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분 중국문화여행 상설 공개 강좌

 

13년 동안 약 400개 도시를 취재와 여행으로 다녔던 기록을 재미있는 주제로 펼쳐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응집된 각 지역이나 여행지의 모습은 사뭇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함께 공통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서로 나누어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테마가 있는 중국문화여행, 현장감 넘치며 흐름을 꿰는 중국발품의 동행이 될 것입니다. 중국발품취재와 중국문화여행이 혼합돼 테마가 정해집니다.

 

처음 시작은 실크로드입니다. 7월17일 실크로드 란저우-둔황 문화여행을 떠나는 이유로 가장 먼저 테마로 실크로드를 정했습니다. 참 재미난 테마입니다. 너무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집약해서 몇가지 중요 포인트 위주로 이야기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동행하듯 분위기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강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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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수도 장안(长安)은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古都). 기원전에는 중원의 변방이었지만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화 민족의 중심이 됐으니 중국을 이해하는 최고의 상징은 서안에서 찾아야 한다. 진시황과 병마용이 있고 4대 미녀 양귀비의 화청지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실크로드의 출발이자 종착이었기에 서역의 문화도 풍부하게 남아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온 독특한 먹거리도 많으니 서안 여행을 가면 여러모로 즐겁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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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제작된 마차인 동차마铜车马 두 대가 병마용兵马俑에서 발굴됐다. 마차의 2분의 1 정도 크기로 제작된 마차는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술이 정말 대단하다. 병마용 박물관에는 진품과 모조품이 각각 순서대로 돌아가며 전시된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던 시기에는 마차바퀴의 거리가 통일돼 있는데 두 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진시황은 병마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천징위안 할아버지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4마리의 말이 끌며 달리는 당시 마차의 생생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중원문화여행 일정 http://youyue.co.kr/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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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兵马俑 2호갱에는 지휘부에서 발굴된 장군 병마용이 전시돼 있다. 무릎 쏴 자세의 궤사용(跪射俑)과 서서 쏴 자세의 입사용(立射俑)과 말을 끌고 있는 안마기병용(鞍馬騎兵俑), 중무장한 군리용(軍吏俑)을 비롯 군사용(軍士俑), 장군용(將軍俑), 포용(袍俑), 개갑용(鎧甲俑), 어수용(御手俑) 등 다양한 형태의 병사용이 발굴됐다. 정말 멋지다. 일반 병사용도 멋지지만 역시 장군의 위용에 더 환호하는 까닭은 더 세밀한 동작을 표현한 예술적 감각때문이다. 

중원문화여행 일정 http://youyue.co.kr/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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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중원문화여행에는 아바타인 낙타를 데리고 다녔다. 실크로드의 상징이자 운송수단인 낙타는 병마용兵马俑 앞에 서니 더욱 믿음직스럽고 적절한 모습을 연출했다. 1호갱은 38줄의 전차와 보병군단을 드러내고 있다. 2천년의 세월을 거쳐 드러났기에 온통 상처투성이인 병마용을 다시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온전히 다 맞추긴 어려워도 대체로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녀석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가까이 보면 세월의 풍파를 견딘 사람처럼 정겹고도 존경스럽다. 

이어서 3호갱으로 들어갔다.  1호갱과는 25m 떨어졌고 2호갱과는 1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1호갱 곁방 개념의 갱이자 차마방车马房이다. 또한 출토된 명마용은 68개로 지휘부였다고 분석된다. 3호갱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마차의 자태에 감동한다. 또한 사라진 무기를 잡고 있던 병마용의 양 손에 가끔 흥분되기도 한다. 그냥 흙으로 보지 말고 역사로 살피고 문화로 접근하면 분명 감동의 눈물을 쏟아낼 것이다. 병마용은 그렇게 세계사적 유물로 손색이 없다. 

중원문화여행 일정 http://youyue.co.kr/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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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兵马俑은 진시황릉秦始皇陵 동쪽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날 따라 비가 내려 꽤 불편했는데 더운 것보다는 훨씬 구경하기에 부담이 없다. 1호갱 안으로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로 인해 숨 막히고 땀냄새 나는 것보다는 더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역사모임 회원에게 사전에 '병마용과 진시황은 무관하다'는 천징위안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서인지 관심이 남달라 보였다. 병마용이야 말로 서안은 물론 중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유물이 아니겠는가. 모두들 처음 보는 병마용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는 눈빛이다. 천징위안의 주장은 제 블로그나 기사, 그리고 <13억 인과의 대화>에서도 많이 다룬 주제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월전> 드라마를 통해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나라 선태후(진소왕의 어머니)을 인생이 알려지기도 했다. 진선태후의 아명 미월, 그 흔적이 병마용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1974년 에 발굴돼 2천년의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는 병마용은 정말 볼수록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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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거 설두산을 모두 보고 영파로 이동해 하루 숙박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영파의 옛날 모습 그대로의 마을 자성고진慈城古镇에서 오전을 보냅니다. 자성고진은 인구 9만명 정도의 마을로 옛 현아县衙와 공자 사당인 공묘孔庙가 볼만 합니다. 청렴한 관리의 표상인 공생명公生明 비석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원래 <순자荀子>에 기재돼 있는 말로 관리의 명철하고 업무처리를 권장하는 문구였습니다. 뒷 면에 새겨져 있는 염생위廉生威와 합쳐 "공정함에서 명백해지고 청렴함에서 권위가 생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에 관부마다 이를 새겨 관리의 철칙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관리가 부패하면 감옥에 보내고 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전시실도 있었습니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부터 태평천국의 민란에 이르는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2016년 출간한 중국민중의 항기록인 <민,란>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공자사당은 전국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춘추시대 그저 그런 사상가였던 공자는 한나라 무제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대일통大一统 주장을 국가통치철학으로 정립합니다. 진시황 때보다 백배나 더 강력한 분서갱유를 실시한 한 무제 이후 유교가 국책이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 법가 등도 사라지지 않고 중국과 동양 전반에 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자성고진에서 공자와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자성고진을 끝으로 3박4일의 중여동 신선거 여유국 초청 행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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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 (05)

 

민란은 새로운 세상을 바꾸는 열쇠다. 독재와 가렴주구는 봉기의 깃발을 불러내고 민란과 토벌이 부수고 지키는 전투를 벌인다. 현실의 모순은 변화를 갈망하고 질적 전환을 이룬다. 2016 12 9, 역사적인 탄핵의 아침이 밝아온다. 이제 박근혜 정부의 침몰 이후 새롭게 여는 아침은 어떤 세상일까? 봉건의 시대, 민란의 역사는 간혹 뜻밖의 지도자가 등장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고 통치자로 군림한다. 진승(陈胜)과 오광(吴广)의 민란이 그랬다. 역사는 교훈이기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명대사를 남긴 진승과 오광은 기원전 209 7, 홍수로 인한 범람으로 지정된 시일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불가능해지자 900여 명의 농민과 함께 안휘 성 북부 태택향(大泽乡)에서 봉기했다. 진시황의 객사 이후 비정상적인 후계구도를 설정하고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 조고(赵高)와 승상 이사(李斯)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살길이 막막했다.

