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명절, 특히 우리의 설날인 춘제(春节)에 먀오후이(庙会)가 열린다. 

사원이나 사당에서 펼쳐지는 시장이라 해 먀오스(庙市)라고도 하고 제창(节场)이라고도 부른다. 

사당에서 향을 피우며 기원하고 시장에서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는 축제인 것이다. 

중국의 오랜 전통이자 민속문화 활동이다. 베이징만 해도 먀오후이가 최소한 20군데 이상 장소에서 열린다. 

보통 1주일 가량 연휴 기간 내내 시장이 열려 수 많은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즐기는 셈이다.  


2월 4일, 차오양구(朝阳区)에 있는 둥위에먀오(东岳庙) 먀오후이를 찾았다. 

입장료 10위엔. 라오베이징(老北京)의 다양한 생활 문화를 한꺼번에 즐길 기회가 흔하지 않다.

아이들의 전통 완구체험관에서 참 재미있는 것을 봤다. 바로 삼국장기이다. 

싼궈샹치(三国象棋)라고 쓰여 있고 장기알이 3등분 돼 있다. 

희한한 것은 장기판도 물론 나누어져 있는데 한가운데가 다소 가로세로로 포물선이다.


자원봉사 여학생이 장기판 앞에 앉아서 자기도 신기한 듯 핸드폰카메라로 찍고 있다. 포물선이지만 서로 엇갈려 만나는 점이 장기알이 가는 자리, 멈추는 지점인 줄 알았다. 한가운데 삼각형 속 공동공간은 빈 공간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포나 차를 사용한다면 둘 중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셈이다. 볼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판에 적혀 있는 설명에 따르면 삼국 이후 남송 시대 이후 이 장기의 원형이 생겼다고 한다. 삼국의 수장인 조조, 유비, 손권을 정해 시작하면 된다. 장기알을 움직이는 동선은 기존 초한 장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서로 잡고 잡히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의 수장이 잡으면 나머지 군사는 모두 수하로 복속돼 나머지 한 나라를 정복하고 통일하는데 유리하게 된다. 실제로 해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변수가 있을 것 같다. 중국사람들도 흔히 보는 장기판과 장기알이 아니어서 신기해 한다.  

함께 데리고 간 후배 딸은 마냥 신이 났다. 알 쌓기 놀이인 줄 아는 것이다. 나중에 배워도 되겠지. 삼국지의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체험관에 또 하나의 삼국지가 있다. 바로 화룽다오(华容道)라는 놀이이다. 적벽대전 이후 도망치는 조조를 잡기 위해 제갈량의 명령을 받은 5대장군 관우, 조운, 장비, 황충, 마초와 병졸 넷이 있다. 관우는 크기가 가로로 긴 사각형이다.  

화룽다오 놀이의 시작 모습. 총 81번을 움직여 조조를 탈출시켜야 한다.

거창하게 수 많은 포진을 설명하고 있다. 총 81보를 움직여 조조를 탈출시켜야 한다. 중간마다의 조조의 위치를 상세하게 그려놨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생각만큼 쉬워보이지 않는다. 마침, 한 아이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막 조조를 탈출시켰다.

"지능놀이로서 중국의 3대 불가사의"(智力游戏界的三个不可思议)라 불릴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전해내려오던 놀이이다. 그러다가 1932년 존 하롤드 플레밍(John Harold Fleming)이란 사람이 영국에서 특허권을 얻었다고 한다.

체험관에 여러 재미난 완구, 놀이기구가 있지만 역시 삼국지만큼 사람의 눈과 발을 끄는 것은 없어보인다. 삼국지장기 놀아보고 화룽다오로 조조도 구출해보면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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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11.02.10 2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정말 대단하군요. ^^




해발 2천미터 베이징 링산,  안나푸르나를 정복하다
초 강풍 한파 속 베이징 최고봉 링산을 오르다

 

베이징은 평양보다 위도가 높다. 북방의 한파가 살을 파고드는 날. 한라산보다 해발이 더 높은 산이 베이징에 있다. 지난 1 29일 한겨울 영하 10도의 날씨에 해발 2,000미터 고지를 등산하는 산악회가 있다고 해서 함께 의욕을 부렸다. 링산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공연한 욕심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베이징 서쪽 먼터우거우(门头沟) 구에 위치한 링산(灵山)이 목적지이다. 베이징최고봉(北京的第一峰) 링산은 베이링()과 함께 둥링(东灵), 시링(西) 3개 거대한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다행인 것은 해발 1,600미터까지 도로가 있다. 차에서 내려 산으로 접어들자 엄청난 강풍이 분다. 7~8급 초 강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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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말로 능선과 능선 사이 산 입구를 야커우(垭口)라고 한다. 야커우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산길로 올라섰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장갑을 두 개나 꼈는데도 손이 얼얼하다. 사진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과연 이 한파를 뚫고 단 100미터라도 올라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 바람에 날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지 괜한 공포도 엄습한다. 여성 회원들이 바람 앞에서 갈피를 잡느라 시작부터 정신 없다. 산악회 회원 17명이 산행에 참가했는데 안타깝게도 바람이 너무 불어 3명이 중간에서 산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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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따라 바람을 헤치고 숨 가쁘지만 숨도 쉬지 않고 뛰어오른 듯하다. 멀리 주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든 추위라 할만하다. 신발로 조금씩 들어간 눈이 녹아 발이 얼얼하게 얼어간다. 발을 쿵쾅 구르며 높이뛰기를 해야 조금 견딜 만하다. 그러니 보통 산보다 곱절은 더 힘이 드는 셈이다.

 

땀이 나는 만큼 추위는 조금씩 익숙해진다. 앞만 보고 한참 올라 가다 잠시 뒤돌아보니 올라온 길이 마치 히말라야 등산로처럼 멀어 보인다. 눈과 볼만 남겨두고 온 몸을 다 감았는데 결국 양 볼은 새빨갛게 타 들어간다. 얼면서 얼굴이 타는 느낌이다.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또 높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얕아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가파르다. 그나마 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 덕분에 점점 추위도 잊는다. 호흡 곤란 때문인지 땀방울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해발 1,600미터에서 시작한 산행. 이제 1,700미터를 지난 듯하다. 완만한 능선 길이다. 추위와 바람과 싸우다 보니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능선 하나를 넘으면 또 새로운 능선이 나타난다. 가끔 멈춰 서서 뒤돌아보면 뒤따라 오는 회원들의 모습이 멋진 산과 잘 어울린다.

 

벌써 4번째 능선을 넘었나 보다. 이미 1시간 30분 가량 산행을 했다. 추위 때문에 중간에 멈춰서 쉬는 것보다는 천천히 느릿느릿 걷는 게 낫다. 이 나지막한 산길을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지그재그로 생긴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 지 현장이 아니면 모른다. 능선을 하나 넘을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색다른 풍광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어라 힘만 빼는 산행이었을 것이다. 비탈길 평원에 살포시 쌓인 눈밭, 파란 하늘과 눈을 닮은 구름이 참 멋지다. 강물에 구름이 투명하게 비친 듯 눈밭 위로 풀들이 바람 따라 누웠다. 강렬한 햇살이다. 풀들이 검은 줄을 그은 듯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이 하얀 거품처럼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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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진하게 뻗은 그림자도 생긴다. 눈밭 위라 더욱 흑백 대비가 선명하다. 숲에는 햇살에 반사된 자작나무 줄기가 꽤나 밝다. 해발 1,800미터 지점에 이르니 회오리 바람이 분다. 눈들이 휘감겨 오르며 햇살을 가로막기도 한다. 히말라야 등반 다큐멘터리가 연상된다. 점점 자기도 모르게 착각에 빠진다. 마치 안나푸르나 등반대인 양.

 

눈길은 깊게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눈이 얼었다면 준비해온 아이젠을 꺼내야 한다. 장갑을 벗어야 한다면 손에게 너무 미안할 뻔했다. 장갑 2개 끼고도 카메라 셔터 누를 때마다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산길에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게 들린다. 이제 어느 정도 추위와 바람에 익숙해졌나 보다. 몸도 마음도 이제 완전히 링산에 적응한 느낌이다.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 더 무섭고 두려워진다.

 

어느새 링산의 봉우리들을 대부분 넘었다. 다시 또 올라가야 할 능선이 하나 더 남았다.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비행기 꽁무니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시샘하나 보다. 브이(V) 자로 펼쳐진 능선 사이로 솟아올라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구도도 안성맞춤이다.  

