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용 죽겠지?”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신비한 동물 용()은 중국을 상징한다. 중화민족, 즉 한족을 대표하는 으뜸 동물이다. 갑골문(甲骨文)에 등장하는 용은 하늘의 결합 형태다.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로 패기에 넘치는 뱀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아마도 한족의 옛 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뱀 토템 부족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굴복시킨 후 연맹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용생구자(龙生九子), 용에게는 아들이 아홉이 있다. 명나라 학자 서응추()가 지은 <옥지당담회(玉芝堂谈荟)에 출몰한다. 지금도 재미난 상징물로 용과 더불어 활개를 치고 있다. 외국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이나 거리 곳곳에 숨어 있다. 아버지의 아들 토템은 그 옛날 연맹에 복속된 부족이었을 것이다.

 

뿔 달린 용으로 음악을 좋아해 현악기 머리에 달린 수우(囚牛)가 장남이다. 애제(睚眦)는 표범 몸과 용 머리의 흉악한 모양으로 살인과 싸움을 좋아하고 칼자루나 병기에 출현한다. 조풍()은 모험을 좋아하고 요괴를 물리치거나 화재를 제거하는 맹수로 전각 앞을 지킨다.

 

포뢰(蒲牢)는 바다사자로 고래에 맞서 거대한 고함을 지르는데 대형 종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 산예(狻猊)는 꿇어앉은 사자 모양으로 연기를 삼켜 내뿜기를 좋아해 향로 다리에 출현한다. 다른 동물보다 쉽게 관찰이 되는 거북이 비희(赑屃)는 장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비석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천하장사다.

 

폐한(狴犴)은 호랑이 형상으로 시시비비 가리기를 좋아해 감옥이나 관청 문에 달려있다. 부희(负屃)는 용처럼 생겼는데 고상하게도 문화를 좋아해 석비 꼭대기를 휘감고 있다. 리문(螭吻)은 용 머리와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화재방지에 일가견이 있어 목조 건물의 지붕 끝에 자리하고 있다.

 

아들을 거느린 용은 황제로 등극한다. 진시황을 조룡()이라 부르는 이유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룬 황제에 대한 극찬이다. 하급관리이던 유방(刘邦)이 한나라를 개국한 후 태몽으로 용을 등장시킨 까닭도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는 이룡희주(龙戏珠)는 황제가 거주하거나 행차한 곳의 건축물에 자주 등장한다. 황제가 거주하는 고궁에는 구룡벽(龙壁)을 세워 위엄을 보이기도 한다.


 

1988년 한단()의 한 마을에서 돌로 조각된 용 열 마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길이가 368m에 이르는 거대한 용과 작은 용 아홉 개였는데 마치 용과 아홉 명의 아들과 짝을 이룬 듯하다. 천하제일용(天下第一)이라 부른다. 차라리 용 한 가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상상의 동물로 알려진 용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원지방 허난(河南) 성 북부 푸양()이다. 1987년 약 7천 년 전 신석기 고분을 발굴과정에서 방각룡(蚌壳龙)이 출토됐다. 민물조개 껍데기를 이용해 마치 용처럼 빚었다. 그래서 용향(龙乡)이 됐다. 중화민족의 자랑, ‘중화제일용(华第一龙)’이라고도 명명했다.

 

중원지방에서 용이 빈번하게 돌출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1971년에 홍산문화(红山文化)로 유명한 네이멍구(内蒙古) 츠펑(赤峰)에서 기원전 4,500여 년 전 유물인 옥결(玉玦, 귀걸이)이 출토된다. 학자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중원의 고도에서 직선거리로 1,300km나 떨어진 동북 변방에서 나온 보물이 돼지의 머리, 말의 갈기, 뱀의 몸을 닮았기 때문이다. 갑골문의 용과 아주 비슷하다는 추리력을 발휘해 벽옥용(碧玉)’이라 이름을 붙인다. 츠펑에 가면 C자 형의 옥결을 이정표로 한 중화제일용이 곳곳에 즐비하다.