 

머슴이자 소작농으로 겨우 풀칠이나 하며 연명해 왔지만, 현실을 보는 눈만큼은 냉정했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데 의기투합했다. 무릎 꿇고 죽느니 일어나 싸우다 보면 살아갈 길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지혜도 빌리고 명분도 살려야 하며 희망도 엿보여야만 농민들이 모두 따르고 그것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직감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의 두 주역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2천 년 역사상 가장 분연히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진승과 오광은 명분을 얻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오광은 몰래 생선 속에 진승왕글자가 새겨진 비단을 넣어두었고 배를 가른 취사병이 호들갑을 떨며 하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왕이라는 글자보다 진승이라는 인물에 더욱 낯설고 놀라지 않았을까? 고대에는 맹수나 뱀, 조류나 물고기까지 신통한 토템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은나라 시대에는 거북이 등껍질 귀갑()이나 신비스런 풀인 시초(蓍草) 점을 치기도 했다. 물고기 배에서 천자의 메아리가 들릴 줄 상상조차 못 했던 사람들에게는 기절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기()>고스란히 기록될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진승과 오광은 한발 더 나아가 사당 부근에 숨어서 대나무로 불을 피우고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 대초흥, 진승왕(大楚兴, 陈胜)이라고 교묘한 음운으로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초나라가 크게 부흥할 것이니, 진승이 출현해 왕이 되리라는 여섯 글자는 전략적 구호로 각인됐다. 사마천(马迁)도 신기했던지 귀신까지 동원한 계책을 대나무 불과 여우 소리라는 뜻의  구화호명(篝火狐鸣)'이라 언급했다. ‘거사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소작농이던 진승은 평소에 포부가 남다르고 의리도 많아 훗날 크게 부유해진다면 가난했던 시절의 형제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늘 호기를 부렸다. 봉건제 신분사회에서 허풍치고는 꽤 인간적인 면모였다.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비웃었을 것인데 그때마다 어찌 제비나 참새 따위가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까?”라고 했다. 기러기와 고니처럼 고귀하고 원대한 포부인 홍곡지지(鸿鹄之志)진승의 캐릭터였다. 당시 농민반란이 가져온 사회적 영향이 폭풍과도 같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고사성어가 수없이 등장했다. 대형사고를 친 인물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던 까닭이 있다. 진승의 민란으로 인해 혜택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영웅스토리로 담았을 것이 분명하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가담항설(街谈巷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거리나 마을마다 번져 말()은 말()보다 빨랐다. 진나라에 핍박을 받던 식민지 땅 중원에 회오리바람이 불었고 초나라 땅에 민족주의의 불길로 타올랐다. 전국시대 6국의 열혈 귀족은 농민군을 규합해 떨쳐 일어났으며 진승의 봉기군과 연합해 점점 세력이 늘어났다. 군중들은 진승이 초나라 사직을 복구한 공을 인정해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요청했다.

 

진승은 때맞춰 합류한 장이(张耳)진여(陈余)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이와 진여는 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며 서둘러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제압한 후 먼저 6국을 재건할 것을 제안했다. 수도 함양(咸阳)을 기반으로 제후를 파견하고 천하를 호령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독자적으로 왕이 된다면 천하가 분열될지 모른다고 충언했다. 하지만 진승은 서둘러 왕을 자처했다. 전국시대의 후손을 복위해 연합하자는 장이의 전략과 상충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키기 전 쌀 한 톨 없이 가난한 시절이 있었는데 아사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농사꾼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와 딸이 봄나물을 넣고 끓여준 쌀죽을 대접받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맛있게 먹고 기운을 차린 진승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는데 왕을 자처한 이후 갑자기 모녀가 생각나서 찾았다. 궁으로 초청한 후 다시 그때의 죽을 먹고 싶었던 진승에게 모녀는 예전처럼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훤초(萱草)를 넣고 죽을 끓여 올렸다. 죽을 먹은 진승은 쓰기만 할 뿐 그다지 맛이 없다고 실망했다.

 

노파는 배가 고플 때는 향기로웠지만, 산해진미를 즐기게 되면 쓴 맛만 느끼게 된다고 해서 망우초(忘忧草)라 합니다.” 고 아뢰니 진승은 부끄러워했다. 창피를 당한 진승은 망우초 대신에 황화채(黄花菜)라 부르라고 했다. 이 풀은 민간에서는 우울한 기운을 싹 가시게 해 준다는 산나물이자 한약재로도 쓰이는 원추리를 말한다. 힘든 시절의 근심을 망각한다는 풀을 등장시켜 진승과 연관된 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은 민란의 실패를 아쉬워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봉기가 성공해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지켜줄 것을 기대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고사일 것이다.

 

진승이 왕이 된 후 전국은 다시 춘추전국시대처럼 혼란이 거듭된다. 옛 제후의 영토마다 서로 앞을 다투어 왕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왕이 되고자 했던 민란의 주역들은 모두 일찌감치 목숨을 잃었다. 토벌군과 싸우는 와중에 민란 주력은 각자 살길을 찾으려고 분열했으니 모두 힘을 잃고 동력을 상실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킨 대택향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곳까지 후퇴한 후 후일을 도모하며 부대를 다시 모으던 중 자신의 수레를 몰던 부하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간질의 유혹에 빠져 주군을 사살하는 천추의 죄를 짓게 됐다. ‘배신은 민란의 역사에도 비일비재한데 도원결의처럼 의리와 충성을 계속 관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승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진승 사후 민란은 뜻하지 않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항우(项羽)와 유방(刘邦)의 초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진승의 인간해방선언은 전국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고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위대한인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2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비록 6개월 만에 진승과 오광은 세력을 잃었지만 작은 현의 정장에 불과하던 풍운아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초한쟁패(汉争霸)>의 멋진 서사를 우리에게 남겨준 일등공신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진승을 영웅으로 묘사한 사람은 바로 유방이었다. 유방 역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조그만 마을의 촌장이었는데 호송 중이던 포로를 석방한 대역죄를 짓고 산적이나 하면서 평생 살았을 운명이었다. 두주불사 술꾼이 산천초목이나 뜯으며 산적 노릇에 갑갑해 하던 유방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농민 출신의 진승이 민란을 일으키자 천하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혼란을 등에 업고 천하를 움켜쥐었으니 유방에게는 하늘에 내린 선물이나 다름 없었다.

 

유방보다 지위가 높던 숙하(萧何)와 조참()이 유방을 혁명군수령으로 옹립했다. 진나라의 위세가 여전한 상태에서 민란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래도 저래도 곤란한 처지에 처했던 그들은 유방을 끌어들여 일종의 보험을 드는 양다리 계책을 내놓았다. 유방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반란주모자는 100% 사형이므로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인 유방을 찾아가 대장으로 호출한 것은 현실적인 정치적판단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유방은 왕을 자처하지도 그렇다고 왕을 옹립하지도 않고 항우에게 머리를 숙이며 소위 잘 나가는 집단에 의탁해 힘을 기르는 현명한 지략을 발휘했다. 반진 전투 3, 초한 전쟁 4년을 거쳐 불과 7년 만에 평민에서 황제가 됐으니 기적의 영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2 3, 232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항쟁의 횃불로 진화하고 있는 민중총궐기의 함성은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정세를 오판해 분열의 나락으로 치닫는 정치인은 반드시 솎아내야 한다. 해체의 대상으로 지적된 새누리당은 면피와 탈출의 칼춤을 추고 있다. 칼날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줄 모르고 뒷구멍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일부 야권 정치세력도 기회를 틈타 정권을 잡아보려고 이합집산이다. 총궐기의 현장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선후보가 땅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구역질이 날 정도다.