 

마지막 능선을 넘어섰다. 뒤돌아 보니 장관이 다름 없다. 뒤 따라오던 회원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멈췄다. 모두 겨울 산의 자태를 감상한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음직한 ‘안나푸르나 같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산 너머로 또 설산이 연이어 이어진 모습이 그렇다. 어디 명산이나 그러 하겠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같은 색깔조차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산은 늘 사람을 흥분시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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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봉우리를 중국사람들은 우밍산(无名山), 즉 이름 없는 산으로 부른다. 링산 주봉 옆 베이링산을 이루고 있는 이 산봉우리는 곁가지 봉우리라 이름이 따로 없다. ‘안타푸르나’를 떠올렸다. 베이징의 ‘황산’이라고도 하고 ‘알프스(阿尔卑斯)’라고도 한다. 오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아름답거나 유럽의 낭만이라 비유해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한겨울만큼은 지독한 ‘안나푸르나’와 같다. 이름이 따로 없다니 적어도 체감 온도 영하 30, 눈발이 휘날리는 강풍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듯하다.

 

베이징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렇게 멋진 겨울 산이 있을 줄 몰랐다. 산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눈이 쌓여서 썰매 타듯 내려가기도 하고 다시 언덕을 오르느라 숨을 헐떡이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바람 속도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날씨도 다소 따뜻해졌다.

 

12시가 넘었다. 햇살을 머금은 자작나무가 산행을 열어주고 있다. 눈 쌓인 벼랑길도 조심스럽게 걸었다. 산길을 내려오다 눈과 산, 하늘이 3분할로 나뉜 모습에 발길을 잠시 멈춘다. 오른쪽으로 산 능선을 따라 원을 그리듯 돌았다. 멀리 주봉인 링산의 멋진 모습도 보인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거친 산행이어서일까 자꾸 ‘안나푸르나’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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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길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습을 문득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마치 제도용 컴퍼스로 그린 듯하다. 누군가 ‘나무줄기가 바람이 불어서 만든 둥근 원’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 바람 따라 나무줄기가 한 바퀴 빙 돈 것이다. 강풍이 만들어낸 조화다. 한번에 돌았는지 여러 차례, 몇 날 며칠이 걸렸는지는 모른다. 귀퉁이에 오롯이 이렇게 조그맣게 만들어진 자연현상이 귀엽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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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1시다. 창청(长城)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서둘러 추월해 앞서 갔다. 이 험준한 산에 만리장성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돌로 쌓은 성벽과 망루가 있고 옆에는 벽돌로 쌓은 성벽도 있다. 명나라 시대 쌓은 것이다. 보수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정말 명나라 창청이 완벽하게 남아있다.

 

바람을 피하고 햇살 드는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쓰레기 한 톨 남기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에 만리장성에서 라면과 김치로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다. 성벽 무너진 틈 사이로 아주 멀리 링산 주봉이 하얗게 엷은 눈을 덮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성벽과 설산의 조화도 보기 힘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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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남쪽 방향의 해발 1,737미터 황차오량(黄草梁)을 거쳐 하산하게 된다. 풀빛이 누런 산등성이라 해 황차오량이라 부르는 곳을 향해 간다. 비교적 평지이다. 밋밋한 산등성이의 모습이고 겨울인데도 밝은 빛깔의 누런 느낌이다. 이런 산등성이가 몇 군데 연이어 있는 곳이 황차오량이다. 이 멋진 등산로를 알았으니 가을 무렵 반드시 다시 찾고 싶다.

 

하늘빛과 풀빛이 아주 대조적이다. 가을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황차오량 등산로에서 쉬고 간다. 자작나무와 하늘 그리고 살짝 나온 흰 구름이 예쁘다. 구름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몇 장 찍고 나니 나무 오른쪽으로 휙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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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차오량에서 측백나무 산골짜기 바이위()까지는 하산 길이다. 중간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계곡 길을 택했다. 계곡을 따라 거대한 암석들이 서로 엉켜 있다. 건너 쪽 암석이 만든 그림자 때문에 더욱 밝게 빛난다.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계곡 절벽에서 자라난 나무가 높이 솟구쳐 있다.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들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

 

계곡 길을 빙 돌아가니 코끼리 코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틈새로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코끼리 코 앞에 서니 계곡을 벗어나는 경계이다. 이 절묘한 공간은 신이 만든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신이 망치로 마술처럼 깨놓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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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해발고도가 낮아지고 있다. 등산로도 차분하게 정돈돼 있어 비교적 안전하다. 여유도 생기고 속도도 느슨해졌다. 뒷동산 약수터를 다니러 가는 느낌이다. 완만하면서도 순조로운 길이니 드디어 하산이다.

 

강렬하던 햇살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해가 저물고 있는 시간이다. 오후 4시가 넘었다. 여전히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 계단 길을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저무는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나무 사이로 차 길도 보인다. 산 아래에 도착하니 4 30분이다. '불은 삼림의 큰 적이니 불씨를 삼림과 멀리 하라'는 문구가 써 있다.

 

해발 2,000미터의 호흡은 거칠었고 바람은 절벽으로 질주했고 살면서 가장 춥게 느낀 날씨였기에 안나푸르나를 빌어 산행의 기분을 만끽한 날이었다. 이 멋진 '알프스'이자 황산'안나푸르나'를 오로지 겨울 산행 최고의 기억이라 말하고 싶다. 최악의 등산이었지만 최고의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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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akco 2011.01.31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멋있네요.대단하세요.부럽기도하고.....잘보고 갑니다.




1월1일과 2일, 군수공장지대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작업실이자 갤러리, 나아가 문화공간과 상업거리로 변해가고 있는 798예술구를 찾았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출사한 셈이지요. 첫날은 혼자 가서 열심히 찍었고 둘째 날은 지인 가족 아이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틀 동안 찍은 사진을 묶어 이미지영상으로 꾸몄습니다. 늘, 시간 날 때마다 가는데 나날이 변하는 모습, 계절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양상이 볼거리가 많아 보기 좋기도 하고, 진솔한 모습은 사라지는 듯해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배경음악은 중국음악 중 진사(金莎)의 샹쓰거우(相思垢)과 린쥔제(林俊杰)의 당니(当你,)입니다.

위 이미지영상에 들어가지 못한 사진 몇 장입니다.


날씨가 영하 5도 가량 되니 오후 햇살이 점점 사라지니 꽤 춥네요. 와중에 멋진 여인 조각상 옆에서 셀프타이머로 사진도 찍었습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티베트(시장, 西藏) 전시와 관련 상품 가게가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너무 예쁘네요. 마치 라싸(拉萨)에 다시 온 느낌입니다. 보랏빛 등만 빼면...

역시 군데군데 갤러리마다 많은 전시가 있습니다. '아이들 눈으로 본 상하이엑스포'란 주제의 전시입니다.

798예술구의 매력은 역시 바깥에 설치된 조형물입니다. 갈수록 독특한 설치물이 더 많아지고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늘 변하지 않는 조형물에 다가선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798'은 이 군수공장지대의 일종의 번지수입니다. 797도 있는데 가는 곳마다 약간 달라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렵습니다. '751' 기차 앞에서 함께 간 아이들 모습이 어울리는 듯 또는 그렇지 않은 듯...

798예술구는 대학로처럼 즐겨 가도 좋아서 아마 이번 해에도 여러번 갈 듯합니다. 벌써 5년 동안 다녔는데 매번 색다른 인상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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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5회] 위츠 허우거우 고촌락을 가다

 


오래된 마을을 찾을수록 신기하고 정겹다. 중국에는 수많은 옛 촌락이 관광지로 개발돼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인구와 역사, 영토와 민족이 다양한 만큼 촌락도 각각 독특하다. 그래서 촌락만 전문으로 여행하거나 또는 연구하기도 한다. 안후이(安徽) 남부의 고촌락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전국 어디나 지형과 풍토에 어울리는 재미난 촌락이 많으니, 관심 가져보면 흥미롭다.

 

산시(山西) 진중(晋中)에 있는 허우거우()라는 이름의 촌락도 매우 특이하다. 성 수도 타이위엔(太原) 기차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가면 위츠라오청(次老城) 종점이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면 기찻길도 없고 국도도 먼 지방도로를 1시간 더 달려간 후 또 1시간 이상을 더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이 대중교통도 변변하지 않은 마을이니 택시요금도 비싸다. 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예 모른다고 내빼는 택시 몇 대를 보내고 나니 점점 손님과 운전사가 합의할 수 있는 요금, 60위엔이다. 거의 1시간이나 달려 둥자오향(东赵乡) 마을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40위엔이나 받는 이 촌락의 공식이름은 위츠허우거우농경문화관광구(次后沟农耕文化景)이다. 되돌아갈 일도 걱정이지만 우선은 이 마을 속으로 푹 들어가련다.