 

중화제일용은 또 있다. 산시(山西) 지현()의 물고기 꼬리가 달린 용 문양의 암화, 랴오닝(辽宁) 차하이(查海) 유적지에서 발견된 거대한 용 모습의 돌무더기도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1996년에는 중원에서 서남쪽 800km 떨어진 소수민족 동네 구이저우(贵州) 안순()에서도 용의 뿔 화석이 발견됐다. ‘제일용이 너무 많으면 곤란했던지 신중국용(新中国龙)’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였다.

 

용으로 추정되는 화석이나 유물은 전국 방방곡곡에 수도 없이 많고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국경선 바깥에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돼 용 문양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중국의 용이라고 주장하기에 십상이다. 중국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 용이 승천하듯 중국이 G2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향하고 있다. 두 마리 용을 가지고 구슬치기 하듯 노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런데 중화민족의 발원이 중화제일용이 출토된 지역 모두라고 우기는 것은 굉장히 거북하다. 요하문명의 핵심지역으로 알려진 츠펑에 용을 토템으로 섬기는 부족이 살았다는 식으로 확정하면 곤란하다. 중원을 넘어 동북부터 서남, 아니 지금의 중국영토 전부를 다 아우르고 싶어하는 욕구는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어서 분통이 터진다. ‘왜곡이기 때문이다.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는데 대책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진실이라는 수레바퀴에 매몰될 것이라는 심정으로 보도미로(宝刀未老)만 남긴다.

 

최종명, 작가/ 13억 인과의 대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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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인민을 춤추게 하라 4] 녹림과 적미, 농민의 야망이 되다 ①


▲  왕망의 고향 한단의 황량몽 사원. 한단지몽 주제의 벽화.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주공의 나라를 흠모해 개혁을 도모했으나 '하룻밤의 꿈'처럼 허무한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 ⓒ 최종명


왕망, 주공을 꿈 꾸다


중국 역사에서 칼부림 없이 황제를 찬탈 또는 선위로 역성혁명을 이룬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왕망(王莽)과 무조(武曌)다. 무조는 당나라 시대 7세기경 주周(역사에서 무주武周)를 국호로 통치한 여성 황제 무측천(武則天)이고 왕망은 1세기경 한나라를 앞뒤로 나누며 신(新)나라를 세워 좌지우지했다. 


무측천이 수렴청정의 지위를 이용해 양위를 강제해 나라를 세웠고 권력을 잃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후에도 황후로서 장례를 치렀다. 이렇듯 여성이었지만 황족의 범위 내에서 벌어진 역성이었다. 왕망은 황제로 군림한 세월만 엇비슷한 15년을 빼면 전혀 다른 맥락이다. 건국과 통치, 죽음조차 완전 색다른 돌출 행동이었기에 한나라를 다룬 역사서마다 객관적인 평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를 봐도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司馬懿)도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상국이나 제후, 태사 및 태부 등 유아독존으로 통치했던 인물은 많다. 조조나 사마의 후손은 후광을 얻어 결국 창업 군주로서 자리를 잡아 새로운 나라를 구축하기도 했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 독이 됐던 것인가? 왕망은 외척 출신이라는 배경과 급진적 이상주의적 개혁가라는 평가와 함께 실패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아마도 후대 역사에서 자기 편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망은 전국시대 위나라 제후국의 식읍이던 원성(元城, 하북 한단邯郸 동쪽 대명大名 현) 사람으로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가난했다. 한원제의 황후가 된 고모 효원황후(孝元皇后)의 도움으로 황궁에서 살았는데 공손한 태도와 총명한 기품을 지녀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는 태황후의 섭정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숙부들의 지위를 이어받아 38살의 나이로 대사마가 됐다. 왕망은 점차 정치의 중심에서 정점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딸을 왕후로 삼고 황제 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다는 부명(符命)을 드러냈고 드디어 선양을 통해 황제에 등극했다. 