 

민중총궐기는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21세기 민란이다. 민주주의를 피붙이처럼 이해하고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세력이 나서야 할 때다. 지속적으로, 전국적으로 더 큰 함성과 횃불로 민주주의의 진보를 노래할 것이다. 지도자는 그 노래 속에서 자연스레 분출되고 검증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직접 뽑은 지도자가 나서야 한다. 전 민중의 희망을 실천하는 머슴 같은 지도자는 반드시 나온다. 역사의 교훈이자 증명이다


  • 민란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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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용 죽겠지?”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신비한 동물 용()은 중국을 상징한다. 중화민족, 즉 한족을 대표하는 으뜸 동물이다. 갑골문(甲骨文)에 등장하는 용은 하늘의 결합 형태다.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로 패기에 넘치는 뱀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아마도 한족의 옛 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뱀 토템 부족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굴복시킨 후 연맹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용생구자(龙生九子), 용에게는 아들이 아홉이 있다. 명나라 학자 서응추()가 지은 <옥지당담회(玉芝堂谈荟)에 출몰한다. 지금도 재미난 상징물로 용과 더불어 활개를 치고 있다. 외국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이나 거리 곳곳에 숨어 있다. 아버지의 아들 토템은 그 옛날 연맹에 복속된 부족이었을 것이다.

 

뿔 달린 용으로 음악을 좋아해 현악기 머리에 달린 수우(囚牛)가 장남이다. 애제(睚眦)는 표범 몸과 용 머리의 흉악한 모양으로 살인과 싸움을 좋아하고 칼자루나 병기에 출현한다. 조풍()은 모험을 좋아하고 요괴를 물리치거나 화재를 제거하는 맹수로 전각 앞을 지킨다.

 

포뢰(蒲牢)는 바다사자로 고래에 맞서 거대한 고함을 지르는데 대형 종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 산예(狻猊)는 꿇어앉은 사자 모양으로 연기를 삼켜 내뿜기를 좋아해 향로 다리에 출현한다. 다른 동물보다 쉽게 관찰이 되는 거북이 비희(赑屃)는 장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비석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천하장사다.

 

폐한(狴犴)은 호랑이 형상으로 시시비비 가리기를 좋아해 감옥이나 관청 문에 달려있다. 부희(负屃)는 용처럼 생겼는데 고상하게도 문화를 좋아해 석비 꼭대기를 휘감고 있다. 리문(螭吻)은 용 머리와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화재방지에 일가견이 있어 목조 건물의 지붕 끝에 자리하고 있다.

 

아들을 거느린 용은 황제로 등극한다. 진시황을 조룡()이라 부르는 이유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룬 황제에 대한 극찬이다. 하급관리이던 유방(刘邦)이 한나라를 개국한 후 태몽으로 용을 등장시킨 까닭도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이룡희주(龙戏珠)는 황제가 거주하거나 행차한 곳의 건축물에 자주 등장한다. 황제가 거주하는 고궁에는 구룡벽(龙壁)을 세워 위엄을 보이기도 한다.


 

1988년 한단()의 한 마을에서 돌로 조각된 용 열 마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길이가 368m에 이르는 거대한 용과 작은 용 아홉 개였는데 마치 용과 아홉 명의 아들과 짝을 이룬 듯하다. 천하제일용(天下第一)이라 부른다. 차라리 용 한 가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상상의 동물로 알려진 용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원지방 허난(河南) 성 북부 푸양()이다. 1987년 약 7천 년 전 신석기 고분을 발굴과정에서 방각룡(蚌壳龙)이 출토됐다. 민물조개 껍데기를 이용해 마치 용처럼 빚었다. 그래서 용향(龙乡)이 됐다. 중화민족의 자랑, ‘중화제일용(华第一龙)’이라고도 명명했다.

 

중원지방에서 용이 빈번하게 돌출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1971년에 홍산문화(红山文化)로 유명한 네이멍구(内蒙古) 츠펑(赤峰)에서 기원전 4,500여 년 전 유물인 옥결(玉玦, 귀걸이)이 출토된다. 학자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중원의 고도에서 직선거리로 1,300km나 떨어진 동북 변방에서 나온 보물이 돼지의 머리, 말의 갈기, 뱀의 몸을 닮았기 때문이다. 갑골문의 용과 아주 비슷하다는 추리력을 발휘해 벽옥용(碧玉)’이라 이름을 붙인다. 츠펑에 가면 C자 형의 옥결을 이정표로 한 중화제일용이 곳곳에 즐비하다.

 

중화제일용은 또 있다. 산시(山西) 지현()의 물고기 꼬리가 달린 용 문양의 암화, 랴오닝(辽宁) 차하이(查海) 유적지에서 발견된 거대한 용 모습의 돌무더기도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1996년에는 중원에서 서남쪽 800km 떨어진 소수민족 동네 구이저우(贵州) 안순()에서도 용의 뿔 화석이 발견됐다. ‘제일용이 너무 많으면 곤란했던지 신중국용(新中国龙)’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였다.

 

용으로 추정되는 화석이나 유물은 전국 방방곡곡에 수도 없이 많고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국경선 바깥에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돼 용 문양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중국의 용이라고 주장하기에 십상이다. 중국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 용이 승천하듯 중국이 G2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향하고 있다. 두 마리 용을 가지고 구슬치기 하듯 노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런데 중화민족의 발원이 중화제일용이 출토된 지역 모두라고 우기는 것은 굉장히 거북하다. 요하문명의 핵심지역으로 알려진 츠펑에 용을 토템으로 섬기는 부족이 살았다는 식으로 확정하면 곤란하다. 중원을 넘어 동북부터 서남, 아니 지금의 중국영토 전부를 다 아우르고 싶어하는 욕구는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어서 분통이 터진다. ‘왜곡이기 때문이다.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는데 대책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진실이라는 수레바퀴에 매몰될 것이라는 심정으로 보도미로(宝刀未老)만 남긴다.

 

최종명, 작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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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의 주인

 

1978년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의 방문을 시작으로 1981 8월 카터, 1984 4월 레이건, 1985 9월 닉슨, 1998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달려갔다. 2004 10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 2007 1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2013년 한국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각국 정상이 늘 찾던 곳, 바로 시안의 병마용(马俑)이다.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병마용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1호 갱에 도열 된 군단의 웅장한 모습에 놀란다. ‘세계 8대 기적이라는 칭송에 손뼉까지 칠 정도다. 문화대혁명 막바지 1974 3, 우연히 세상에 출현한 병마용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거대한 중국에 딱 어울리는 유산이다.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은 공식 명칭이다.