황토 산과 푸른 빛 살짝 도는 나무 앞에 황토 색깔 나는 조각상이 보인다. 땅을 가는 소와 소를 재촉하는 사람, 후구구촌(後溝古村) 농경문명(農耕文明) 8글자도 모두 누렇다. 메마르고 높은 고원지대를 한위엔()이라 하는데 정말 온 산이 다 황토로 뒤범벅이고 해발도 거의 1천 미터에 육박한다. 어떻게 이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살았을까 궁금해진다.

 

마을로 들어서니 주민들도 군데군데 보이고 방문객들도 여럿 눈에 띤다. 입구에 5백 년은 붙박고 살아온 노목 2그루가 서로 가지를 잇대고 서 있다. 아마도 마을의 광장인가 보다. 무대인 구시타이()와 도관()이 마주 보고 있는데 미술학도도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옥황상제가 자리잡고 있는 도관 앞에 앉은 학생은 곁에 다가가도 인기척도 없다. 건너편 언덕 불교사원 관음당(音堂)에도 도화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돌로 쌓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70여 채의 집이 옹기종기 살아왔으며 지금은 250여명의 주민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워낙 멀리 떨어진 두메산골이라 농사부터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다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흔적이 많다.

 

집마다 역할분담이 이뤄졌던 듯 쌀, , , , 기장을 찧던 오곡방(五谷坊)이나 술을 빚던 주방(酒坊), 두부를 만들던 두부방(豆腐坊), 식초를 만들던 초방(醋坊) 그리고 기름을 짜던 향유방(香油坊) 간판이 걸려 있다. 당나귀가 식초 공장에서 눈을 가리고 돌고 있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미용 연자방아도 있다.

 

역시 사람들이 시끌벅적거리는 곳은 양조장이다. 전통양조 방식으로 만드는 허우거우구주(古酒)가 탐이 난다. 항아리에 담은 것도 있고 유리병에 담은 것도 있는데 맛이 궁금하다.

 

다시 산비탈을 걸어 오르는데 한 노인이 길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평화롭게 조용히 부르다가 낯선 이방인이 다가가니 약간 부담스러운 표정이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낯익은 노래인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홀로 노래를 즐기고 있는데 방해를 한 것 같아 미안하다.




갑자기 불쑥 여행을 온 초등학생들이 잔뜩 나타났다. 흰 모자를 쓰고 오렌지색 셔츠를 한 아이들이 인솔 선생님을 따라 가는데 시끄럽다. 이런 산골까지 와서 농경문화를 배우러 오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우리나라라면 어느 학교가 이런 곳을 일부러 찾을까 생각해봤다. 아이들은 농경생활문화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농사 짓는 법이나 농가 생활을 보며 여전히 떠든다. 한 아이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기도 한다.

 

아이들을 따라 가는데 집 마당에 서 있는 개 한 마리가 보인다. 옆집 처마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고 그 앞을 고양이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가기도 한다. 뒷동산으로 오르니 빨간 부리가 멋진 토종 닭도 보인다.



이곳은 평지와 해발이 67미터 차이가 난다. 높은 곳으로 오르니 마을도 다 보이고 둘러싼 산세도 다 보인다. 황토를 부은 듯한 산 2개가 양쪽으로 빙 둘러 위치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 마을 속설로 전해오는 말로 얼룽시주허우거우춘(龙戏珠后)’이라 불렸다.

두 마리 용이 구슬을 물고 하늘을 오르는 형세라는 뜻인데 사뭇 마을 별명이 극존칭이라 할만하다. 이 말은 중국 황제나 공자를 상징하는 건물에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속담으로 전해왔길래 망정이지 이를 기록했다면 아마 마을은 전멸했을 지도 모른다. 이 마을이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당나라 시대인 9세기 초 묘비명 기록이라 하니 천년 이상 자급자족하며 살아온 마을이다.


비탈길을 따라 윗동네로 올라갈수록 집들은 관광지답게 숙식을 겸하고 있다. 집 이름도 독특하며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재미있다. 댜오차오위엔()‘Hanging Bridge Courtyard’, 반포위엔(半坡院)‘Half-slope Courtyard’라고 적혀 있다. 사실 댜오차오라는 말은 방어시설로 긴 동굴로 이어진 지형이며 반포라는 말은 비탈 중간이라는 뜻이니 집의 위치를 연상해 지은 듯하다. 장씨 일가의 사당도 보이는데 황토 굴을 파고 그 안에 초상화와 신주를 모시는 형태이다.

 

황허()를 따라 황토고원에는 동굴 집인 야오둥이 전통가옥이라 할 정도로 많다. 이 산골 가옥의 특징은 반혈거(半穴居) 형태의 야오둥()이다. 완전 동굴 집 형태도 있지만 사합원(四合院)처럼 바깥문과 안쪽으로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나오고 실제 사는 집은 동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허우거우 마을에 와서 가장 신기한 것은 마당 벽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조형물이다. 흔하게 보기 힘든 모양인데 대체로 마을 수호신인 토지야(土地)와 같은 조각상이 숨겨 있다. 벽을 파고 안에 아주 작은 크기의 수호신을 두고 지붕을 덮고 집 모양으로 쌓아 마치 축소된 사당을 집집마다 모셔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 동쪽에는 문창묘(文昌)가 있고 서쪽에는 관제묘()가 있다. 동문서무(文西武)의 원칙에 따라 마을 전체의 길흉화복을 빌고 있다. 마을 한복판에 도관인 옥황묘(玉皇)가 있는데다가 마을 서남쪽에는 불교 사당인 관음당(音堂)이 있고 반대편에는 도교의 현무를 뜻하는 진무묘()가 자리잡고 있다.

 

민간신앙과 관련된 산신묘(山神)나 사람의 생사를 관장한다는 오도장군(五道将军)의 오도묘(五道)도 있다. 마을 전체가 마치 모든 민간신앙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오랜 역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산골 깊은 곳에서 농경생활을 중심으로 외부와 크게 교류하지 않고 공동체생활을 해온 마을치고는 굉장히 다양한 종교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사합원과 동굴이 복합된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채나물과 토종 계란, 동네 두부를 반찬으로 조밥과 마을에서 직접 양조한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친구와 동행해 함께 갔는데 서로 기다렸다는 듯 한 잔 마셨다. 곡주가 다 그렇지만 구수한 향과 더불어 지역특색이 강렬한 알코올농도가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한다. 마침 촉촉한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다. 방금 한 밥 내음이 노란 때깔까지 예뻐 빗소리 들으며 산골마을 한 끼 식사는 너무도 환상적이다.

 

동굴 집에서 하루 밤을 보내도 좋을 듯하다. 하루 묵는데 100위엔인데 다시 오면 아주 싸게 해주겠다고 한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명함까지 주면서 한국사람들에게 많이 알려달라고 한다. 글쎄 이 산골을 찾아올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옆자리에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 역시 조밥을 먹고 있다. 얼핏 보니 중년의 남자와 다소 어린 아가씨였기에 괜히 눈치가 보여 그저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기만 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마침 비도 조금 그쳤다. 산골을 내려가는 길에 오도묘를 거쳐 관음당을 둘러봤다. 아담한 암자로 제 격인데 10여 개나 되는 마을홍보용 홍등을 걸어놓아 영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관음당으로 들어서는데 황토색 도포를 입은 스님이 따라온다.

 

공짜로 향 3개를 받아 들고 관음보살 앞에서 예를 올리는 동행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눈치가 영 불안하다. 아니나다를까 친구를 붙잡더니 관상을 보기 시작한다. 사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빨리 나가려는데 계속 하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첫 마디에 당신은 추차이(储财) 능력이 별로 좋지 않다고 꼬신다. 주차이라는 말은 돈을 벌어서 쓰지 않고 모으는 것을 말하는데 ‘1천위엔을 벌지만 8~9백위엔을 쓰는 사람이라니 다음 말이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한참 관음당 안을 두루 다 둘러보며 마음껏 돌아다녔다. 이런 사당은 관상을 보며 돈벌이를 하는 대신 사진 찍는 일에 관대한 편이다. 동행도 마음이 급해서인지 10여 분만에 나왔다. 관상을 봐주는데 1천위엔을 내라고 하는데 그냥 나오기 그래서 1백위엔을 주니 그냥 받더라고 한다. 원자재가 드는 일도 아닌데 아마 얼마를 줘도 고맙다고 할 스님이다. 그런데 정말 스님이 관상을 봐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도교와 불교, 유교가 다 융합돼 섞인 마을이라 해도 좀 심했다.