한무제가 통치하던 100여 년 전 북방민족 흉노 등과 영토 전쟁을 벌이기 위해 소금과 철을 전매하고 농지뿐 아니라 상업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 나라의 창고를 과도하게 축적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으며 개혁에 대한 요구가 심각하게 도래하고 있었다. 한나라 초기의 통치철학이던 도교적 기풍은 점차 유교적 학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왕망의 개혁, 그것도 유교 통치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  20세기 중국 최고 문학가 노신의 고향 소흥(紹興), 마을 입구 조각 초상화가 대문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녹림서옥'이라 쓰며 '인민'의 고통을 함께 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최종명


간신이나 아첨하는 집단에 의해 황제에 올랐는지 모르나 적어도 왕망은 유교 경전이 향하는 이상적인 나라, 공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인물 주공을 닮고 싶었다. '주공재세(周公再世)'는 주나라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왕망이 스스로 황제까지 되면서라도 개혁하고자 했던 꿈이었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철학적 체계나 국가의 이상을 제대로 구현하거나 보장했던 한나라 왕조가 아니었기에 개혁을 원했던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고 싶어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명예혁명'으로 황제가 된 왕망은 주나라의 정전법을 참고해 토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한나라 초기부터 시행된 군국제(郡國制) 기반의 지방 제후와 호족의 정치적, 물적 토대를 제한하면서 농민의 소작농으로의 전락을 타파하려는 제도였다. 유교경전 <주례>에 기반해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화폐 개혁, 상공업 부흥, 노비 매매 금지 등은 의욕적인 건국 정책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쌓였던 사회적 모순은 유교이념을 현실화할 노하우가 부족했고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로 강제하자 기층 민중의 고충은 개선되지 않고 더욱 피폐화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지방 호족들은 호시탐탐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서역의 흉노 및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을 낳아 나라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다.


녹림, 천자의 문을 열어라


▲  녹림군을 통해 한나라의 부흥을 이끌어낸 광무제 유수를 기념해 친필어제를 내린 건륭제. 승덕(옛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서 ⓒ 최종명


서한 말년에 왕광(王匡), 왕봉(王鳳)은 녹림산(綠林山)에서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녹림' 또는 '녹림호한'은 산속에 은거하며 관청에 항거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됐다. 1925년 북양(군벌)정부의 교육부 관리 유백소(劉百昭)와 일부 관변 평론가들은 여자사범대학생들의 정치투쟁을 지지하던 교원들을 '토비(土匪)', '학비(學匪)'라고 매도했는데, 이에 작자는 자신의 서재를 비꼬는 투로 '녹림서옥'이라 기재했다.


20세기 문학가 노신(魯迅)의 <화개집(華蓋集)> '화개집속편' 머리말인 제기(題記) 중 '1925년 12월 31일 밤, 녹림서옥 동쪽 벽 밑에서 쓰다'라는 말에 나오는 '녹림서옥'에 대한 주석이다. 녹림산에서의 민란이 서기 17년이니 거의 1900년이나 지나 '토비'보다 다소 그럴 듯한 '학비'까지 들먹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민란을 대표하는 말로 녹림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멋진 말이 아닌가? 


호북 형문(荊門)에 있는 대홍산(大洪山)이 1988년 장가계와 구채구와 함께 국가급 풍경구로 비준됐다. 계곡, 표류, 온천, 동굴, 불교성지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갈대로 휩싸인 해발 1,488m 고원에 위치한 녹림채가 있어 그 어떤 명승지보다 유명하다. 도대체 녹림산의 산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왕망의 신나라가 이상정치를 열심히 시술하고 있었지만 농민이건 평민이건 먹고 사는 일이 날로 힘들어 갔다. 흉노와의 변방 전쟁으로 국력 낭비가 심해 전반적으로 GDP 수준은 극악해졌으니 왕망은 왕창 망하기 일촉즉발이었다. 더구나 남방 지역은 자연재해와 흉년의 연속이었고 안타깝게도 인육까지 입에 대는 인상식(人相食) 사례도 빈번했다고 <후한서(後漢書)>가 기록한 걸 보면 참혹했던 실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놀랍게도 중국 역사에서 식인에 관한 근거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장자(莊子)>에 당당히 등장해 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고대 최고의 민란 두목이자 도적인 도척(盗跖)은 사람의 내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한서>를 시작으로 중국 24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노신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 나오는 홀인(吃人)은 식인의 뜻이기도 하다. 