 

이 박물관 이름에 감히 진시황을 떼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80세인데도 끊임없이 병마용을 연구하고 있는 천징위안(陈景元) 씨다. 베이징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2005 12월 무렵, ‘병마용과 진시황은 무관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 학술적이었고 게다가 집요했다. 병마용 모습이 궁금했던 나는 이듬해 5월 직접 시안을 찾았다.

 

그의 주장은 대체로 명쾌하다.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대략 2km가 넘는 거리에 위치하는 것부터 고대 건축방식에 어긋난다. 진시황은 3백 장() 이내에 황릉을 조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넓어도 700m를 넘지 않는다.

 

전국을 통일한 역량을 지닌 나라답게 진나라는 군복 색깔이 모두 흑색에 가까웠다. 병마용은 공기와 접촉한 후 40년이 지났어도 오색찬란하다. 도량형과 문자, 화폐 등을 표준화하고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도로도 그 길이가 일치했다. 당연히 도로에 맞게 마차를 운용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마차들은 크기도 서로 다르다.

 

병마용의 상투는 모두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는데 초나라 풍습이다. 더구나 병마용이 서 있는 방향은 모두 초나라를 향하고 있다. 천 씨는 이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닌 초나라와 관련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줄곧 진나라 소양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부장 묘라고 설파한다. 진시황의 고조모다.


▲ 시안의 병마용 1호 갱


 

2015 11 30. 베이징TV와 둥팡TV는 동시에 드라마 <미월전(芈月传)>을 처음 방영했다. 2016 1 9일 종영 때까지 두 TV는 시청률 1, 2위를 독점하고 서로 다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전국 50개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시청 점유율이 평균 7%를 넘겼는데 채널이 엄청나게 많은 중국에서 폭발적인 대기록이다.

 

초나라 공주 미월이 진나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태후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펼치는 내용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방송 채널도 수입해 방영했다. 역사드라마를 깔끔하게 잘 만드는 중국답게 구성과 품질이 꽤 기대 이상이다. 천 씨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해 진시황과 병마용이 무관하다는 글을 10년 전부터 써왔고 문화여행 때마다 강의하며 졸저에도 담았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다.

 

()는 초나라 왕족 특유의 성()이다. 미월이 곧 진선태후다. 사마천 <사기>에도 아들 대신 섭정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실존 인물이다. 진시황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출토된 병마용에는 독특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 모양과 비슷해 그 동안 모두 한 글자로 생각했지만 천 씨는 병마용의 주인의 이름인 미월, 두 글자로 나누어서 볼 것을 밝히고 있다. 얼핏 보면 비()와 미()가 비슷해 생긴 오해라는 것이다.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병마용 주인을 둘러싼 논쟁이 더욱 가열되고 있다. 제작진과 사전교감이 전혀 없던 천 씨는 진상을 밝힐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기뻐하고 있다. 병마용의 진상을 대중 앞에 드러내려는 평생의 업적이 평가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병마용이 발견된 시점은 문화대혁명 마지막 해였다. 정권을 농락하던 4인방은 중앙집권적 카리스마를 유지하고자 병마용은 곧 진시황이라는 선입견으로 고고학계와 언론계에 명령했다. 천 씨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지금껏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에게 역사 왜곡이라는 선물을 안겨주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높이 솟은 진시황 조각상을 미월의 늠름한 모습으로 대체될 날이 올 것인가?

 

역사에 대한 바른 평가를 공유할 것인가, 아니면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후세에게 가르칠 것인가? 병마용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중국의 역사가 세계에서 반듯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만큼 병마용은 중국을 상징한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다고 역사를 되돌려 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근시안일 뿐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문화와 이데올로기 부문 총 책임자이던 장칭()이 바로 왜곡 명령의 당사자였다. 그녀는 체포, 구금, 재판 후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최종명, 작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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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3] 진승과 오광의 대규모 기층 민란 ②


▲  진승 민란군은 수도로 진격했으나 려산의 죄수까지 동원한 진의 마지막 장수 장한 부대와 싸워 패퇴했다. 려산은 한나라를 건국한 후 수도로 정한 장안(지금의 서안)에 있는 진시황 능원과 병마용 뒷산이다. 병마용은 지금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 최종명


왕을 자처하고 망우초 죽을 먹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가담항설(街談巷說)'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리나 마을마다 번져 말(言)은 말(馬)보다 빨랐다. 진나라에게 핍박 받던 식민지 땅 중원에 회오리 바람이 불었고 초나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불길로 번지기 시작했다. 


전국시대 6국의 열혈 귀족은 농민군을 규합해 떨쳐 일어났으며 진승의 봉기군과 연합해 점점 세력이 늘어났다. 지금의 하남 진현(陳縣, 회양淮陽)을 점령하자 군중들은 진승이 초나라 사직을 복구한 공을 인정해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요청했다. 


진승은 때 맞춰 합류한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이와 진여는 '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며 지금은 서둘러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제압한 후 먼저 6국을 재건하고 수도 함양(咸陽)을 기반으로 제후를 파견하고 천하를 호령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지금 독자적으로 왕이 된다면 천하가 분열될지 모른다고 충언했다. 하지만 진승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서둘러 왕을 자처했다. 전국시대의 각 나라 왕족의 후손을 복위해 연합하자는 장이와 진여의 전략과 상충했다. 


<사기> 등 역사서에서는 진승이 세운 나라를 '장초(張楚)'라고 기록했다. 역사 기록물에 따르면 실제 당시 사용하던 국호 또는 깃발과는 다르게 기재한다. 동서남북과 같은 방위를 붙인다거나 나라의 복원을 뜻하는 후(後)를 앞머리에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나라를 널리 확대한다'는 장대(張大)의 뜻으로 기록한 사마천 때문에 역사에서 그다지 흔하지 않은 장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고구려를 고대의 지방 정권이라 부르는 역사 왜곡 마인드까지 겹쳐져 진승 왕은 장초 정권의 우두머리로 전락하고 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키기 전 쌀 한 톨 없이 가난한 시절이 있었는데 아사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농사꾼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와 딸이 봄 나물을 넣고 끓여준 쌀죽을 대접 받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맛있게 먹고 기운을 차린 진승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는데 왕을 자처한 이후 갑자기 그 모녀가 생각나서 애써 찾았다. 궁으로 초청한 후 다시 그 때의 죽을 먹고 싶었던 진승에게 모녀는 예전처럼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훤초(萱草)를 넣고 죽을 끓여 올렸다. 죽을 먹은 진승은 쓰기만 할 뿐 그다지 맛이 없다고 실망했다. 


노파는 "배가 고플 때는 향기로웠지만 산해진미를 즐기게 되면 쓴맛만 느끼게 된다고 해서 망우초(忘憂草)라 합니다" 고 아뢰니 진승은 부끄러워했다. 창피를 당한 진승은 망우초 대신에 황화채(黄花菜)라 부르라고 했다. 이 풀은 민간에서는 우울한 기운을 싹 가시게 해 준다는 산나물이자 한약재로도 쓰이는 원추리를 말한다. 힘든 시절의 근심을 망각한다는 풀을 등장시켜 진승과 연관된 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은 민란의 실패를 아쉬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승의 봉기가 성공해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지켜줄 것을 기대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고사일 듯하다.