마을을 나와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버스 시간을 물었더니 걸어가는 것이 나을 듯싶다. 젊은 친구 하나가 한국사람이냐고 갑자기 물어서 몇 마디 나놨다. 방언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인사말인 니하오()니호라 발음한다. 베이징 인근 허베이(河北)나 산시(山西) 방언이 우리말과 비슷한 듯하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허베이 술인 라오바이갈(老白干)로빼갈로 발음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가 붙어 헤어지는 말을 물었더니 자이젠()자이제라 한다. 우리는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자이제라고 하며 헤어졌다.

 

터벅터벅 1시간 걸어갈 일이 끔직하다 싶을 때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오고 있다. 자세히 보니 식당에서 만났던 불륜 느낌 강한 한 쌍이다. 급히 지나가기 전에 손을 흔들었더니 뜻밖에도 멈춰 서더니 차를 태워준다.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부탁한다고 했는데 시내까지 데려다 준다. 길에서 차를 얻어 타기 드문 중국이다 보니 정말 무지하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위츠라오청(老城)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쌀에 이름이나 명언을 새겨 넣어 목걸이를 만들어 파는 미커(米刻)가 보였다. 언니와 동생이 수업 끝난 후 아르바이트로 한다고 해서 하나 팔아줄 요량이 들었다. 쌀에 ‘13억과의 대화라는 뜻의 <허스싼이두이화(和十三亿对话)>를 새겨달라고 하니 글자가 길어도 문제없다며 웃는다.






중국 고촌(古村)은 전국적으로 아주 많다고 했다. 각양각색의 마을마다 역사가 있고 토양이 다르며 생활방식이 다 다르다. 물이 많은 수향이 있으며 산이 높은 고원마을도 있을 것이다. 민족이 56개나 되고 민족문화 역시 주거문화가 기반일 터이니 정말 옛 촌락 다 둘러보려면 평생 다녀도 어려울 것이다.

 

유명 여행사이트인 르투()닷컴을 보면 고촌락을 역사의 활화석(史的活化石)’이라 표현했다. 정말 어울리는 말이다. 하루 종일 농경문화가 풍부하고 종교도 골고루 섞인 천 년 역사의 흔적과 만났다. 흔적만큼 진한 황토 마을의 인상도 머리 속에 또렷하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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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10.12.31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형님 잘지내시죠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대박 나시길 기원합니다.
    한국 계시면 얼굴 좀 뵈요 ^^




[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4회-2]  영화 <동사서독>의 촬영지 홍스샤

홍스샤는 이름처럼 붉은 암석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협곡이다. 황토인지 홍암(红岩)인지 이 곁들여 있는 절벽에 지역 특색이 강한 동굴 집인 야오둥(窑洞)이 많다. 협곡 사이로 들어가니 거침 없이 흐르는 강물 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한다.

절벽에는 185개나 되는 마애석각(摩崖石刻)이 새겨져 있으며 누워 있는 부처 조각상도 보인다. 석각이 많다는 것은 수많은 문인들이나 정치가들이 다녀간 흔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름 짓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이곳을 혼이 담긴 보물이라고 석각혼보(石刻魂宝)라 부른다.



이 협곡이 처음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때는 중국 북송(北宋)시대 강력한 경쟁왕조 서하(西夏)이다. 이 붉은 홍산(红山)에는 원래 동굴 속에 커다란 샘이 있어서 물이 흘러나와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지방 출신 서하의 창업 국왕인 이계천(李继迁)은 풍수지리에 따라 물줄기를 막고 암석을 부숴 물길을 바꾼 후 조상을 매장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이 조상을 모시고 번창했던 곳이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훼손돼 사라졌다.

또 다른 기록은 1472년 명나라 시대 순무도어사(巡抚都御史) 여자준(余子俊)이다. 이곳에 만리장성의 중건을 위해 파견된 그는 홍스샤 북쪽에 물이 고여 있는 큰 호수 가운데에 도적떼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이 깊어 접근하기 힘들자 군대를 동원해 암석을 뚫어 부순 후 도랑을 만들었다. 물이 다 빠진 후 습격해 도적들을 소멸시켰다고 한다. 이때 암석을 부숴 만든 협곡을 홍스샤라 했고 호수의 물이 흘러 위시허가 됐으며 관개된 도랑을 광저취(广泽渠)라 불렀다.




동굴 속에는 태극의 괘나 꽃, 동물, 태양과 같은 문양들이 천장에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이 살던 흔적이다. 도랑이 동굴 속으로 흘러들어 생활용수로 사용했으며 불을 피운 흔적도 보인다. 절벽을 깎아 문을 만들고 통로도 좁아 천혜의 요새라 해도 될 만하다.

좁은 동굴 속이고 바닥에 물이 흐르며 동굴 옆과 서로 통로인 공간이다. 홍스샤를 다녀온 후 최근에 안 사실은 바로 1994년 방영된 영화 <동사서독(東邪西毒)>의 촬영지라는 것이다. 진융(金庸) 원작소설이자 왕자웨이(王家卫)가 감독하고 장궈룽(张国荣)과 량자후이(梁家辉)가 각각 '서독'과 '동사'로 열연했으며 량차오웨이(梁朝伟), 장쉐여우(张学友), 장만위(张曼玉), 린칭샤(林青霞), 류자링(刘嘉玲), 양차이니(杨采妮) 등 이름만 들어도 당대 최고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영화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인 장궈룽이 기거하는 공간에는 얽히고 설킨 인물들의 캐릭터를 드러내야 한다. 어두우면서도 약한 자연 조명이 드러나야 하며, 숨 막힐 듯 혼탁한 벽면이거나 길고 암흑 같은 통로가 필요하다면 정말 기가 막힌 곳이다.

게다가 아픈 상처를 잊도록 하려고 연인(장만위)이 '동사'를 통해 보내는 술 대신에 물을 마시는 장면은 동굴 속을 흐르는 물줄기가 제격인데 이 세상 어느 곳에 홍스샤 말고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상의 장소이다. 영화의 탁월한 영상미를 발휘하는 아름다운 사막과 오아시스 같은 느낌도 다 이 부근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정말 <동사서독>의 촬영지가 산시(陕西) 성 위린(榆林)일지는 몰랐다.

그래서 2008년도에 다시 편집하고 새로 더빙한 리덕스(redux) 필름을 봤다. 배우들의 연기야 홍콩영화 중 실로 최상이라 할만할 뿐 아니라, 탁월한 영상미가 바로 홍스샤 동굴 속이구나 하는 것을 바로 느끼게 해줬다.

협곡 사이를 연결하는 돌다리를 건넜다. 돌과 돌 사이에 빈 공간이 있고 그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모습이 다 보인다. 발을 잘못 디디면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이 빈 공간을 거미가 줄로 얼키설키 이어놨다. 마치 아래를 보지 말고 자신을 보라는 듯, 아니면 다리를 건너는 동물들이 자신의 거미줄에 빠지라는 본능일 지도 모른다.




반대편으로 가면 빠른 유속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홍스샤의 또 다른 이름인 슝스샤(雄石峡) 석각이 훤히 보인다. 석각 위로 몇 마리 새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날갯짓 하는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았다가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한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니 다소 완만해진 물줄기 때문에 조그마한 모래사장이 생겼다. 아직 여름이어서인지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아래쪽으로는 출렁이는 구름다리가 멋지게 걸려 있다. 구름다리 가운데 서면 양쪽 협곡과 세찬 물줄기가 한눈에 보인다. 이 자연스럽게 펼쳐진 풍광을 오랫동안 서서 지켜본다. 어렵게 이 멀리 찾아왔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니 작은 아쉬움도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디라 해도 기억에서 사라지지도 않지만 또한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도 않는 것을 보니 여행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장궈룽, 즉 장국영이 영화에서 막 살아나올 듯한 협곡을 둘러보느라 열심히 다녔더니 힘겹다. 협곡을 빠져 나와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 나오는 길이 참으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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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4회-1] 달팽아, 니가 만리장성을 알아? [전베이타이 장성]

만리장성만 보면 참 멋지다. 대체로 높은 산 위에 성벽을 쌓고 망루를 세워서 위성에서도 보인다지 않는가.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역대정권들의 치열한 생존전략이었으며 수없이 많은 서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엄청난 규모의 개발공사이기도 했다.