서기 17년 강하(江夏) 군 신시(新市, 지금의 경산京山) 일대에 흉년이 들어 황량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산과 들에 나가 냉이를 캐먹었지만 풀조차 말라버리자 사람들은 서로 먹자고 싸우고 무법천지가 되기 일쑤였다. 이때 늘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근심을 해소해주며 명망이 두터웠던 왕광은 아수라장에서도 사태를 잘 해결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왕광은 인자한 왕봉과 함께 점점 폭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나서게 됐다. 기근은 흉흉한 인심을 낳고 대책 없이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깊게 하는데 왕광과 왕봉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모두 다 살아남을 방안을 강구했다. 유일한 솔루션은 곧 지방 관청에 대한 공격, 그리고 약탈의 시작이었다. 


<후한서> '유현전(劉玄傳)'에 따르면 처음에 수백 명으로 시작한 약탈은 왕광이 농민들을 이끌고 녹림산으로 들어가 요새를 쌓고 비적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몇 달 만에 7~8천 여명이 따라 들어와 곧 무장 군대로 발전했다. 이렇게 신시 지방에서 모인 군대는 녹림군으로 불리며 역사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녹림군의 위세가 날로 커져가자 4년 후인 21년 2월에 왕망의 명령을 받은 형주목(荆州牧)은 2만 명의 진압군을 동원했다. 토벌군의 이동을 간파한 왕광과 왕봉 등 지휘부는 잠복해 있다가 토벌군이 경내로 들어오자마자 습격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군수물자를 모두 빼앗았다. 녹림군 장군 마무(馬武)가 후퇴하는 군대 앞에 갑자기 나타나자 형주목은 혼비백산 마치를 몰고 달아났다. 마차를 쫓아간 마무의 긴 창이 문짝을 내리치자 마차와 함께 형주목이 나뒹구는 사이 단칼에 말부터 베버리는 동안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허겁지겁 도망쳤다. 대승을 거두자 마무의 영웅담은 하늘을 찔렀다. 


녹림군은 2만 명의 정부군을 격퇴한 여세를 몰아 경릉(竟陵, 호북 천문天門 시)과 현성이 있는 운사(雲杜, 경산京山 현)를 공격했는데 위세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녹림군이 약탈을 마치고 산채로 돌아올 때 수만 명이 뒤를 따랐다. 


17년 9월, 토벌군과 일전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이나 함께 거주하는 산채에 돌연 전염병이 돌아 병사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왕광 등 지도부는 산에서 돌림병으로 모두 죽느니 하산해 출정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왕상(王常)과 성단(成丹)이 통솔하는 하강병(下江兵, 강릉江陵 지역에서 활동) 부대는 서남쪽 남부(南郡, 강릉)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왕광, 왕봉, 마무가 통솔하는 신시병은 북쪽 남양(南陽)으로 출병했다. 녹림군이 산에서 내려와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져 들었으며 전국으로 퍼진 소문은 일파만파로 또 다른 민란으로 이어졌다.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가던 21년 7월, 신시병 부대가 평림촌(平林村, 수주随州 시)까지 진군하자 진목(陳牧)과 료심(廖諶)이 통솔하는 수천 명의 평림병이 반란에 호응해 합류했다. 이때 한나라의 황실의 파락호이자 귀족 출신으로 2년 후 녹림군에 의해 경시제(更始帝)로 추인되는 유현이 단신으로 평림병에 투신했다. 북상하던 10월, 용릉(舂陵, 조양棗陽 시)에 이르러 지방호족 유인(劉縯)과 유수(劉秀)도 녹림군에 합류했다. 용릉병을 통솔하는 유연은 왕망의 신나라에 반대해 거병했다. 한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거병 후 세력이 미미했던 유인 부대는 녹림군의 확산을 눈 여겨 보고 합류를 요청했다. 유인의 인척 동생인 유수는 신나라의 종말 후 동한을 세운 광무제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말조차 타 본 적 없고 유약했던 유수가 녹림군 민란의 와중에 천자가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민란 양상이 확산되자 각 지역 농민들은 물론 지방호족도 분기탱천(憤氣撐天) 일어나 전국적 민란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신시병, 평림병, 용릉병을 통합 부대는 북상을 서둘러 신야(新野)를 점령했으며 12월 마지막 날에는 하강병까지 합류해 군수물자 주둔지인 남향(藍鄉, 신야 현)을 야습, 주둔군 장군을 포함해 2만여 명을 섬멸했다. 22년 새해가 되자 남향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격해오는 수만 명의 토벌군을 육양(淯陽, 하남 남양南陽 부근)에서 조우해 단번에 참패시켰다. 녹림군은 여세를 몰아 완성(宛城, 하남 남양)을 공략하자 대부분의 토벌군이 투항했다.