진승은 장이와 진여의 전략을 무시한 채 곧바로 군대를 셋으로 나눠 전국을 한꺼번에 장악할 태세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왕권을 대신하지만 후계 승계는 할 수 없는 가왕(假王)이 된 오광에게는 하남 성도인 정주 서쪽 곡창지대인 형양(滎陽)을 공략하도록 했으며 무신(武臣)을 대장으로 임명한 후 장이와 진여와 함께 북쪽 조나라 영토로 진군시켰다. 주시(周市)에게는 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며 얼마 후에는 등종(鄧宗)과 합세해 남방 진출을 촉구했다. 사방으로 봉기군의 위세를 떨치며 옛 전국 시대의 나라를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부전부승(屢戰屢勝)으로 진나라 군대를 섬멸하고 형양에 당도한 오광은 뜻밖에도 승상 이사의 장남인 이유(李由)가 이끄는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한치 앞도 진군할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진승은 전국에서 봉기에 호응한 대규모 군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선무라 여겼던 형양이 지지부진하자 주문(周文)에게 장군 인장(印章)을 내리고 급히 형양 남쪽으로 우회해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해 수도 함양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문은 전국 시대 초나라 영웅 항연 부대에서 점복사(占卜師)로 근무했으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로 신망이 두텁던 초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 문하에서 자칭 병법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진승의 부름을 받아 장군이 된 후 사병을 모집해 수 십만의 군사와 천 량에 이르는 마차를 이끌고 질풍노도로 함곡관을 돌파해 지금의 병마용이 있는 서안 동쪽 임동(臨潼) 부근 희정(戲亭)에 진을 치고 진나라 최후의 대장군으로 유명한 맹장 장한(章邯)의 대부대와 맞섰다. 


장한은 려산(驪山) 일대에서 황릉 공사를 담당하던 노예와 죄수 20만을 동원해 상비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는데 주문의 부대는 패전을 거듭해 관중(關中)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주문은 연이어 장한 군대에 쫓기어 낙양 서쪽 면지(渑池)에 이르러 더 이상 가망이 없자 자결했다. 


한편, 부장 전장(田臧)과 이귀(李歸)와 함께 형양을 공략하던 오광은 장한의 군대가 주문 군대를 물리치고 진격해오자 진퇴양난이었다. 하루 빨리 형양을 함락하자는 오광의 전술에 대해 전장은 장한 군대와 전면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전장은 돌연 오광을 살해하고 '오광이 군권을 통솔하지 못하고 자만에 빠져있어 불가피하게 도모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전시 상황은 긴박했으며 진승은 반란 동지의 죽음을 한탄한 겨를도 없었다. 승상으로 임명된 전장은 군 통수권을 부여 받자 이귀에게 형양의 준동을 통제하게 한 후 전군을 동원해 의기양양하게 장한 군대에 맞섰다. 하지만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의 지략에 밀려 패퇴하고 살해 당하고 말았다. 진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장한에 맞섰지만 이미 주력부대들을 잃은 상태에서 역부족이었다. 


진승은 민란을 일으킨 대택향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하성부(下城父, 안휘 과양渦陽)로 후퇴한 후 후일을 도모하며 부대를 다시 모으던 중 자신의 수레를 몰던 부하 장고(莊賈)에 의해 살해 당했다. 장고는 장한이 벌린 이간질의 유혹에 빠져 주군을 사살하는 천추의 죄를 짓게 됐다. '배신'은 민란의 역사에도 비일비재한데 '도원결의'처럼 의리와 충성을 계속 관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승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진승 사후 부하장수 여신(呂臣)이 초나라 수도 진현을 회복하고 장고를 죽여 복수했지만 진승과 오광이 일으킨 민란은 뜻하지 않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유방에게 '나라'라는 말 바꾸는 것도 '식은 죽 먹기'


▲  역사의 고도 서안의 종루가 보이는 광장 ⓒ 최종명


2014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말인 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자 황제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하고 읊조린 말이다. 조고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은 신하들이 모두 동조해 '말'이라는 말로 아부한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황제 호해는 조고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고 조고는 황제를 손바닥에 놓고 정치를 농간한다. 


조고는 다시 호해를 폐위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3번째 황제로 만들고자 했다. 곧이어 조고는 진승 오광의 봉기군이 함양을 향해 진격하자 진 황실을 모두 도륙하려는 술책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아버지 부소의 억울한 자살을 알고 있던 자영은 조고의 의도를 눈치채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물러나는 고육책을 세워 유인한 후 조고를 살해했으며 삼족을 멸해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니 그도 항우의 칼날에 짓밟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승 오광의 민란이 일어나자 일약 풍운아로 등장한 두 사람이 있었다. 장이와 유방(劉邦)은 민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역사에 단 한 자도 기록될 리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혼란의 시기에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처세에 능통한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게 마련이다. 게다가 일생 일대의 행운을 직감하고 제대로 낚아채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 삶이 필요하다.


장이는 위나라 태생으로 빈곤했을 뿐 아니라 죄를 짓고 타향살이를 하던 시절에 행운을 걸머지게 됐다. 무능하고 평범한 남편에 실망한 부자 집 딸이 집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아버지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은 장이를 보자 단숨에 이혼해버렸다. 장이는 부자 집 사위로 들어앉아 전국의 빈객들을 불러모아 교우 관계를 넓혔다. 지역 유지이자 명사로 전국에 유명해진 덕분에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던 유방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진나라에 멸망 당한 후 장이는 위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현상금까지 걸린 죄인으로 전락했다. 진현으로 도피한 후 문지기로 위장한 후 살아가고 있었는데 바로 이곳은 진승 오광의 봉기군 거점이었다. 전국에 체포령이 내려진 죄인에게는 인생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코 앞에 찾아온 것이다. 진승은 일찍이 전국에 유명세를 떨친 장이가 몸을 의탁하자 크게 기뻐했다. 


장이는 진승의 책사로 임명되자마자 하북 성 일대 조나라 땅 평정을 자원하겠다는 건의를 올렸다. 장이는 왕을 칭하려는 진승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국 각 제후의 후예들과 연합하자는 전략을 제시한바 있다. 진승은 결국 오랜 친구였던 무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소요(邵騷)를 도위로 삼았으며 충성심이 검증되지 않은 장이와 진여를 교위로 삼아 함께 조나라 땅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무신이 인솔하는 3천여 명의 부대는 승승장구해 조나라 영토를 삽시간에 장악했다. 장이는 무신에게 조나라 왕이 되라고 권유했고 이어 연나라에 파견된 한광(韓廣)도 왕을 칭하는 등 너도나도 왕을 자칭했다. 진승을 비롯해 혼란기에 왕이 된 자는 치열한 전투와 내분으로 인해 모두 요절했다. 장이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고 왕을 보필하는 위치를 견지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유방과의 친분으로 사돈을 맺고 한나라가 선포된 후 제후국의 왕으로서 장수했다. 