중국학계가 나서서 만리장성을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무한정 확대해 '이만리장성'을 만들고 있지만, 명나라 한족정권이 재건한 산하이관(山海关)과 자위관(嘉峪关)에 이르는 장성만으로도 충분히 기나길다. 딱 중간에 전베이타이(镇北台)가 있다.

산시(陕西) 북단에 있는 도시이자 내몽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위린(榆林)시에 바로 전베이타이가 있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도착하는 거리다.



깔끔하게 조성된 국가AAA급 관광지를 들어서니 '천하제일대(天下第一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나타난다. 허름한 듯 보이는 바위에 새겨진 붉은 글씨는 중국 만리장성의 수호자인 고건축가 뤄저원(罗哲文)이 쓴 것이다. 올해 86세인 뤄저원은 중국 만리장성 대부분을 보수하고 연구한 학자이다. 그야말로 만리장성의 산 증인의 필체를 여기서 보다니 반갑다.

수 만리 떨어진 만리장성의 긴 노정에는 수많은 명승지가 있다.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니 곳곳마다 그 이름이 서로 각각 다르다. 그 기능이나 지형에 따라 다른데 산하이관처럼 관(关)이라 하면 관문일 것이다. 관문은 대체로 요지이니 크고 작은 관청도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산하이관이나 자위관처럼 관청이 남아있기도 하다. 산둥 칭다오(青岛) 해변가에는 서구열강이 들어와 조차로 쓰면서 만리장성의 8개 관문 이름으로 바다관(八大关)이라 이름 짓기도 했다.

관문이란 말 대신에 입구라는 뜻으로 커우(口)라는 지명이 붙은 곳도 아주 많다. 베이징 외곽에 있는 유명한 장성인 구베이커우(古北口)나 아예 허베이(河北) 도시 이름이 된 장자커우(张家口)도 있다. 변방의 요새라는 싸이(塞)라는 지명도 꽤 있는데, 지루싸이(鸡鹿塞)나 가오취에싸이(高阙塞), 쥐옌싸이(居延塞) 등은 대부분 한(汉)나라 이전에 쌓은 장성이다.


요새와 비슷한 보루라는 뜻의 바오(堡)라는 이름이 붙은 장성도 많은데 이는 대부분 명나라 장성이다. 이 바오라는 이름은 주로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많은데 주변지역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흙담을 높이 쌓고 축성을 해서인지 보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싶다.

만리장성 중에서 흔하지 않은 것이 타이(台)라는 이름이다. 베이징 동북 쪽 쓰마타이(司马台)와 이곳 전베이타이가 유명하다. 전베이타이는 높이 4층 규모의 웅장한 정방형 망루로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 건설했다. 수많은 장성 중에 3대 절경을 꼽으라면 산하이관과 자위관 그리고 바로 이 전베이타이를 떠올린다. 산하이관이 바다와 잇닿아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답다면 자위관은 온통 사막과 초원으로 둘러싸인 가파른 절벽이 멋지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과연 이 전베이타이는 어떤 경관이길래 만리장성을 대표할까 생각했다.



과연 4층 높이이면서도 웅장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위 하나가 또 나타난다. 가운데 전베이타이 글자와 함께 만리장성 모습을 붉게 새겼다. 바위 위를 무심코 봤는데 갑자기 꿈틀하는 것이 보인다.

처음에는 돌 조각 하나가 바위 위에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움직이는 모습과 가느다란 촉수 2개가 들락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달팽이다. 달팽이 종류나 개체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렇게 국가급 관광지 한가운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누군가 길바닥에서 주워서 올려놓았을 수도 있고 스스로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랐을 수도 있다. 도대체 한 평도 채 안 되는 바위 위에 무슨 먹을거리가 있다고 올라와서 꿈틀거리고 있는지.


이 느리디 느린 달팽이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중국인의 특성으로 거론하는 만만디(慢慢地)라는 말이 생각난다. 명나라 시대 대규모 장성 건설 기간만 따져도 120여 년이나 되고 춘추전국시대 전후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으로 따지면 2500년 이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세우기도 힘들지만 부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굳이 없애야 할 이유도 없으니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세운 장성을 볼 때마다 엄청나게 느린 달팽이처럼 여유가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공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달팽이가 장성의 역사를 알 도리가 없겠지만 느리면서도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는데 치열한 중국인들을 떠오르기에 적합해 보인다.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는 달팽이에게 '니가 만리장성을 알아?'하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달팽이 몸짓 뒤로 전베이타이의 거대한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 1층 기단 부분의 전체 둘레가 320m이며 벽 높이가 10m에 이른다. 남쪽이 76m, 북쪽이 82m, 동쪽과 서쪽이 각각 64m인 사다리꼴 모양이다.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4층의 높이는 4.4m이고 둘레는 35m가 조금 넘는다.


계단을 따라 층층이 올라가니 225㎡ 넓이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사면을 빙 둘러 요철 형 성가퀴(城垛)가 있다. 이 성가퀴에 남녀 한 쌍이 앉아있는데 놀러 나온 모양인지 웃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했다.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긴 했지만,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하다.


얼마 후 관리인이자 가이드가 오더니 내려오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뜻밖이다. 당연히 '위험하니 내려 와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문화재를 보호할 줄 모르냐고 야단을 친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른가 보다.

멀리 보이는 곳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우리의 어머니 강'(我们的母亲河) 위시허(榆溪河)인데 우딩허(无定河)와 합쳐져 흐르다가 옌안(延安) 동쪽 부근에서 황허(黄河)로 흘러간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고향에 있는 강을 '어머니 강' 무친허(母亲河)라고 부른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정겨운 말이다. 황허를 이를 때도 중국인들은 무친허라고 하며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우리가 '서울의 젖줄 한강'이라고 하는 말과 비슷한 의미다.




전베이타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서 양봉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건만 수십 개의 벌통을 두고 벌들과 함께 살고 있다. 1근(500g)에 12위안이니 참 싸다. 야생 잡꽃 꿀이지만, 가짜 같지 않고 선량한 표정과 말투니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다.

위린 시의 젖줄인 위시허에는 홍스샤(红石峡)가 있다. 이 협곡은 만리장성이 지나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베이타이에서 걸어서 20분 가량 걸으면 된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데 마침 아이들이 옆에 다가온다. 머리 감으라고 하는 엄마가 야속하기도 하다. 여행 중에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만나면 늘 고향에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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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indlov2.tistory.com BlogIcon 돌이아빠 2010.12.01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달팽이는 만리장성을 넘어가려고 하는걸까요? 아니면 만리장성을 따라 가려고 하는걸까요?

    만리장성.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역사가 담겨있을까요~

    좋은 사진으로 좋은 구경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youyue.co.kr BlogIcon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2010.12.01 18: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이상하게 만리장성에 가서 희한한 것들을 많이 봅니다. 베이징올림픽아웃사이드에서도 만리장성 기사 보시면 한 벌레가 장성 벽을 넘어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3회] 마오쩌둥의 정치적 고향 옌안을 가다

시안
(西安)역 아침 9시. 기차가 서서히 산베이(陕北)를 향해 출발한다. 산베이는 산시(陕西)성 북부 지방을 이 지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산베이 중심에는 바로 옌안(延安)이 자리잡고 있다. 옌안은 중국공산당 홍군(红军) 2년간의 25천리 장정(长征)의 종착지이다. 1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으니 바로 마오쩌둥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 더욱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은 공산주의자이거나 혁명을 꿈 꾸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 다가간다는 느낌, 카메라 메고 가는 여행자의 기대감이리라. 350킬로미터, 4시간 반의 기차 여행, 아침에 출발하는 여행은 늘 맑아서 좋기도 하다. 옌안으로 다가갈수록 차창 밖은 온통 황토 빛깔이다.

