켰다. 녹림군은 여세를 몰아 완성(宛城, 하남 남양)을 공략하자 대부분의 토벌군이 투항했다.


서남쪽으로 출병한 하강병도 형주를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북상한 3개 부대 연합군도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커졌다. 왕광을 비롯한 각 부대 지도자들은 어느덧 황족인 유씨 일가 중에서 황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모였던 농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민란의 합법적인 명분을 세워야 했으니 신나라 황제를 몰아내는 건국을 목표로 전진하는 길만 남았다. 


▲  왕망의 개혁은 '주공재세'를 꿈꾸며 유교 예악을 통한 통치였다. 비록 그의 개혁은 실패했으나 공자를 통치이념으로 통찰한 지도자였다. 공자 사당에서 열린 제례. ⓒ 최종명


완성을 장악하고 안정을 취하자 녹림군의 주축 세력인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약하고 병력이 미미해 통제하기 쉬운 혈혈단신 파락호 유현을 황제로 옹립하고 한나라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경시제라 불렀다. 녹림군 지도자들은 모두 중신에 올랐는데 왕광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의 최상위 벼슬에 올랐으며, 공로에 따라 신시병 장군 주유(朱鲔)는 대사마(大司馬), 유연은 대사도(大司徒), 유수는 태상편장(太常偏将)에 임명됐다. 


녹림군은 경시군으로 조직을 안정화하자마자 왕봉, 왕상, 유수를 앞세워 곤양(昆陽, 엽현葉縣), 정릉(定陵, 무양舞陽), 언현(郾縣, 루하漯河) 방향으로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서기 23년, 왕망은 유현을 황제로 옹립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대사마 왕읍(王邑)과 사도(司徒) 왕심(王尋)을 장군으로 삼고 기인이자 거인인 거무패(巨毋霸)가 이끄는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한 백만대병(실제로 43만 명 가량)을 모병해 대규모 토벌을 시작해 경시군이 주둔한 곤양 일대를 포위했다. 겨우 7~8천 명뿐이었던 곤양 성의 경시군은 성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곤양을 잃으면 각개격파 당할 것을 우려한 유수는 적극적으로 판세를 뒤집기 위해 13명의 돌격대를 인솔해 포위망을 뚫은 후 정릉과 언현의 주력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는 3천명의 병력으로 토벌군 주력 부대를 향해 돌진해 오로지 지휘 장군 왕심을 타깃으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북송의 학자 사마광(司馬光)의 편년체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유수가 앞으로 내달리니 병사들은 퇴각하였고, 한 명이 백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유수는 성의 서쪽 해자를 시작으로 적의 주력 부대로 쳐들어갔다.'고 묘사했다. 유수의 결사대가 왕심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대군의 전열을 일시에 붕괴시키자 곤양 성에 있던 부대가 호응해 합세했다. 안과 밖에서 세력을 합치니 고함이 천지를 흔들었으며 토벌군은 전의를 상실해 도망치는 자들끼리 서로 밟히고 엎어져 죽은 시체가 백여 리나 늘어섰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까지 겹쳐 왕읍을 비롯한 장수들은 시체를 딛고 도망치기 바빴다.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지만 불과 수천 명이 '백만대군'을 물리친 기적과도 같은 전쟁은 곤양대전 말고 또 있을까? 곤양대전을 통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유수는 데뷔 무대에서 결승골을 넣은 스타나 다름 없었다. 


호북 경산의 녹림채로 향하는 절벽 길에는 유리 재료로 흔히 쓰는 석영석 암석이 'V자 거꾸로' 형상으로 서 있는데 그 높이가 25미터, 폭이 16미터에 이른다. 유수 광무제의 아들 한명제 유장(劉庄)이 녹림산과의 인연을 듣고 아버지를 기리며 '한천문(漢天門)' 친필을 하사해 새겼으며 청 건륭제도 강남을 순행하던 중 감개무량해 '천자지문(天子之門)'의 어필친제를 내렸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통해 유방이 천하에 얼굴을 내밀었듯 '녹림산'이 아니었다면 유수가 어떻게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곤양대전의 영웅 유수는 불과 1년 만에 서생에서 용사로 거듭났다는 역사의 기록을 믿고 기적을 인정해야 하듯 '하늘로 가는 문'을 지나면서 천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될 뿐이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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