유방 역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조그만 마을 사수(泗水)의 촌장이었는데 호송 중이던 포로를 석방한 대역죄를 짓고 망탕산(芒砀山)에서 산적이나 하면서 평생을 살았을 운명이었다. 두주불사이던 술꾼 유방이 산천의 초목이나 뜯으며 산골 대장 노릇에 갑갑해 하던 유방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농민 출신의 진승과 오광이 민란을 일으키자 천하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혼란을 등에 업고 천하를 움켜졌으니 진승과 오광은 유방에게는 하늘에 내린 선물이나 다름 없었다.


나라를 건국한 후 유방의 어머니가 용꿈을 꿨으며 코가 오뚝하고 얼굴빛이 화사한 용모를 용안이라 과장하고 외상 술 즐겨 마시는 것조차 탁월한 능력으로 비화시켰다. 유방이 술을 마시고 누워 자면 용이 자는 모습으로 변모시킨 이야기는 진부한 신화 공작이다. 유방이 연회에 참여하면서 축하금으로 일만 양의 돈을 써냈다는 호방한 성격이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지만 후일 여태후(呂太后)가 된 여치(呂雉)의 아버지가 한눈에 유방의 용안을 알아보고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고, 게다가 이미 아들까지 있거늘 애지중지 키운 자기 딸을 줬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심지어는 지나던 과객이 여치와 유방, 아이들까지 관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도 황제가 된 이후 충분히 창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버젓이 <사기> 와 <한서>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건국 신화는 멈추지 않는다. 포로를 석방한 후 유방의 의리에 동조해 산적이 되기로 한 무리가 망탕산에 이르자 뱀이 앞길을 막으니 모두가 두려워 길을 돌아가자고 했다. 이때 유방은 '사나이 가는 길에 두려울 게 뭐냐'고 소리치며 칼로 뱀을 베버렸다. 그래서 죄를 짓고 유방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으킨 행위를 '참사(斬蛇) 봉기'라고 부르며 현장을 보존했다. 


지금도 하남 영성(永城)에 있는 망탕산에는 후대의 황제들이 참사비(斬蛇碑)를 세워 놓고 기념했으니, 승리한 역사에게는 영웅담도 적지 않다. 참사비가 있는 망탕산은 진승이 사망한 장소와 가까워 유방이 나라를 세운 후 묘역을 조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회가 오자 행운도 뒤따랐다. <초한지>를 본 사람들은 숙하와 조참이 유방을 '혁명군' 수령으로 옹립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진나라의 위세가 여전한 상태에서 농민 반란군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지위가 높았던 그들이 굳이 유방을 끌어들인 것은 행운이었음에 분명하다. '반란'의 주모자는 100% 사형이므로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인 유방을 찾아가 대장으로 호출한 것도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유방은 왕을 자처하지도 그렇다고 왕을 옹립하지도 않고 항우의 숙부 항량 등 소위 잘 나가는 집단에 의탁해 힘을 기르는 현명한 지략을 발휘했다. 3년 동안의 반진 투쟁, 4년의 초한전쟁을 거쳐 불과 7년 만에 평민에서 황제가 됐으니 '기적'의 영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황제가 된 유방은 능력과 기회만 되면 누구라도 황제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게 된 '상황'을 '신화'로 덮어버릴 필요가 생겼다. 진나라 이전의 사서에 나오는 나라는 곧 방(邦)이었으나, 한나라 황제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모두 국(國)으로 바꾸는 일은 '식은 죽 먹기' 였다. 


감생설(感生說)을 적용해 삼황오제처럼 황제의 상징인 용 태몽을 창조하고 찬란한 빛이 온 몸에 퍼지고 얼굴에는 용의 관상이 돋보이도록 해야 했다. 사마천은 각고의 고난 속에서도 역사 기록을 남겼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거짓'을 '참'으로 치환한 유방 우상화 자료를 참고해 유방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를 미화하고 패자를 추화하는 파노라마처럼 흘러왔다. 


민란 연재한다니 "중국 가기 힘들겠다"는 염려


▲ 춘추전국시대 이래 조나라 왕성 유적지가 하남 성 한단에 조성돼 있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에 등장하는 장이와 진여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 최종명


1975년 11월, 호북 효감(孝感) 시 운몽(雲夢) 현 일대에서 대량의 진나라 죽간이 출토됐다. 상당수의 법률 조문 중에 노역에 관한 요율(徭律)도 세상에 알려지자 '사마천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는 성토가 빗발쳤다. 비록 진나라 법령이 엄하긴 했어도 <사기>가 언급한 '정해진 시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모두 죽게 된다.'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폭우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징발을 면제한다는 기록도 있어서 사마천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사기>의 내용 중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진승과 오광은 모두 하남 성 사람인데 북쪽 어양으로 진군 방향을 잡지 않고 왜 동남쪽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태택향에서 민란을 일으켰는가 하는 의심이다. 900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한결같이 '참수 당할 것이다.'는 말을 믿었다는 것과 물고기 배속의 신화, 부소와 항연을 거론하는 것도 아무리 농민들이 무지몽매했다고 치더라도 이상하고 '신비한' 기록이긴 하다.


아마도 <사기>는 '유방의 나라'를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사료를 근거로 집필한 사마천의 '기자 정신'에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왕후장상'을 명분으로 삼은 것도 평민 유방을 동일시한 냄새도 난다. 그럼에도 중국 역사상 가장 멋진 농민혁명 '소설' <사기>의 '진섭세가'는 읽을만하다. 


진승과 오광이 인간해방을 부르짖던 섭고대(涉故台)의 함성이 여전히 외치고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지만 사람들이 일부러 찾을 만큼 열광적인 곳도 아닌데다가 교통도 불편한 '기초 단체'나 마찬가지다. 중국 사람들도 교과서에서 진승과 오광을 배워 익숙하지만 대택향이 도대체 어딘지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휘 성 북부의 한 작은 농촌 서사파(西寺坡) 진으로 오랫동안 불려 왔던 곳이 바로 민란의 발원지 대택향이다. 


2014년 2월 11일 서사파 진이 민정청(民政㕔) 비준을 받아 대택향 진으로 이름을 바꿨다. 마을 이름 바꾸는 일이 우리처럼 주민 투표를 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꽤 진지한 사안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농민 반란의 상징을 마을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당한 우려'나 '정치적 고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중국 지역언론 보도에 따르면 동년 4월 23일 마을 이름을 변경하는 행사에서 지역의 서기 손용(孫勇)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아우성처럼 속전속결 승리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사상, 개척정신으로 무장해 경제개발에 분투하자"고 치사를 했다. 기사는 이어 '역사에 대한 존중', '전통으로의 회귀', '문화적 전승과 민의의 순응'과 더불어 '대택향 마을 발전의 새로운 동력과 보다 커다란 활력'을 위해 이름을 변경했다는 취지를 덧붙였다. 


현대 중국의 작은 마을이 역사 속 민란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부럽다. '민란'을 연재한다고 하니 "앞으로 중국 가기는 힘들겠다"고 한 지인들에게 꼭 대택향 마을에 같이 가보자고 할 생각이다. 2천 년 세월이 훨씬 지났건만 진승과 오광의 외침이 멈추지 않고 있다. 