기차에서 내려 옌허(延河)가 흐르는 칭량산(清凉山)으로 향했다. 시내 중심을 흐르는 이 하천은 황토고원의 색감을 다 휘감고 돌아서인지 황허(黄河)만큼 누렇다. 강을 바라 보며 조금씩 산을 오른다. 강이 흐르는 황토 산이라 동굴들이 쉽게 형성돼 있다. 산 속 동굴을 집 삼아 기거하는 야오둥(窑洞)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혁명유적지 입구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유적지의 신화서점 야오둥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혁명유적지 중국공산당 중앙 당보위원회 발행과


옌안 시내 중심의 얕은 산 속 동굴은 바로 중국공산당 옌안 정부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특히 이곳 칭량산은 언론기관지들이 대거 집결했던 곳이다. 신화통신사(新华通讯社), 해방일보사(解放日报社), 신화라디오방송국(新华广播电台) 등이 여기서 탄생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중공중앙당보위원회(中共中央党报委员会) 발행과(发行科)’ 표시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1937 4 24일 문을 연 신화서점(新华书店)이 있던 야오둥이 있다.

지금은 1만4천여 지점을 지닌, 전 중국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최대의 서점 프랜차이즈이지만 그 시작은 이렇게 황토 동굴 속에서 시작했다. 당보를 발행하고 서점을 운영하면서 정치사상을 선전하고 교육하는 것이 옌안 정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산에는 대략 18군데에 야오둥이 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는 사원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만불동(万佛洞)이다. 만불사 안에 있는 이 동굴은 수당(隋唐)시기에 처음 건립됐다고 하는데 이후 수 차례 중건을 거쳤다. 입구에는 하천을 바라보며 34기둥3누각(三门四柱三楼) 형태의 돌 패루가 온전히 황토 빛깔을 담고 있다.

보수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동굴을 입구 삼아 안에는 불상이 있고 바깥에는 향로가 놓였다. 붉은 현수막을 내걸고 나무들을 이리저리 엮어놓아서 다소 어수선하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한가운데 커다란 불상이 자리잡고 있고 벽에는 자그마한 불상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새겨져 있다. 옌안 정부 시절에는 이 말 없는 불상 조각들이 그저 홍군들만의 귀찮은 눈요기였으리라. 종교보다 혁명이 더 긴박한 시절이니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만불사 패루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의 절벽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만불동...


만불동은 중앙인쇄창(中央印刷厂) 유적지이다. 이 인쇄공장은 장시(江西) 성 루이진(瑞金)에서 성립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 시절의 서북지사 소속이었는데 대장정으로 옌안에 온 중국공산당이 1937년 1월 칭량산으로 옮겼다. 인쇄공장은 곧 당보위원회가 설립되자마자 주간지인 당보 <해방(解放)>을 발간하게 된다. 이후 당 기관지인 <해방일보(解放日报)>를 비롯 <중국공인(中国工人)>, <중국부녀(中国妇女)>, <중국청년(中国青年)>, <중국문화(中国文化)> 등 신문을 발행했다. <삼국연의(三国演义)>, <손자병법(孙子兵法)>, <사마문답(司马问答)>과 같은 중국고전과 <고리키선집(高尔基选集)>, <돈키호테(堂吉诃德)> 같은 외국 소설을 발행했다.

야오둥을 떠난 1948년까지 중앙인쇄창 이름으로 발행한 <해방일보>가 총 2130호에 이른다. 옌안 정부가 홍군은 물론 전 중국의 농민과 지식인을 교양하는데 그 공로가 혁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비록 그저 돌 비석 하나이고 야오둥은 잠겨 있지만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후방에서 종이에 용기와 미래를 담아내던 현장의 냄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사진을 찍으면 ‘당시 풍모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尽显当年风采)’는 관광지 상술과는 다르다. 홍군 복장을 입고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담벼락 앞에서 사진 찍는데 15위엔이다. 중국사람들은 거의 기념사진 찍는 것에 돈을 아까와 하지 않는다. 중국 아주머니가 막 사진을 찍는데, 총까지 겨눈다. 황토 벽에는 거울까지 하나 놓여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혁명유적지 중앙인쇄창


사용자 삽입 이미지홍군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


사용자 삽입 이미지절벽에 거울이 매달려 있다. 옷 입는데 10위엔, 사진까지 찍으면 15위엔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국농공홍군 글자가 써 있는 배경


바로 이곳은 역대 문장가들의 멋진 글자가 구비구비 새겨졌다고 해서 시만(诗湾)이라 한다. 절벽에 글자를 새긴 마애제각(摩崖题刻)이 곳곳에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오르면 시중화(诗中画)라는 글자도 인상 깊다. 멋진 글자체로 사방에 새겨진 뜻을 다 살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던 중 중국공산당 역사를 답사하는데 어울릴 멋진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홍군의 창설자 중 한 명인 예젠잉(叶剑英)의 충여우옌안(重游延安)이다.

옌안 떠난 지 12년, 이제 그 옛날 모습은 아니지만
왕자핑의 양자링 보니, 지나간 흔적 머리 속에 생생하네

그 옛날 야오둥 시절, 토비들 횡포 심했건만
탁월한 산베이의 건아들, 어려운 일마다 재주를 발휘했네.

마을사람들 진심으로 대해주고, 대추와 호박으로 옛 친구 환대하니
당면한 과제가 곧 고향의 일이니, 모두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서 나서자.

延安十二年, 延安已改旧时颜. 王家坪上家岭, 鸿从头细细.
旧时窑旧时, 剩胡匪劫后灰. 北健儿真, 艰难处显奇才.
乡亲呼我最情, 子南瓜宴故人. 到今年社里事, 大家创业要先行.

예젠잉은 홍군의 활동근거지이던 옌안의 왕자핑(王家坪)과 양자링(杨家岭)을 떠올리며 회한과 함께 새 시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시를 지었다. 옌안을 떠난 지 12년 만에 쓴 7언 율시 형식의 시인데 주더(朱德)와 함께 홍군을 지휘하며 혁명을 이뤄낸 장군의 노회가 가슴에 와 닿는 듯하다. 이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불렸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이 과연 이 시나 노래를 알는지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시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젠잉의 '충여우옌안'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만 절벽을 사이로 계단길이 있고 아래로는 누런 옌허가 흐르고 있다


절벽을 따라가면 공중에 매달린 듯 서 있는 아담한 정자 인위에팅(印月亭)이 나온다. 달의 흔적이 있다는 이름이니 관망대가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자 안에는 둥근 구멍이 뚫린 위에얼징(月儿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맨 바닥의 우물을 두레박으로 기어 올리는 통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물을 바라보면 달의 모습이 비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층 높이나 되니 이렇게 물을 끌어올려 생활했던 것이다. 절벽을 끼고 야오둥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 하겠다.

산베이 야오둥은 중국 5대 전통 가옥 중 하나이다. 오랜 역사와 수 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답게 각양 각색의 향토적인 가옥양식이 많다. 베이징 등 화북지방의 장방형의 쓰허위엔(四合院), 광시(广西) 등 남방지방의 대나무와 풀로 엮어 만든 간난식(杆栏式), 윈난 이족(彝族)의 문과 방이 붙어 있고 이층구조로 마치 도장처럼 생긴 이커인(一颗印), 남방으로 이주한 북방 커자(客家) 사람들의 공동체 가옥인 웨이룽우(围龙屋) 등이 대표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에 있는 인위에팅 정자. 가운데 있는 동그란 구멍 아래에 우물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유적지 길

칭량산은 중국공산당이 진주하기 전에는 불교 및 도교 사원이 있던 곳이다. 문 입구의 만불동 외에도 야오둥 안는 미륵동(弥勒洞)과 누워 자고 있는 부처가 있는 수불동(睡佛洞)도 있다.

수불동을 지나면 벽에 붉은 글씨로 마음 심()자가 크게 써있고 그 뒤 절벽에는 시안(是岸)이라 새겨 있다.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다(回头是岸)’라는 말이 있는데 ‘깨달으면 극락이란 뜻이니 마음을 다스리면 극락에 이른다는 뜻인가 보다.

산 서쪽으로 선인동(仙人洞)이 자리잡고 있다.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누각을 보니 봉래각(蓬莱阁)이다. ‘봉래란 신선이 산다는 산의 이름이니 누각 이름치고는 도교의 냄새가 잔뜩 묻어난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에 새겨 있는 봉래선경(蓬莱仙境), 복지동천(福地洞天) 글자만 봐도 신비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절벽마다 수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절벽에 새겨진 시안(是岸). '돌아보면 피안이다'는 뜻!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절벽 쪽으로는 자연동굴 야오둥으로 노자동(老子洞)과 노반동(鲁班洞)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노자야 도교를 창시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데 노반은 낯설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톱(), 송곳(), 대패(刨子), (铲子) 등 공구를 발명한 건축의 달인이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처럼 노반은 성이 공수(公输)이고 이름이 반()이다. 노나라 사람 공수반을 일반사람들이 음이 같은 반()을 써서 노반이라 하며 숭상하는 것이다.