서남쪽으로 출병한 하강병도 형주를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북상한 3개 부대 연합군도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커졌다. 왕광을 비롯한 각 부대 지도자들은 어느덧 황족인 유씨 일가 중에서 황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모였던 농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민란의 합법적인 명분을 세워야 했으니 신나라 황제를 몰아내는 건국을 목표로 전진하는 길만 남았다. 


▲  왕망의 개혁은 '주공재세'를 꿈꾸며 유교 예악을 통한 통치였다. 비록 그의 개혁은 실패했으나 공자를 통치이념으로 통찰한 지도자였다. 공자 사당에서 열린 제례. ⓒ 최종명


완성을 장악하고 안정을 취하자 녹림군의 주축 세력인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약하고 병력이 미미해 통제하기 쉬운 혈혈단신 파락호 유현을 황제로 옹립하고 한나라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경시제라 불렀다. 녹림군 지도자들은 모두 중신에 올랐는데 왕광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의 최상위 벼슬에 올랐으며, 공로에 따라 신시병 장군 주유(朱鲔)는 대사마(大司馬), 유연은 대사도(大司徒), 유수는 태상편장(太常偏将)에 임명됐다. 


녹림군은 경시군으로 조직을 안정화하자마자 왕봉, 왕상, 유수를 앞세워 곤양(昆陽, 엽현葉縣), 정릉(定陵, 무양舞陽), 언현(郾縣, 루하漯河) 방향으로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서기 23년, 왕망은 유현을 황제로 옹립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대사마 왕읍(王邑)과 사도(司徒) 왕심(王尋)을 장군으로 삼고 기인이자 거인인 거무패(巨毋霸)가 이끄는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한 백만대병(실제로 43만 명 가량)을 모병해 대규모 토벌을 시작해 경시군이 주둔한 곤양 일대를 포위했다. 겨우 7~8천 명뿐이었던 곤양 성의 경시군은 성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곤양을 잃으면 각개격파 당할 것을 우려한 유수는 적극적으로 판세를 뒤집기 위해 13명의 돌격대를 인솔해 포위망을 뚫은 후 정릉과 언현의 주력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는 3천명의 병력으로 토벌군 주력 부대를 향해 돌진해 오로지 지휘 장군 왕심을 타깃으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북송의 학자 사마광(司馬光)의 편년체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유수가 앞으로 내달리니 병사들은 퇴각하였고, 한 명이 백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유수는 성의 서쪽 해자를 시작으로 적의 주력 부대로 쳐들어갔다.'고 묘사했다. 유수의 결사대가 왕심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대군의 전열을 일시에 붕괴시키자 곤양 성에 있던 부대가 호응해 합세했다. 안과 밖에서 세력을 합치니 고함이 천지를 흔들었으며 토벌군은 전의를 상실해 도망치는 자들끼리 서로 밟히고 엎어져 죽은 시체가 백여 리나 늘어섰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까지 겹쳐 왕읍을 비롯한 장수들은 시체를 딛고 도망치기 바빴다.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지만 불과 수천 명이 '백만대군'을 물리친 기적과도 같은 전쟁은 곤양대전 말고 또 있을까? 곤양대전을 통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유수는 데뷔 무대에서 결승골을 넣은 스타나 다름 없었다. 