▲  고대에는 대나무 죽간에 역사를 기록했다. 1975년 운몽 현에서 출토된 진나라 죽간에 기록된 '노역에 관한 요율'을 통해 사마천의 <사기>가 상당 부분 '사기'임에 드러났다. 사진은 안휘 성 홍촌 마을 시장에서 찍은 죽간 상품.ⓒ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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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2] 진승과 오광의 대규모 기층 민란 ①


하염없이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기원전 209년 7월, 대규모 범람으로 회수(淮水)는 온통 습지로 변했다. 900여 명의 농민들은 폭우 속에서 계속 더 진군하는 것은 무리였다. 안휘 성 북부 태택향(大澤鄉)에 이르러 푹푹 빠지는 속도로는 북경 밀운(密雲) 근처 어양(漁陽)까지 명령대로 도착하긴 불가능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고 호송 무관들의 호령은 이미 저승사자 고함조차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다. 더 이상 걸음조차 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겨우 몸 하나 가눌 움막 찾아 쉬어가기로 했다. 농민들의 대장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머슴이자 소작농으로 겨우 풀칠이나 하며 연명해 왔지만 현실을 보는 눈만큼은 냉정했다.


진승: 도망가도 죽고 당도해도 죽게 생겼네.

오광: 헛되이 목숨을 버릴 수야 없지.

진승: 영정(嬴政)이 죽자 호해(胡亥)가 황위를 찬탈하더니만 세상이 이 꼴이야. 사람들이 부소(扶蘇)를 어질다고 기억하고 초나라 영웅 항연(項燕)조차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 우리 둘이 의기투합하면 사람들도 모두 따를 것이야.

오광: 좋소. 사람들은 점복(占卜)을 믿으니 꾸며 보리다.


강력한 통치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 영정이 사망하자 환관 조고(趙高)는 승상 이사(李斯)를 압박해 공모하더니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막내아들 호해를 권좌에 올렸다. 진나라 2대 황제가 된 호해는 부소는 물론 서른 명이 넘는 공자와 공주를 갖가지 핑계로 도륙하고 조고의 전횡을 눈감고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북방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제하느라 빈농까지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가난에 이력이 난 삶을 살았지만 진승과 오광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무지렁이는 아니었다.


▲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전국을 주유하며 통치하다가 객사했다.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의 공모가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며 진승과 오광 민란의 원인이 됐다. 사진은 진시황의 순행지 동쪽 끝 산동 위해 성산두. ⓒ 최종명


정비(鄭妃)가 낳은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는 성품이 인자하지만 심약했던지 분서갱유와 가혹한 징벌체제에 반발하다가 변방으로 쫓겨나 있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도무지 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진시황이 객사하자 조고와 이사는 황제 조서를 위조해 '효성스럽지 못한 아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부소를 자결하도록 했다. 충과 효를 다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만 허위 조서로 죽을 정도로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중국인들은 '영원한 황제의 아들 공자公子'로 대우하고 있는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열전에 기재된 덕분이다. 부소의 자살을 진지하게 만류했던 변경 총사령관 몽염(蒙恬)도 압송된 후 스스로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2005년 성룡과 김희선 주연의 영화 <신화(神話)>는 바로 대장군 몽염을 역사로부터 캐스팅한 명작이었다. 몽염과 이사를 각각 한 편의 열전으로 엮은 덕분에 부소 역시 오늘날 멋지게 부활했다. 더불어 사마천은 <사기>에 '진섭세가(陳涉世家)' 편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섭은 진승의 자(字)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데 의기투합했다. 무릎 꿇고 죽느니 일어나 싸우다 보면 살아갈 길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지혜도 빌리고 명분도 살려야 하며 희망도 엿보여야만 농민들이 모두 따르고 그것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직감했다. 중국 역사 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의 두 주역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2천년 역사상 가장 분연한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농민들을 불러일으키는데 믿을 구석이 필요했으니 반란의 깃발을 들며 부소와 항연을 대역했다. 그들의 캐스팅은 적절했으니 혁명이나 반란 사상이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 구세주의 등장을 통해 스스로 믿을 구석을 찾는 것도 당연했다.


항연은 누구인가? 부소 옆을 지키던 장군 몽염 대신에 항연을 무대에 올린 이유는 진승이나 오광이 주도한 농민반란군은 대부분 진(秦)에게 멸망한 초(楚)나라 국적(?)이었던 것이다. 제(齊)나라 땅 임기(臨沂)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성공한 몽염 대신에 초나라 대장군 항연을 부추긴 것은 당연했다. 항연은 진나라에 맞서 싸운 영웅이자 초나라 부흥운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항연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기 바라는 초나라 사람들의 염원을 이용했던 것이다. <사기>의 '초세가(楚世家)'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각각 등장하는 항연은 죽음의 과정이 서로 다르게 기록될 정도로 애매했다. 그만큼 역사에서 흔적이 모호하니 진승과 오광이 캐스팅하기에 아주 좋은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봉기 이후 초나라를 재건한 항량(項梁)은 그의 아들이며 진나라를 멸망시킨 초패왕 항우(項羽)는 그의 손자였다.


부소와 항연을 자처한 진승과 오광의 농민군은 어양에 도착하더라도 진나라 군법에 의해 참수될 운명에 이를 것이라 판단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의해 사라지는 한 떨기 민초로 남기보다는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맞춤 구호가 필요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모의하면서 명분을 얻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오광은 몰래 생선 속에 "진승왕(陳勝王)" 글자가 새겨진 비단을 넣어두었고 배를 가른 취사병이 호들갑을 떨며 '하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왕이라는 글자보다 진승이라는 인물에 더욱 낯설고 놀라지 않았을까? 고대에는 맹수나 뱀, 조류나 물고기까지 신통한 토템이 정신 세계를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은나라 시대에는 거북이 등껍질 귀갑(龜甲)이나 신비스런 풀인 시초(蓍草)로 점을 치기도 했다. 물고기 배에서 놀랍게도 천자의 메아리가 들릴 줄 상상조차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절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기>에 고스란히 기록될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진승과 오광은 한발 더 나아가 사당 부근에 숨어서 대나무로 불을 피우고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 '대초흥, 진승왕(大楚興, 陳勝王)'이라고 교묘한 음운으로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초나라가 크게 부흥할 것이니, 진승이 출현해 왕이 되리라'는 리드미컬한 여섯 글자는 마치 전략적 구호마냥 각인됐다. 귀신까지 동원한 이들의 계책은 사마천도 신기했던지 대나무 불과 여우소리라는 뜻의  '구화호명篝火狐鳴'이라 언급했으며 바로 '거사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대명사로 회자됐다.