동굴에 만들어진 정면 본당인 팔선동(八仙洞)에는 8명의 신선들이 각양 각색의 모양으로 서 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조각상 8개가 나란히 서 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는데 그 모양들이 흔히 보기 어려운 형상들이고 생경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도교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도술을 부리거나 한다는 선입견 때문일지 모른다.

도교에서 말하는 팔선은 모두 도술을 잘 부리거나 악기 연주가 신기하거나 무기 다루는 솜씨가 신비롭거나 한 신선들을 말한다.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마다 팔선이 서로 달랐는데 명나라 시대 소설가인 오원태(吴元泰) <팔선출처동유기(八仙出处东游记)>에 이르러 지금의 팔선으로 정해졌다 한다.

도교적 판타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동굴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흥미롭다. 일명 동유기라 불리는 이 소설은 서유기에 비해 훨씬 도교적 소재와 주제를 담았다고 전해진다. 서유기가 지금도 널리 알려진 소설이자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되듯이 동유기 역시 팔선의 캐릭터로 흥미로운 대중문화의 소재이다. 우리는 도교의 영향을 덜 받아서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은 온통 명산마다 도교사원이 많아 자주 접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선인동 입구 봉래각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선인동 노자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선인동 노반동


신선동 마당에서 절벽 위를 바라보니 사각형의 동굴 안에 하얀 천으로 온몸을 가린 조각 상이 자리잡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장식이 달려서 그런지 더욱 화사해 보인다. 자연동굴을 다듬고 양쪽에 돌기둥을 세웠으니 나름대로 잘 관리하는 신선인 듯싶었다. 그런데 바람에 휘날리는 휘장에 부처님이 지닌 지혜의 빛이 두루 세상을 비추다라는 뜻의 불광보조(佛光普照)라는 4글자가 써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도교 안 불교인 것이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불교와 도교가 서로 한 공간에 머물고 융합되었던 역사적 흔적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종교 교리에 얽매어 서로 경계가 분명한 것보다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기구에 더 부합하려는 합리성이 아닐까 싶다. 특히 중원으로 진출한 민족들은 더욱 도교와 불교, 심지어 유교까지도 함께 융합하려는 시도가 많았던 이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선인동에 있는 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선인동 정자에서 본 칭량산과 옌허


사용자 삽입 이미지칭량산 선인동과 류리탑이 보인다


신선동을 나와 황허(黄河) 같은 옌허(延河)를 바라보며 산길을 더 오르니 멋진 류리탑(琉璃塔)이 나온다. 명나라 숭정(崇祯) 2(1629년)에 만든 탑으로 원래 시 동북쪽 탕자핑(唐家坪)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6.25미터 칠층 높이의 팔각 목조 탑으로 겉면에는 매 층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부분 불상들이 예쁘게 자리잡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3층에는 용이 솟구치는 모습(腾龙)이 있으며 4층에는 봉황(凤凰), 기린(麒麟), 사슴(鹿), 천마(天马)와 같은 길상영물이 류리로 상감 돼 있다. 군데군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상감 자욱이 떨어져 나간 것이 오히려 이 탑의 진면목이다.

탑을 몇 바퀴 돌아보고 나니 멀리 서민들이 살아가는 야오둥이 보인다. 아직 옌안 시민들은 동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칭량산에서 부처와 신선에게 생사고락을 의지하거나 삶의 고통을 하소연하며 살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옌안에 왔던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은 떠나갔어도 마을을 지키며 변함 없이 살아갈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류리탑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류리탑. 7층8각 목조탑에 조그만 불상들이 많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옌안 칭량산 류리탑. 3층에는 승천하는 용, 4층에는 길상동물들이 상담돼 있다!


* 중국 옌안 칭량산 혁명유적지와 불교 및 도교사원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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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 산시 2010 2회] 고도 서안에 정착한 후이족 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안 후이족 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안 후이족 거리

 

고도 시안(西安)은 중국 패키지여행 코스 중 제법 인기가 높은 편이다. 실크로드나 티베트로 가려는 배낭여행자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중원 고도 시안은 진시황이나 병마용이 대표하지만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소수민족 거리인 후이민제(回民街)도 관광코스 중 하나이다, 기껏해야 한 두 시간, 야시장만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골목길이나 서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쉽다.

 

이슬람 문화를 간직한 채 중국에서 정착하면서 만들어먹던 요리들이 아주 많다. 그냥 중국요리라는 큰 범주에 넣어서 짬뽕처럼 섞어버리지 않는다면 중국 서북방면에서 살아온 이슬람교도들의 독특한 먹거리문화와 만날 수 있다.

 

시안 중심가인 중러우(钟楼)에서 구러우(鼓楼)를 지나면 바로 후이족(回族) 거리가 나온다.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清真寺)가 몇 군데 있고 주변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시장이고 외국인을 위한 관광코스이다.

 

청진이란 말은 이슬람교를 숭상하는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를 상징한다. 온통 홍색이나 황금색으로 뒤덮인 중국에서 초록색 이 두 글자가 있으면 무슬림이다.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는 15억이 넘는다. 중국은 6개 정도의 소수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데 자치주가 있는 후이족과 위구르족(维吾尔)이 가장 인구가 많다.

 

두 민족은 혈통이나 역사적 배경이 아주 다르다. 게다가 위구르족이 민족국가에 대한 애착이 강렬한데 비해 후이족이 자주 독립의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나 아라비아 출신 상인들은 자신의 민족 영토나 왕조를 세운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이슬람교를 숭상하면서 현지화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 서북방면에 정착한 후이족들은 종교적 신념이 유사하고 지역적 특성에 맞는 재료나 기후에 적합한 위구르족 먹거리와 아주 닮아있다. 후이족 서민들이 사는 시장 곳곳에서 파는 먹거리를 보면 대체로 후이족 전통먹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 눈요기 삼아 이색적이면서도 재미난 먹거리를 하나씩 맛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건포도가 드러간 양고기볶음밥 양러우좌판


사용자 삽입 이미지호도과자 허타오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누라과자 라오포빙


사용자 삽입 이미지말린 과일들

 

면을 주식으로 먹는 서북지방 사람들이지만 양고기가 듬뿍 들어간 양러우좌판(羊肉抓饭)도 시도 때도 없이 먹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양고기는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양고기뿐 아니라 채소까지 넣어서 기름과 함께 볶는데 양고기볶음밥이라 할 만하다. 중국에도 많은 볶음밥인 차오판(炒饭)과 달리 건포도를 넣는다. 신장(新疆) 투르판(鲁番)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 생산지이니 자연스레 말린 포도가 감초처럼 들어간다. 큰 그릇에 담아주는데 10위엔이다.

 

전해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한 의원이 말년에 병이 들었는데 어떤 처방으로도 낫지 않자 스스로 매일 먹는 밥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먹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도대체 무얼 먹었는지 묻자 이 밥을 만드는 처방을 알려줬다고 한다. 전설치고는 아주 단순하지만 양고기와 야채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공감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거리마다 이 양러우좌판을 파는 곳이 많다. 건포도 맛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포도 맛과 어울린 볶음밥이라니 두세 명이 한 그릇 함께 맛 봐도 좋을 듯싶다.

 

아침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이 양러우좌판을 먹다 보니 시장에는 건포도인 푸타오간(葡萄干)을 파는 곳이 많다. 검은색도 있지만 붉은색, 연두색도 있다. 다양한 종류의 포도가 생산된다는 뜻일 것이다. 품질에 따라 1(500그램) 12위엔에서 15위엔까지 한다.

 

말린 포도만 있는 것은 아니라 파인애플(보뤄, ), 망고(망궈, 芒果), 키위(, 미허우타오), 사과(핑궈, 苹果), 바나나(샹자오, 香蕉), 여지(리즈, 茘枝), (진쥐, 金橘) 등 다양하다. 우리는 술 안주나 심심풀이로 먹지만 밥 볶는데 함께 들어가기도 하니 사뭇 식습관이 다르다.