호북 경산의 녹림채로 향하는 절벽 길에는 유리 재료로 흔히 쓰는 석영석 암석이 'V자 거꾸로' 형상으로 서 있는데 그 높이가 25미터, 폭이 16미터에 이른다. 유수 광무제의 아들 한명제 유장(劉庄)이 녹림산과의 인연을 듣고 아버지를 기리며 '한천문(漢天門)' 친필을 하사해 새겼으며 청 건륭제도 강남을 순행하던 중 감개무량해 '천자지문(天子之門)'의 어필친제를 내렸다. 


진승과 오광의 민란을 통해 유방이 천하에 얼굴을 내밀었듯 '녹림산'이 아니었다면 유수가 어떻게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곤양대전의 영웅 유수는 불과 1년 만에 서생에서 용사로 거듭났다는 역사의 기록을 믿고 기적을 인정해야 하듯 '하늘로 가는 문'을 지나면서 천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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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여행 박정희 무덤 자리를 조선의용대 열사로

 

96주년 기념이라고 시끄럽다. 특별하게민족적인 나라가 된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던 주말, 고 김학철 선생에 대한 SBS 특집을 보다가, 한단 생각났다. 2013 1월 북경을 출발해 지인 3분과 개척여행을 한답시고 굳이 한단을 찾은 이유는 석정 윤세주 열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단은황량몽한단학보고사와태극문화, 진시황 출생지, 나라 문화뿐 아니라 항일투쟁 혁명열사의 피가 서린 곳이다. 시내 한 가운데 조성된 혁명열사능원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원이다. 혁명열사기념당 앞에는 시민들이 나와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엄마 따라온 아이가 너무 귀여워 과자도 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기념당 안 한쪽 면에 <아리랑> 곡조와 함께 윤세주, 진광화 두 조선인 열사를 '특별하게' 모셨다. 밀양 출신의 윤세주 열사와 평양 출신의 진광화 두 분이 남북을 대표하듯 나란히 중국 한단에 자랑스레 서 계시니 참 기쁘다. 그러나 슬픔도 있어, 우리는 조용히 묵념을 올리고 항일전쟁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야욕,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조선의용대의 조선인 열사들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과거 반민족적인 행위의 반성과 속죄는커녕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의 최고위층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들을 떠올려도 본다.

 

우리는 항일운동 시기 국내뿐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 도무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듯하다. 또는 알고자 하면 무언가 자꾸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일을 부관참시로 다스리는 그날이 오면 중국 전역에 흩어져 계신 무명총无名까지 다 모셔서 성대한 제례를 올려야 할 것이다. 박정희 무덤 자리는 열사들이 자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20세기에 외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다고 천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경서역에서 고속열차를 타면 2시간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한단동역 기차 역에서 내려 택시 타면 20분이면 도착한다. 입장료는 없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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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랜만에 주말 문화투어 인솔을 하지 않아서...


개척여행 2013년 그 첫번째 코스를 허베이 남쪽 옛 도시 한단邯郸과 스자좡石家庄에 있는 창암산苍岩山, 룽궈푸荣国府를 취재하고 왔습니다. 


허베이 남쪽에 늘 가고 싶었던 한단은 전국칠웅 조나라의 수도였으며 진시황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합니다. 한단지몽 고사가 있는 곳이자 조선의용대 석정 윤세주 열사가 잠들어 있기도 합니다. 


먼저...베이징에서 가오테高铁를 타고 2시간여 만에 한단동 역에 도착 후 다시 약 4~50분 거리의 황량黄粱 진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는 송나라 시대에 건축된 도교사원인 한단고관邯郸古观이 있습니다. 한단지몽, 황량몽이라고 불리는 재미난 고사를 딴 황량몽뤼센츠黄梁梦吕仙祠 또는 루셩먀오卢生庙라고도 불립니다.



고관 입구 바깥 조벽입니다. 최근에 만든 벽이지만 나름대로 시골스러운 낡은 색이 푸근합니다. 