▲  진승과 오광 민란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안휘 성 중심에 위치한 천주산. 천주산은 고대에 환산(山)이라 불렸으며 안휘 성 별칭을 '환'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 최종명


구(篝)는 허신(許慎)의 <설문(說文)>에 따르면 곧 대나무 죽(竹)이다. 화약이 없던 시절의 폭죽(爆竹)은 바로 대나무를 태우며 귀신을 쫓던 행사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춘절(春節)뿐 아니라 혼례를 치르거나, 진학이나 승진, 건물 낙성식, 가게 개장에도 폭죽을 터트린다. 서기 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편찬된 책으로 초나라 지방의 명절 풍습을 담은 종름(宗懔)의 <형초세시기(荆楚歲時記)>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부터 정월 초 하루, 첫닭이 울 때 모든 가족이 문 밖에 나와 폭죽을 터트렸다고 전한다.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질 박烞(pò), 불 활활 탈 필熚(bì) 자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새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귀신을 쫓는 의식이었는데 화약과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대나무를 불에 태우면 꽤 커다란 소리가 났던 것에 착안했다. 중국사람들의 민간풍속인 '개문폭죽開門爆竹'은 복이나 재물을 바라는 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단순한 폭죽놀이가 아니라 민간 풍속이며 기복이자 귀신을 쫓는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승과 오광의 민란 전술은 대중적인 관점을 지닌 멋진 아이디어였다.


지금의 소림사 부근 하남 양성(陽城) 사람으로 소작농이던 진승은 평소에 포부가 남다르고 의리도 많아 훗날 크게 부유해진다면 가난했던 시절의 형제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늘 호기를 부렸다. 봉건제 신분사회에서 허풍치고는 꽤 인간적인 면모였다.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비웃었을 것인데 그때마다 "어찌 제비나 참새 따위가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까?"라고 했다. 


기러기와 고니처럼 고귀하고 원대한 포부인 '홍곡지지鴻鵠之志'를 진승의 캐릭터로 둔갑했던 것도 당시 농민반란이 가져다 준 사회적 영향이 폭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대형사고를 친 인물은 늘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어울릴 터이니 후대에 이르러 진승의 반란으로 인해 큰 혜택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영웅스토리로 담았을 것이 분명하다.


물고기를 영물로 둔갑시키고 대나무로 도깨비 불을 피우며 '왕'의 도래를 알린 후 진승과 오광은 보다 명확하게 목표와 전략을 드러냈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후 영토를 군과 현으로 나누어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내려 보내 통치를 펼치게 된다. 춘추전국 시대 이래 왕과 제후, 지방 대부 등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권력이자 세습이라 생각했던 사람들 앞에 생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관리가 파견 와서 농민들을 수탈했던 것이다. 


신권이건 왕권이건 하늘에서 오는 줄 알았던 허위를 일깨운 건, 어쩌면 진나라의 군현제이기도 했다. 진승이 외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는 메시지치고는 원자폭탄이었다. 모두 떨쳐 일어나서 누구든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폭약만큼 폭발적이었으며 농민반란군에게는 군현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회심의 한 수였다. 이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국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거사, 인간해방을 선언하다


디데이는 정해졌다. 평소에 대인관계가 좋은 오광은 진 나라 호위 무관들을 자극한 후 다툼을 벌여 일부러 채찍질을 당했다. 안 그래도 서럽고 억울했던 농민들은 흥분했으며 분위기가 고조되자 오광은 검을 높이 들어 무관들을 찔러 죽였으며 동시에 진승도 합세해 진나라 관리 및 무관들을 모두 제압했다. 농민들이 함성으로 호응하자 진승은 큰 목소리로 "죽어도 명성을 남기고 죽자!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를 하늘이 내려주기라도 하는가?"라고 외쳤다. 


부소와 항연을 잇는다고 설파하고 가독(苛毒)한 요역(徭役)을 거부하고 떨쳐 일어서자고 설득했다. 농민들의 동조를 얻자 바로 연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를 세울 것을 선포했다. 굴욕의 허울을 벗어 제키듯 한쪽 웃통을 벗고 나섰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리 빛 몸통은 순백의 양심으로 절규하는 몸짓처럼 멋지게 보였다. 나라의 독립과 재건을 꿈 꾼 진승과 오광은 드디어 민란의 주동자로 화려하게 탄생했다.


용농(傭農) 진승은 장군(將軍)으로, 빈농(貧農) 오광은 군대를 지휘하는 도위(都尉)가 돼 군대 조직을 갖추고 반진(反秦)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국 최초의 농민주도의 혁명군이 탄생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왕과 제후의 전쟁 놀이의 소모품이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만 겨우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농민은 스스로 주인을 자처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인간해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승이 제단을 쌓고 '인간해방'을 동맹했던 제대(祭台)는 지금도 안휘 성 숙주(宿州) 기현(蘄县)에 남아있는데 진승의 자인 섭을 따서 섭고대(涉故台)라 부른다. 사마천의 <사기> "진섭세가" 편에 진승의 자가 기재돼 있는데 언뜻 보면 진승에게도 자가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다.


고대 사람들은 이름 '명名'과 '자字'를 함께 썼으며 현대 중국인들은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밍쯔(名字)?'라 한다. 태어나자 마자 이름을 얻는 것을 취명(取名)이라 하고 남자가 20세 성인이 되는 관례를 올릴 때 이름을 얻는 것은 표자(表字)라 했다. 또한, 남송 역사학자인 정초(鄭樵)가 편찬한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따르면 씨족이 후손을 잇는 개념으로 모계사회의 영향은 성(姓), 이후 부계사회는 씨(氏)로부터 나왔다 하고 성씨를 설명하면서 귀한 이는 씨가 있고 천한 이는 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고 했다. 하층민이던 진승과 오광에게도 성과 이름뿐 아니라 자도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부여한 것인지는 아마 사마천에게 물어봐야 할 듯싶다.


▲  예로부터 용은 황제를 상징하며 중국인은 용의 후손이라는 토템적 사고를 믿고 싶어한다. 진승과 오광이 민란을 일으킨 후 '장초'를 건국했는데, 지금도 민란 발생지 대택향에는 '용' 이름이 들어간 유적지가 많다. 사진은 북경 고궁(자금성)의 전각 대문에 조각된 용의 모습으로 관광객의 손때가 반질하다. ⓒ 최종명


현을 점령한 후 기거했던 기현고성이 여전히 유적지로 보존돼 있으며 최근에 만든 민란 기념관은 진승의 포부를 상징하듯 홍곡원(鴻鵠苑)이라 하고 옛 우물은 용안정(龍眼井), 커다란 나무는 자용수(柘龍樹)라 부른다. 용이 등장하는 이름을 쓴 이유는 진승이 곧 초나라의 왕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진승은 '민란' 이상의 역사를 꿈 꾸며 진나라의 황제가 있는 황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제 "무도한 황실과 재상을 벌(伐)하고 폭력적인 진 나라를 주(誅)하려는" 거사가 시작됐다.


진승의 '인간해방' 선언은 전국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으며 진나라의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제2의 춘추전국' 시대를 열었다. 비록 6개월 만에 진승과 오광은 세력을 잃었지만 작은 현의 정장에 불과하던 풍운아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으니 <초한지>의 멋진 서사를 우리에게 남겨준 일등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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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보포럼(세리포럼)에서 지난 2014 8월 출판기념회 겸 13억인과의 대화 강의한 자료이다.

출간된 책을 전부 묶어 관련 영상과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본 시간이었다.

 

3편 역사문화는 중국인의 문, 진시황과 무관한 병마용, 티베트, 팔대괴, 사설도서관, 변검, 가람묘, 공자, 공예, 마지막 황제, 비단장수 왕서방, 금면왕조 등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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