 

한 후이족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포장하고 있어서 보니 바삭바삭 구운 과자인 쑤빙()이다. 호두로 구운 과자인 허타오쑤(核桃酥)를 담고 있는데 누런 종이에 제품 이름이 적힌 빨간 종이를 덮고 포장하니 꽤나 값어치 있는 모양새가 난다. 밀가루에 설탕 넣고 기름에 구울 때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즈마쑤(芝麻酥, 깨과자), 화셩쑤(땅콩과자, 花生酥)와 용의 수염처럼 생겼으며 황실에서 먹었다는 룽쉬쑤(龙须酥)도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감 튀김 스쯔빙


사용자 삽입 이미지위구르의 오랜 음식 카오낭


사용자 삽입 이미지'낭' 진짜 어렵다!

 

거리 좌판에 재미난 이름의 과자가 하나 보인다. 바로 마누라과자라고 해야 할 라오포빙(老婆饼)이다. 밀가루 빵에 호박 속과 깨를 묻혀 만든 것이다. 총각이 매일 이 과자를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배필을 만나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일 것이다. 다만, 마누라고자라고 이름이 붙은 까닭은 옛날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고 집안어른이 병이 나자 마누라가 몸을 팔아 병간호를 했으며 남편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오랜 연구 끝에 이 과자를 만들어 팔아 다시 마누라를 데려왔다고 한다.

 

사실 라오포빙은 소수민족 먹거리인지 알 수 없고 원나라 말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부인이 휴대하기 편하고 영양가 있는 간편요리로 고안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후이족 거리에서 전통 먹거리는 민족 불문하고 다양하다.

 

가을철 별미인 감을 기름에 튀긴 스쯔빙(柿子饼)은 정말 독특하다. 명나라 말기 반란군인 이자성()부대가 시안에 진군하자 농민들이 대접해 알려졌다고 하는데 감을 열을 가해 요리를 만들다니 정말 발상이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 떫은 감에 술을 살짝 바른 후 밀봉해 며칠 말린 후 꺼내 즉석에서 튀겨 만든다고 하니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다. 하기야 곶감 만드는 시간에 비하면야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다소 한적한 거리를 걸어 들어가니 전형적인 위구르 사람이 무언가를 열심히 펼쳐놓고 있다. 간판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글자가 써 있다. 어떻게 읽는지 물어보고 나서야 낭()인줄 알게 됐다. 획순이 무려 31획이고 간략하게 줄인 중국 간체로도 25획이나 된다. 위구르족 등이 즐겨 먹는 밀가루 빵으로 화덕에 붙인 채 오래 구웠다고 해 카오낭(烤馕)이라 부른다. 마치 피자처럼 커다란 크기인데 반죽할 때 소금, 양파, 달걀 등을 함께 넣고 굽는 것이다.

 

이 빵은 고고학자들이 위구르족 고분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 정도로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바깥에 이 빵을 넓게 펼쳐놓았는데 안쪽으로 2명의 젊은 위구르족이 빵 화덕인 낭컹(馕坑)에 불을 계속 지피면서 반죽을 넣었다가 다시 빼내고 있다. 이 큰 빵 하나에 5위엔이다. 서너 사람이 나눠 먹어도 될 정도로 큰데, 사실 여러 명이 나눠 먹어야 겨우 다 먹을 수 있으니 우리 입맛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실음료수 재료 쏸메이펀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실음료수 쏸메이탕을 마시는 후이족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고기와 양고기 파는 라뉴양러우 가게


사용자 삽입 이미지거리에서 고기를 썰어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빵에 고기를 넣은 퉈퉈모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라촬 파는 후이족 아주머니...실제 파는 것은 마라탕!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라촬 굽는 장비

 

시안부터 실크로드 도시마다 손 쉽게 볼 수 있는 음료수가 쏸메이탕(酸梅汤)이다. 한여름 갈증을 풀어내는 훌륭한 맛이자 1잔에 1위엔 정도하는 서민적인 음료인데 사실 알고 보면 매실을 감초, 계피, 설탕 등을 함께 넣고 가루 낸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곳곳에 음료수의 원료 가루인 쏸메이펀(酸梅粉)을 파는 곳이 많다.

 

후이족 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것 중에 라러우(腊肉)가 있다. 이슬람교도 무슬림들은 돼지고기, 개고기, 당나귀고기, 말고기를 먹지 않지만 소고기나 양고기는 먹는다. 이 고기를 훈제한 것이 라러우이다. 라뉴양러우(腊牛羊肉)라고 쓴 고깃집이 많고 거리 좌판에도 흔하다.

 

그리고 고깃집에서는 정육점처럼 고기를 근 무게로 썰어 팔기도 하지만 밀가루 빵()에 훈제된 라러우를 사이에 넣고() 햄버거처럼 만든 라뉴러우자모(腊牛肉夹馍)를 팔기도 한다. 이 모()는 일반적으로 만터우(馒头)라고 하는데 발음으로 만두는 중국에서는 맨 빵을 말한다. 이 러우자모에 양고기를 넣기도 하는데 시안을 비롯해 중국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만하다.

 

러우자모와 비슷한 것으로 퉈퉈모(饦饦馍)라는 것도 있다. 이곳 시안 후이족들이 즐겨 먹던 것으로 러우자모와 만드는 방법은 대동소이하지만 이름만 다르다. 아라비아 말로 음식이란 말의 투얼무(尔木, Turml)에서 유래된 퉈(tuo)를 중복해서 쓴 것이다. 러우자모가 점차 퍼져 중국 여러 지역에서 팔리지만 퉈퉈모는 시안에서 처음 봤을 정도로 이름에서 풍기는 정서가 사뭇 종교적, 민족적이다.

 

이렇게 고기를 훈제해 햄버거처럼 먹기도 하지만 빵을 으깨고 거기에 고기가 들어간 국물을 넣어 먹기도 한다. 물기가 있다고 해서 파오모()라 부른다. 이 파오모 역시 이곳 시안의 전통요리이다.

 

고기라면 양고기꼬치인 마라촬(麻辣串儿)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전 중국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이제 많이 볼 수 있는 이 양고기꼬치 양뤄촬(羊肉串儿)은 사실 서북지역의 고유한 먹거리라 할 수 있다. 마라(麻辣)라는 말은 아주 심하게 맵다는 말인데 우리나라 고추처럼 매운 느낌과는 다소 다르고 산초라고 하는 라자오(辣椒)가 들어가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데,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렵다.

 

숯이나 연탄을 넣고 긴 판 위에서 자전거 살인 촬(串儿)로 고기를 꽂아 구울 때 이 라자오를 뿌려서 불에 굽는 것이다. 거리마다 마라촬을 굽는 장치가 많이 보이는데 밤이 되면 연기가 진동하고 고기 굽는 냄새가 사방을 뒤덮는다.

 

맥주와 함께 길거리에서 술 안주로 수십 개씩 먹기도 하는데 고치 하나에 1위엔 정도하니 그다지 비싸지도 않다. 전 중국이 이 양고기꼬치로 매일 밤 얼마나 많은 양들이 죽어나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양고기 꼬치의 진면목은 시안을 시작으로 우루무치(乌鲁木齐)에 이르는 서북지역이 최고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카이자이(라마단) 표시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 음식가게의 불꽃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 마시는 후이족 청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청소부 아주머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거리의 연탄가게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이족 거리에서 본 개인수도꼭지...자물쇠가 있어야~~


후이족 거리 주변은 관광지이지만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라마단이 끝나 육식을 하기 시작하는 카이자이(开斋)라는 말이 걸려 있는 것도 다른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주 마시는 팔보차(八宝茶)를 마시는 청년도 있고 길거리 청소부 아주머니도 보인다. 이들은 모두 후이후이마오(回回帽)라 부르는 단색의 모자를 쓰고 있다. 남자들은 평상시에는 흰색을 쓰고 겨울철이면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만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는 붉은색이나 파란색, 녹색 모자를 쓰기도 한다.

 

여자들은 머리를 다 가리는 두건 같은 것을 두른다. 보통 흰색이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검은색, 아이들은 녹색을 쓰고 무늬를 수 놓아 예쁘게 만들기도 한다.

 

생활공간 곳곳에는 마작하는 사람들도 많고 옷 가게나 잡화점도 일반 중국서민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탄 파는 가게도 보이고 식당마다 불꽃이 거리까지 내뿜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공동 수도가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야채를 씻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자물쇠로 잠긴 개인수도꼭지를 열었는데 수도꼭지마다 다 하나씩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민족이나 종교가 같더라도 서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생계문제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이 수도는 공동수도가 아니라 개인수도인 것이다. 열쇠가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다는 것이고 어디선가 사용량을 검침하고 있다는 것이니 정말 중국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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