한단고관 입구입니다. 중국사람들에게 도교사원은 향을 피우고 염원하는 장소라 그런지 계속 향을 사라고 난리였지만 눈 하나 꿈벅하지 않고 입장권을 사고 들어갔습니다. 30원이나 하는 입장료, 이 먼 시골 구석 사원도 비싼 편입니다. 



황량이란 누런 수수를 말하며 고량주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며 먹기도 합니다. 어느 날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한단 땅에서 도사인 여몽呂翁을 만나게 되는데 베개를 베고 한바탕 긴 인생의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아직도 황량이 덜 익었다는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일장춘몽의 의미를 뜻하는 고사를 비석에 새겼네요! 황량몽이라고도 하고 황량미몽黄粱美梦이라고도 합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그다지 높지 않은 석회암 4각 벽에 봉래선경(蓬莱仙境)이라고 흘려쓴 초서체가 써 있습니다.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세계, 신선이 사는 세상을 뜻하는 도교용어이기도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팔선 중 가장 으뜸이라 할만한 여동빈이 쓴 글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동빈의 글씨가 불분명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을 정도로 멋진 글입니다. 다만, 앞 세글자는 오롯이 한사람의 것이지만 닳아 없어진 경(境)은 청나라 건륭제의 글씨를 가져다 보완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필체의 미미한 차이가 있는데 그저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잔잔한 호수 렌츠(莲池)가 꽝 얼었습니다. 팔각정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최근에 지은 팔각정 건물인 듯한데 용마루에 잡상이 4마리이네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신선동부(神仙洞府) 편액이 걸린 아담한 문 우차오먼(午朝门)을 지납니다. 류리(琉璃)로 만든 용 문양이 있는 지붕도 산뜻합니다. 



도교의 팔선 중 한명인 정양제군(正阳帝君) 한중리(汉钟离)라고도 불리는 중리권(钟离权)의 사당입니다. 오대(五代) 시대 대장군이었는데 토번(지금의 티베트) 정벌에 실패한 후 심산에 들어갔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종리전 뒤에는 믿고 복종하고 보호한다는 뜻의 부유제군(孚佑帝君) 여동빈의 사당입니다. 


한단고관에서 가장 유명한 여동빈(吕洞宾) 사당인 뤼주덴(吕祖殿)입니다. 여동빈은 당나라 사람으로 본명이 여암(吕岩)이며 도교 전진파의 조사(祖师)로 역시 팔선 중 한명입니다.  


도교에서는 당송이래 일반 서민들의 추앙을 받던 사람들로 팔동신선(八洞神仙) 사상이 널리 퍼지며 팔선을 섬기게 됩니다.  여동빈을 비롯 철괴리(铁拐李), 앞서 말한 한종리(汉钟离), 남채화(蓝采和), 장과로(张果老), 하선고(何仙姑), 한상자(韩湘子), 조국구(曹国舅)를 팔선이라 부릅니다. 그중 여동빈이 가장 유명하며 팔선의 우두머리로 꼽습니다. 




노생 사당 안에는 석회암으로 만든 노생의 와불상이 있습니다. 한단고관의 3대 보물 중 하나로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벽에는 꿈 꾸는 동안 일어난 일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한단지몽이란 말은 당나라 심기제(沈旣濟)가 쓴 <침중기(枕中記)>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각 부근 벽으로 많은 비석이 새겨져 있지만 그 중 단연 눈에 번쩍 띠는 것이 바로 이 르르스하오르(日日是好日)라는 문구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두번째 글자가 좀 이상합니다. 일(日)자가 아니고 앞의 글자랑 같은 글자라는 표시일 뿐입니다.  '매일매일이 좋은 하루'라는 뜻인데 불교 선종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느날 운문이란 선종 대사가 제자들을 불러놓고 15일 전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고 15일 후의 상황은 어떨까 라고 묻자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라 합니다. 매일 매일이 서로 다른 생로병사의 세상에서 그저 하루 하루 좋은 일을 축원하며 살라는 의미가 담긴 선종의 의미라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입니다. 



연꽃 위에 앉은 조롱박 위에 태극 문양이 있고 아래에는 어려운 두 글자가 나란히 착할 선(善)을 향하고 있습니다. 후투(糊涂)와 런전(认真), 어리석음과 진심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뜻 글자건만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인생 삶이 진심이 깃들여 있어야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고 어리석은 세상사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심은 신앙이나 학습을 통해야 가능한데 어느 정도 진심을 배워도 다시 어리석어 지는데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세상사 이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어야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에 다다를 수 있다는 도교적 가르침을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황량미몽의 꿈 몽(梦)자가 새겨진 탁본입니다. 상품을 파는 가게 벽에 걸려 있네요. 바깥에 있는 비석에서 가져온 것으로 몽 글자 사이에 4등분해서 각각 인생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도교의 설법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한겨울 한단지몽의 본 고장 사원의 모습입니다. 마른 나뭇잎이 살짝 걸린 모습이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운치가 넘칩니다. 



둥근 벽돌이 사이사이 끼어 있는 벽입니다. 



본전 양 옆으로 두 곳의 행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태후와 광서(慈禧)제가 다녀갔다는 자희(慈禧)행궁과 광서행궁이 나란히 위치해 있습니다. 재미난 곳은 바로 이곳 광서행궁에 눈이 넷 달린 창힐(苍颉) 사당이 있습니다. 그는 신화에서 황제 시기에 문자를 발명했다는 사람입니다. 얼핏 눈이 침침해서 눈이 넷으로 보이나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요상하게 생긴 모습입니다. 중국 수없이 다녀도 눈 셋은 많지만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하게 바라봤습니다. 볼수록 섬찟한데 꿈에 나올까 무섭습니다. 행궁 내에는 도교의 수많은 창조자들, 관리자들이 수두룩 등장합니다. 



역시 천후전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천후(天后) 또는 마조(妈祖)라 부르는 도교의 드문 여성 인물로 복건 성 출신의 임묵(林默)이란 사람입니다. 바다를 지키는 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행궁을 나오는데 햇살이 비쳐 환해지는 모습이 마치 도를 다 깨친 느낌이 들었습니다. 후후~




한단고관에는 꿈 박물관이 있습니다. 벽화마다에는 중국에서 유명한 꿈이란 꿈은 다 그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꿈을 연구하는 역사가라면 한번 와도 좋을 정도입니다. 고대 사람에게 꿈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의 고대 3대 꿈은 바로 이곳 황량몽과 함께 나비가 등장하는 호접몽(蝴蝶梦)과 남가몽(南柯梦)입니다. 


호접몽은 장자가 꿈에 나비와 만나 물아일체에 대해 깨닫는다는 꿈이며 남가몽은 당나라 순우분이 나무 아래에서 꾼 꿈으로 허망한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황량몽 역시 비슷하지만 그 배경은 사뭇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홍루몽 (红楼梦)소설에서도 신선의 세계, 돌과 꽃의 환생을 빗대기도 하고 그것이 어쩌면 춘몽같은 인생을 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꿈을 모티브로 재미난 이야기와 삶의 철학을 만들어온 역사의 유산이라 할만 합니다. 



중국 꿈 박물관 옆에 있는 가짜 산인 자산(假山)에 올라서 보니 사당 모습이 한눈에 보입니다. 



고관을 한바퀴 돌아 나왔습니다. 그냥 나가기 아쉬워 연못으로 들어가는 문인 단방(丹房) 앞에서 사진을 남겼습니다. 단방이란 도교에서 단전을 수련하던 곳이나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도교사원이라는 곳입니다.  


이곳 입구가 삼진(三进)의 시작이라 보면 됩니다. 삼진이란 문을 세개 지나야 한다는 뜻이나 앞에서 본 종리전, 여조전, 노생전을 두루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꿈으로 보는 도교. 소설의 주인공 노생까지 모시며 꾸민 사당이니 정말 도교는 역사와 신화, 종교를 두루 한 솥에 담아내는 탁월한 소질을 가진 게 분명합니다. 하여간 즐거운 꿈나라 여행이었습니다. 

Posted by 최종명작가 최종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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